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아래로 스크롤 하세요.
이세계 닥터 1권(4화)
1장 새로운 세계(1)
쏴아아, 쏴아아.
귓가에 와 닿는 파도 소리가 따갑다. 바람에 섞여 있는 소금기 때문에 목도 따갑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덥다. 정말 현기증이 날 정도로 덥다. 고작 한 시간 있었을 뿐인데, 사흘은 물도 마시지 못한 것처럼 괴롭다.
멍하니 주위를 둘러보았다. 앞은 끝도 없이 펼쳐진 바다, 뒤는 빽빽하게 우거진 숲. 그 외에는 아무것도 없다. 배가 드나들 만한 부둣가나 안내 표지판 같은 건 눈을 씻고 찾아봐도 보이지 않는다.
…대체 여기는 어디인 걸까?
처음 한 시간은 바닷가를 정처 없이 걸어 다녀봤다. 혹시나 지나가는 사람이 있다면 여기가 어딘지 물어볼 마음으로. 하나 그건 바보 같은 생각이었다는 걸 곧 깨달을 수 있었다.
어느 순간 뒤돌아보았다가 모래사장에 남아 있는 흔적이 오로지 내 발자국뿐이라는 걸 알아냈으니까.
사람의 흔적이라곤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었다. 그야말로 무인도. 처음 무인도에 도착한 로빈슨 크루소의 기분이 이러했을까?
조금 안쪽으로 들어가 나무 그늘에 풀썩 주저앉았다. 습도가 높아 더운 건 마찬가지지만, 땡볕에 서 있는 것보단 나았다.
“대체… 이게 어찌 된 거야…….”
메마른 목소리로 중얼거려 본다. 혼자서 중얼거리는 게 많아지면 정신적으로 문제가 생긴 거라는데……. 그 정도로 지금 난 혼란스러웠다.
멍하니 수평선을 바라보았다. 여길 빠져나갈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끝도 없는 바다만이 눈에 들어온다. 하, 헛웃음만 나오는구나.
“꿈이라면 제발 좀 깨달라고…….”
분명 조금 전까지만 해도 나는 이송되어 오는 구급차에 치여 척추골절에 과다 출혈로 인한 쇼크사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것이 자영이를 살려준 대가였으므로 나는 후회하지 않고 죽음을 받아들였었다. 그런데…….
“운명을 붙잡아 또 하나의 기회를 열었으니, 자신의 신념을 믿고 길을 개척하라.”
그 목소리와 함께 번듯한 모습으로 이곳에 이동된 것이다.
처음엔 믿겨지지가 않았다. 분명 내 상태는 즉사할 정도로 엉망진창이었다. 상태만 두고 보았을 때는 설령 나라 할지라도 고치는 건 무리일 정도로. 그런데 마치 꿈이었다는 듯이 멀쩡하다니. 정말 그 목소리의 주인은 신이라도 되는 건가?
매우 맑고 고운 목소리였다. 하지만 여성인지 남성인지는 단정할 수 없는, 신비함이 담겨 있었다. 만약 그 목소리가 정말 신이라면, 어째서 나를 여기로 보낸 걸까? 아니면 난 차에 치여 지금도 혼수상태고, 여태껏 꿈을 꾸고 있는 게 아닐까?
볼을 꼬집어보니 제대로 아픔이 느껴졌다. 꿈이라기엔 정신이 너무도 멀쩡해 아무리 생각해도 꿈을 꾸는 것 같지는 않다. 그렇다면 대체 지금은 무슨 상황이란 말인가.
“이봐! 정녕 당신이 날 여기로 보냈다면 이유라도 알려줘야 할 거 아냐! 대답해 보라고!”
있는 힘껏 소리 질러봤지만, 되돌아오는 건 파도 소리뿐이었다.
괜한 부끄러움에 머리를 마구 헝클곤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문득 내 옆에 놓여 있는 외진 가방을 돌아보았다. 신은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외진 가방을 함께 보냈다. 그래봐야 들어 있는 건 고작 구급용으로 만들어진 의료 기기와 마취제가 전부인지라 무인도에서 살아남는 데는 전혀 쓸모없다고 할 수 있었다.
쓰게 입맛을 다시며 가운 주머니에서 엄지손가락만 한 유리구슬을 꺼내 보았다.
살짝 푸른빛이 도는 투명한 유리구슬. 이건 퇴원을 하던 자영이가 나에게 주려고 했던 선물이다.
차에 치였을 때, 이 유리구슬을 든 채 펑펑 울던 자영이의 모습이 아직도 기억난다. 그랬던 이것이 내 가운 주머니 안에 있는 것을 보면, 신은 생각보다 배려심이 아예 없는 것도 아닌 것 같았다.
난 차분히 유리구슬을 바라보며 마음을 다잡았다. 그래, 냉정해지자, 강현호. 이유야 어찌 됐든 기적처럼 다시 주어진 목숨인데, 일단 살고 봐야 하지 않겠는가. 지금 당장 나에겐 물도, 식량도 없다. 이대로라면 사흘 안에 굶어 죽고 말겠지.
“젠장, 숲 안쪽에 마을이 있으면 좋을 텐데.”
여기가 어딘지 모르겠지만, 사람이 사는 곳이라면 정말 좋을 것이고, 적어도 시냇물이라도 있다면 우선 물 걱정은 없을 것이다. 외진 가방 안에 몇 가지 서적과 구급 의료 패킹도 들어 있으니 종이를 이용해 불을 붙이고 봉합용 침을 낚싯바늘용으로 사용한다면 불과 식량도 어찌어찌 해결되겠지.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곳이 어디인지 알고 싶었다.
높은 곳에 올라가 전경을 바라보면 뭔가 알 수 있지 않을까?
그렇게 가벼운 마음으로 일단 무작정 숲 안으로 들어갔다. 그게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생각지도 못하고.
처음엔 온갖 벌레들 때문에 정신이 없었다. 가벼운 정장 차림에 가운을 입고 있던 터라 몸 곳곳이 벌레들의 만찬이 되었다. 뿐만 아니라 길이 만들어지지 않은 곳이 많아 수풀을 헤치고 갈 때면 몸 곳곳에 상처가 나 이러다 상처나 벌레로 인해 병균이나 기생충에 감염되는 것 아닐까 하고 괜한 걱정이 들었다.
그러한 것들은 정말 사소한 것에 불과했다는 것도 모른 채.
“헉, 헉.”
거추장스러운 가운과 와이셔츠를 벗어 허리에 묶고 러닝셔츠 차림으로 걷기를 한 시간째. 급성 영양실조로 빈혈 증상까지 나타나 머리가 어질어질해 죽을 것만 같던 그때, 멀리서 조그맣게 물 흐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무, 물소리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지금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만 같았는데 단지 물소리가 들린 것 하나만으로 뛸 수 있다니, 사람의 몸이란 참 알다가도 모르겠다.
“살았어! 살았다고!”
반짝이는 시냇물. 물이 얼마나 맑은지, 물속에 있는 자갈들까지 빛나 보일 정도였다.
나는 짐승처럼 시냇물에 코를 박아 벌컥벌컥 물을 마셨다. 죽어가던 몸에 활기가 불어넣어지는 느낌이랄까? 이때의 물맛은 지금껏 느껴보지 못한 행복감을 선사해 주었다.
나는 폐까지 상쾌해지는 청량감을 만끽하곤 부랴부랴 가방 안을 뒤졌다. 혹시나 물을 담아갈 만한 것이 있을까 싶어서였다.
“봉합용 침, 청진기, 메스, 주사 통, 수술용 장갑에… 봉합실, 주삿바늘, 마취약이라……. 제길, 뭐 하나 쓸 만한 게 없… 잠깐, 수술용 장갑? 이것이라면…….”
수술용 장갑은 라텍스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얇으면서도 잘 늘어나는 성질을 가지고 있다. 이것이라면 생각보다 많이 물을 담아갈 수 있지 않을까?
수술용 장갑 100매가 들어 있는 팩을 열어 장갑을 하나 꺼낸 뒤, 물살이 비교적 강한 곳으로 이동해 물속에 장갑을 넣어보았다.
“좋아!”
역시나 내 생각대로 장갑은 풍선처럼 부풀며 엄청난 양의 물을 담을 수 있었다. 생각보다 물이 무거워 덜어내야 할 정도였다.
“대충 2리터쯤 될까? 이거라면 사흘은 물 걱정 없이 살 수 있…….”
키르르르.
장갑 안에 든 맑은 물을 감상하며 좋아하는 그때, 등 뒤에서 뭔가 돌끼리 마찰하는 듯한 소리가 들려왔다. 하지만 정말 돌 부딪치는 소리는 아니라는 걸 확신했다. 내 머리 위로 커다란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으니까.
불안한 마음에 어깨너머로 뒤돌아보았다.
그리고 난, 나를 직시하고 있는 머리통만 한 거미의 여덟 개 눈을 볼 수 있었다.
“우와아아아아아악!”
키르르르르르륵!
내가 소리를 지르자 거미가 흥분한 것인지 두 앞다리를 치켜들었다. 저렇게 다리를 들며 몸을 일으키니 대충 3m쯤 될까? 그건 거미라고 부르기 어려울 정도로 커다랬다.
“뭐, 뭐야! 저, 저리 가!”
허공에 가방을 휘두르며 뒷걸음쳤다. 그러자 거미는 민첩한 반응으로 살짝 뒤로 물러났다가 힘차게 앞다리를 휘둘렀다.
빠직!
뒷걸음치다 자갈에 걸려 넘어졌는데, 덕분에 살았다고 해야 할까? 내 옆에 있는 바위가 대신 거미의 공격을 맞아주었다. 덕분에 나는 상상할 수 없는 일을 목격할 수 있었다.
바위가 쩌적, 갈라지더니, 그대로 무너지듯 부서졌던 것이다.
“흐, 흐아악! 사람 살려어어어!”
거미가! 거미가 바위를 부수다니! 저건 괴물이다! 절대로 거미 따위가 아냐!
달렸다. 미친 듯이 달렸다. 엎어지고 쓰러져도 필사적으로 일어나 달렸다.
거미는 그 커다란 몸으로 이리저리 나무 사이를 헤치며 나를 쫓아왔다. 민첩한 모습은 보통 거미와 다를 바 없었는데, 덕분에 난 소름이 돋을 정도로 무서움을 느꼈다.
“오지 마아아아! 우와아아아악!”
발을 헛디뎌 수풀을 뒹굴었다. 덕분에 물을 담아놓은 장갑도 터진 것인지, 온몸이 물과 흙으로 뒤범벅이었다.
“크아악!”
다리도 삐었는지 고통이 말이 아니다. 난 물과 흙, 낙엽까지 온몸에 덕지덕지 붙은 모습으로 머리 위에 나타난 거미를 올려다볼 수밖에 없었다.
“사, 살려줘.”
키르르르르르륵!
내 머리 위로 날카로운 앞발이 떨어져 내렸다. 그 시간은 무척이나 짧았지만, 내게는 어릴 때 돌아가신 부모님의 모습과 부끄러워하며 병실로 사라졌던 선배의 마지막 모습이 떠오를 정도로 길게 느껴진 시간이었다.
…이런 게 주마등이란 건가.
오줌을 지리며 현실을 회피하기 위해 눈을 꽉 감았다. 그런데 곧이어 찾아올 고통이 느껴지지 않았다. 가까스로 용기를 내 눈을 떠보니, 거미가 내 바로 머리 위에 앞발을 멈춰 세운 채 동상처럼 굳어 있는 걸 볼 수 있었다.
그리고 뒤이어 거미의 머리를 관통한 거대한 나무 꼬챙이도 발견할 수 있었다.
“무, 무슨…….”
“쿠쉬쿠쉬, 쿠라하!”
“에시바흐하! 에간하!”
뒤늦게 언덕 위에서 투박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억양이 담겨 있어 동물의 목소리라기보단 마치 사람의 대화 소리같이 느껴졌다.
나는 멍하니 언덕 위를 올려다보았다. 비록 거리는 조금 멀었지만, 확실히 볼 수 있었다. 한 손에 나무 꼬챙이를 들고 달려오는 사람들의 모습을.
“사, 살았어! 사람이야! 신이시여, 감사합니다! 여기예요! 여기에 있…….”
도움을 받았다고 생각해 손을 흔들다 멈췄다. 뭔가 이상하다. 멀리서 보았을 땐 몰랐지만, 조금 가까워지니 이상한 점이 한둘이 아니었던 것이다.
분명 두 다리로 뛰어오는 모습은 사람과 다를 게 없었다. 그런데 얼굴은 사람이라기보단 짐승에 가까웠다. 거칠게 드러난 송곳니에 피부색도 살색이 아니라 초록빛이었다. 거기에 인디언이 문신한 것처럼 몸 여기저기를 붉은 염료로 칠해놔 무언가 무섭게 느껴졌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들의 사나운 눈이 사람과는 너무도 동떨어져 있었다.
넘어진 채로 슬슬 뒷걸음쳤다. 자꾸만 내 감각이 도망가라고 호소한다. 저들은 결코 아군이 아니라 말하고 있었다.
도망가야 해. 지금 당장 여기서 도망가야 해!
“으윽!”
일어나 도망가려 했지만, 삔 다리 때문에 옴짝달싹할 수 없었다.
빌어먹을! 움직여! 움직이란 말이야!
“무후하! 무크라!”
“쉬스쉬스 쿠라하!”
저들은 서로 말을 주고받으며 내가 있는 곳으로 향해 다가왔다. 이젠 확연히 보이는 저들의 모습. 이가 덜덜 떨릴 정도로 공포가 엄습했다.
저들은 사람이 아냐. 절대로 사람이 아냐!
난 완전히 굳은 몸으로 아무런 반항조차 하지 못한 채 그들을 올려다보았다. 공포에 젖은 토끼가 멈춰 서 있는 것과 비슷하다고 할까? 솔직히 움직일 힘도 없어 그저 가만히 앉아 있었다는 게 정답이겠지만.
그들은 내 앞에서 멈춰 섰다. 거미를 꿰뚫은 것처럼 내 머리도 나무 꼬챙이로 꿰뚫어 버리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별의별 생각을 다 하는 그때.
사람같이 이족 보행을 하는 괴물 둘은 거미의 머리를 뜯어 나눠 먹기 시작했다.
1장 새로운 세계(1)
쏴아아, 쏴아아.
귓가에 와 닿는 파도 소리가 따갑다. 바람에 섞여 있는 소금기 때문에 목도 따갑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덥다. 정말 현기증이 날 정도로 덥다. 고작 한 시간 있었을 뿐인데, 사흘은 물도 마시지 못한 것처럼 괴롭다.
멍하니 주위를 둘러보았다. 앞은 끝도 없이 펼쳐진 바다, 뒤는 빽빽하게 우거진 숲. 그 외에는 아무것도 없다. 배가 드나들 만한 부둣가나 안내 표지판 같은 건 눈을 씻고 찾아봐도 보이지 않는다.
…대체 여기는 어디인 걸까?
처음 한 시간은 바닷가를 정처 없이 걸어 다녀봤다. 혹시나 지나가는 사람이 있다면 여기가 어딘지 물어볼 마음으로. 하나 그건 바보 같은 생각이었다는 걸 곧 깨달을 수 있었다.
어느 순간 뒤돌아보았다가 모래사장에 남아 있는 흔적이 오로지 내 발자국뿐이라는 걸 알아냈으니까.
사람의 흔적이라곤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었다. 그야말로 무인도. 처음 무인도에 도착한 로빈슨 크루소의 기분이 이러했을까?
조금 안쪽으로 들어가 나무 그늘에 풀썩 주저앉았다. 습도가 높아 더운 건 마찬가지지만, 땡볕에 서 있는 것보단 나았다.
“대체… 이게 어찌 된 거야…….”
메마른 목소리로 중얼거려 본다. 혼자서 중얼거리는 게 많아지면 정신적으로 문제가 생긴 거라는데……. 그 정도로 지금 난 혼란스러웠다.
멍하니 수평선을 바라보았다. 여길 빠져나갈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끝도 없는 바다만이 눈에 들어온다. 하, 헛웃음만 나오는구나.
“꿈이라면 제발 좀 깨달라고…….”
분명 조금 전까지만 해도 나는 이송되어 오는 구급차에 치여 척추골절에 과다 출혈로 인한 쇼크사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것이 자영이를 살려준 대가였으므로 나는 후회하지 않고 죽음을 받아들였었다. 그런데…….
“운명을 붙잡아 또 하나의 기회를 열었으니, 자신의 신념을 믿고 길을 개척하라.”
그 목소리와 함께 번듯한 모습으로 이곳에 이동된 것이다.
처음엔 믿겨지지가 않았다. 분명 내 상태는 즉사할 정도로 엉망진창이었다. 상태만 두고 보았을 때는 설령 나라 할지라도 고치는 건 무리일 정도로. 그런데 마치 꿈이었다는 듯이 멀쩡하다니. 정말 그 목소리의 주인은 신이라도 되는 건가?
매우 맑고 고운 목소리였다. 하지만 여성인지 남성인지는 단정할 수 없는, 신비함이 담겨 있었다. 만약 그 목소리가 정말 신이라면, 어째서 나를 여기로 보낸 걸까? 아니면 난 차에 치여 지금도 혼수상태고, 여태껏 꿈을 꾸고 있는 게 아닐까?
볼을 꼬집어보니 제대로 아픔이 느껴졌다. 꿈이라기엔 정신이 너무도 멀쩡해 아무리 생각해도 꿈을 꾸는 것 같지는 않다. 그렇다면 대체 지금은 무슨 상황이란 말인가.
“이봐! 정녕 당신이 날 여기로 보냈다면 이유라도 알려줘야 할 거 아냐! 대답해 보라고!”
있는 힘껏 소리 질러봤지만, 되돌아오는 건 파도 소리뿐이었다.
괜한 부끄러움에 머리를 마구 헝클곤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문득 내 옆에 놓여 있는 외진 가방을 돌아보았다. 신은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외진 가방을 함께 보냈다. 그래봐야 들어 있는 건 고작 구급용으로 만들어진 의료 기기와 마취제가 전부인지라 무인도에서 살아남는 데는 전혀 쓸모없다고 할 수 있었다.
쓰게 입맛을 다시며 가운 주머니에서 엄지손가락만 한 유리구슬을 꺼내 보았다.
살짝 푸른빛이 도는 투명한 유리구슬. 이건 퇴원을 하던 자영이가 나에게 주려고 했던 선물이다.
차에 치였을 때, 이 유리구슬을 든 채 펑펑 울던 자영이의 모습이 아직도 기억난다. 그랬던 이것이 내 가운 주머니 안에 있는 것을 보면, 신은 생각보다 배려심이 아예 없는 것도 아닌 것 같았다.
난 차분히 유리구슬을 바라보며 마음을 다잡았다. 그래, 냉정해지자, 강현호. 이유야 어찌 됐든 기적처럼 다시 주어진 목숨인데, 일단 살고 봐야 하지 않겠는가. 지금 당장 나에겐 물도, 식량도 없다. 이대로라면 사흘 안에 굶어 죽고 말겠지.
“젠장, 숲 안쪽에 마을이 있으면 좋을 텐데.”
여기가 어딘지 모르겠지만, 사람이 사는 곳이라면 정말 좋을 것이고, 적어도 시냇물이라도 있다면 우선 물 걱정은 없을 것이다. 외진 가방 안에 몇 가지 서적과 구급 의료 패킹도 들어 있으니 종이를 이용해 불을 붙이고 봉합용 침을 낚싯바늘용으로 사용한다면 불과 식량도 어찌어찌 해결되겠지.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곳이 어디인지 알고 싶었다.
높은 곳에 올라가 전경을 바라보면 뭔가 알 수 있지 않을까?
그렇게 가벼운 마음으로 일단 무작정 숲 안으로 들어갔다. 그게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생각지도 못하고.
처음엔 온갖 벌레들 때문에 정신이 없었다. 가벼운 정장 차림에 가운을 입고 있던 터라 몸 곳곳이 벌레들의 만찬이 되었다. 뿐만 아니라 길이 만들어지지 않은 곳이 많아 수풀을 헤치고 갈 때면 몸 곳곳에 상처가 나 이러다 상처나 벌레로 인해 병균이나 기생충에 감염되는 것 아닐까 하고 괜한 걱정이 들었다.
그러한 것들은 정말 사소한 것에 불과했다는 것도 모른 채.
“헉, 헉.”
거추장스러운 가운과 와이셔츠를 벗어 허리에 묶고 러닝셔츠 차림으로 걷기를 한 시간째. 급성 영양실조로 빈혈 증상까지 나타나 머리가 어질어질해 죽을 것만 같던 그때, 멀리서 조그맣게 물 흐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무, 물소리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지금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만 같았는데 단지 물소리가 들린 것 하나만으로 뛸 수 있다니, 사람의 몸이란 참 알다가도 모르겠다.
“살았어! 살았다고!”
반짝이는 시냇물. 물이 얼마나 맑은지, 물속에 있는 자갈들까지 빛나 보일 정도였다.
나는 짐승처럼 시냇물에 코를 박아 벌컥벌컥 물을 마셨다. 죽어가던 몸에 활기가 불어넣어지는 느낌이랄까? 이때의 물맛은 지금껏 느껴보지 못한 행복감을 선사해 주었다.
나는 폐까지 상쾌해지는 청량감을 만끽하곤 부랴부랴 가방 안을 뒤졌다. 혹시나 물을 담아갈 만한 것이 있을까 싶어서였다.
“봉합용 침, 청진기, 메스, 주사 통, 수술용 장갑에… 봉합실, 주삿바늘, 마취약이라……. 제길, 뭐 하나 쓸 만한 게 없… 잠깐, 수술용 장갑? 이것이라면…….”
수술용 장갑은 라텍스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얇으면서도 잘 늘어나는 성질을 가지고 있다. 이것이라면 생각보다 많이 물을 담아갈 수 있지 않을까?
수술용 장갑 100매가 들어 있는 팩을 열어 장갑을 하나 꺼낸 뒤, 물살이 비교적 강한 곳으로 이동해 물속에 장갑을 넣어보았다.
“좋아!”
역시나 내 생각대로 장갑은 풍선처럼 부풀며 엄청난 양의 물을 담을 수 있었다. 생각보다 물이 무거워 덜어내야 할 정도였다.
“대충 2리터쯤 될까? 이거라면 사흘은 물 걱정 없이 살 수 있…….”
키르르르.
장갑 안에 든 맑은 물을 감상하며 좋아하는 그때, 등 뒤에서 뭔가 돌끼리 마찰하는 듯한 소리가 들려왔다. 하지만 정말 돌 부딪치는 소리는 아니라는 걸 확신했다. 내 머리 위로 커다란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으니까.
불안한 마음에 어깨너머로 뒤돌아보았다.
그리고 난, 나를 직시하고 있는 머리통만 한 거미의 여덟 개 눈을 볼 수 있었다.
“우와아아아아아악!”
키르르르르르륵!
내가 소리를 지르자 거미가 흥분한 것인지 두 앞다리를 치켜들었다. 저렇게 다리를 들며 몸을 일으키니 대충 3m쯤 될까? 그건 거미라고 부르기 어려울 정도로 커다랬다.
“뭐, 뭐야! 저, 저리 가!”
허공에 가방을 휘두르며 뒷걸음쳤다. 그러자 거미는 민첩한 반응으로 살짝 뒤로 물러났다가 힘차게 앞다리를 휘둘렀다.
빠직!
뒷걸음치다 자갈에 걸려 넘어졌는데, 덕분에 살았다고 해야 할까? 내 옆에 있는 바위가 대신 거미의 공격을 맞아주었다. 덕분에 나는 상상할 수 없는 일을 목격할 수 있었다.
바위가 쩌적, 갈라지더니, 그대로 무너지듯 부서졌던 것이다.
“흐, 흐아악! 사람 살려어어어!”
거미가! 거미가 바위를 부수다니! 저건 괴물이다! 절대로 거미 따위가 아냐!
달렸다. 미친 듯이 달렸다. 엎어지고 쓰러져도 필사적으로 일어나 달렸다.
거미는 그 커다란 몸으로 이리저리 나무 사이를 헤치며 나를 쫓아왔다. 민첩한 모습은 보통 거미와 다를 바 없었는데, 덕분에 난 소름이 돋을 정도로 무서움을 느꼈다.
“오지 마아아아! 우와아아아악!”
발을 헛디뎌 수풀을 뒹굴었다. 덕분에 물을 담아놓은 장갑도 터진 것인지, 온몸이 물과 흙으로 뒤범벅이었다.
“크아악!”
다리도 삐었는지 고통이 말이 아니다. 난 물과 흙, 낙엽까지 온몸에 덕지덕지 붙은 모습으로 머리 위에 나타난 거미를 올려다볼 수밖에 없었다.
“사, 살려줘.”
키르르르르르륵!
내 머리 위로 날카로운 앞발이 떨어져 내렸다. 그 시간은 무척이나 짧았지만, 내게는 어릴 때 돌아가신 부모님의 모습과 부끄러워하며 병실로 사라졌던 선배의 마지막 모습이 떠오를 정도로 길게 느껴진 시간이었다.
…이런 게 주마등이란 건가.
오줌을 지리며 현실을 회피하기 위해 눈을 꽉 감았다. 그런데 곧이어 찾아올 고통이 느껴지지 않았다. 가까스로 용기를 내 눈을 떠보니, 거미가 내 바로 머리 위에 앞발을 멈춰 세운 채 동상처럼 굳어 있는 걸 볼 수 있었다.
그리고 뒤이어 거미의 머리를 관통한 거대한 나무 꼬챙이도 발견할 수 있었다.
“무, 무슨…….”
“쿠쉬쿠쉬, 쿠라하!”
“에시바흐하! 에간하!”
뒤늦게 언덕 위에서 투박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억양이 담겨 있어 동물의 목소리라기보단 마치 사람의 대화 소리같이 느껴졌다.
나는 멍하니 언덕 위를 올려다보았다. 비록 거리는 조금 멀었지만, 확실히 볼 수 있었다. 한 손에 나무 꼬챙이를 들고 달려오는 사람들의 모습을.
“사, 살았어! 사람이야! 신이시여, 감사합니다! 여기예요! 여기에 있…….”
도움을 받았다고 생각해 손을 흔들다 멈췄다. 뭔가 이상하다. 멀리서 보았을 땐 몰랐지만, 조금 가까워지니 이상한 점이 한둘이 아니었던 것이다.
분명 두 다리로 뛰어오는 모습은 사람과 다를 게 없었다. 그런데 얼굴은 사람이라기보단 짐승에 가까웠다. 거칠게 드러난 송곳니에 피부색도 살색이 아니라 초록빛이었다. 거기에 인디언이 문신한 것처럼 몸 여기저기를 붉은 염료로 칠해놔 무언가 무섭게 느껴졌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들의 사나운 눈이 사람과는 너무도 동떨어져 있었다.
넘어진 채로 슬슬 뒷걸음쳤다. 자꾸만 내 감각이 도망가라고 호소한다. 저들은 결코 아군이 아니라 말하고 있었다.
도망가야 해. 지금 당장 여기서 도망가야 해!
“으윽!”
일어나 도망가려 했지만, 삔 다리 때문에 옴짝달싹할 수 없었다.
빌어먹을! 움직여! 움직이란 말이야!
“무후하! 무크라!”
“쉬스쉬스 쿠라하!”
저들은 서로 말을 주고받으며 내가 있는 곳으로 향해 다가왔다. 이젠 확연히 보이는 저들의 모습. 이가 덜덜 떨릴 정도로 공포가 엄습했다.
저들은 사람이 아냐. 절대로 사람이 아냐!
난 완전히 굳은 몸으로 아무런 반항조차 하지 못한 채 그들을 올려다보았다. 공포에 젖은 토끼가 멈춰 서 있는 것과 비슷하다고 할까? 솔직히 움직일 힘도 없어 그저 가만히 앉아 있었다는 게 정답이겠지만.
그들은 내 앞에서 멈춰 섰다. 거미를 꿰뚫은 것처럼 내 머리도 나무 꼬챙이로 꿰뚫어 버리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별의별 생각을 다 하는 그때.
사람같이 이족 보행을 하는 괴물 둘은 거미의 머리를 뜯어 나눠 먹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