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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화


세운대학교 의과대학은 세운대학병원과 연계되어 병원의 뒤뜰에 거대한 건물 몇 채로 자리하고 있었다. 은반과 민영은 어슴푸레 저녁 빛이 푸르게 퍼진 캠퍼스에 들어서자마자 그 압도적인 웅장함에 넋을 잃었다.
단과대학일 뿐임에도 그 어느 대학교보다 규모가 크게 느껴지는 건, 이곳이 대한민국에서 최고 엘리트들만 모인 곳이라는 인식 때문이리라. 그러나 마주 보이는 세운대학병원 건물과 함께 커다란 원형지대를 이루며 그들만의 세상을 구성하고 있는 이곳에서, 은반은 또 다른 고민에 부딪혔다.
민영의 허황된 부탁을 들어주기 위해 오긴 했지만, 여긴 지나치게 넓다. 온통 흰 가운을 입고 돌아다니는 사람들의 무리 속에서 그를 찾기란, 서울에서 김 서방을 찾는 거나 다름없는 일이었다. 이놈의 표 서방을 어디서 찾는다?
“너 그 쌤 폰 번호 알지? 얼른 걸어 봐.”
민영이 기막힌 제안을 해 온 건 은반이 제2의학관 건물을 올려다볼 때였다. 그렇군. 전화를 하면 되는 거였군. 역시 김민영 이 기집애의 뇌구조는 남자에 한해서만 특출한 능력을 발휘하는 게 틀림없다. 그렇지만 은반은 그의 전화번호를…….
“모르는데?”
“야! 넌 과외 쌤 폰 번호도 몰라? 그게 과외를 받는 학생의 올바른 태도라고 할 수 있어?”
“그게 필요해? 시간에 맞춰 딱 나타나는 사람인데.”
“긴급 상황이란 게 있잖아. 긴급 상황.”
“아하. 이를테면 지금 같은?”
“그렇지.”
“그래도 모르는 걸 어쩌니. 돌아가자. 네 안구웰빙은 다음으로 미루는 거야.”
은반은 하는 수 없이 다음을 약속하며 시무룩해진 친구의 어깨를 끌어안았다. 혹여 그와 우연찮게 부딪히기 전에 이 친구를 데리고 얼른 이곳을 나가야 할 것 같다. 그리고 이쯤 되니 민영도 얼마쯤 포기하는 듯했다.
“기다려. 화장실 좀 다녀올게.”
민영이 풀이 죽은 음성으로 말하며 제2의학관으로 들어갔다. 은반은 어깨를 으쓱하며 제법 쌀쌀한 기온에 어깨를 움츠렸다. 건물 사이사이를 오고 가는 학생들을 눈으로 좇다가 무심결에 발길을 옮겼다.
인적이 드문 제2의학관 뒤뜰까지 갔다가 지금쯤 민영이 나왔겠다 싶어 빙그르르 몸을 돌렸다. 왔던 길을 되돌아가려는데 건물 뒤편의 벽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은반은 소리를 죽이고 그 기척을 확인하기 위해 눈을 가늘게 떠 초점을 모았다. 수명이 다 되어 금세 꺼질 것만 같은 희미한 가로등 불빛 아래 흰 가운을 입은 남자의 모습이 시야에 잡혀 왔다. 그는 벽에 이마를 묻고 있다가 잠시 후 하늘을 향해 고개를 들었다. 그 얼굴을 확인한 은반의 시선이 긴장을 담고 고정되었다.
‘쌤…….’
이록이 한 손에 핸드폰을 든 채로 소리 없이 울먹이고 있었다. 누구의 발길도 닿지 않을 그곳에서, 덩그러니 홀로 아이처럼 울고 있었다. 은반의 가슴이 덜컥, 잡음을 내었다. 늘 강해 보였던 그의 눈물이 은반의 건조한 가슴을 차츰 젖어 들게 만들었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압도적인 슬픔. 이어지는 연민이 생소한 모습을 하며 은반에게로 흘러들었다.
이끌리듯 그에게 다가가려 움직인 발걸음을 멈칫하며 망설였다. 그 틈에 은반은 발치로 한숨을 토해 냈다. 이럴 땐 어떻게 해야 하는지 배우지 못했다. 세련되게 위로하는 법을 알지 못했다.
손을 내밀어야 한다는 것도 어깨를 토닥여야 한다는 것도, 모두 머릿속에서만 맴돌 뿐이다. 그렇게 어쩔 줄 몰라 하며 주먹을 쥐었다 폈다를 반복하고 있는데, 문득 이록이 했던 말이 되살아나 그녀를 한 걸음 한 걸음 그에게로 떠밀었다.
‘어린아이는 어른이 그 눈물을 닦아 주지만, 어른은 그걸 홀로 견뎌야 한다는 거지.’
“……쌤.”
이록에게 다가간 은반은 나직이 그를 불렀다. 왜 그러고 계시냐는 물음이 목구멍까지 올라왔다가 도로 내려갔다. 고개를 내려 그녀를 응시하는 이록의 얼굴은, 가로등 불빛의 역광을 받고 있어 그 표정을 확인할 수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은반은 용기를 내어 손을 뻗었다. 발뒤꿈치를 들고 손가락으로 볼을 쓸면서 그가 흘린 눈물을 모두 닦아 내어 주었다. 그것은 무척 긴 시간이었다.

「Ban’s note
내가 우는 기분이었다. 마음이 동요하고 흐트러지고 있었다. 눈물을 닦아 줬던 건 내 흐트러진 마음을 바로잡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닦아 주지 말걸. 모른 척 지나갈걸. 그랬다면 그의 눈물을 다시 볼 수 있었을지도 모르는데.☆☆」



2. 최고라고 말해 주기


대학병원에서의 실습이 끝난 후 30분의 여가시간을 틈타 이록은 제2의학관으로 향했다. 민혁수 교수의 호출이 있기도 했지만 잠시라도 앉아 피곤함을 달래야 했다. 강의와 고시 준비, 빡빡한 실습 스케줄에다가 과외까지 끼얹힌 나날로 인해 수면 시간이 절대적으로 부족했고, 그것은 정신적인 고단함으로 이어졌다.
그중 그를 가장 견딜 수 없게 한 것은, 핸드폰 속 하영의 목소리가 시간이 흐를 때마다 점차 약해진다는 사실이었다.
치료비와 검사 비용을 감당할 수 있을 정도의 돈이 모일 때까지만 버텨 준다면 좋겠지만, 지금으로선 그럴 가능성이 희박하다는 것을 안다. 그럼에도 아직 단 한 번도 그녀의 죽음을 생각해 보지 않은 것은 결국 자위에 불과한 것이다.
“교수님.”
제2의학관의 1층. 복도의 끝에 있는 강의실에 민혁수 교수가 있었다. 세운대학병원의 흉부외과 과장이자 이록으로 하여금 흉부외과 쪽으로 방향을 잡게 만든 장본인이었다. 이록의 출신이 고아라는 것과 그 때문에 겪어야 했던 수많은 고충을 알고 있는 유일한 사람. 민혁수 교수는 이록이 학비 걱정 없이 공부할 수 있도록 다양한 형태의 장학단체를 알선해 주기도 했다.
“응. 그래. 실습은 다 끝났어?”
“네. 방금요. 절 부르셨다고 들었습니다.”
“하하. 뭐 거창한 용건이 있어서 부른 건 아니야. 그저 말동무가 필요했던 거지. 그래. 실습은 재미있고?”
창가에 서 있던 민혁수 교수가 한걸음 이록에게 다가섰다. 유난히 고된 오늘, 민 교수의 온기 넘치는 얼굴을 보니 그제야 이록을 묶고 있던 수많은 긴장의 끈이 한꺼번에 풀리는 듯했다.
“재미로 하는 일은 아닌 것 같습니다. 교수님들 따라다니면서 보고 들은 걸 수첩에 기록하다 보면 글자 암호를 지정해야 하는 게 아닐까, 싶기도 해요. 워낙 순식간에 지나가고 흘러가니 일일이 다 기록하는 게 힘들거든요.”
“많이 보고 듣게. 보고 들은 것을 기억하는 것만으로도 반은 인턴인 셈이니까.”
이록은 민 교수의 충고에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대화가 중단되고 그들 사이에 침묵이 흘렀다. 민 교수답지 않은 그 짧은 시간 동안의 머뭇거림에 이록은 역시 그가 할 말이 있는 거라고 짐작했다. 그리고 그 짐작은 얼마 지나지 않아 침묵을 깨뜨린 민 교수의 질문으로 사실이 되었다.
“과외 한다면서?”
“……어떻게 아셨습니까?”
“요주의 학생들에 대한 정보는 대부분 나한테 들어와.”
‘요주의 학생’이라는 말에 이록이 살짝 웃음을 터뜨렸다. 민 교수가 말하는 ‘요주의 학생’은 이록을 비롯해 상위권에 있는 동기들을 뜻함을 알기 때문이었다. 본과 4학년들의 일상이 대부분 거기서 거기기 때문에, 그 사이클에서 조금만 벗어나도 금세 티가 나는 법이다. 민 교수는 일주일에 두 번 같은 시각에 도서관을 비운 이록이 궁금해서 동기들에게 수소문했을 것이다.
“네. 시작하게 됐습니다.”
“장학금으로 용돈은 해결이 될 텐데 혹 다른 일이 생긴 건가?”
“개인적으로 일이 좀 있습니다. 그걸 해결하기 위해선 돈이 필요한데 제 처지에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과외뿐이어서요. 그런데 막상 시작하고 나니 나름대로 흥미도 있어요. 아이가 한글을 한 자씩 한 자씩 깨우칠 때 느끼는 부모의 심정을 요즘 절실히 이해하고 있습니다.”
“나한테 말해. 내가 필요하다면 도와줄 테니까.”
“아닙니다. 제 힘으로 해야 하는 일이고, 또 그렇게 할 겁니다.”
“고집은…….”
아주 잠시, 민 교수에게 도움을 청해 볼까, 하는 염치없는 생각이 들긴 했지만 곧 접었다. 대신에 다시금 창문 쪽으로 고개를 돌리는 민 교수의 뒷모습을 보면서 이록은 다시 한 번 여유라는 것을 누릴 수 있었다. 조용한 시간, 공간. 그리고 자신을 걱정해 주는 분과의 잔잔한 대화.
“저걸 좀 보게.”
문득 민 교수가 창밖으로 보이는 세운대학병원 건물의 간판을 가리켰다. 이록의 시선이 민 교수의 손가락을 따라서 움직였다.
“난 자네가 저곳에서 최고의 의사가 되길 바라고 있어. 쉽지 않을 일이야. 자네의 십 년, 이십 년 후의 모습이 고작 나일 테니, 이런 권유조차 미안할 지경이지. 그래도 포기하지 말고 의사가 되어라, 표이록. 바로 저 병원에서 말이야.”
잠시간 평화로웠던 마음이 민 교수의 말에 긴장의 궤도에 올라섰다. 민 교수는 그가 과외를 하는 것에 심경이 복잡해진 것이다. 사정 때문에 혹여 이 과정을 포기할까 지레 걱정되어 저러시는 거다.
이록은 그제야 민 교수가 자신을 왜 이곳으로 부른 건지 감을 잡을 수 있었다. 그럴 일은 없을 것이다. 민 교수가 염려하는 것처럼, 의사가 되는 일을 포기하는 일은 절대 없을 것이다. 그 약속을 마음으로 전하며 이록은 민 교수의 한없이 넓어 보이는 등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제2의학관을 나오는데 핸드폰이 울렸다. 유하영. 그 이름 석 자에 이록의 안면 근육이 불안함으로 미세하게 떨렸다. 좋지 않은 소식일까, 머릿속이 복잡하게 뒤엉겼다.
“응. 누나.”
- 바쁘지 않니?
“지금은 괜찮아. 왜? 무슨 일 있어?”
- 너 혹시 지금, 공부 말고 다른 일도 해?
이록은 발걸음을 멈추었다. 여느 때와는 다른 또렷한 하영의 어조. 그리고 무언가에 화가 난 듯한 음성이 그의 낯빛을 굳어지게 했다.
“무슨 말이야?”
- 내 화장대 위에서 고등학생들이나 보는 문제집을 발견했어. 우리 집에 오는 사람은 너 말고 아무도 없으니 이건 네 거야. 대학생인 네가 고등학교 문제집을 왜 가지고 있는데? 과외 하는 거 아냐?
의심이 현실로. 하영의 침대 옆 소파에 앉아 잠시 들여다본다는 게 그만 문제집을 두고 나왔나 보다. 이록은 멈추었던 발걸음을 이었다. 애써 목소리 톤을 높였다.
“누나 목소리가 지금, 굉장히 건강하게 들린다? 역시 화를 내게 만들어야 되는 건가?”
- 어서 대답해.
“길을 가다가 주웠다거나 다른 우연찮은 이유로 가지고 있다거나 할 수도 있잖아. 왜 과외로 연관 짓는 거지?”
- 너 지금 돈이 무척 궁하잖아. 나 때문에.
그녀의 말에 이렇다 할 반박의 여지가 없다는 것이 안타까웠다. 답답한 내심으로는 화를 내고 싶었지만 결국 이록은 좀 전보다 더 밝은 음성으로 대답해야 했다.
“알면 가만히 계십시오, 여사님. 제가 다 알아서 할 테니까요.”
- 의대생이 시간이 어디 있다고 과외야? 너 옛날처럼 나한테 한 대 얻어맞고 싶어?
“때릴 기운 있으면 때리기라도 해 봐. 내가 원하는 바니까.”
- 뭐?
“누나 말대로 시간이 없는 상황에서도 돈을 벌고 있는 불쌍한 어린 양한테 그렇게 갑질이 하고 싶어?”
- ……너 이제 여기에 오지 마. 비밀번호 바꿀 거야.
전화는 약속도 없이 왔던 것처럼 일방적으로 끊겼다. 다시 버튼을 눌렀지만 전원이 꺼졌다는 신호만 들릴 뿐이었다. 이록은 허탈감에 잠시 발치로 한숨을 쏟아 내었다. 결국 잠시라도 앉아서 쉬고 싶었던 바람을 접고 밖으로 나갔다.
인적이 비교적 드문 제2의학관의 뒤뜰을 찾은 이록은 핸드폰을 든 손을 아래로 늘어뜨린 채 미간을 일그러뜨렸다. 몸의 고단함과 마음의 피곤함이 동시에 찾아왔다.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지 아무것도 확신할 수 없는 상황에서, 하영의 차가움은 동분서주하고 있는 그의 노력을 거품처럼 허무하게 만들고 있었다.
처음으로 이록은 자신 때문에 울컥해졌다. 한 번쯤은 스스로를 위해 울어도 된다고, 뜨거워진 눈시울에 면죄부를 주면서 처음으로 고된 마음을 내려놓고 눈물을 흘렸다.
“쌤…….”
그러다 어느 순간, 귀에 익은 음성이 내려앉았다. 그 익숙한 느낌에 퍼뜩 정신을 챙긴 이록이 시선을 내렸다. 흐릿한 가로등 불빛이 은반의 얼굴을 정확하게 비추고 있었다. 느닷없는 만남에 잠시 아연해진 이록이 할 말을 찾지 못하고 있던 사이에, 은반이 발꿈치까지 들고 손을 뻗어 그의 젖은 얼굴을 닦아 내었다.
뺨에 얹힌 은반의 어설픈 체온에 습기가 전부 달아나 버렸다. 그 생경한 경험에 은반을 응시하던 이록의 눈동자가 아주 잠깐 흔들렸다. 하지만 이내 흔들림을 밀어내고 다시금 눈빛을 단단히 했다.
“뭐하는 거야, 너.”
이록이 은반의 손목을 거칠게 붙들었다. 그의 낮고 굵은 목소리가 은반을 다시 현실로 끌어들였다.
은반은 그제야 자신이 지금 무슨 해괴망측한 행동을 하고 있는지 깨달았다.
“어…… 그게…… 그러니까…….”
“네가 여기에 왜 있는 거지?”
이록이 그 이유를 꼭 들어야겠다는 듯 은반의 눈을 헤집으며 집요하게 응시하자 은반이 눈동자를 굴렸다. 잡힌 손목이 아팠지만 우선 이 난감한 상황에서 재빨리 벗어나야 할 것 같았다.
“그게요. 제 친구 오빠가 여기 다니는데요. 친구가 학교 구경시켜 준다고 해서 따라온 거예요. 근데 이 친구년…… 아, 아니 친구가 인간의 의지로는 도저히 극복하기 힘든 생리적 현상 때문에 잠시 자릴 비운 사이, 이 학교 교정의 아리따움에 반해서 돌아보고 있는 중이었어요.”
안 믿는 눈치다. 은반이 그를 만나러 왔다는 것을 어렴풋이 짐작하고 있는 듯했다. 은반은 시선을 내리깔았다.
“진짠데…….”
“그게 다야?”
“맞다니까요, 쌤. 학교에 딱 들어서는 순간 소독약 냄새가……. 아, 이곳이 말로만 듣던 의대구나. 피부에 확 와 닿더라구요. 역시 사람은 배워야 한다니까. 으음. 이거 봐. 이거 봐. 벌써 공기부터 신선하잖아요?”
일부러 허공을 향해 코를 킁킁거리다가 켁켁 기침을 해 버린 은반은 이번에는 이록의 가운에 시선을 던졌다.
“우와. 울 쌤 의사 가운 겁나 잘 어울리셔. 역시 모델이 좋으니 옷발이…… 굿좝! 저는요. 옷발 좋은 남자들은 국보로 지정해야 한다고 봅니다, 쌤.”
“네 친구 데려와 봐.”
“……넵!”
답지 않게 감탄사까지 연발하며 과도하게 횡설수설하고 있는데 이록이 그녀의 호들갑을 차갑게 끊었다. 은반은 비장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며 민영을 기다리던 곳까지 냅다 뛰었다. 이대로 도망갈까 생각했지만 그건 자존심상 하기 싫다.
그렇지만 막상 도착한 그곳에 민영이 없는 걸 보며 골치가 지끈거리기 시작하자 차라리 도망가는 게 나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은반은 콧김을 씩씩 뿜으며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너 지금 어디야?”
- 야! 너야말로 어디야! 화장실 다녀오니까 너 없어서 혹시 먼저 나갔나 싶어 버스 정류장까지 갔잖아. 너는 없고 집으로 가는 버스는 도착했고. 별수 있냐? 냅다 올라타 버렸지.
“나쁜 년. 내일 등교 하는 길에 필히 넘어질 거다, 넌.”
홧김에 종료 버튼을 누르고 홱 돌아서는데 바로 앞에 이록이 서 있는 걸 발견하며 헉, 소리를 내었다.
“치, 친구가 먼저 갔나 봐요. 평소에 저를 참 잘 따르는 친군데 오늘은 마음이 허한지 혼자 걷고 싶었다네요. 저희 나이가 그렇잖아요. 바람만 불어도 막 쓸쓸하고……. 음. 그럼 저도 이만.”
“따라와.”
구부정하게 머리를 숙여 인사를 하는 은반을 이록이 지나치며 말했다. 하얀 가운이 스윽 지나가는 것이 시야에 잡히자 은반은 고개를 들었다. 교문으로 나가는 이록의 뒷모습에 눈을 두었다.
들켜서 그런 거다. 남자의 눈물을 한참 어린 제자한테 들켜 버려 그게 부끄럽고 쪽팔리니 저러는 거다. 은반은 다 이해한다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며 그를 따랐다.
“다음부턴 미리 연락하고 와. 내가 학교에 없으면 어쩌려고 그래?”
교문 앞 도롯가에서 택시를 잡은 이록은 은반을 억지로 뒷좌석으로 밀어 넣었다. ‘어어어!’ 하며 그대로 택시에 탄 은반은 차 문을 닫기 전, 고개를 불쑥 안으로 들이민 이록을 마주하며 멈칫거렸다.
“버스 타고 가면 늦어서 혼날 거다. 이거 타고 집으로 가. 내일 보자.”
이록은 차 문을 닫은 후 택시의 번호를 메모해 두었다. 차체를 손으로 탁탁, 두드리자 택시가 출발했다. 저만치 앞에서 우회전을 하며 사라질 때까지 이록은 택시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택시가 보이지 않자, 그제야 심난한 이마를 손바닥으로 문질렀다.
은반에게 자신의 전부를 들킨 것 같은 굴욕감이 찾아왔다. 그 어설픈 위로에 얼마쯤 마음이 안정되었다는 거부하고 싶은 깨달음이 자존심을 뭉갰다. 서둘러 그 녀석을 돌려보낸 건 그래서였다. 자존심을 세워야 했고 더는 바닥을 치는 기분을 맛보고 싶지 않았다. 그것이 어떤 이유이든, 누구에 의해서든.

학교가 끝나고 집 앞에 도착한 은반은 핸드폰으로 시간을 확인했다. 20분 후면 과외가 시작될 시간이다. 그리고 이록은 아마도 정확하게 10분 후에 이곳에 도착할 것이다.
“후우…….”
은반은 초인종을 누를 생각도 하지 않고 대문 앞 돌계단에 털썩 주저앉았다. 턱을 괴고 시선을 저만치 떨어져 있는 건너편 집의 담벼락에 모았다. 괜스레 심통이 난 표정으로 담벼락을 뚫어져라 노려보았다.
은반은 오늘 하루 기분이 저조했던 것을 돌이켰다. 무슨 일이 있어도 철저하게 준수했던 쉬는 시간과 점심시간조차도 은반은 이록에 대한 생각에 시간을 내어 주었다. 이처럼 설은반의 역사에 있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난 건 전부 어젯밤에 있었던 그 사건 때문이었다.
위로의 손길을 매몰차게 거절하고 차갑게 말을 내뱉은 거야, 그 인간의 성질이 그러려니 넘어갈 수 있다. 그러나 흡사 귀찮은 파리 떼를 내쫓듯이 매우 떨떠름한 얼굴로 택시까지 태워서 보낸 건 아무리 생각해도 용납이 안 된다.
우는 걸 들켰다는, 자존심에 구멍이 난 상황에 대한 대처치곤 상당히 궁색하고 치사했다. 물론 은반 자신이 그에게 어떤 커다란 위로의 존재가 되어 함께 대책을 세워 줄 수 있는 상대는 아니다. 그러나 그런 대접을 받을 만큼 잘못한 것도 없다. 생각을 하면 할수록 어딘가 찝찝하고 화가 나서 은반은 깊숙이 호흡을 골랐다.
“나 참, 기가 막혀서. 내가 위로를 하고 싶어서 했나? 그냥 딱 보이니까. 눈물이 딱 보이니까. 사람이 짐승도 아닌데 어떻게 눈물을 흘리고 있는 걸 외면하냐고. 그렇게 냉혈한으로 보이나? 내가? 그래서 택시까지 태워서 급히 보내셨어?”
그렇게 내뱉고 나니 저 담벼락에 이록이 서 있는 것만 같은 착각이 들었다. 후다닥 일어난 은반은 발에 걸리는 돌멩이를 냅다 차 버렸다.
“공부 좀 한다 이거지. 좋은 대학에 최고의 과에다가 장학생이라 이거지. 그래. 수석 좀 한다 이거지 뭐. 사람 진심 우습게 알고 피하는 거, 그거 좋은 버릇 아니에요. 그렇게 잘났는데 왜 겨우 나 같은 애 과외나 하고 계실까요? 네에?”
“망상 병 있어?”
“꺄악!”
갑작스런 목소리의 난입에 은반은 놀라 소리를 치곤 두어 걸음 내뺐다. 이록이 언제 왔는지 그녀의 옆에 서 있었다.
“혼잣말하는 것도 습관이면 병이야. 병원에 가 봐.”
다 들었다는 얼굴. 은반은 목으로 마른침을 삼키곤 다급히 변명했다.
“저, 저는…… 아무 말 안 했는데요?”
“공부 좀 한다 이거지. 좋은 대학에 최고의 과에다가 장학생이라 이거지. 그래. 수석 좀 한다 이거지 뭐. 사람 진심 우습게 알고 피하는 거, 그거 좋은 버릇 아니에요. 그렇게 잘났는데 왜 겨우 나 같은 애 과외나 하고 계실까요? 네에?”
은반이 좀 전에 했던 말을 단 한 글자도 틀린 것 없이 이록이 또박또박 재생했다. 은반은 아연하여 헛웃음을 터뜨렸다.
“하! 세상에……. 설마 그 앞에 한 말도 들었어요?”
“나 참, 기가 막혀서. 내가 위로를 하고 싶어서 했나? 그냥 딱 보이니까. 눈물이 딱 보이니까. 사람이 짐승도 아닌데 어떻게 눈물을 흘리고 있는 걸 외면하냐고. 그렇게 냉혈한으로 보이나? 내가? 그래서 택시까지 태워서 급히 보내셨어?”
“하! 설마 쌤 지금 녹취하신 거예요? 그거 명백한 사생활 침해 아니에요?”
“내 기억력을 탓하거나 아니면 너의 그 지나치게 높은 목소리 톤을 탓해.”
이록은 은반의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보곤 핏, 입꼬리를 비스듬히 틀었다.
“그게 그렇게 기분이 나빴냐? 셀프화풀이까지 할 정도로?”
“네.”
부인하지도 않고 곧장 들려온 긍정의 대답에 이록이 한숨을 흘렸다. 아무래도 이 상황을 모면하려면 강력한 물타기를 해야 할 듯하다.
“다음 주에 2학년 첫 모의고사지? 성적을 조금이라도 올리면 내가 왜 그랬는지 말해 주지.”
“진짜 졸렬하고 치사하시다. 와아…… 쌤이 이래도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쓸데없는 곳에 기운 빼지 마. 들어가자.”
이록이 먼저 앞장서서 초인종을 누르려는데 등 뒤에서 착 가라앉은 듯한 은반의 말소리가 들려왔다.
“저요. 진심으로 쌤을 위로해 주고 싶었다고요. 그리고 향후 20년 동안은 쌤이 그렇게 우신 거 절대 아무한테도 말하지 않을 거예요. 혼자만의 비밀로 할 거라고요.”
“20년 후엔? 그땐 뉴스에 나와서 떠들썩하게 인터뷰라도 할 거냐?”
“하시는 거 봐서요.”
은반이 도도하게 턱을 치켜 올리며 대답했다. 정말 인터뷰라도 할 것처럼 오만방자하기 짝이 없는 표정이다. 그러나 이록은 은반의 그 표정을 응시하며 더는 말을 보태지 않았다. 어제 은반과의 사이에 있었던, 그 어색하고 난감했던 감정의 골은 이미 사라진 지 오래였다. 대신 그 자리에 은반에 대한 새로운 인식이 덧붙게 되었다. 어쩌면 이 녀석, 내면에 품고 있는 것이 더 많을지도 모르겠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