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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화


은반은 가로로 긴 종이 표를 들고 현관에 들어섰다. 며칠 전에 친 모의고사의 결과가 나온 날이었고 그녀는 지금 좀처럼 얼굴에 올리지 않았던 미소를 싱긋 짓고 있었다. 이록이 그날 왜 그랬는지, 그 이유를 듣기 위한 최후의 발악이 이 결과표에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이제 그녀는 그날의 진실에 대해 마음대로 수사를 진행할 수 있고, 그는 꼼짝없이 그날의 진실에 대해 낱낱이 알려야 할 것이었다.
“흐흐흐흐.”
모종의 웃음을 흘린 후에 거실을 가로지르는데 주방에서 왔다 갔다 하고 있는 인숙이 보였다. 이 기쁜 소식을 동포에게도 알려야겠지.
“엄마. 이거.”
은반은 성적표를 식탁 위에 자랑스럽게 올려놓았다. ‘응?’ 하며 다가온 인숙이 고개를 숙여 그것을 들여다보았다. 은반은 인숙이 이맛살을 찌푸리는 것을 보며 낙담했다. 인숙은 모의고사 성적표를 보면 늘 고개를 갸웃거리곤 했다. 성적표라는 건 알겠는데 당최 이 숫자들이 다 무엇을 의미하는지 아직도 파악하지 못한 것이다. 자식 공부에 열성인 엄마지만 안 되는 건 안 되나 보다.
“난 모의고사 성적표는 아무리 봐도 헷갈리더라. 그래. 이게 다 무슨 뜻이라고?”
“등급이 올랐다는 뜻이라고. 수탐 5등급에 언어영역은 6등급. 내가 뭐랬어? 울 쌤, 옆에 두면 성적이 오를 상이라고 했지?”
은반의 성적표에선 본 적이 없는 5, 6이라는 숫자에 인숙이 살짝 고개를 들고 미심쩍은 눈빛으로 딸을 보았다. 과연 은반의 말을 믿을 것인가 말 것인가, 고민하는 듯했다.
“나 머리가 꽤 좋은 편이었나 봐. 한 달 과외 하고 이렇게 오를 수 있는 건가? 그럼 1년 과외 하면 대박이겠다, 그치 엄마?”
순수하게 좋아하는 은반의 얼굴에서 의심의 여지가 없다고 판단했는지 인숙의 얼굴이 그때부터 풀어지기 시작했다.
“에이. 아쉽다. 언어영역도 좀 더 올라서 4등급이면 딱이었는데. 엄마 친구 아들 기우 알지? 너랑 같은 학교 다니잖아. 걘 3등급이거든. 얼마나 자랑을 해 대는지. 그래 봤자 2등급 딸 둔 엄마 앞에선 꼼짝도 못하면서 말이야.”
인숙이 언급한 이름에 은반의 눈이 빛을 내었다. 동시에 기우가 새로 사귄 여자아이와 깨졌다는 민영의 보고가 떠올랐다. 모종의 계획이 비열한 미소와 함께 생각났다.
“그래? 그 엄친아 윤기우 따위, 안 그래도 내가 가볍게 뭉개 줄 생각이야.”
기우와 작년에 사귀었다는 것을 알 리가 없는 엄마의 말에, 은반은 복수를 약속했다. 그러나 계속되는 인숙의 넋두리는 얼마쯤 들떴던 은반의 마음이 점점 바닥으로 가라앉게 했다.
“아쉬워. 좀 더 집중해서 문제를 풀지 그랬어. 이것아.”
“엄마.”
“왜.”
“이럴 땐 그냥, 수고했다, 잘 했다, 이 한 마디만 해 주면 안 돼? 넌 최고야, 까진 바라지도 않는다 진짜.”
“얘는. 아쉬운 건 사실이잖아. 그렇게 큰돈을 써 가며 과외를 시키는데 엄마가 이 정도도 못 바라?”
“그래. 엄마한테 그런 걸 바라는 내가 웃기지. 칭찬하면 어디가 덧나는 게 확실한 엄마니까요. 나 올라가요.”
은반은 성적표를 휙 낚아채듯 집어 들고는 주방을 나섰다. 그러자 인숙이 외쳤다.
“그걸 왜 가져가?”
“내일 울 쌤 오면 성적 올랐다고 보고해야지. 쌤은 물증이 없으면 안 믿는 성격이거든. 맛있는 거 얻어먹을 거야. 나도 기분 낼 땐 장난 아니니까요.”
계단을 오르며 은반은 씁쓰레한 미소를 머금었다. 아무리 열심히 해도, 어떤 성적을 받아 와도 결국 엄마를 만족시킬 순 없을 거라고 생각하자, 그 미소에 더욱 짙은 섭섭함이 묻어났다. 자괴감에 쓰게 웃으며 은반은 주방을 향해 힘없이 소리쳤다.
“나 좀 있다가 나갈 거야, 엄마!”

은반은 <행복한 빌라> 건물 옆 인도에 서서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제 곧 어두워질 시간이라 오고 가는 사람들의 발길이 빨라지는 것을 쳐다보다가 주머니 속에 잡히는 것을 만지작거렸다. 성적표. 저도 모르게 입가가 늘어나는 것을 어쩔 수가 없었다. 그만은, 쌤만은 이 성적표를 보고 기뻐해 줄 거라는 이상한 믿음이 생겨나는 것을 어쩔 수가 없었다.
그렇게 실없이 웃고 있는데 그녀의 앞으로 <해피피자>라고 쓰인 깃발이 달린 오토바이가 요란하게 멈추어 섰다. 은반은 좀 전까지 차올랐던 기대감을 밀어내고 다분히 정색한 얼굴로 그 모습을 보았다.
“아저씨!”
피자 배달원이 상자를 들고 내리는 순간, 은반이 그 앞을 가로막았다. 얼떨결에 갈 길이 막혀 버린 피자 배달원이 헬멧 너머로 뚱한 시선을 보내왔다.
“예? 저요?”
“네. 이거 이 빌라 302호로 가져가시는 거 맞죠?”
“……예. 맞는데요.”
“이거 제가 주문한 거거든요? 302호에 제 친구가 사는데요. 축하할 일이 있어서 제가 익명으로 쏘는 거예요. 서프라이즈, 아시죠? 그래서 친구는 주문한 적 없다고 할지도 몰라요. 그래도 용기 잃지 마시고 꿋꿋하게 전해 주고 오세요.”
“아…… 예에.”
배달원은 고개를 연신 갸웃거리면서도 알겠다고 답하며 안으로 들어가려 했다. 은반은 피자 상자에 부착된 쿠폰을 보고는 다시 한 번 소리쳤다.
“잠깐만요!”
“예?”
“그래도 축하하는 건데 메모는 필수겠죠?”
은반은 메모를 할 요량으로 가방에서 볼펜을 꺼내어 들었다. 뭘 쓸까, 고개를 기울이며 잠시 고민을 하는데 문득 미간이 찌푸려졌다. 그 순간에, 어이없게도 이록이 의대 건물 뒤편에서 눈물짓고 있던 모습이 떠오른 탓이다.
고개를 세차게 젓고는 다시 생각에 집중했다. 하지만 지워지지 않는 그 모습 때문에, 은반은 결국 무의식중에 이록을 떠올리며 쿠폰에 한 줄 메모를 적어 넣었다. 이 피자와 쿠폰을 받아 든 기우의 일그러진 표정을 상상하면서, 키득키득 소리를 내며 웃기도 했다.
그녀를 찬 놈에 대한 응징치고는 매우 가벼운 수준이지만, 사귈 때 은반 또한 기우에게 열과 성을 다하지 않고 심드렁했으므로 이것으로 퉁칠 것이다. 모든 작업을 끝낸 은반은 피자 배달원을 향해 용기를 불어넣어 주는 것을 잊지 않았다.
“아저씨. 파이팅!”
개운한 심정이 되어 돌아서는데 그녀의 앞으로 어두운 그림자가 졌다. 숙인 시야에 남자의 것으로 추정되는 운동화와 바지, 그리고 어깨에 메고 있는 가방이 잡혀 왔다. 슬쩍 고개를 드는데 은반은 세상의 모든 우연이 그와 자신 사이로 순간적으로 몰려들었다고 확신했다. 커진 눈에 놀람과 당황스러움이 고스란히 담겼다. 가슴이 또다시 엇박자를 내기 시작했다.
“네가 여긴 어쩐 일이지?”
이록은 그렇게 물으며 한쪽 눈썹을 밀어 올렸다. 실습이 끝나고 하영을 보기 위해 잠시 시간을 낸 참이었다. 지난번 그렇게 통화를 끝낸 후 하영은 정말로 현관의 비밀번호를 바꾸어 버렸고 기다렸다는 듯 통화마저 끊어 버렸다.
오늘 시간이 난 김에, 열어 줄 때까지 그 앞에서 문이라도 두드릴 생각으로 찾아온 것이다. 그런데 빌라 근처에 다다랐을 때 멀리서부터 은반의 실루엣이 확실한 형체로 이록의 시선에 잡혔다. 의심할 여지가 없이 은반임을 알아보았다는 게 우스울 정도였다.
“그러는 쌤은요?”
“내가 묻는 말에 대답을 먼저 한 기억이 없다, 넌. 항상 되물어.”
“제가 그랬나요? 저런. 친구가 여기 살거든요. 잠시 그 친구한테 볼일이 있어서 온 거예요. 이를테면 복수는 나의 것? 쌤은요?”
“아는 사람이 이 빌라에 살아.”
“세상에…… 이렇게 기막힌 우연이 다 있을까…….”
은반은 일부러 과도하게 감탄했다. 집이 아닌 다른 곳에서 만난 이록은 항상 낯설다. 낯선 만큼 가슴이 뛰는 속도가 현저하게 빨라진다. 그것을 감추기 위해선 음성을 높여야 했다. 은반은 점퍼 주머니에 천천히 손을 집어넣었다.
성적표가 손바닥에 닿자 이걸 꺼낼까 말까 그녀답지 않게 갈등에 휩싸였다. 하지만 ‘그럼, 가라.’라고 말하며 그녀의 곁을 스치는 이록 때문에, 그 갈등은 금세 종지부를 찍고 말았다.
섭섭하다 생각하며 멈추었던 발걸음을 이어 가려는데, 순간 그녀의 바로 옆 길바닥으로 쿵, 하며 누군가가 쓰러졌다. 길을 가던 아주머니가 갑자기 쓰러진 건지 일행이 다급히 외치며 다가왔다.
“어머! 언니!”
놀란 은반이 엉거주춤 쓰러진 사람에게서 두어 걸음 물러나려는 찰나, 스쳐 지나갔던 이록이 황급히 되돌아오고 있는 것이 보였다. 이록은 한쪽 무릎을 구부린 채 50대로 보이는 여자의 얼굴을 자세히 살폈다. 검지와 엄지를 이용하여 눈꺼풀을 열어 보니 이미 동공이 풀린 상태였다.
“아주머니! 아주머니! 제 말 들리세요?”
이록은 여자의 뺨을 치며 귀에 대고 외쳤다. 그러나 쓰러진 여자에게선 어떤 종류의 반응도 나타나지 않았다. 이록은 다급히 다가온 일행을 향해 고개를 들었다.
“평소 다니시는 병원이 없다면 119에 먼저 연락 좀 해 주시겠습니까?”
“예? 예…… 예.”
일행인 여자는 갑작스런 사태에 충격을 받았는지 손에 핸드폰을 들고 있음에도 어쩔 줄을 몰라 하고 있었다. 그에, 은반이 제 핸드폰으로 119에 전화를 걸고 통화를 시도했다.
“쌤. 도착하는 데 6분이 걸릴 거래요.”
통화를 끝낸 은반이 대답하자, 이록이 잠시 그녀를 쳐다보곤 고개를 끄덕였다. 목의 경동맥에 손을 대고 손목시계를 확인했다. 정신없이 빠르게 뛰는 맥박 때문에 이록이 미간을 찌푸렸다. 30초에 75회. 심각한 수준의 빈맥(頻脈)이었다.
“평소에 지병이 있으신 분입니까?”
이록이 다시금 고개를 들고 일행에게 묻자 여자가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이내 울먹이며 대답했다.
“지병 그, 그런 건 잘 모르겠고……. 평소에 가슴이 자주 두근거린다는 말은 했어요. 막…… 아프고 숨도 잘 못 쉬는 것 같다고……. 혀, 현기증도 가끔 난다고도 하고…….”
여자의 대답을 듣고 이록은 다시 시선을 내렸다. 증세를 취합한 결과 아무래도 부정맥(arrhythmia) 같은데 빈맥에 의식까지 잃은 상태여서 상태가 더 심각해질 수도 있었다.
“우리 언니, 괜찮을까요? 네? 우리 언니 좀…… 우리 언니…….”
일행인 여자가 울며불며 이록의 팔에 매달렸다. 누구든 의지할 곳을 찾고 있는지 집요하게 매달리자 쓰러진 여자의 경동맥에 대고 있던 이록의 손이 중심을 잃고 흔들렸다. 그러다 다시 그곳에 손가락을 갖다 대었을 때, 이록의 낯빛이 굳어졌다.
여자에게서 갑자기 맥이 전혀 잡히지 않았던 것이다. 이록은 재빨리 가방을 열어 휴대용 청진기를 꺼내었다. 그리고 그것을 가슴에 대고 귀를 기울여 보았지만 들려오는 심장의 소리 역시 일절 없었다.
심정지(arrest).
그것을 인식하자 이록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여자는 5분 안에 심장을 소생시키지 않으면 그대로 사망할 위기에 직면한 것이다. 시계를 보았다. 구급차가 도착하기까지 아직도 4분이 더 남았고 이대로 기다리고 있기엔 시간이 촉박했다.
“설은반, 너 팔과 다리 좀 주물러.”
“네? 제, 제가요?”
“어서! 급해. 숨을 쉬지 않고 있다고!”
이록이 큰 소리로 은반에게 명령하듯 주문했다. 그러자 그때까지도 방관자에 불과했던 은반이 이록의 얼굴을 확인하며 눈을 휘둥그레 떴다. 그의 얼굴에서 설명할 수 없는 긴박감을 읽은 것이다.
은반은 주춤주춤 쓰러진 여자에게로 다가가 앉았다. 점퍼의 소매를 걷은 후 다리를 주무르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이록이 하는 양을 곁눈으로 살피는 것을 잊지 않았다.
이록은 여자의 목까지 조이고 있는 셔츠의 단추를 풀고 팔에 힘을 주어 심폐소생술을 시작했다. 가슴 중앙 부분에 손바닥을 두고 팔을 직각으로 세워 눌렀다. 자신의 체중을 힘껏 실어 가며 눌렀다가 떼어 내기를 반복하는 이록의 얼굴은 그 어느 때보다 진지하고 심각해 보였다.
“헉헉헉!”
쉬지 않고 하느라 숨이 차 헉헉대며 땀까지 흘리는 이록의 모습, 앉아 오열하고 있는 일행, 호기심 어린 얼굴로 다가와서 지켜보거나 혹은 옆으로 흘깃거리며 지나가는 사람들, 그리고 다리를 열심히 주무르며 이록의 주문을 흡사 의무처럼 행하고 있는 자신까지. 그 모든 광경이 은반의 눈에 생소하면서도 매우 준엄한 의식처럼 보였다.
이록의 모든 행동은 은반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타인의 일에 저토록 땀을 쏟는 것이 가능한 건가. 모든 일에 감흥이 없고 건조하기만 했던 은반으로선 처음엔 쉽게 납득하기가 어려웠다. 그러나 물줄기처럼 쏟아지는 그의 땀을 보며 절박하다는 것이 무엇인지, 이 상황에서도 희망을 놓지 않는다는 것이 무엇인지, 어렴풋이 느낄 수가 있었다.
무엇보다 죽을 만큼 고통스럽게 숨차하면서도 절대 손의 움직임을 느리게 하지 않는 이록의 모습은, 은반에게 이유 없는 뜨거움을 안겨 주었다.
얼마의 시간이 흘렀는지 알 수 없었다. 이록은 목까지 차오르는 숨 막힘 때문에 고통스러웠다. 가슴에 귀를 대어 보니 희미하나마 심장이 움직이는 것 같아 속도를 늦출 수가 없었다. 어디선가 구급차 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았지만 그조차도 멍해진 의식 속에 확실하지가 않았다.
기운이 모두 다 빠져 버려 정신력으로 버티고 있는 상황에서, 이록은 가까이 다가온 구급차를 확인하곤 가쁜 호흡을 내뱉었다. 이록은 그제야 시계를 확인하며 심폐소생술이 얼마나 지속되었는지 계산했다.
구급대원 세 명이 차에서 뛰어내려 뒷문을 열고 침대를 빼내었다. 그중 한 명이 이록에게 다가왔다.
“동행분이십니까?”
“저는 아닙니다. 그리고 이분은 빈맥성 부정맥 환자 같습니다. 2분간 심폐소생술을 시도했는데 희미하게 심장이 뛰는 소리가 들립니다. 지금부터 최소한 3분 안에 응급실에 도착해야 할 겁니다.”
숨이 차 가슴이 들썩거리고 귀밑으로 이마로 연신 땀이 흐르는 와중에도, 이록은 자신의 견해를 전달했다. 고개를 끄덕인 구급대원이 잠시 침대 쪽을 보더니 다시 이록을 쳐다봤다.
“3분은 힘든데…… 혹시 의사십니까?”
“의대생입니다.”
“흠. 우선 같이 타 주시죠. 일행분도 함께 동행해 주십시오.”
대원의 말이 떨어지자 이록은 널브러져 있던 일행을 챙겨 구급차 쪽으로 향했다. 그때 그의 소매를 잡는 누군가가 있었다.
“쌤…….”
잊고 있었다. 자신의 옆에서 함께 노력했던 은반의 존재를. 이록은 고개를 틀어 녀석을 내려다보았다.
“어떻게 되는 거예요? 쌤은 왜 가시는 거예요?”
“심장이 다시 멈출지도 몰라서 구급차 안에 있는 기계로 가는 동안 응급처치를 해야 돼. 긴급 상황이라 차 안의 인력이 부족할 거야.”
이록은 그렇게 말한 후 팔을 뻗어 은반의 이마에 맺힌 땀을 걷어 내어 주었다. 그리고 은반이 지금까지 한 번도 들어 본 적이 없는 최고의 찬사를 전했다.
“넌 이만 집에 돌아가. 그리고…… 오늘 잘했다. 설은반. 최고였어, 넌.”
사려 깊은 눈동자, 그리고 그 안에 든 진심이 은반의 넋을 빼놓았다. 은반은 이록이 훌쩍 구급차에 뛰어올라 타는 것을 멍하니 바라만 보다가 이내 숨을 거칠게 토해 냈다. 쌀쌀한 바람에 이미 땀이 모두 식었지만 최고치로 솟구치는 감정은 뜨거움 그 자체였다.
가슴이 터질 것 같았다. 처음 들어 본 누군가의 칭찬에 은반은 저도 모르게 울컥하는 기분이 되어 그 후로도 오랫동안 그 자리를 떠날 수 없었다.

「Ban’s note
이다음에 내 아이에게 말해 줄 것이다. 노력이 적더라도, 그 노력이 마음에 차지 않아도, 언제나 최고라고 말해 주기. 그가 그랬던 것처럼. ☆☆」



3. 설렘은 끝이었다


구급차는 사고 지점을 떠난 지 4분여 만에 근처 병원의 응급실에 도착했다. 구급차 안에서 제세동기를 통해 다행히 심박 수를 되찾은 여자의 상태는, 심전도 검사를 통해 이록이 짐작한 빈맥성 부정맥으로 판정이 났다.
여자가 눈을 뜨는 것을 멀리서 지켜보던 이록은 미소를 머금고 응급실을 나왔다. 그의 심폐소생술이 없었다면 여자는 지금 사경을 헤매고 있었을 거라는 담당의의 한마디에 괜스레 기분이 상쾌해져 터져 나온 미소였다.
이록은 어둠이 내려앉은 인도를 뛰었다. 버스 정류장이 나타날 때까지 뛸 생각을 하며 주머니에 넣어 둔 핸드폰을 꺼내었다. 저장해 두었던 인숙의 번호를 누르고 귀에 가져간다. 아까 매우 놀랐을 은반에게 제대로 위로를 해 주지 못한 것이 생각난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전원이 꺼져 있다는 메시지에 의해 수포로 돌아갔다. 결국 통화를 포기한 이록은 때마침 버스 정류장에 도착했고, 줄지어 대기하고 있던 서너 대의 버스 중에서 하영의 빌라가 있는 동네로 가는 버스에 올라탔다.
다분히 들떴던 이록의 가슴은 굳건히 닫힌 빌라의 현관문 앞에서 차츰 어둡게 가라앉았다. 쾅쾅 현관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요란하게 울렸지만 안에선 어떤 기척도 없었다.
“문 부숴 버린다? 가뜩이나 돈도 없는데 엉뚱한 데다 돈 낭비하고 싶어?”
결국 소리를 치며 재차 두드리니 잠시 후 철컥, 하는 소리와 함께 스르르 문이 열렸다.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초췌한 얼굴을 한 하영이 인상을 찌푸렸다.
“시끄러워. 오지 말랬잖아. 대체 왜 온 거야.”
“문 열어 주면서 오지 말라네. 진작 열어 줬으면 좋았잖아. 누나 이제 빌라 이웃들한테 찍혔어.”
이록은 반쯤 열려 있던 문을 완전하게 열고 들어가 하영을 부축했다. 방으로 들어가 침대에 눕히곤 손바닥을 탁탁 털며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이제 찾아오지 말라고 그렇게 화를 내더니. 고작 주먹질 몇 번에 이렇게 무너질 거면서.
이록은 침대 옆 협탁에 둔 약 봉투를 체크한 후 문득 그 옆에 있는 피자 상자로 시선을 던졌다.
“이건 뭐야?”
“……나도 몰라. 누가 벨을 누르길래 보니까 피자 배달원이더라구. 나더러 그걸 먹으래. 배달하기로 한 집에 아무도 없다고.”
“나한텐 열어 주지도 않는 문을 고작 피자 배달원한테 열어 줬다고?”
대답 대신 하영은 돌아누웠다. 괜히 빈정이 상해 상자를 툭툭 건드리던 그는 상자 겉면에 붙어 있는 쿠폰을 발견하곤 눈썹을 밀어 올렸다. 노란색 바탕에 볼펜으로 휘갈긴 글이 있었다.

괜찮아, 짜샤. 내일은 내일의 태양이 새로 떠.☆☆

처음엔 어이없어 헛웃음이 났고 그 뒤로 이해할 수 없는 위로가 찾아왔다. 누가 썼는지 알 수는 없었지만 이록은 이 글귀를 현재의 자신에게 들려주고 싶었다. 쿠폰의 글귀 한 줄에 보일 듯 말 듯 한 미소를 지으며 소파에 앉은 그는 하영을 쳐다봤다.
“그렇게 기분 나빴어? 내가 과외를 하는 게?”
등을 보이고 누운 하영에게선 대답이 없었다. 웬만하면 그냥 넘어갔겠지만 이록은 오늘만큼은 하영의 대답을 들어야 했다. 그렇지 않아도 그녀와의 사이에 쌓인 벽이 더없이 높은데 거기에 오해까지 끼얹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똑같은 질문을 재차 하려는데 하영의 힘없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네가 나 때문에 힘든 게 싫어.”
“나는 누나가 아픈 게 싫어.”
“내가 아픈 건 네 죄가 아니지만, 네가 힘든 건 내 죄니까 그게 싫어.”
저런 자괴감을 갖는 것도 마음에 들지 않는다. 이록은 대화의 주제를 돌려 버렸다.
“2주 후에 병원에 가서 정밀검사 받을 거야. 준비해.”
“병원…….”
“아프지 마. 원한다면 귀찮게 하지 않을게.”
하영이 혹여 병원행을 또다시 거부할까 이록은 재빨리 선수를 쳤다. 낮게 깐 음성이 진심으로 그녀의 건강을 기원하고 있었다.
“살아 줘, 누나. 살아서…… 어딘가에 누나가 살고 있다고 생각하고 나도 열심히 살 테니까.”
꾸밈도, 과장도, 불안도, 모두 걷어 낸 음성이 차분하게 말했다.
“……제발 살아 줘.”
이록은 하영의 등에 시선을 고정시킨 채 다시금 마음을 다잡았다. 헛헛한 색채의 낯빛이 다른 그것으로 변할 때까지, 굳어 있던 어깨가 뻐근해질 때까지, 하영에게 둔 시선을 거두지 않았다.
식사를 끝내고 약까지 먹은 하영이 잠이 든 후에야 이록은 숨을 돌렸다. 어깨에 가방을 메고 방을 나가려는데 예의 그 쿠폰이 눈에 띄었다. 손가락 사이에 그것을 끼운 이록은 유심히 들여다보다가 한참 만에 바지 주머니 깊숙이 넣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