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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화


이상한 변화.
은반은 자꾸만 가슴에 손바닥을 갖다 대었다. 1교시가 끝난 후 쉬는 시간을 이용하여 복도의 끝 창가까지 와선, 또다시 가슴을 진정시켰다. 정확하게는 어젯밤부터 생긴 변화였다. 어젯밤, 빌라 앞에서 그 일을 겪은 후부터 가슴이 뛰는 속도가 현저하게 빨라졌다. 시도 때도 없이 두근거렸고 그 두근거림은 내처 얼굴까지 붉게 달아오르게 만들었다.
“나도 부정맥인가?”
쓸데없는 소리로 이 낯선 변화에 핑계를 대 보았지만 그건 사실이 아님을 잘 알고 있다. 사실은 심장이 멈춘 사람을 살리기 위해 땀을 흘리던 이록의 모습을 보았기 때문이라는 것도. 사는 게 재미가 없다는, 사춘기 여고생다운 미성숙한 생각으로 살아왔던 것이 부끄러울 정도로, 그녀의 눈에 비친 이록의 모습에는 그녀가 한 번도 보지 못했던 열정과 뜨거움이 있었다.
그리고…….
‘최고였어, 넌.’
설레기 시작했다. 어젯밤부터 무시로 떠오르는 그의 말과 얼굴 때문에, 부정맥이라 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심장 어딘가가 단단히 고장이 난 것 같다. 은반은 설핏 입술을 깨물며 창문에 이마를 쿵쿵 박았다.
이 변화가 좋은 건지 나쁜 건지 감을 못 잡겠다. 분명한 건 이록을 생각하는 일이 꽤 빈번하게 발생한다는 것이고, 그를 생각할 때마다 얼굴이 뜨거워지고 가슴이 아플 정도로 뛴다는 것이다.
“그래 가지고 이마가 깨지겠냐?”
하도 많이 박아서 이제 이마가 제법 아프다는 걸 깨달을 때쯤, 민영의 것이 분명한 목소리가 은반의 생각을 가로막았다.
“반아. 수학여행 공지 난 거 봤어?”
“응.”
“드디어 올 것이 왔다 이거야. 우리 오늘 옷 사러 가자.”
“오늘은 안 돼. 과외 하는 날…….”
무심결에 대답하다가 창문으로부터 이마를 떼어 낸 은반은 갑자기 생각났다는 듯 민영을 홱 돌아보았다.
“친구야. 남자들은 대충 어떤 스타일의 여자를 좋아하니?”
질문의 종류가 지금껏 은반의 입에서 나오지 않았던, 제법 신선한 것이어서 민영은 잠시 눈을 휘둥그레 떴다.
“뭐시라? 지금 너, 남자들의 이상형에 대해 물은 거야?”
“어.”
“분위기가 어째 심상치 않으면서도 묘한데? 이것은 뭐다?”
“이것은 아무것도 아니다.”
“아무것도 아니긴. 네가 언제 남자들한테 관심 가진 적 있었어? 기우 사귈 때도 마지못해 사귄 거지. 늘 심드렁했다는 불편한 진실의 역사를 엄연히 내가 아는데?”
“왜 이래? 나 남자들한테 관심 많아. 과외 쌤 하나 뽑는 데도 심혈을 기울이는 편이지.”
“흐음. 뭔가 수상쩍은데. 너. 모의고사 성적도 올랐다며? 소문 쫙 났더라. 이 나쁜 년. 혼자만 즐겁기냐?”
“그럼 어떡하니? 문제집의 글자나 숫자들이 내 머릿속에 들어오려고 아주 돗자리를 깔고 대기하는데. 캬아. 공부가 이렇게 재밌는 건 줄 애초에 알았더라면, 지금쯤 나는 여러 저명한 학자님들과 오목이나 두면서 담소를 나누고 있었을 텐데.”
“야. 너무 나가진 마. 닭살 돋아.”
“나 의사가 될 거야.”
민영이 정말로 닭살이 돋는다는 듯 팔을 슥슥 긁으며 교복 주머니에서 손거울을 꺼내는데, 은반이 무지막지한 발언을 했다.
“켁! 켁켁. 끄억끄억.”
심하게 사레가 들린 나머지 제대로 말을 못 하고 있는 민영을, 은반이 멀뚱하게 쳐다보았다. 그렇게 충격적인 발언이었나?
“꺽꺽. 켁켁. 뭐, 뭐가 돼?”
“의사. 누구한테라도 선언을 해 놔야 결심이 더 확고해질 것 같아서 너한테 말해 두는 거야.”
“어머나. 우리 은반이가 드디어 장래 희망이라는 걸 생각했구나아. 우쭈쭈쭈. 그래 의사가 되고 시퍼쪄여?”
서로가 서로를 놀리고 뭉개는 것에 일가견이 있는 사이라, 이번에도 역시 민영의 입에서 장난기 섞인 조롱이 가장 먼저 나왔다. 하지만 민영이 기억하기에 중학교 1학년 때부터 알아 왔던 은반은 단 한 번도 장래 희망에 대해 농담으로라도 꺼낸 일이 없다.
매년 새 학년이 될 때마다 제출하는 환경조사서 속 장래 희망 칸은 항상 공란이었다. 왜 그러냐고 물은 적이 있었는데, 되고 싶은 것이 없다는 대답이 돌아왔었다. 그런데 지금 은반의 얼굴에는 그때의 무미건조하고 무심한 기색이 전혀 없었다.
“비웃고 어이없어할 때가 좋을 때다. 3년 후에 보자고.”
설상가상으로 다부진 각오마저 밝힌다. 민영은 어딘가 많이 달라진 것 같은 은반에게 적응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으래? 좋아. 네가 의사가 되면 난 네가 일하는 그 병원의 원무과에서 근무할게.”
“됐고, 빨리 남자들이 어떤 여자를 좋아하는지나 말해.”
“흐음. 그건 아주 간단해. 세대별로 분류해 줄게. 잘 들어. 십 대 남자의 이상형은 예쁜 여자. 이십 대 남자의 이상형은 예쁜 여자. 삼십 대 남자의 이상형은 예쁜 여자. 사십 대, 오십 대를 비롯한 칠십 대 할아버지의 이상형은 예쁜 여자.”
이런. 은반은 제법 진지한 얼굴로 민영의 대답을 경청하다가 눈살을 찌푸렸다. 자신의 외모가 평범한 수준이라는 것에 이록이 화를 내며 차 버리는, 최악의 상황을 상상하면서.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놀라울 정도의 속도로 뛰어 집에 도착한 은반은, 현관에서 신발을 벗는 둥 마는 둥 하며 허겁지겁 거실로 올라섰다. 주방에서 방금 나온 인숙이 쌩하니 지나가는 은반을 질타했다.
“왜 이렇게 늦었어. 선생님 벌써 와 계셔.”
“버스가 많이 밀리더라고. 나 올라가.”
“녹즙 마시고 올라가!”
인숙의 외침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은반은 쏜살같이 계단을 올라 방문 앞에 섰다. 헉헉, 숨을 고르며 상반신을 잠시 구부렸다가 다시 폈다. 문을 열려다 멈칫, 은반은 머리칼을 정리하고 재킷 단을 바르게 폈다. 후우 하고 길게 숨을 뱉으며 긴장된 가슴을 다독거렸지만 왠지 문손잡이를 잡는 데 자꾸만 망설여졌다.
“미치겠네, 진짜.”
지금쯤 이록이 책상 앞에 앉아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그 사실을 인식하자 새삼 손바닥에 땀이 배었다. 의식할수록 땀은 더 나고 한걸음 더 나아가 마른침까지 연신 삼키게 되었다. 그렇게 손잡이만 만지작거리며 선뜻 들어가지 못하고 있는 자신의 행동을 한심하게 여기고 있는데 갑자기 안에서 문이 확 열렸다.
“헙!”
“안 들어오고 뭐해?”
“아…… 네.”
은반은 이록의 눈치를 슬슬 살피며 어깨를 잔뜩 움츠린 채로 들어갔다. 은반이 제 앞을 스윽 지나가자 이록은 상체를 약간 뒤로 젖혀 지나갈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해 주었다.
“어젯밤의 일에 대해 칭찬을 해 주려고 기다리고 있었는데 문손잡이만 달그락거리더라.”
“하하하. 손잡이가 막 흔들려서요. 그거 고정시키느라.”
은반의 말에 문쪽을 흘깃 본 이록은 고개를 갸웃하며 녀석의 옆에 앉았다. 평소와는 달리 얼마쯤 경직되어 있는 것 같은 은반을 빤히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너 어디 아프냐?”
“아뇨? 저 매우 건강한데요? 하루 세 잔 녹즙으로 다져진 몸인데?”
“됐다 그럼. 문제집 펴자.”
은반은 이록이 알아채지 못하도록 숨을 훅 내쉬었다. 방 안의 공기마저 평소와는 다르게 느껴졌다. 이따금 손등이나 팔에 스치는 옷깃의 느낌이 온통 그에게 집중하도록 만들었다. 은반은 머뭇거리다가 가방을 열어 성적표를 꺼내었다. 모른 척 그것을 스윽 이록의 앞으로 밀었다.
“……쌤. 이거 보세요.”
이록은 제 쪽으로 밀려온 성적표를 보며 입꼬리를 추켜올렸다. 녀석이 어지간히도 자랑하고 싶었나 보다. 손에 들고 꽤 꼼꼼하게 들여다보았다.
“아까 올라오다가 어머니께 얘기 들었어. 잘했구나.”
“그것뿐이에요?”
“뭐가?”
“설은반 학창 시절 역사에 성적이 오른 건 매우 이례적인 일이에요. 그걸 해낸 저나 쌤이나 자축해야 한다고요. 전생에 몇 개국은 구한 정도? 그런데 ‘잘했구나.’ 이걸로 땡?”
은반은 어깨를 으쓱하며 좀 더 강한 무언가를 바라는 듯한 표정으로 그를 쳐다봤다. 그 순간에 절로 부딪힌 시선 때문에, 의기양양하던 은반의 낯빛이 긴장의 그것으로 바뀌었다. 은반은 자신을 빤히 쳐다보는 이록의 시선에 갇혀 애써 밀어 두었던, 그래서 꺼내기를 주저했던 감정을 들여다보았다.
정말로…… 이 쌤을 좋아하게 된 건가.
“너. 최근에 했던 가장 미친 짓이 뭐야.”
이록이 은반을 빤히 보며 물었다. 오늘 이 녀석을 데리고 수업을 한다는 건 아무래도 불가능할 것 같았다. 들떠 있을 때엔 들뜬 대로, 감정을 최대한 누리는 것도 옳을 것이다.
“네? 미친 짓요? 으음. 성적 오른 거?”
‘쌤을 좋아하게 된 거.’
은반의 입과 가슴에서 서로 다른 대답이 흘러나왔다. 두 가지의 대답 모두를 한 것과 다름없다. 가슴에서 불쑥 튀어나온 대답은 그가 듣지 못했어도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그만큼 은반은 지금, 꽤 행복했다. 갑자기 이록이 은반의 어깨를 툭 치며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딱 그만큼 내가 미친 짓을 보여 줄게. 나가자.”
“어딜요?”
“자축해야 한다며. 오늘은 야외수업이다.”
“꺄오!”
안방에 있는 인숙 몰래 집을 나오는 데 성공한 두 사람은 집에서 어느 정도의 거리가 생길 때까지 뛰었다. 타닥타닥. 골목을 가르는 발소리가 잦아들 즈음, 갑자기 은반이 크게 소리 내어 웃기 시작했다. 허리까지 숙여 가며 웃는데 이록이 그 모습을 보고 핏,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너, 그렇게 크게 웃는 거 처음 보는 것 같은데?”
“쌤이랑 제 꼴이 우스워서요.”
“너만 웃기겠지. 내 꼴은 아무 이상 없어.”
“피이. 쌤. 쌤은 무슨 의사가 될 거예요?”
사실은 의사로 장래 희망을 정했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그의 반응은 민영이보다 더하면 더했지 결코 덜하지 않을 것임을 알기에 질문을 우회했다.
“흉부외과.”
“흉부? 아하 가슴 쪽요?”
“응.”
“엉큼하시다.”
흉부를 그런 쪽으로 상상하는 그 설은반다움에 이록은 헛웃음이 났다.
“가슴에 위치하는 심장, 폐, 기관, 식도, 대동맥 등 생명 유지에 기본이 되는 중요 장기의 질환을 진단하는 분야시다. 그런 과를 두고 어떻게 하면 너처럼 엉큼한 생각을 할 수가 있지?”
“누구나 다 그렇게 생각할 것 같은데요?”
“그래? 그럼 이런 건 어때? 흉부외과는 환자를 치료하는 곳이 아니야.”
“그럼 뭔데요?”
“환자를 살리는 데지.”
은반은 멀뚱멀뚱 그를 보면서 그 말을 곱씹었다. 흉부외과는 환자를 치료하는 곳이 아닌, 살리는 곳. 당장은 이해할 수 없는 말이었지만 어쩐지 뇌리에 오래 남을 것 같다. 문득 웃음이 났다. 그의 것들을 점차 알아가는 것이 즐겁다는, 다소 납득할 수 없는 이유로 자꾸만 웃음이 터진다.
이록은 은반의 잘못된 생각을 바로잡아 주었지만, 녀석은 그저 헤실헤실 웃고만 있을 뿐이다. 이록의 빤한 시선이 또다시 은반에게 멈추었다.
“그렇게 웃지 마라. 실없어 보여.”
“생각해 보니 이렇게 웃는 거 되게 오랜만인 것 같긴 해요. 으음. 아주 어렸을 때 엄마가 막 간지럼 태운 적이 있었는데 그때 이후로 처음?”
“설마. 천성이 밝은 성격인 것 같은데 그 사이에도 몇 번은 있었을 거야. 네가 기억을 못 해서 그렇지.”
“어? 아닌데. 정말로 그때 말곤 기억이 없어요.”
“그렇다고 해 두지. 아버진 뭐하셔? 집에서 한 번도 뵌 적이 없는 것 같다.”
“모르세요? 저 아버지 안 계세요. 얼굴도 사진으로 겨우 볼 수 있어요. 제가 태어나기 전에 돌아가셨거든요.”
은반과 나란히 걷고 있던 이록의 발걸음이 차츰 느려졌다. 그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할 수 있는 걸 보니 역시 밝은 것이 은반의 본래 성격인 거다.
“쌤은요? 쌤 부모님은 어떤 분들이세요? 보나 마나 두 분 모두 되게 엄격하고 진중하실 것 같아요. 일류 대 나오시고. 제 말 맞죠?”
“틀렸어. 난 고아야.”
그래서 이록도 은반이 그랬던 것처럼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했다. 이번에는 은반이 아예 걸음을 멈추었다. 앞서 가던 이록이 뒤를 돌아본다.
“왜. 실망했니?”
이록은 뒤로 걸으며 은반을 마주 보았다. 녀석의 얼굴에 오른 연민의 기색을 금세 눈치채었다. 저런 표정도 지을 줄 아는 녀석이었나. 내뱉은 질문과는 전혀 방향이 다른 생각을 하고 있는데 은반이 강하게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아뇨. 더 존경스러워요.”
“그래? 황송하군.”
“표이록! 쌔앰! 진짜 존경스러워요!”
이록이 진심으로 황송해하고 있는데 은반이 갑자기 소리를 쳤다. 그 바람에 주변에서 개 짓는 소리가 시끄럽게 들려왔고 이록은 간간이 지나가는 행인들이 볼까 멈칫하며 고개를 숙였다.
“쌔앰! 저 떡볶이 사 주세요!”
은반은 마땅히 받아야 할 상이라도 되는 듯 태연자약하게 말하곤 냅다 큰 도롯가를 향해 내달리기 시작했다.
녀석과 함께 있으면 주변에 몰려 있는 고된 일과 생각들이 모두 잊힌다. 그래서 웃게 된다. 입술 끝을 올리는 것에 머물렀던 희미한 미소가, 그 선이 좀 더 선명한 웃음으로 바뀌었다. 녀석의 밝은 기운이 그에게 전해지고, 내처 병에 먹혀 버린 하영에게까지 전해질 수 있도록 이록은 은반에게 꽂혀 있는 시선을 거두지 않은 채 웃고 있었다.

***

시간은 정신없이 흘러갔다. 은반은 어제 수학여행을 떠났고 이록 역시 약속대로 하영을 병원에 입원시켰다.
입원하기 며칠 전부터 하영은 부쩍 전신이 붓기 시작했고 가끔 치매 같은 섬망증세가 보이기도 했다. 그것은 일종의 전조라는 것을, 이록은 불안하게 느끼고 있었다. 그간 억지로 모른 척하고 생각의 저편으로 밀쳐 두었던, ‘마지막’이라는 것을 아프게 예감하기 시작한 것이다.
어제 의사는 하영의 상태를 단지 눈으로만 스윽 훑었을 뿐인데도 최악의 상황임을 예상했던 것 같았다. 쓸데없이 돈을 들여 조직검사를 할 필요가 없으니 호스피스 병동으로 옮기는 것이 좋겠다고 했지만, 이록은 집요하게 의사에게 매달렸다.
그런 이록의 태도에 의사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면서 결국엔 수락을 했다. 물론 조직검사는 해 보겠지만 희귀한 심장암의 특성상 아무 손도 써 보지 못할 가능성이 더 많다는 단서를 단 후였다.
과 차원의 공동연구 과제 때문에 이리저리 뛰어다니면서도 이록은 단 한 순간도 하영을 놓지 못하고 있었다. 은반이 지어 줬던 환한 웃음을 따라서 몇 번이나 하영에게 마음으로 용기를 보내었다.
종종 울컥하는 심정을 겪으며 교정 곳곳에 피어 있는 양귀비며 철쭉나무에 허한 시선을 두었다. 어린 시절 하영과의 기억들을 하나둘 떠올렸다. 기억을 좇아가는 눈길은 허했다가 일그러졌다가 다시 허해지는 것을 반복했다.
하지만 그 어떤 것도 위로가 되지 못했다. 어제 수학여행을 떠난 은반의 말간 웃음이 떠오른 건 그래서였다고, 깨어져 조각이 난 것 같은 가슴을 다독거려 줄 무언가가 필요했다고 허울 좋은 구실, 혹은 핑계를 갖다 대었다.
짧은 상념은 하영으로부터 걸려 온 전화에 의해 금세 깨어졌다. 불안한 예감. 액정에 흐르는 그녀의 이름을 본 순간, 이록은 가슴 한가운데를 찌르는 날카로운 가시를 느꼈다.
- ……이록아.
처음과 끝이 흐린 말투였지만 하영은 분명하게 그의 이름을 부르고 있었다. 이록은 메이기 시작하는 목으로 침을 겨우 넘기고 일부러 밝은 음성을 끌어내었다.
“하! 전화할 힘은 있는 거야?”
- ……응.
“그래. 우리 누님께서 무슨 일로 전화하셨지?”
- ……고마웠어. 내 옆에 있어 줘서.
예감은 선명하게, 그리고 뾰족한 칼끝처럼 아프게 그의 뇌리를 찔러 왔다. 더는 말을 내뱉지 못할 정도로 견디기가 버거워지기 시작했다.

하영의 불안한 전화를 받고 병원에 가기 전, 이록은 장일그룹 본사에 먼저 들렀다. 거창한 계획이 선 건 아니었지만 우선 되는대로 주변의 도움이란 도움은 모두 받아 보기로 했던 것이다. 시작은 장일그룹 회장 김석민이 될 것이고, 민혁수 교수에게도 모두 털어놓고 손을 빌리기로 마음먹었다.
로비에서부터 경비에 의해 출입을 저지당했지만 이록은 물러서지 않았다. 경비와 몇 차례의 실랑이를 벌인 이록은 마침 입구에 들어서는 김석민 회장을 발견하곤 모든 움직임을 멈추었다. 그를 저지했던 경비가 난감한 얼굴로 두 사람을 번갈아 쳐다보는 가운데, 이록은 성큼성큼 걸어 김석민 회장의 앞을 가로막았다.
“저는 유하영 씨 동생 되는 사람입니다.”
난데없는 누군가의 등장에 잠시 인상을 찡그린 김석민은 유하영이라는 이름을 듣고는 이록의 아래위를 훑었다. 그의 옆에 있던 경호원과 비서로 보이는 사람들이 이록에게 달려들려 하는 것을 손을 들어 막는다.
“회장실로 안내하지.”
김석민이 비서를 향해 그렇게 말했고, 이록은 비서의 안내를 받고 엘리베이터 쪽으로 움직였다.
회장실로 들어와 김석민과 단둘이 된 후에야, 이록은 그의 인상을 세밀하게 관찰할 수 있었다. 텔레비전에서 보았던 느긋함과 여유로움과는 달리 지금은 고집이나 약간의 깐깐함이 엿보였다.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그래. 동생이라……. 날 찾아온 용건이 뭐지?”
“회장님께서도 아시다시피 누나가 지금 심장암이라는 병에 걸려 있습니다. 희귀한 병이라 발병의 원인도 치료 방법도 현재로선 전무하다고 합니다.”
망설임 없이 나간 대답에 책상으로 걸어가던 김석민이 잠시 이록을 돌아보았다.
“그래서?”
“부탁드립니다. 일본이든 미국이든, 어디든 좋으니 누나가 제대로 치료를 받을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
“내가 왜?”
김석민은 회전의자에 몸을 묻고는 느긋하게 등을 기대었다. 이록을 쳐다보는 눈빛에 냉혹한 거절의 의미를 싣고 있었고 이록은 그것을 충분히 느꼈다.
“회장님의 뒤에서 없는 사람처럼 몇 년을 산 여잡니다. 사람이 살아가는 데에 돈이 전부가 아닌 것에 동의하신다면, 누나를 위해 조금의 배려를 해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하! 그런 말을 하려거든 당장 내 눈앞에서 사라지게. 난 더 이상 그 아일 볼 생각이 없으니.”
김석민은 완강했다. 그 고집스런 표정에서 이록은 더는 희망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들이나 하나 낳아 줄까 해서 들였더니 애도 못 낳는 바보 천치였어. 게다가 병까지 생겨 내가 골치를 좀 썩었지. 애초부터 뿌리가 시원찮은 고아 따위, 거두는 게 아니었는데. 내 인생 최대의 실수야. 알아?”
덧붙여지는, 가슴 아픈 말들이 비수가 되어 꽂혀 들었다.
“주는 게 있으면 오는 것도 있어야 하는 법이야. 경제에도 그런 게 있는데 하물며 사람 관계야 더하겠지. 그 아이 밑으로 들어간 돈이 얼만데. 난 자선사업가가 아니야.”
“내일이 없는 것처럼 살지 마십시오, 회장님. 당신이 지금 하고 있는 말 그대로, 언젠가 돌려받을지도 모릅니다.”
“그래? 그럼 그때 가서 뉘우치든가 하지 뭐.”
세상의 벽.
높고 험준한 그 벽 앞에서, 이록은 태어나 처음으로 쓰디쓴 좌절을 맛보아야 했다. 가슴 언저리로 매서운 통증이 지나갔다. 누구에게도 드러낼 수 없는, 그래서 그 고통이 몇 배로 큰 통증이 그의 심신을 차츰 갉아먹고 있었다.

장일그룹 본사를 떠나 병원으로 향하는 버스 안에서, 이록은 내내 어둠이 내려앉기 시작하는 창밖에만 눈을 두었다. 갑자기 몸에서 오한이 났다. 이가 저들끼리 부딪힐 정도로, 어깨가 뻐근해질 정도로 강한 오한이 그를 엄습해 왔다.
5월의 온도치곤 터무니없이 낮아서 그런 거라 생각하며 점퍼 주머니에 손을 집어넣었다. 문득 손에 잡히는 것이 있었다. 이록은 그것을 꺼내었다. 그날, 하영의 빌라에서 발견한 이후로 내내 갖고 있던 쿠폰이었다.

괜찮아, 짜샤. 내일은 내일의 태양이 새로 떠.☆☆

새카맣게 타 버린 가슴 위로 그 문구가 내려앉았다. 그것은 위로처럼 용기처럼, 이록의 시야를 장악했다. 적어도 병원으로부터 걸려 온 전화를 받기 전까지, 이록은 그 휘갈겨진 투로 써진 글을 보며 안정을 찾을 수가 있었다.
그러나 병원의 번호가 흘러가는 핸드폰의 액정화면은 순간적으로 긴장의 끈을 팽팽하게 잡아당겼다.
- 유하영 환자 보호자분 되시죠?
“……그렇습니다.”
- 유하영 씨가 조금 전 사망하셨습니다.
이록의 시선이 허공 그 어딘가에 머문 채로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지금 빨리 병원으로 와 달라는 간호사의 마지막 말이 귓전에 울렸다가 사라졌다. 하얗기도 하고 검기도 한 시야에 보이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그저 극심한 오한만을 느끼고 있을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