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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세계 닥터 1권(5화)
1장 새로운 세계(2)
내 눈앞에서 그 둘은 마치 만찬을 즐기듯 거미의 단단한 머리를 으적으적 씹어 먹었다. 뒤이어 거미의 녹색 진액이 맛있다는 듯이 후루룩 들이켠다. 그 엽기적인 모습에 구토가 올라왔지만, 가까스로 참았다. 그도 그럴 것이, 저 둘은 어쩐지 나를 전혀 신경 쓰지 않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난 슬쩍 눈동자만 굴려 내 모습을 내려다보았다. 물과 흙, 그리고 낙엽까지 엉겨 붙어 있는 처량한 모습이다. 혹시 저들은 이런 나를 보지 못하는 게 아닐까? 어쩌면 뱀처럼 눈보다 코가 더 발달한 녀석들일 확률도 있다. 어찌 됐든 나는 살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느꼈다.
조심히, 아주 천천히 몸을 낙엽 속에 더 파묻었다. 그리고 저들이 제발 그냥 이대로 떠나주기만을 기도했다.
녀석들은 그런 내 기분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 큰 거미의 머리통을 다 먹고 나선 만족한 얼굴로 각자 거미의 앞다리를 어깨에 들쳐 메 끌고 가기 시작했다. 아마 저들의 거주지로 식량을 이동시키는 것이리라. 살았다. 나는 살 수 있……!
빠직.
안도의 기쁨을 누리는 그때, 손으로 무언가 잘못 짚은 것인지 나뭇가지 부러지는 소리가 울렸다. 동시에 두 괴물의 충혈된 눈동자가 내 쪽을 홱 돌아보았다.
심장이 멎을 듯했다. 숨도 쉴 수 없을 정도로 공포가 몰려왔다. 괴물 둘은 서로 무언가 얘길 주고받더니 한 명이 다시 내 쪽으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젠장, 젠장, 젠장!
“킁, 킁.”
지척까지 다가와 눈을 감은 채 무언가 냄새를 맡기 시작한 녀석. 그 녀석은 조금 전 내가 오줌을 지렸던 곳까지 다가와 거칠게 꼬챙이를 푹, 꽂았다.
만약 뒷걸음질 치지 않고 그 자리에 숨어 있었다면 분명 저 꼬챙이는 내 복부를 관통했을 것이다.
녀석은 꼬챙이에 아무런 느낌이 없자 의아한 듯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좀 더 내 쪽으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녀석이 한 발 한 발 다가올 때마다 내 심장은 터질 듯이 뛰었다.
제발, 오지 마. 오지 마. 오지 마!
쿠르르르르르르릉……!
녀석의 나무꼬챙이가 내 머리칼 근처까지 다가온 그때, 바닥이 진동했다.
이건… 지진?
“후르하! 후르하!”
지진이 일어나자 거미 쪽에 있던 녀석이 다급히 동료를 불렀고, 그제야 내 눈앞에 있던 녀석이 돌아가기 시작했다.
나, 나… 산 건가?
그 둘은 마치 도망가기라도 하는 것처럼 허겁지겁 거미를 들쳐 메고 달아나기 시작했다. 그렇게 그들이 사라지고 나서야 나는 잔뜩 긴장해 굳었던 어깨를 늘어트릴 수 있었다.
한참 뒤, 아픈 다리를 질질 끌며 어찌어찌 해안가로 다시 돌아왔다. 또 다른 괴물을 만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필사적으로 걸었기에, 솔직히 해안가에 도착하는 순간까지 아무것도 생각하지 못했다.
“흐윽, 흐으윽!”
해안가에 도착하는 순간, 뭐가 그리 서럽던지 눈물이 끊임없이 쏟아져 나왔다. 대체 여기는 어디인 걸까? 그 괴물들은 대체 무엇인가. 대체 왜 나는 이런 말도 안 되는 곳에 떨어졌단 말인가!
거친 모랫바닥에 쓰러지듯 누웠다. 해안가에 도착할 때쯤엔 이미 날이 어둑어둑해져 있던 터라 모래는 무척이나 차가웠다.
내 기분을 아는지 모르는지 밤하늘에 떠 있는 별은 지금까지 본 적 없을 정도로 총총하다.
무의식적으로 호주머니를 뒤져 유리구슬을 꺼내 들었다. 구슬 속은 별이 모여든 것처럼 반짝거렸다.
나를 위해 울던 자영이가 기억난다. 내 어깨를 팡팡, 치며 쾌활하게 웃던 선배의 모습도, 어머니처럼 잔소리해 대는 김 간호사의 모습도, 그 외에 감사하다며 고개 숙이던 수많은 환자의 모습들까지…….
난 죽을 뻔한 순간까지도 절대 놓지 않았던 외진 가방을 끌어안은 채 쓰러져 잠이 들었다.
그날 꿈에서 자영이가 나타났다.
너무도 반가운 마음에 눈물을 흘렸지만, 어째선지 그 소녀는 너무도 무심한 눈동자로 나를 내려다보기만 했다.
내가 무엇이라도 잘못한 걸까? 그 소녀의 눈동자는 너무도 차가워 무섭기까지 했다.
그래, 마음에 상처만 안겨주고 떠나 화가 난 거다. 다음에 꼭 다시 만나자고 했는데 약속을 지키지 못해 화난 거다.
미안하다고, 내가 잘못했다고 끊임없이 사과했다. 그럼에도 소녀의 차디찬 눈은 풀어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그러다 문득 내 손에 들려 있던 유리구슬을 돌아보더니 기묘한 얼굴이 된다. 내가 망설이듯 유리구슬을 건네주자 빼앗듯 낚아채더니, 밤하늘에 유리구슬을 비춰 보기 시작했다.
그제야 표정이 풀어진다. 평소 밝았던 자영이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그렇게 자영이는 매료된 것처럼 유리구슬 속을 바라보더니, 이내 허공에 녹아들 듯 유령처럼 모습을 감추었다.
새벽녘이 밝아올 무렵, 만조 현상으로 발끝을 치는 파도 덕에 잠에서 깨어났다. 만약 이때 일어나지 못했더라면 그대로 파도에 휩쓸려 물귀신이 되었을지도 모를 일이리라.
“으으…….”
새벽 해안가의 추위를 무시했던 탓일까? 일어난 순간 이빨이 딱딱 부딪칠 정도로 추위에 떨던 나는 어찌어찌 가방 안에 있던 동의보감 서적 한 권을 전부 태워 다시 한 번 생명을 연장할 수 있었다. 만약 이때도 라이터가 없었더라면…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크윽… 젠장.”
대충 불가에 쪼그려 누었더니 발에서부터 격통이 찾아왔다. 들여다보니 복숭아뼈 부근이 조금 부어 있는 걸 확인할 수 있었다.
젠장, 설마 부러진 건가?
심각한 표정으로 발을 이리저리 만져 보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다행히 부러지진 않고 인대가 손상된 것 같은데… 그래도 이거, 일주일 이상은 갈 것 같다.
다행히 붕대는 많았기에 응급조치로 감아놨지만, 걱정이 태산이었다. 이런 꼴로 여기서 생존해야 한다는 생각에 막막함이 몰려왔던 것이다.
“어, 어라? 어디 갔지? 어, 없어?”
마음을 안정시키기 위해 유리구슬을 들여다보려 했던 나는 호주머니 안을 뒤지다 놀랐다. 가운 안, 외진 가방 안까지 전부 뒤져도 보이지 않았다. 분명 어젯밤만 해도 있었는데.
아무래도 자는 새에 바닥에 떨어트린 모양이다. 뒤늦게라도 찾고 싶었지만, 이미 내가 자고 있던 자리엔 바닷물이 자리하고 있었다. 찾기엔 너무 늦어버린 것이다.
“하아… 되는 게 하나도 없네.”
괜히 더 우울해져 깊은 탄식의 한숨만 새어 나왔다.
어제 무리하게 움직여서일까? 발뿐만이 아니라 온몸의 근육통도 심했고, 배도 고팠으며, 목도 말랐다. 시냇물이 문득 떠올랐지만, 이내 고개를 저었다. 한 시간 거리를 이런 다리로 갈 수도 없을뿐더러 거긴 너무도 위험했기에.
그래, 거긴 너무 위험…….
당시의 공포가 다시 떠올라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그 거대한 거미하며 두 발로 걷던 괴물들은 무엇이었을까? 아직 밝혀지지 않은 섬의 희귀종? 하, 그게 희귀종이라니, 웃기지도 않는다. 거미는 둘째 치고, 그 괴물들은 분명 대화를 나눴다고!
대화를 나눈다는 것 자체가 일반 동물의 범주를 벗어났다는 말이다. 어느 정도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들은 분명 도구를 쓸 줄 알았으며, 대화도 나눌 수 있을 정도의 지능을 가지고 있었다.
“어쩌면… 이곳은 그 괴물들의 서식처일지도 몰라.”
순간, 등줄기가 오싹해졌다. 만약 정말 숲 전체가 그 괴물들의 서식지라면? 나는 먹힐 날만을 기다리는 닭장 속 닭이 된 꼴이 아닌가.
까악! 까악!
끼루루루루루루루.
“우와악!”
갑자기 뒤쪽에서 들린 산새 소리에 나도 모르게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질색한 마음으로 뒤돌아보니 어둡고 음침한 숲이 눈에 들어온다. 바람에 흔들리는 나무의 모습이, 마치 지옥에 온 걸 환영한다고 인사하는 것처럼 보였다.
이보다도 괴기스러운 숲이 또 있을까?
잔뜩 무서워져 한껏 몸을 움츠렸다. 잠시만 긴장을 늦춰도 그 이족 보행 괴물들이 나타나 내 머리를 으적, 씹어 먹어버릴 것 같다. 거미의 날카로운 발톱으로 내 심장을 뽑아 먹을 거 같다. 부정적인 생각을 하면 안 된다고 이성적으론 알고 있으면서도 자꾸만 그런 생각들이 뇌리에서 떠나질 않는다.
이곳은 지옥이야…….
그냥 혼자만 있어도 굶어 죽을 지경인데 그런 괴물들을 피해가며 생존하라니.
“빌어먹을!”
정면을 향해 한 움큼 모래를 쥐어 던졌다. 어째서 나는 이런 위험이 가득한 곳에 떨어졌단 말인가. 대체 그 신이란 작자는 어째서 내게 이런 고난과 시련을 내린단 말인가!
좌절해 있으려니 문득 선배의 얼굴이 떠올랐다. 짓궂게 웃는 김 간호사의 얼굴도 떠올랐다. 그 외에 의사도 사람인데 먹고 살아야 한다며 감귤을 하나 내주던 암 투병 중인 할머니, 의사 선생님이 찾아오면 싸게 해줄 거라며 가느다란 다리를 슬쩍 내보이던 성병 환자 아가씨, 겨우 살아난 고양이를 꼭 안고서 해맑게 웃던 자영이의 얼굴까지 떠올랐다.
“살아주겠어. 그래, 기필코… 살아남아 주겠어…….”
몸을 부둥켜안은 채 중얼거렸다. 아마 지금 내 눈은 오기로 가득 차 있겠지.
그래, 이런 곳에서 영문도 모른 채 죽을 수는 없다. 나는 비참하게 굶어 죽으려고 의사가 된 게 아냐. 이 손으로 사람을 살리겠다고 결심하지 않았던가. 다시는 내 눈앞에서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죽어가는 모습을 보지 않겠다고 다짐하지 않았던가!
교통사고로 죽어가던 부모님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 당시 내 나이 불과 여덟 살. 그 당시에 나로선 부모님을 안고 달릴 힘도, 능력도… 아무것도 없었다.
그저 할 수 있던 건 피를 철철 흘리며 죽어가던 부모님을 지켜보는 것뿐.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지금은 이 손으로 내가 살릴 수 있어. 구원할 수 있어! 그러니까 이딴 곳에서 굶어 죽을 순 없단 말이다!
우선은 물이다. 그다음은 식량이다. 그리고 그 괴물들에게서 들키지 않을 은신처가 필요하다.
물을 확보하기 위해선 무슨 방법이 있을까? 일단 한 시간 거리나 떨어진 그 시냇물은 지금 당장 이용할 순 없어. 최대한 이곳에서 자급자족해야 해.
가장 쉽고 편하게 물을 확보하는 건 빗물을 받아 끓여 먹는 것이겠지만, 언제 내릴지도 모를 비를 기다리고만 있을 수는 없다. 그렇다면 해수를 담수로 만드는 수밖에 없는 건가?
분명 해수를 증류해 물을 만드는 법을 어느 서바이벌 프로그램에서 본 적이 있다. 하지만 지금 내겐 불로 가열해도 괜찮은 용기가 없는데…….
“아, 그래! 죽통! 분명히 근처에서 본 적이 있어!”
분명 멀지 않은 곳에 대나무 숲이 있던 게 기억났다. 정확한 장소는 모르겠지만, 몇 번 둘러보면 바로 알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근처라 해도 숲 속이다. 또다시 괴물들과 마주칠 위험성이 있는데…….
난 곰곰이 생각하다 흙투성이의 몸을 내려다보았다. 좋아, 할 수 있는 건 다 해보자. 적어도 보험은 되겠지.
“크윽!”
억지로 일어났더니 다리의 통증이 말이 아니다. 그래도 살기 위해서 억지로 몸을 이끌었다.
근처 숲으로 들어가 흙더미 속을 마구 뒹굴었다. 그래, 돼지가 진흙 목욕을 하는 것처럼 말이다. 덕분에 상거지 꼴이 되었지만 난 오히려 만족한 얼굴로 일어났다. 뒹굴 때 몸속에 벌레가 묻은 것인지 여기저기 간지러웠지만, 신경도 쓰지 않았다. 그 정도로 난 지금 필사적이었다.
드디어 굳게 결심하고 용기를 내 숲 안으로 다시 들어갔다. 걷는 도중 주위에 떨어져 있는 나뭇가지 하나를 주워 지팡이처럼 사용하니, 그나마 조금 편하게 걸을 수 있었다.
대숲은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었다. 괴물들과의 조우를 우려했지만, 다행히도 운 좋게 마주치진 않았다.
처음엔 나이프도 없이 대나무를 어찌 자를까 고민하다 메스를 이용하기로 했다.
메스를 끌처럼 대나무에 대고 주먹만 한 돌을 정처럼 내리찍는 것으로, 방식은 투박하지만 결국 잘라내는 데 성공했다. 그렇게 대충 적당한 크기로 잘라 두어 개 챙기고 나니 공복이 심각하게 몰려왔다. 작업하는 데 칼로리를 상당히 많이 소비한 것 같았다.
이참에 식량도 확보해 둘까 하는 심정으로 주변을 30분쯤 수색해 죽순을 하나 찾아낼 수 있었다. 아마 조금 더 수색한다면 몇 개 더 찾아낼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이미 짊어진 무게도 상당하고 여기는 위험했기에 아쉽지만 만족하고 해변으로 돌아왔다.
1장 새로운 세계(2)
내 눈앞에서 그 둘은 마치 만찬을 즐기듯 거미의 단단한 머리를 으적으적 씹어 먹었다. 뒤이어 거미의 녹색 진액이 맛있다는 듯이 후루룩 들이켠다. 그 엽기적인 모습에 구토가 올라왔지만, 가까스로 참았다. 그도 그럴 것이, 저 둘은 어쩐지 나를 전혀 신경 쓰지 않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난 슬쩍 눈동자만 굴려 내 모습을 내려다보았다. 물과 흙, 그리고 낙엽까지 엉겨 붙어 있는 처량한 모습이다. 혹시 저들은 이런 나를 보지 못하는 게 아닐까? 어쩌면 뱀처럼 눈보다 코가 더 발달한 녀석들일 확률도 있다. 어찌 됐든 나는 살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느꼈다.
조심히, 아주 천천히 몸을 낙엽 속에 더 파묻었다. 그리고 저들이 제발 그냥 이대로 떠나주기만을 기도했다.
녀석들은 그런 내 기분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 큰 거미의 머리통을 다 먹고 나선 만족한 얼굴로 각자 거미의 앞다리를 어깨에 들쳐 메 끌고 가기 시작했다. 아마 저들의 거주지로 식량을 이동시키는 것이리라. 살았다. 나는 살 수 있……!
빠직.
안도의 기쁨을 누리는 그때, 손으로 무언가 잘못 짚은 것인지 나뭇가지 부러지는 소리가 울렸다. 동시에 두 괴물의 충혈된 눈동자가 내 쪽을 홱 돌아보았다.
심장이 멎을 듯했다. 숨도 쉴 수 없을 정도로 공포가 몰려왔다. 괴물 둘은 서로 무언가 얘길 주고받더니 한 명이 다시 내 쪽으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젠장, 젠장, 젠장!
“킁, 킁.”
지척까지 다가와 눈을 감은 채 무언가 냄새를 맡기 시작한 녀석. 그 녀석은 조금 전 내가 오줌을 지렸던 곳까지 다가와 거칠게 꼬챙이를 푹, 꽂았다.
만약 뒷걸음질 치지 않고 그 자리에 숨어 있었다면 분명 저 꼬챙이는 내 복부를 관통했을 것이다.
녀석은 꼬챙이에 아무런 느낌이 없자 의아한 듯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좀 더 내 쪽으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녀석이 한 발 한 발 다가올 때마다 내 심장은 터질 듯이 뛰었다.
제발, 오지 마. 오지 마. 오지 마!
쿠르르르르르르릉……!
녀석의 나무꼬챙이가 내 머리칼 근처까지 다가온 그때, 바닥이 진동했다.
이건… 지진?
“후르하! 후르하!”
지진이 일어나자 거미 쪽에 있던 녀석이 다급히 동료를 불렀고, 그제야 내 눈앞에 있던 녀석이 돌아가기 시작했다.
나, 나… 산 건가?
그 둘은 마치 도망가기라도 하는 것처럼 허겁지겁 거미를 들쳐 메고 달아나기 시작했다. 그렇게 그들이 사라지고 나서야 나는 잔뜩 긴장해 굳었던 어깨를 늘어트릴 수 있었다.
한참 뒤, 아픈 다리를 질질 끌며 어찌어찌 해안가로 다시 돌아왔다. 또 다른 괴물을 만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필사적으로 걸었기에, 솔직히 해안가에 도착하는 순간까지 아무것도 생각하지 못했다.
“흐윽, 흐으윽!”
해안가에 도착하는 순간, 뭐가 그리 서럽던지 눈물이 끊임없이 쏟아져 나왔다. 대체 여기는 어디인 걸까? 그 괴물들은 대체 무엇인가. 대체 왜 나는 이런 말도 안 되는 곳에 떨어졌단 말인가!
거친 모랫바닥에 쓰러지듯 누웠다. 해안가에 도착할 때쯤엔 이미 날이 어둑어둑해져 있던 터라 모래는 무척이나 차가웠다.
내 기분을 아는지 모르는지 밤하늘에 떠 있는 별은 지금까지 본 적 없을 정도로 총총하다.
무의식적으로 호주머니를 뒤져 유리구슬을 꺼내 들었다. 구슬 속은 별이 모여든 것처럼 반짝거렸다.
나를 위해 울던 자영이가 기억난다. 내 어깨를 팡팡, 치며 쾌활하게 웃던 선배의 모습도, 어머니처럼 잔소리해 대는 김 간호사의 모습도, 그 외에 감사하다며 고개 숙이던 수많은 환자의 모습들까지…….
난 죽을 뻔한 순간까지도 절대 놓지 않았던 외진 가방을 끌어안은 채 쓰러져 잠이 들었다.
그날 꿈에서 자영이가 나타났다.
너무도 반가운 마음에 눈물을 흘렸지만, 어째선지 그 소녀는 너무도 무심한 눈동자로 나를 내려다보기만 했다.
내가 무엇이라도 잘못한 걸까? 그 소녀의 눈동자는 너무도 차가워 무섭기까지 했다.
그래, 마음에 상처만 안겨주고 떠나 화가 난 거다. 다음에 꼭 다시 만나자고 했는데 약속을 지키지 못해 화난 거다.
미안하다고, 내가 잘못했다고 끊임없이 사과했다. 그럼에도 소녀의 차디찬 눈은 풀어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그러다 문득 내 손에 들려 있던 유리구슬을 돌아보더니 기묘한 얼굴이 된다. 내가 망설이듯 유리구슬을 건네주자 빼앗듯 낚아채더니, 밤하늘에 유리구슬을 비춰 보기 시작했다.
그제야 표정이 풀어진다. 평소 밝았던 자영이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그렇게 자영이는 매료된 것처럼 유리구슬 속을 바라보더니, 이내 허공에 녹아들 듯 유령처럼 모습을 감추었다.
새벽녘이 밝아올 무렵, 만조 현상으로 발끝을 치는 파도 덕에 잠에서 깨어났다. 만약 이때 일어나지 못했더라면 그대로 파도에 휩쓸려 물귀신이 되었을지도 모를 일이리라.
“으으…….”
새벽 해안가의 추위를 무시했던 탓일까? 일어난 순간 이빨이 딱딱 부딪칠 정도로 추위에 떨던 나는 어찌어찌 가방 안에 있던 동의보감 서적 한 권을 전부 태워 다시 한 번 생명을 연장할 수 있었다. 만약 이때도 라이터가 없었더라면…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크윽… 젠장.”
대충 불가에 쪼그려 누었더니 발에서부터 격통이 찾아왔다. 들여다보니 복숭아뼈 부근이 조금 부어 있는 걸 확인할 수 있었다.
젠장, 설마 부러진 건가?
심각한 표정으로 발을 이리저리 만져 보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다행히 부러지진 않고 인대가 손상된 것 같은데… 그래도 이거, 일주일 이상은 갈 것 같다.
다행히 붕대는 많았기에 응급조치로 감아놨지만, 걱정이 태산이었다. 이런 꼴로 여기서 생존해야 한다는 생각에 막막함이 몰려왔던 것이다.
“어, 어라? 어디 갔지? 어, 없어?”
마음을 안정시키기 위해 유리구슬을 들여다보려 했던 나는 호주머니 안을 뒤지다 놀랐다. 가운 안, 외진 가방 안까지 전부 뒤져도 보이지 않았다. 분명 어젯밤만 해도 있었는데.
아무래도 자는 새에 바닥에 떨어트린 모양이다. 뒤늦게라도 찾고 싶었지만, 이미 내가 자고 있던 자리엔 바닷물이 자리하고 있었다. 찾기엔 너무 늦어버린 것이다.
“하아… 되는 게 하나도 없네.”
괜히 더 우울해져 깊은 탄식의 한숨만 새어 나왔다.
어제 무리하게 움직여서일까? 발뿐만이 아니라 온몸의 근육통도 심했고, 배도 고팠으며, 목도 말랐다. 시냇물이 문득 떠올랐지만, 이내 고개를 저었다. 한 시간 거리를 이런 다리로 갈 수도 없을뿐더러 거긴 너무도 위험했기에.
그래, 거긴 너무 위험…….
당시의 공포가 다시 떠올라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그 거대한 거미하며 두 발로 걷던 괴물들은 무엇이었을까? 아직 밝혀지지 않은 섬의 희귀종? 하, 그게 희귀종이라니, 웃기지도 않는다. 거미는 둘째 치고, 그 괴물들은 분명 대화를 나눴다고!
대화를 나눈다는 것 자체가 일반 동물의 범주를 벗어났다는 말이다. 어느 정도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들은 분명 도구를 쓸 줄 알았으며, 대화도 나눌 수 있을 정도의 지능을 가지고 있었다.
“어쩌면… 이곳은 그 괴물들의 서식처일지도 몰라.”
순간, 등줄기가 오싹해졌다. 만약 정말 숲 전체가 그 괴물들의 서식지라면? 나는 먹힐 날만을 기다리는 닭장 속 닭이 된 꼴이 아닌가.
까악! 까악!
끼루루루루루루루.
“우와악!”
갑자기 뒤쪽에서 들린 산새 소리에 나도 모르게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질색한 마음으로 뒤돌아보니 어둡고 음침한 숲이 눈에 들어온다. 바람에 흔들리는 나무의 모습이, 마치 지옥에 온 걸 환영한다고 인사하는 것처럼 보였다.
이보다도 괴기스러운 숲이 또 있을까?
잔뜩 무서워져 한껏 몸을 움츠렸다. 잠시만 긴장을 늦춰도 그 이족 보행 괴물들이 나타나 내 머리를 으적, 씹어 먹어버릴 것 같다. 거미의 날카로운 발톱으로 내 심장을 뽑아 먹을 거 같다. 부정적인 생각을 하면 안 된다고 이성적으론 알고 있으면서도 자꾸만 그런 생각들이 뇌리에서 떠나질 않는다.
이곳은 지옥이야…….
그냥 혼자만 있어도 굶어 죽을 지경인데 그런 괴물들을 피해가며 생존하라니.
“빌어먹을!”
정면을 향해 한 움큼 모래를 쥐어 던졌다. 어째서 나는 이런 위험이 가득한 곳에 떨어졌단 말인가. 대체 그 신이란 작자는 어째서 내게 이런 고난과 시련을 내린단 말인가!
좌절해 있으려니 문득 선배의 얼굴이 떠올랐다. 짓궂게 웃는 김 간호사의 얼굴도 떠올랐다. 그 외에 의사도 사람인데 먹고 살아야 한다며 감귤을 하나 내주던 암 투병 중인 할머니, 의사 선생님이 찾아오면 싸게 해줄 거라며 가느다란 다리를 슬쩍 내보이던 성병 환자 아가씨, 겨우 살아난 고양이를 꼭 안고서 해맑게 웃던 자영이의 얼굴까지 떠올랐다.
“살아주겠어. 그래, 기필코… 살아남아 주겠어…….”
몸을 부둥켜안은 채 중얼거렸다. 아마 지금 내 눈은 오기로 가득 차 있겠지.
그래, 이런 곳에서 영문도 모른 채 죽을 수는 없다. 나는 비참하게 굶어 죽으려고 의사가 된 게 아냐. 이 손으로 사람을 살리겠다고 결심하지 않았던가. 다시는 내 눈앞에서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죽어가는 모습을 보지 않겠다고 다짐하지 않았던가!
교통사고로 죽어가던 부모님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 당시 내 나이 불과 여덟 살. 그 당시에 나로선 부모님을 안고 달릴 힘도, 능력도… 아무것도 없었다.
그저 할 수 있던 건 피를 철철 흘리며 죽어가던 부모님을 지켜보는 것뿐.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지금은 이 손으로 내가 살릴 수 있어. 구원할 수 있어! 그러니까 이딴 곳에서 굶어 죽을 순 없단 말이다!
우선은 물이다. 그다음은 식량이다. 그리고 그 괴물들에게서 들키지 않을 은신처가 필요하다.
물을 확보하기 위해선 무슨 방법이 있을까? 일단 한 시간 거리나 떨어진 그 시냇물은 지금 당장 이용할 순 없어. 최대한 이곳에서 자급자족해야 해.
가장 쉽고 편하게 물을 확보하는 건 빗물을 받아 끓여 먹는 것이겠지만, 언제 내릴지도 모를 비를 기다리고만 있을 수는 없다. 그렇다면 해수를 담수로 만드는 수밖에 없는 건가?
분명 해수를 증류해 물을 만드는 법을 어느 서바이벌 프로그램에서 본 적이 있다. 하지만 지금 내겐 불로 가열해도 괜찮은 용기가 없는데…….
“아, 그래! 죽통! 분명히 근처에서 본 적이 있어!”
분명 멀지 않은 곳에 대나무 숲이 있던 게 기억났다. 정확한 장소는 모르겠지만, 몇 번 둘러보면 바로 알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근처라 해도 숲 속이다. 또다시 괴물들과 마주칠 위험성이 있는데…….
난 곰곰이 생각하다 흙투성이의 몸을 내려다보았다. 좋아, 할 수 있는 건 다 해보자. 적어도 보험은 되겠지.
“크윽!”
억지로 일어났더니 다리의 통증이 말이 아니다. 그래도 살기 위해서 억지로 몸을 이끌었다.
근처 숲으로 들어가 흙더미 속을 마구 뒹굴었다. 그래, 돼지가 진흙 목욕을 하는 것처럼 말이다. 덕분에 상거지 꼴이 되었지만 난 오히려 만족한 얼굴로 일어났다. 뒹굴 때 몸속에 벌레가 묻은 것인지 여기저기 간지러웠지만, 신경도 쓰지 않았다. 그 정도로 난 지금 필사적이었다.
드디어 굳게 결심하고 용기를 내 숲 안으로 다시 들어갔다. 걷는 도중 주위에 떨어져 있는 나뭇가지 하나를 주워 지팡이처럼 사용하니, 그나마 조금 편하게 걸을 수 있었다.
대숲은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었다. 괴물들과의 조우를 우려했지만, 다행히도 운 좋게 마주치진 않았다.
처음엔 나이프도 없이 대나무를 어찌 자를까 고민하다 메스를 이용하기로 했다.
메스를 끌처럼 대나무에 대고 주먹만 한 돌을 정처럼 내리찍는 것으로, 방식은 투박하지만 결국 잘라내는 데 성공했다. 그렇게 대충 적당한 크기로 잘라 두어 개 챙기고 나니 공복이 심각하게 몰려왔다. 작업하는 데 칼로리를 상당히 많이 소비한 것 같았다.
이참에 식량도 확보해 둘까 하는 심정으로 주변을 30분쯤 수색해 죽순을 하나 찾아낼 수 있었다. 아마 조금 더 수색한다면 몇 개 더 찾아낼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이미 짊어진 무게도 상당하고 여기는 위험했기에 아쉽지만 만족하고 해변으로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