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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화
시간의 흐름이 이토록 지루하게 느껴지는 것은 처음이다.
자정(子正)을 알리는 종소리까지 앞으로 1분.
소이는 미리 준비한 간편한 복장으로 갈아입고 멀티퍼포스 캡슐 앞에 섰다.
“오픈.”
푸슉!
기본적인 음성 명령어에 반응한 캡슐의 덮개가 공기 빠지는 소리와 함께 천천히 개방되었다.
스윽!
몸을 눕힌 다음 좁은 캡슐의 내부를 두리번거리던 소이는 저절로 튀어나오는 감탄사를 막지 않았다.
‘이게 내 침대보다 편하네.’
과연 비싼 가격에는 이유가 있는 것인가.
장시간 가상현실 시스템을 이용할 경우를 대비하여 인체 공학적으로 설계된 내부는 등에 닿는 시트의 감촉만 하더라도 최고급 침대를 방불케 했다.
철컹!
소이가 안에서 폐쇄 스위치를 누르자 덮개가 닫혔다.
그런 후, 멀티퍼포스 캡슐이 본격적인 작동을 시작했다.
‘현재 시각…… 12시!’
가상현실 게임, 소드 앤 매직의 베타테스트 서버가 오픈할 시간이다.
기대감으로 두근거리는 심장을 다스릴 여유도 없이 귓가에 기계의 작은 동작 소리가 스친다.
이어지는 차가운 금속선들의 움직임.
뇌를 비롯한 인체의 수많은 감각기관들을 자극하여 완벽한 가상현실 시스템을 만끽하기 위한 준비 단계였다.
“후우…….”
이미 가상현실 시스템 커뮤니티를 통해 수백 번을 확인했던 접속 과정이지만, 실제로 겪어보는 것은 처음인 탓에 절로 긴장감이 돌았다.
그런 소이의 신체 반응을 체크한 것인지, 시스템 음성이 심장박동 수가 비정상적으로 높아지고 있다며 경고를 해왔다.
소이는 안정을 되찾기 위해 눈을 감고 천천히 심호흡을 했다.
그러한 행동을 몇 번 반복하자 작동을 멈췄던 기계들이 다시 움직임을 재개했다.
― 스캔(Scan)을 시작합니다. 눈을 감아주세요.
위이잉!
순간, 레이저 광선 같은 것이 전신을 스치고 지나갔다.
그런 다음 금속선에서 인간의 시각으로는 인식하기 힘들 정도로 작고 얇은 바늘들이 튀어나와 신체의 중요 부위들을 장악했다.
‘묘한 느낌인데.’
그 순간, 전신으로 퍼져 나가는 몽롱함이 소이를 사로잡았다.
마치 꿈을 꾸는 것같이 아늑한 느낌.
그 달콤한 감각에 거부하지 않고 빠져든 소이는 정신을 차린 순간 어둠 속에 홀로 서 있는 본인의 모습을 발견하고 헛바람을 들이켰다.
“헛!”
당황스러움이 전신을 지배했다.
분명 멀티퍼포스 캡슐에 누워서 가상현실 시스템에 접속을 하는 도중이었는데, 잠시 다른 곳에 정신이 팔린 사이 끝도 보이지 않는 광활한 암흑의 공간에 서 있게 되었다.
휙휙!
혹시나 하는 마음에 허공을 향해 주먹을 몇 번 질러보았다.
결코 꿈이 아니다.
실제로 신체가 움직이는 감각이 느껴졌고, 동시에 날카롭게 허공을 가르는 주먹을 보며 소이는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
‘이게 가상현실의 세계인가?’
[‘강소이’ 고객님, 가상현실 시스템을 이용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최초 접속에는 기본 설정 과정으로 인해 시간이 지연될 수 있음을 알려 드립니다.]
“윽!”
갑작스럽게 머릿속에 울려 퍼지는 20대 여성의 목소리에 어지간한 담력을 지닌 소이도 움찔 할 수밖에 없었다.
마치, 영화 속에서 등장하는 텔레파시를 받는 느낌.
가상현실 시스템을 처음 이용해 보는 소이로서는 모든 것이 새로운 경험이었다.
[기본 설정 과정이 모두 종료되었습니다.]
[사용자의 설정 데이터가 없습니다.]
[기본 환경을 적용합니다.]
화악!
잠깐 기다렸더니, 이번에는 어둠이 밀려나고 새하얀 빛이 폭발하며 주위의 환경을 변화시킨다.
소이는 잠시 동안 가려진 시야에 눈살을 찌푸렸다.
이윽고 빛이 사라지자 드러나는 광경.
그것은 순간적으로 헛바람을 들이켤 만한 것이었다.
“허어!”
창이나 입구가 아치형으로 구성된, 르네상스 양식으로 지어진 순백의 성당과 그것을 중심으로 아기자기하게 지어져 있는 유럽식의 주택들.
길고 곧게 뻗어 있는 길들은 사방에서 시작되어 중앙의 광장으로 모여들었다.
삼삼오오 모여서 시끌벅적하게 뛰어다니는 아이들.
그 뒤편으로 무지개가 비치는 아름다운 분수대가 있고, 미술관에서나 볼 수 있을 법한 우아하고 고풍스러운 느낌의 동상들이 주위를 장식했다.
짹짹짹―!
어디선가 새소리가 들려온다.
분수대와 주위 나무들에 앉아서 지저귀는 새들의 울음소리가 앙증맞기 그지없다.
싱싱한 나무들은 불어오는 바람에 몸을 맡겨 잎사귀를 흩날렸고, 가끔 방향을 잘못 잡은 것들은 소이의 눈앞을 스쳐 지나가며 뚜렷한 존재감을 과시했다.
“이건…….”
현실은 새벽이지만 이곳은 달랐다.
따스한 햇살이 비치는 화창한 오후.
소이는 손바닥 위에 나뭇잎 한 장을 올려보았다.
잎맥까지 선명하게 보인다.
소이는 새삼스럽게 가상현실 시스템의 발전상을 느끼고 소름이 돋았다.
숨을 쉬는 것도 자연스럽고, 심장의 움직임도 미약하지만 분명히 느껴진다.
지면을 밟고 있는 발바닥의 감촉부터 긴장감으로 꿀꺽 삼킨 마른침마저 현실과 별반 차이가 없었다.
[현재 설정된 배경은 유럽의 중세 시대를 바탕으로 하고 있습니다.]
[환경 설정 메뉴에서 변경이 가능합니다.]
때마침 소이의 감동을 깨트리는 기계적인 시스템 음성들.
쓴웃음과 함께 정신을 차린다.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지.’
놀라움이란 감정을 잠시 접어두고 들려오는 음성에 신경을 집중했다.
“이용할 수 있는 서비스에는 뭐가 있지?”
[포괄적인 명령어입니다.]
[메뉴 창으로 직접 확인하시기를 원하십니까,
아니면 음성 메시지로 확인하시겠습니까?]
소이가 음성을 선택하자 기다렸다는 듯 다양한 콘텐츠들을 알려왔다.
[현재 이용 가능한 서비스에는 금융, 방송, 복지, 쇼핑, 의료, 게임, 휴양…….]
“게임, 게임 서비스를 이용하겠어.”
[현재 등록된 가상현실 게임으로는 ‘소드 앤 매직’이 존재합니다.]
[게임을 실행하시겠습니까?]
“그래.”
추가적인 인증의 과정은 없었다.
최초의 스캔 시 소이의 신분이 확인되었고, 게임 회사에서 등록된 베타테스터들의 게임 접속을 승인하였기에 금세 주위에서 변화가 일어났다.
화악!
다시 한 번 빛이 폭발하며 소이의 시야를 가린다.
이미 한 번 겪어본 일이기에 소이는 당황하지 않고 편안한 자세로 빛이 사라지기를 기다렸다.
아아, 아아아아!
소이가 시야를 찾아갈 때쯤 오페라를 생각나게 하는 웅장한 음률과 그 사이를 꿰뚫는 맑고 청아한 목소리가 귀를 자극했다.
이어서 은은한 빛을 주위로 흩뿌리는 신전이 전면에 나타나서 소이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새하얀 대리석 기둥들이 빛을 뿜어내고 그 위로 음각(陰刻)된 신비로운 문양들이 반짝거리며 새로운 방문자를 환영했다.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신전들이 이러할까.
아름다운 동상과 문양들이 입구를 장식했고, 그 주위로는 몽환적인 연기가 피어올라서 환상적인 분위기를 연출했다.
‘신경을 많이 썼네.’
기존에 즐겨왔던 3D 게임과는 아예 다른 차원의 스케일이다.
마른침을 꿀꺽 삼킨 소이는 조심스럽게 신전을 향해 걸음을 떼어놓았다.
계단을 지나 넓은 회랑마저 통과하니, 그곳에는 소이를 반기는 존재가 있었다.
플레이어들을 제외하면 유일하게 게임 내에서 캐릭터로 존재할 수 있는 NPC가 그곳에서 소이를 기다리고 있었다.
― 반갑습니다. 이계인(異界人)이여.
“……네, 반갑습니다.”
― 저는 테라의 신들 중 하나인 운명의 신 ‘에아’입니다. 처음으로 이곳을 방문하신 이계인분들을 바른길로 인도하는 역할을 맡고 있지요.
금을 녹여서 바른 것처럼 반짝이는 금발과 아기를 닮은 뽀얀 피부가 인상적이다.
거기에 발은 한 뼘 정도 지면과 떨어져 있었다.
소이는 연신 펄럭이고 있는 세 쌍의 날개를 구경하다가 대답이 늦었다는 것을 깨닫고는 급히 말문을 열었다.
“게임은 어떻게 시작하죠?”
― 테라의 세계를 방문하려 하시는군요. 제가 도움을 드릴 수 있겠네요.
소이의 질문에 흔쾌히 답한 에아는 수정처럼 맑은 눈동자를 빛내며 양손을 가슴께로 모았다.
― 지금부터 그대의 운명을 보여 드리겠습니다.
띠링!
[멀티퍼포스 캡슐의 내부 설정 정보를 확인 중입니다.]
[내부 설정 정보가 확인될 경우 계정 생성 단계는 생략됩니다.]
[다음 단계인 캐릭터 생성을 위한 이미지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시스템 메시지에 관심을 주는 동안 에아의 손바닥 사이에서 시작된 작은 회오리가 점점 규모를 키워가더니, 이내 소이만 한 크기가 되어서 반투명한 이미지로 변했다.
‘이것이…… 내 캐릭터인가?’
거울 속에서나 볼 수 있는 본인의 모습이었다.
180㎝의 신장에 살짝 마른 느낌을 주는 더벅머리의 남자가 눈에 들어온다.
외모는 평범했다.
유일한 특징이라면 365일 집에만 있는 소이답게 창백할 정도로 새하얀 피부색이 눈에 띠는 정도랄까?
‘딱히 변경할 것도 없고, 현실과 동일한 비율이 싱크로에도 긍정적이라고 하니까, 이대로 가자.’
소드 앤 매직에서의 캐릭터 생성은 본인의 모습을 베이스로 최대 50%까지의 수정이 가능했다.
멋진 외모를 꿈꾸는 대부분의 플레이어들이 캐릭터를 생성시킬 때 다양한 수정 작업을 거치는데, 그런 부분은 소이에게 있어서 관심 밖이었다.
흔한 눈동자 색의 변화나 머리 염색도 귀찮기만 했다.
우선순위는 역시 효율성이다.
그리고 다음으로는 빠른 접속을 원할 뿐.
그런 소이의 마음이 전해졌는지, 캐릭터 외형 설정이 끝나자마자 에아가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 운명은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가 있습니다. 다음 운명을 보여 드릴게요.
띠링!
[이름 ― 미설정]
[종족 ― 미설정]
[능력 ― 미설정]
허공에 생성된 반투명한 창을 보며 소이는 이름이라고 적힌 곳을 가볍게 손가락으로 클릭했다.
― 이름이란 그 존재의 모든 것을 증명할 수 있는 중요한 약속입니다. 그대는 어떤 이름을 가지고 있습니까?
고아한 음성에 거창한 내용이다.
그래봐야 단순히 해석하면 캐릭터 이름을 설정하라는 뜻이기에 소이는 잠시 동안 고민을 하다가 삶, 생명이라는 뜻을 가진 ‘라이프’를 닉네임으로 등록시켰다.
언제까지일지는 모르지만, 당분간 가상의 세계에서 새로운 삶을 살아보겠다는 의미로…….
그렇게 이름을 정하고 나니 기다리고 있는 순서는 종족의 선택이었다.
베타테스터 기간 동안 선택이 가능한 종족은 휴먼(Human), 오르크(Orc), 드워프(Dwarf)가 있는데, 각 종족마다 나름의 장점과 단점을 지니고 있었다.
‘이런 건 꼼꼼히 확인을 해봐야지. 대충 정할 수는 없으니까.’
시작은 휴먼이었다.
소이의 시선이 허공에 떠오르는 화려한 이미지와 설명글들로 향했다.
[끝없는 욕망과 경쟁은 그들 삶의 원동력이다.]
휴먼(Human)
인생은 짧아.
한 사람의 삶이라는 것이 그렇게 길지 않거든.
저기 짜리몽땅한 드워프를 보라고.
300살이 넘었는데도 아직 정정해서
맥주를 오크 통째로 퍼마시는 모습을.
길쭉한 엘프들은 더하지.
저거, 500살도 넘은 할머니라더군.
그런데 볼 때마다 쿵쾅거리는 내 심장 좀 어떻게 해줄래?
……이건 비밀로 하자고.
마누라에게 걸리면 내 등짝이 남아나질 않을 테니까.
아무튼 그들은 오랜 삶을 살아가며
수많은 작품과 업적들을 남기지.
물론 그렇다고 해서 그들을 마냥 부러워하고
우리의 삶을 비관하려는 것은 아니야.
다만, 우리의 인생이 짧은 만큼
저들 이상으로 하루하루를 열정적으로 살아가야 하지 않을까?
[신앙] ― 모든 종교에 관대합니다. 선택의 범위가 넓습니다.
[마법] ― 마나와 친숙합니다. 다양한 속성을 선택할 수 있습니다.
[신체] ― 평범합니다. 대부분의 무기를 사용할 수 있습니다.
[특징] ― 명성 수치에 강한 영향을 받습니다.
‘무난하네.’
특별히 좋은 부분도, 나쁜 부분도 보이지 않는 종족이었다.
다른 종족에 비해서 선택의 폭이 넓다는 걸 생각한다면 상당히 인기가 있을 것 같았다.
휘리리릭―!
“음?”
소이가 휴먼 족의 특징을 살피고 있는 동안 캐릭터에게서 작은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다.
평범한 가죽옷 차림에 편안한 자세를 취하고 있던 캐릭터가 두터운 금속 갑옷을 차려입고 당장에라도 돌격할 것처럼 양손에 든 대검을 치켜세웠다.
보기에도 강인한 느낌이 절로 드는 전사의 모습.
“이건…….”
캐릭터는 변화는 거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이번에는 마법사였다.
챙이 넓은 모자를 쓰고 화려한 보석으로 장식된 완드를 손에 쥐었다.
두근두근―!
누가 봐도 알 법한 메이지(Mage)의 외견에 심장이 떨림이 거세진다.
‘이건 클레릭(Cleric)인가? 음…… 이번 건 대장장이네.’
캐릭터의 형태 변화는 계속되었다.
끝도 없이 이어지는 색다른 모습들.
그건 앞으로 소드 앤 매직의 세상에서 소이가 손에 쥘 수 있는 수많은 가능성들을 표현해 주는 것 같았다.
“이것들이…… 이 세계에서의 ‘나’란 말이지?”
꿀꺽!
허공에 못 박힌 소이의 시선이 강하게 빛났다.
시간의 흐름이 이토록 지루하게 느껴지는 것은 처음이다.
자정(子正)을 알리는 종소리까지 앞으로 1분.
소이는 미리 준비한 간편한 복장으로 갈아입고 멀티퍼포스 캡슐 앞에 섰다.
“오픈.”
푸슉!
기본적인 음성 명령어에 반응한 캡슐의 덮개가 공기 빠지는 소리와 함께 천천히 개방되었다.
스윽!
몸을 눕힌 다음 좁은 캡슐의 내부를 두리번거리던 소이는 저절로 튀어나오는 감탄사를 막지 않았다.
‘이게 내 침대보다 편하네.’
과연 비싼 가격에는 이유가 있는 것인가.
장시간 가상현실 시스템을 이용할 경우를 대비하여 인체 공학적으로 설계된 내부는 등에 닿는 시트의 감촉만 하더라도 최고급 침대를 방불케 했다.
철컹!
소이가 안에서 폐쇄 스위치를 누르자 덮개가 닫혔다.
그런 후, 멀티퍼포스 캡슐이 본격적인 작동을 시작했다.
‘현재 시각…… 12시!’
가상현실 게임, 소드 앤 매직의 베타테스트 서버가 오픈할 시간이다.
기대감으로 두근거리는 심장을 다스릴 여유도 없이 귓가에 기계의 작은 동작 소리가 스친다.
이어지는 차가운 금속선들의 움직임.
뇌를 비롯한 인체의 수많은 감각기관들을 자극하여 완벽한 가상현실 시스템을 만끽하기 위한 준비 단계였다.
“후우…….”
이미 가상현실 시스템 커뮤니티를 통해 수백 번을 확인했던 접속 과정이지만, 실제로 겪어보는 것은 처음인 탓에 절로 긴장감이 돌았다.
그런 소이의 신체 반응을 체크한 것인지, 시스템 음성이 심장박동 수가 비정상적으로 높아지고 있다며 경고를 해왔다.
소이는 안정을 되찾기 위해 눈을 감고 천천히 심호흡을 했다.
그러한 행동을 몇 번 반복하자 작동을 멈췄던 기계들이 다시 움직임을 재개했다.
― 스캔(Scan)을 시작합니다. 눈을 감아주세요.
위이잉!
순간, 레이저 광선 같은 것이 전신을 스치고 지나갔다.
그런 다음 금속선에서 인간의 시각으로는 인식하기 힘들 정도로 작고 얇은 바늘들이 튀어나와 신체의 중요 부위들을 장악했다.
‘묘한 느낌인데.’
그 순간, 전신으로 퍼져 나가는 몽롱함이 소이를 사로잡았다.
마치 꿈을 꾸는 것같이 아늑한 느낌.
그 달콤한 감각에 거부하지 않고 빠져든 소이는 정신을 차린 순간 어둠 속에 홀로 서 있는 본인의 모습을 발견하고 헛바람을 들이켰다.
“헛!”
당황스러움이 전신을 지배했다.
분명 멀티퍼포스 캡슐에 누워서 가상현실 시스템에 접속을 하는 도중이었는데, 잠시 다른 곳에 정신이 팔린 사이 끝도 보이지 않는 광활한 암흑의 공간에 서 있게 되었다.
휙휙!
혹시나 하는 마음에 허공을 향해 주먹을 몇 번 질러보았다.
결코 꿈이 아니다.
실제로 신체가 움직이는 감각이 느껴졌고, 동시에 날카롭게 허공을 가르는 주먹을 보며 소이는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
‘이게 가상현실의 세계인가?’
[최초 접속에는 기본 설정 과정으로 인해 시간이 지연될 수 있음을 알려 드립니다.]
“윽!”
갑작스럽게 머릿속에 울려 퍼지는 20대 여성의 목소리에 어지간한 담력을 지닌 소이도 움찔 할 수밖에 없었다.
마치, 영화 속에서 등장하는 텔레파시를 받는 느낌.
가상현실 시스템을 처음 이용해 보는 소이로서는 모든 것이 새로운 경험이었다.
[사용자의 설정 데이터가 없습니다.]
[기본 환경을 적용합니다.]
화악!
잠깐 기다렸더니, 이번에는 어둠이 밀려나고 새하얀 빛이 폭발하며 주위의 환경을 변화시킨다.
소이는 잠시 동안 가려진 시야에 눈살을 찌푸렸다.
이윽고 빛이 사라지자 드러나는 광경.
그것은 순간적으로 헛바람을 들이켤 만한 것이었다.
“허어!”
창이나 입구가 아치형으로 구성된, 르네상스 양식으로 지어진 순백의 성당과 그것을 중심으로 아기자기하게 지어져 있는 유럽식의 주택들.
길고 곧게 뻗어 있는 길들은 사방에서 시작되어 중앙의 광장으로 모여들었다.
삼삼오오 모여서 시끌벅적하게 뛰어다니는 아이들.
그 뒤편으로 무지개가 비치는 아름다운 분수대가 있고, 미술관에서나 볼 수 있을 법한 우아하고 고풍스러운 느낌의 동상들이 주위를 장식했다.
짹짹짹―!
어디선가 새소리가 들려온다.
분수대와 주위 나무들에 앉아서 지저귀는 새들의 울음소리가 앙증맞기 그지없다.
싱싱한 나무들은 불어오는 바람에 몸을 맡겨 잎사귀를 흩날렸고, 가끔 방향을 잘못 잡은 것들은 소이의 눈앞을 스쳐 지나가며 뚜렷한 존재감을 과시했다.
“이건…….”
현실은 새벽이지만 이곳은 달랐다.
따스한 햇살이 비치는 화창한 오후.
소이는 손바닥 위에 나뭇잎 한 장을 올려보았다.
잎맥까지 선명하게 보인다.
소이는 새삼스럽게 가상현실 시스템의 발전상을 느끼고 소름이 돋았다.
숨을 쉬는 것도 자연스럽고, 심장의 움직임도 미약하지만 분명히 느껴진다.
지면을 밟고 있는 발바닥의 감촉부터 긴장감으로 꿀꺽 삼킨 마른침마저 현실과 별반 차이가 없었다.
[환경 설정 메뉴에서 변경이 가능합니다.]
때마침 소이의 감동을 깨트리는 기계적인 시스템 음성들.
쓴웃음과 함께 정신을 차린다.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지.’
놀라움이란 감정을 잠시 접어두고 들려오는 음성에 신경을 집중했다.
“이용할 수 있는 서비스에는 뭐가 있지?”
[메뉴 창으로 직접 확인하시기를 원하십니까,
아니면 음성 메시지로 확인하시겠습니까?]
소이가 음성을 선택하자 기다렸다는 듯 다양한 콘텐츠들을 알려왔다.
“게임, 게임 서비스를 이용하겠어.”
[게임을 실행하시겠습니까?]
“그래.”
추가적인 인증의 과정은 없었다.
최초의 스캔 시 소이의 신분이 확인되었고, 게임 회사에서 등록된 베타테스터들의 게임 접속을 승인하였기에 금세 주위에서 변화가 일어났다.
화악!
다시 한 번 빛이 폭발하며 소이의 시야를 가린다.
이미 한 번 겪어본 일이기에 소이는 당황하지 않고 편안한 자세로 빛이 사라지기를 기다렸다.
아아, 아아아아!
소이가 시야를 찾아갈 때쯤 오페라를 생각나게 하는 웅장한 음률과 그 사이를 꿰뚫는 맑고 청아한 목소리가 귀를 자극했다.
이어서 은은한 빛을 주위로 흩뿌리는 신전이 전면에 나타나서 소이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새하얀 대리석 기둥들이 빛을 뿜어내고 그 위로 음각(陰刻)된 신비로운 문양들이 반짝거리며 새로운 방문자를 환영했다.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신전들이 이러할까.
아름다운 동상과 문양들이 입구를 장식했고, 그 주위로는 몽환적인 연기가 피어올라서 환상적인 분위기를 연출했다.
‘신경을 많이 썼네.’
기존에 즐겨왔던 3D 게임과는 아예 다른 차원의 스케일이다.
마른침을 꿀꺽 삼킨 소이는 조심스럽게 신전을 향해 걸음을 떼어놓았다.
계단을 지나 넓은 회랑마저 통과하니, 그곳에는 소이를 반기는 존재가 있었다.
플레이어들을 제외하면 유일하게 게임 내에서 캐릭터로 존재할 수 있는 NPC가 그곳에서 소이를 기다리고 있었다.
― 반갑습니다. 이계인(異界人)이여.
“……네, 반갑습니다.”
― 저는 테라의 신들 중 하나인 운명의 신 ‘에아’입니다. 처음으로 이곳을 방문하신 이계인분들을 바른길로 인도하는 역할을 맡고 있지요.
금을 녹여서 바른 것처럼 반짝이는 금발과 아기를 닮은 뽀얀 피부가 인상적이다.
거기에 발은 한 뼘 정도 지면과 떨어져 있었다.
소이는 연신 펄럭이고 있는 세 쌍의 날개를 구경하다가 대답이 늦었다는 것을 깨닫고는 급히 말문을 열었다.
“게임은 어떻게 시작하죠?”
― 테라의 세계를 방문하려 하시는군요. 제가 도움을 드릴 수 있겠네요.
소이의 질문에 흔쾌히 답한 에아는 수정처럼 맑은 눈동자를 빛내며 양손을 가슴께로 모았다.
― 지금부터 그대의 운명을 보여 드리겠습니다.
띠링!
[내부 설정 정보가 확인될 경우 계정 생성 단계는 생략됩니다.]
[다음 단계인 캐릭터 생성을 위한 이미지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시스템 메시지에 관심을 주는 동안 에아의 손바닥 사이에서 시작된 작은 회오리가 점점 규모를 키워가더니, 이내 소이만 한 크기가 되어서 반투명한 이미지로 변했다.
‘이것이…… 내 캐릭터인가?’
거울 속에서나 볼 수 있는 본인의 모습이었다.
180㎝의 신장에 살짝 마른 느낌을 주는 더벅머리의 남자가 눈에 들어온다.
외모는 평범했다.
유일한 특징이라면 365일 집에만 있는 소이답게 창백할 정도로 새하얀 피부색이 눈에 띠는 정도랄까?
‘딱히 변경할 것도 없고, 현실과 동일한 비율이 싱크로에도 긍정적이라고 하니까, 이대로 가자.’
소드 앤 매직에서의 캐릭터 생성은 본인의 모습을 베이스로 최대 50%까지의 수정이 가능했다.
멋진 외모를 꿈꾸는 대부분의 플레이어들이 캐릭터를 생성시킬 때 다양한 수정 작업을 거치는데, 그런 부분은 소이에게 있어서 관심 밖이었다.
흔한 눈동자 색의 변화나 머리 염색도 귀찮기만 했다.
우선순위는 역시 효율성이다.
그리고 다음으로는 빠른 접속을 원할 뿐.
그런 소이의 마음이 전해졌는지, 캐릭터 외형 설정이 끝나자마자 에아가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 운명은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가 있습니다. 다음 운명을 보여 드릴게요.
띠링!
[종족 ― 미설정]
[능력 ― 미설정]
허공에 생성된 반투명한 창을 보며 소이는 이름이라고 적힌 곳을 가볍게 손가락으로 클릭했다.
― 이름이란 그 존재의 모든 것을 증명할 수 있는 중요한 약속입니다. 그대는 어떤 이름을 가지고 있습니까?
고아한 음성에 거창한 내용이다.
그래봐야 단순히 해석하면 캐릭터 이름을 설정하라는 뜻이기에 소이는 잠시 동안 고민을 하다가 삶, 생명이라는 뜻을 가진 ‘라이프’를 닉네임으로 등록시켰다.
언제까지일지는 모르지만, 당분간 가상의 세계에서 새로운 삶을 살아보겠다는 의미로…….
그렇게 이름을 정하고 나니 기다리고 있는 순서는 종족의 선택이었다.
베타테스터 기간 동안 선택이 가능한 종족은 휴먼(Human), 오르크(Orc), 드워프(Dwarf)가 있는데, 각 종족마다 나름의 장점과 단점을 지니고 있었다.
‘이런 건 꼼꼼히 확인을 해봐야지. 대충 정할 수는 없으니까.’
시작은 휴먼이었다.
소이의 시선이 허공에 떠오르는 화려한 이미지와 설명글들로 향했다.
[끝없는 욕망과 경쟁은 그들 삶의 원동력이다.]
휴먼(Human)
인생은 짧아.
한 사람의 삶이라는 것이 그렇게 길지 않거든.
저기 짜리몽땅한 드워프를 보라고.
300살이 넘었는데도 아직 정정해서
맥주를 오크 통째로 퍼마시는 모습을.
길쭉한 엘프들은 더하지.
저거, 500살도 넘은 할머니라더군.
그런데 볼 때마다 쿵쾅거리는 내 심장 좀 어떻게 해줄래?
……이건 비밀로 하자고.
마누라에게 걸리면 내 등짝이 남아나질 않을 테니까.
아무튼 그들은 오랜 삶을 살아가며
수많은 작품과 업적들을 남기지.
물론 그렇다고 해서 그들을 마냥 부러워하고
우리의 삶을 비관하려는 것은 아니야.
다만, 우리의 인생이 짧은 만큼
저들 이상으로 하루하루를 열정적으로 살아가야 하지 않을까?
[신앙] ― 모든 종교에 관대합니다. 선택의 범위가 넓습니다.
[마법] ― 마나와 친숙합니다. 다양한 속성을 선택할 수 있습니다.
[신체] ― 평범합니다. 대부분의 무기를 사용할 수 있습니다.
[특징] ― 명성 수치에 강한 영향을 받습니다.
‘무난하네.’
특별히 좋은 부분도, 나쁜 부분도 보이지 않는 종족이었다.
다른 종족에 비해서 선택의 폭이 넓다는 걸 생각한다면 상당히 인기가 있을 것 같았다.
휘리리릭―!
“음?”
소이가 휴먼 족의 특징을 살피고 있는 동안 캐릭터에게서 작은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다.
평범한 가죽옷 차림에 편안한 자세를 취하고 있던 캐릭터가 두터운 금속 갑옷을 차려입고 당장에라도 돌격할 것처럼 양손에 든 대검을 치켜세웠다.
보기에도 강인한 느낌이 절로 드는 전사의 모습.
“이건…….”
캐릭터는 변화는 거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이번에는 마법사였다.
챙이 넓은 모자를 쓰고 화려한 보석으로 장식된 완드를 손에 쥐었다.
두근두근―!
누가 봐도 알 법한 메이지(Mage)의 외견에 심장이 떨림이 거세진다.
‘이건 클레릭(Cleric)인가? 음…… 이번 건 대장장이네.’
캐릭터의 형태 변화는 계속되었다.
끝도 없이 이어지는 색다른 모습들.
그건 앞으로 소드 앤 매직의 세상에서 소이가 손에 쥘 수 있는 수많은 가능성들을 표현해 주는 것 같았다.
“이것들이…… 이 세계에서의 ‘나’란 말이지?”
꿀꺽!
허공에 못 박힌 소이의 시선이 강하게 빛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