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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화


다솜은 잔뜩 뿔이 나 있었다.
한 번도 아니고, 이틀 연속으로 이어진 소이의 무관심한 행동은 어린 소녀의 마음에 대못을 박는 잘못된 행동…… 아니, 조금 비약해서 범죄행위라고까지 주장했다.
‘내가 얼마나 노력하고 있는데. 흥!’
다솜은 멀티퍼포스 캡슐 안에 누워 있는 소이를 흘겨보았다.
아무것도 모른 채 숙면이라도 취하는 것처럼 누워 있는 모습이 무척이나 얄밉다.
주위를 어슬렁거리면서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는 존재들이 많다는 것을 알게 된다면 이렇게 태연할 수 있을까?
그리고 수시로 그들에게 경고를 하며 근처로 접근하지 못하게 하는 자신의 노력을.
‘정말 얄미워. 어제도 그렇고, 오늘도…….’
겨우 이틀 가지고 왜 이렇게 유별나게 구냐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다솜에게는 쉽게 말할 수 없을 만큼 심각한 문제였다.
‘혼자인 건 싫어.’
오랜 시간을 기다려 왔다.
처음에는 강렬한 원한을 불태웠지만, 시간의 흐름에 따라서 그러한 원색적인 감정들까지도 조금씩 무뎌져 버렸다.
왜 미련을 떨쳐 내지 못하고 이승에 남게 되었는가.
어째서 이렇게 존재하고 있어야 하는가.
아무런 색상조차 가지질 못한 무채색의 세상은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힘이 들었다.
그 누구도 다솜을 볼 수 없고, 이야기를 들어주지도 못한다.
그저 멍하니 허공을 부유하며 시간을 보낼 뿐이다.
지옥과 같은 나날들.
그것을 깨트려 준 것이 바로 소이와의 만남이었다.
‘함께하고 싶어. 항상.’
다솜은 간절했다.
혼자서는 아무런 존재의 이유조차 찾을 수 없을까 봐.
그래서 더욱 소이와 함께하는 시간에 집착했다.
누군가가 본인을 기억해 주고 신경을 써주고 있다는 사실을.
그만한 존재가치가 자신에게 있다는 걸 확인 받고 싶어 하는 두려움의 발현이었다.
[……소이가 잘못한 거야.]
다솜은 경직된 표정으로 소이에게 다가갔다.
멀티퍼포스 캡슐의 덮개는 혹시나 모를 사고 발생 시 주위 사람들이 알아차리기 쉽게 투명한 재질이었다.
물론, 그것과 상관없이 귀신인 다솜을 막아설 순 없지만.
스윽!
다솜의 투명한 몸이 덮개를 통과했다.
그러고는 천천히 손을 뻗었다.
소이의 얼굴을 향해 살짝 각도를 튼 손바닥이 부드럽게 움직이다가 목표점에 달하자 날카롭게 쏘아져 나갔다.
짝!
[…….]
만약 다솜의 몸이 물리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면 위와 같은 소리가 울렸을 것이다.
하지만 공허하게도 다솜의 손바닥은 소이의 볼을 통과해서 얼굴을 한 번 휘젓고 옆으로 빠져나왔다.
[우씨!]
휙, 휘익!
몇 번 더 힘차게 손바닥을 휘두르다가 결국 포기를 한다.
정신승리는 가능하겠지만, 이건 너무 비효율적이다.
지금은 감정을 잠시 뒤로 밀어놓고 실리를 챙길 때다.
[언제까지 버틸 수 있는지 두고 봐!]
슬그머니 소이의 몸 위로 올라서는 다솜의 몸짓이 너무도 익숙했다.
오른발을 살짝 들어 올린다.
그리고 박자에 맞춰서 쿵!
“…….”
소이는 아무런 말이 없다.
하지만 왼쪽 눈썹이 꿈틀거린 것 같았는데, 단순한 착각일까?
아무튼 이번에는 왼발이다.
경쾌하게 소이의 복부를 내리찍는다.
물론, 물리력은 없어서 그대로 통과하는 발 구름 동작이지만, 다솜의 음기가 침투하고 있으니 효과가 아주 없다고는 할 수 없었다.
그렇게 본격적으로 스타트를 끊은 다솜의 은밀한 취미 생활.
소이의 몸 위에서 신명나는 널뛰기가 시작되었다.

그리고 바로 그 시각…….
소이는 황당한 일을 겪고 있었다.
띠링!

[사용자의 접속 상태가 불안정합니다.]
[정확한 정보가 입력되지 않고 있습니다.]
[현재 상태가 계속된다면 자동 로그아웃이 진행될 수 있습니다.]


‘뭐야, 이건?’
비싼 돈 들여서 최신형 멀티퍼포스 캡슐을 구매해 놨더니, 어처구니가 없는 상황이다.
괜스레 설정 쪽에 문제가 있는지 확인을 해보고 고객 문의 메뉴를 뒤적거리면서 시간을 보냈다.
하지만 눈앞에 생성된, 반투명한 경고 메시지는 사라지질 않았다.
아니, 오히려 좀 더 심각한 상황으로 발전했다.
띠링!

[10초 뒤 자동 로그아웃이 진행됩니다.]
[안전한 장소로 이동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망할.”
오류인가, 아니면 기계의 문제?
당황해서 안절부절못하고 있는데, 창에 표시된 시간은 점점 줄어든다.
3초, 2초, 1초, 그리고 마지막으로…….
[여긴 어디야?]
“……?”
띠링!

[사용자의 접속 상태가 정상화되었습니다.]
[차후 동일한 문제가 발생 시 고객 센터로 문의해 주시기 바랍니다.]


절대로 들려서는 안 될 익숙한 목소리가 머릿속에서 들려왔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소리는 아니었다.
염(念)이라고 해야 할까?
본인의 생각을 전해 오는 것이니까.
‘아니지.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라…….’
라이프는 당황해서 열심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곳은 현실이 아니다.
소이가 아닌 라이프로서의 시간…….
[우왓! 이게 가상현실 게임이야? 대단해. 여긴 숲이잖아.]
“……!”
다시 한 번 머릿속을 때리는 익숙한 방식의 대화법에 라이프는 얼이 빠졌다.
조용히 공포 영화의 한 장면처럼 뒤를 돌아보았다.
영화 속 주인공들은 물론이고, 관객들이 모두 심장을 졸이면서 긴장을 하는 그 순간…… 과연 귀신이 튀어나올 것인가.
‘이럴 때는 식상하긴 하지만 아무것도 없는 게 좋은데.’
황당한 상황을 연달아서 겪으니, 순간 머릿속이 이상해진 모양이다.
쓸데없는 생각들을 떠올리고 있는 라이프에게 확인 사살이라도 하려는 것인지, 명확한 대상을 설정한 인사말이 들려왔다.
[얀마! 혼자 재미있는 거 하고 놀면 좋아?]
“…….”
정말 있었다, 등 뒤에 귀신이.
……망할.

현실을 인정하는 것은 생각보다 어렵지 않았다.
황당한 상황이지만…… 애초에 귀신을 본다는 능력 자체가 판타지이고 난센스(Nonsense)인데 뭘 더 고민할까.
그저 이런 일이 가능한 이유가 궁금할 뿐이다.
[우와! 이거 진짜 같아. 대박, 대박!]
“…….”
그런 라이프의 고민은 안중에도 없는지, 다솜은 잔뜩 신이 나서 주위를 휘젓고 다녔다.
‘얄미운 녀석.’
물론 라이프는 모를 것이다.
소드 앤 매직의 세계로 들어오기 전 멀티퍼포스 캡슐에 누워 있는 자신을 보고 다솜이 똑같은 생각에 빠져 있었다는 사실을.
“가만히 좀 있어봐. 상황 좀 파악하게.”
[좋은 상황 아니야? 이제 우리 같이 게임하면 되겠네.]
“……너, 혹시 내 몸에 이상한 행동을 한 건 아니지?”
움찔!
[어, 어머. 숙녀한테 못하는 소리가 없네. 저질!]
“…….”
수상하다.
이건 절대로 자연스러운 반응이 아니었다.
게다가 대답하기 전, 미묘하게 시간을 끄는 모습이 라이프에게 확신을 주었다.
“뭐라고 하려는 게 아니라 중요한 문제일 수도 있으니까 묻는 거야. 말해봐. 현실에서 무슨 행동을 해서 이런 일이 벌어진 거야?”
[…….]
사뭇 진지하게 변한 라이프의 음성에 다솜은 긍정도, 부정도 하지 못한 채 쩔쩔맸다.
“괜찮으니까, 말해봐.”
다그치지 않았다.
그저 차분한 목소리로 타이르듯 재차 말했을 뿐이다.
거기에서 그치지 않고 눈빛으로 보내는 무언의 압박.
다솜은 결국 백기를 내걸고 현실에서 벌어진 일들을 털어놓았다.
“……그렇게 했더니, 순간 이곳으로 빨려들었다고?”
[응. 그게 정확한 표현일지는 모르겠지만.]
라이프는 고개를 갸웃했다.
몸을 겹치는 정도로 이런 일이 벌어졌다는 게 쉽사리 믿어지지 않은 것이다.
[정말이야. 나도 어떻게 된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순간 정신을 잃었다가 다시 차리니까 여기였어.]
“흐음…….”
라이프는 열심히 머리를 굴려가며 고민을 해봤다.
그렇게 약 10여 분. 결국 두 손, 두 발 다 들었다.
‘내가 가상현실 쪽의 권위자도 아니고, 어떻게 알아? 그냥 이용자일 뿐인데.’
그렇게 원인을 찾는 걸 포기한 라이프는 대신 현실적인 부분에서 고민하기로 했다.
“일단 로그아웃하자. 다른 것보다 우연한 일인지, 아니면 다시 접속해도 반복될 일인지 확인부터 해야 하니까.”
[아, 알았어.]
다솜도 사뭇 진지해진 표정이었다.
워낙 갑작스럽게 일어난 일이어서 처음에는 얼떨떨하고 좋기만 했지만, 자칫하다간 심각한 문제가 일어날 수도 있는 일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이다.
“로그아웃.”
띠링!

[로그아웃을 진행합니다.]
[안전한 데이터 보관을 위해 10초의 시간이 소요됩니다.]


그렇게 10초의 시간이 지나고 라이프는 빛에 휩싸여서 소드 앤 매직의 세계를 벗어났다.
그리고 돌아온 현실…….
‘다행히 로그아웃에 문제는 없네.’
혹시나 하는 생각을 했었다.
다솜으로 인해 오류가 발생해서 연결이 끊겼거나 하는 불행한 사태가 벌어지진 않을지.
로그아웃 과정에서는 심장이 다 떨렸지만, 다솜이 걱정할까 봐 최대한 의연한 모습을 보이려고 노력했을 정도다.
슈웅!
개폐 스위치를 누르자 김이 빠지는 소리와 함께 멀티퍼포스 캡슐의 덮개가 열렸다.
그와 동시에 시야가 밝아졌다.
아주 잘 보인다. 눈앞에 보이는 다솜의 입술까지도…….
응? 입술?
“흐억!”
화들짝 놀라 멀티퍼포스에서 나와 벽 쪽으로 붙은 소이는 두근거리는 심장을 애써 누르며 다솜을 살폈다.
소이가 있던 장소 옆에 가지런히 누워 있는 다솜은 잠을 자는 것 같았다.
귀신이 잠이라니.
말도 안 된다고 속으로 소리치는 소이였지만, 현실은 변하지 않았다.
여전히 눈을 감은 상태였고, 어깨를 살짝 덮는 검은 머리칼도 미동이 없었다.
‘설마 죽은 건 아니겠지……는 무슨. 생각해 보니 이미 죽은 상태잖아!’
혹시나 하는 걱정스러운 마음에 머릿속으로 이런저런 생각들을 떠올릴 때쯤 다솜이 눈을 깜빡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금 나도 접속했던 거 맞지? 꿈 아니지?]
“귀신은 잠을 안 잔다면서 무슨 꿈이냐? 거참, 황당한 일이네.”
머쓱함에 다솜에게 핀잔을 주면서도 몇 번이나 고개를 갸웃거리는 소이였다.
말세가 오려나, 귀신의 가상현실 게임 접속이라니.
“일단 난 밥 좀 먹자. 얼떨떨해서 원. 마음이 진정되면 이것저것 확인 좀 해보고.”
[그래!]
가상현실 게임에 접속했다는 것이 마냥 좋은지 싱글벙글한 다솜이었다.
소이는 거실과의 경계가 애매한 부엌으로 가서 즉석식품을 조리했다.
오늘의 메뉴는 카레.
전자레인지에 돌려서 미리 해놓은 밥에 뿌려 먹으니, 한 끼 식사는 뚝딱이다.
‘김치가 있었으면 더 좋았을 텐데.’
배달 온 식료품을 확인했는데, 깜빡하고 김치를 안 샀다.
양치를 하고 가볍게 부엌을 정리한 소이는 다솜과 함께 소드 앤 매직에 접속했다.
그 이후로 행해진 여러 가지 실험들.
“……대충 이 정도인가.”
[거기 너무 재미있어. 다시 접속하자. 응?]
징징거리는 다솜을 옆으로 밀어놓고 소이는 알아낸 사실들을 차분하게 정리했다.
그러면서도 이게 뭐하는 짓인지 헛웃음이 나왔지만, 꿈이 아니었다.
정말로 귀신이 가상현실 게임에 접속할 수 있었다.
‘물론 제한 조건이 있지만.’
첫째로 다솜이 소드 앤 매직에 접속하기 위해서는 소이가 필요했다. 다솜이 홀로 멀티퍼포스 캡슐에 있을 때는 기계가 아무것도 인식하지 못했고, 당연히 접속이 불가능했다.
하지만 소이가 눕고 다솜이 그 위에서 기운을 겹치면 어떤 원리에서인지는 파악할 수 없지만, 함께 접속을 할 수 있었다.
‘로그아웃도 함께해야 하고, 거리에 제한 조건도 있었지.’
현실에서는 이 집에 매인 지박령인데, 소드 앤 매직에서는 소이에게 묶인 신세다.
정확하게 규정할 수는 없지만, 지금까지 확인된 것만 봐서는 빙의(憑依) 현상이 가장 신빙성 있었다.
소이의 몸에 다솜의 영혼이 함께하는 것 같은 느낌으로…….
아무튼 가장 중요한 부분이 확인되자 소이는 소이대로, 다솜은 다솜대로 무척 흥분했다.
소이는 함께 플레이하며 생길 수 있는 부가적인 이익에 관심이 있고, 다솜은 뭔가를 함께할 수 있다는 것 자체에 즐거웠던 것이다.
사실 소이의 그런 기대감은 무척이나 애매하고 확신할 수 없는 종류의 것이었는데, 잠깐 동안의 실험을 통해 얻어낸 성과가 있어서 자신감을 가질 수 있었다.

[라이프] ― [Lv. 3]

클래스 ― [초보자]
명성 ― [0] / 성향 [0]
HP ― [160] / MP ― [100] / SP ― [62%]

근력 ― [6] / 민첩 ― [4] / 체력 ― [6]
지능 ― [0] / 집중 ― [2] / 행운 ― [0]
소울 ― [1]

Point ― [0]

토끼를 사냥해서 레벨 업을 했다고 일어난 변화가 아니었다.
기본 능력치 이외에 새롭게 생성된 ‘소울’ 능력치!
특별한 행동은 없었고, 그저 다솜과 함께 행동했을 뿐인데 갑작스럽게 얻게 되어 소이도 황당해하는 상황이었다.

[소울] ― 소드 앤 매직의 세계에는 수많은 종류의 힘이 있습니다. 그중에서도 ‘소울’의 힘은 특별합니다. 늘 ‘죽음’과 가까운 당신에게 가장 어울리는 힘이 될 것입니다.

게시판을 완전히 훑어 내릴 정도로 확인을 했음에도 아직까지 기본 능력치 이외의 것을 얻었다는 플레이어는 없었다.
물론, 글을 올리지 않았을 뿐 새로운 능력치를 얻은 사람도 있을 수 있지만, 말 그대로 극소수일 것이다.
별다른 노력도 없이 얻어낸 달콤한 과실.
미래에 대한 기대가 커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아, 당장 접속해서 해보고 싶은 게 많은데…….’
아쉽게도 당장은 접속 제한 시간에 걸린 상태다.
한계까지 부풀어 오른 기대감의 실현을 내일로 미룰 수밖에 없는 소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