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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력의 잔재(3화)
chapter 2. 미련 한가득


라준은 푹 퍼졌다. 무료했다. 뺨에 닿은 대리석 식탁의 냉기도 지루함을 없애진 못했다. 라준의 눈이 어두컴컴한 거실을 응시했다.
이 집에 드나든 지도 벌써 일주일째다. 이젠 은호를 하원시키는 것도 제법 익숙해졌지만, 여전히 낯가리는 아이와 친해지는 건 힘들었다. 은호의 기묘한 버릇 때문에 더 그런지도 몰랐다.
하부장에 숨어 있던 첫날이 끝이 아니었다. 매번 그러는 건 아니지만, 신발장이나 옷장, 책상 밑, 거실 테이블 밑, 암막 커튼 안쪽까지, 숨는 장소도 다양했다. 은호를 발견할 때마다 심장이 뚝 떨어졌다.
생판 남인 라준이 봐도 은호는 무언가 좀 이상했다. 문호에게 슬쩍 떠봤지만, 신경 끄라는 답만 받았다. 정말 주먹을 부르는 얄미움이었다.
라준이 축 처진 이유는 그뿐만이 아니었다. 문호 보기가 하늘의 별 따기였다. 자주 보면서 놈의 못된 면에 질려야 하는데, 감질날 정도로만 마주치니 괜히 심장만 더 간질거렸다. 어느 날은 자신도 모르게 문호의 방문을 보며 멍하니 있던 적도 있었다. 기다리면 기적처럼 문이 열릴지도 모른다는 어이없는 상상을 하면서.
“얼굴에 금이라도 처발랐나.”
비싼 것도 아닌데 하루 한 번은 꼬박 봤으면 싶었다. 식사도 제 마음 내키면 먹어서 오늘도 문호 몫의 음식이 싸늘하게 식었다. 뜻밖의 일은 문호와 달리 은호는 꼬박꼬박 식사한다는 것이다.
문호에게 무슨 말을 들은 건지 몰라도 라준이 부르면 거부하는 법 없이 주방으로 들어왔다. 비록 도구를 사용하는 게 서툴러 라준이 직접 먹여 줘야 했지만, 적막한 집이다 보니 은호의 행동이 반가울 지경이었다.
은호의 식사를 거드는 것은 꽤 인내심을 필요로 했다. 강한 거부 외에는 말문을 여는 법이 없다 보니 눈치로 밥을 먹여야 했다. 입안의 음식물을 언제 삼키는지, 아이가 먹을 수 있는 밥 양은 얼마 정도인지 세심하게 살펴야 했다. 한 번은 숟가락 가득 밥을 떴다가 은호가 입을 꾹 다물고 안 연 적도 있었다. 며칠뿐이지만 지금은 꽤 익숙해져서 라준도 실수하는 일이 줄었다.
드르르르륵―
뺨이 덜덜 떨렸다. 진동 소리에 라준은 느릿느릿 휴대폰을 켰다. 화면 가득 ‘카사노바 배’가 얼른 전화 받으라고 재촉했다.
“왜.”
―고자야. 잘 꼬시고 있냐?
“뭔 헛소리냐.”
―오매불망 그리워하던 님 집에 들어갔으면 뭔가 소득이라도 있어야 할 거 아냐.
“주둥이 다물어라. 덜 맞았냐? 그런 거 아니거든.”
―헐, 누가 고자 아니랄까 봐. 어차피 까일 대로 까인 거. 그냥 마구 들이대.
“쓸데없는 말 할 거면 끊는다.”
가뜩이나 불난 라준의 마음에 승철이 부채질했다. 단호히 종료 버튼을 누르려 하자 낌새를 눈치챈 승철이 다급하게 소리쳤다.
―야야야야. 용건은 그게 아니고. 얼굴 못 본 지 꽤 됐잖아. 함 모이자.
“일주일 전에 봤잖아. 사내새끼들 모여 봤자 구린내만 나는데 뭘 모여.”
―고니가 쏜단다. 이번에 대박 터뜨렸나 봐.
“그 새끼 또 도박하냐?”
―재개한 지 얼마 안 됐어. 한 달 전인가? 집에서 풀려난 놈들하고 다시 만원도박단을 꾸렸더라. 초기 자금은 원보가 대고.
“금원보가? 고니, 이 미친놈이 돌았나.”
―크흐흐흐, 안 그래도 이자가 눈덩이처럼 불어난다고 고니가 울상이긴 했다. 원금이 5만 원인데 이자가 10만 원이라고. 그래도 이번에 번 돈으로 빚 청산 했다던데?」
어처구니없는 소식에 라준이 입을 떡 벌렸다. 정신 못 차린 고니도 그렇지만, 친구 상대로 사채 하는 원보도 제정신은 아니었다. 미래의 제3 금융업자를 곁에 두고 있는 느낌이었다. 절로 입에서 혀 차는 소리가 새어 나왔다.
안 봐도 훤했다. 빚을 갚기 위해 노예처럼 도박질 했을 고니와 빚 상환 받았음에도 아쉬워했을 원보가 눈앞에 선했다.
“이젠 학교에서 판 못 벌이지 않냐? 그때 사건으로 교수들이 틈만 나면 강의실 문 열고 다닌다고 했잖아.”
―아. 걔, 하우스 원정 다녀. 듣기로는 네가 알바하는 데 근처라던데? 거기 주택가라서 채소 하우스 재배하는 집 많잖아.
“하― 미친. 그 새끼는 언젠가 집 말아먹을 거야.”
―걔는 돈이 목적이 아니라 도박 자체가 좋아서 하는 거라서 판돈은 크게 안 벌려. 그러니 공부 스트레스 때문에 엇나가고 싶은 미친놈들이 들러붙었지.
“그게 그거지. 어쨌든 알았다. 카톡으로 장소하고 시간 보내. 나 알바하는 시간 피하는 거 잊지 마라. 아니, 나 한가할 때 먼저 연락할게.”
―오케이! 아, 차거! 아씨, 비 오네.
“비?”
―엉. 야, 끊어. 나 겁나 뛰어야겠다.
뚝, 하고 전화가 끊겼다. 승철이 어딘지는 몰라도 같은 서울 하늘 아래이니 여기도 비 올 가능성이 컸다. 라준은 거실로 나가 전등을 켜려다 멈칫했다. 절대 금지. 무슨 이유인지 몰라도 문호는 집에 불 켜는 걸 극도로 싫어했다. 주방은 어쩔 수 없다 치더라도 거실 같은 경우는 스위치에 손이 닿기만 해도 살벌한 경고가 날아왔다.
라준이라고 불만이 없는 건 아니었다. 청소하려면 불을 켜야 하는데, 무작정 하지 말라고만 하니 반발심만 들었다. 그래서 문호의 말을 무시하고 한 번 켜려고 했다가 집 나가라는 소리까지 들었다. 그 뒤로는 얌전히 주방 전등을 켜고 청소했다.
지난 기억에 라준은 어깨를 부르르 떨었다. 또다시 나가라는 소리는 듣기 싫었다. 스위치를 누르는 대신 라준은 창가로 다가가 암막 커튼을 손가락 길이만큼만 걷었다. 괜히 눈치 보여 문호의 방문을 힐끗거렸다.
희미한 빛이 그림자를 드리웠다. 집을 둘러싼 나무 때문인지 골목 가로등이 만족할 만큼 빛을 주진 못했다.
투둑. 투둑.
미약한 빗소리가 들렸다. 정말 비가 오는지 창에 물방울이 요란하게 부딪쳤다. 빗줄기가 굵은 것으로 보아 장대비인 모양이었다. 아직 30분 정도 남았지만, 조기 퇴근 할까 고민하던 찰나였다.
“……히잉…….”
“응?”
물먹은 듯 칭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잘못 들었나 싶어 무시하려 했지만, 다시 낑낑거리는 소리가 귀에 파고들었다. 라준은 주방 불빛에 의지해 소리 나는 쪽으로 살금살금 움직였다. 이런 소리를 낼 사람은 은호뿐이었다.
“또 숨었나.”
소리는 들리는데 은호가 안 보였다. 욕실 앞을 지나치려던 라준이 문을 벌컥 열었다. 어두컴컴한 욕실 구석에서 무언가가 움직였다.
“은호야.”
나직한 부름에 은호는 몸을 더 움츠렸다. 더듬더듬 벽을 짚으며 가까이 다가가니 욕조 한쪽에 웅크린 아이가 보였다. 술래잡기도 아니고, 은호가 이럴 때마다 라준은 가슴이 선뜩했다.
“은호야?”
라준은 얼굴을 굳혔다.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달랑 들어서 나가기만 하면 될 줄 알았더니, 상태가 심상치 않았다. 은호는 몸을 옹송그린 채 두 손으로 귀를 막고 있었다. 입에서 나는 소리도 칭얼거림이 아닌 울음이었다. 그것도 누가 들을세라 숨죽인 소리였다.
“은호야, 형이야.”
은호는 죽어도 형이라고 안 부르지만, 이 상황에서 할 말은 이것뿐이었다. 라준은 최대한 부드럽게 아이를 부르며 겨드랑이 사이에 손을 밀어 넣었다. 됐다, 싶은 찰나 은호가 발작하듯이 몸부림쳤다. 막힌 숨이 터진 듯 비명을 날카롭게 터뜨렸다.
“흐어어어엉! 시, 시러어어―!”
“괜찮아. 괜찮다니까?”
“흐어어어어!”
라준은 작은 몸을 꽉 안은 채 등을 토닥였다. 아이의 발이 배를 퍽퍽 쳤다. 순간 치밀어 오른 짜증을 간신히 억눌렀다. 아픈 아이다. 아픈 아이. 그렇게 세뇌하듯이 읊조렸다. 한동안 얌전하더니 처음으로 돌아간 것 같았다.
라준을 욕실을 나와 빠른 걸음으로 문호 방으로 향했다. 자신이 의지가 될 수 없으니 문호에게 맡기는 수밖에 없었다.
“야! 차문호! 네 동생이 이상해! 야!”
라준은 문을 부술 듯이 쾅쾅 두드렸다. 한참을 기다렸지만, 기척도 없었다. 귀머거리가 아닌 이상 이 정도 소란에도 답이 없는 건 이상했다. 미간을 찌푸린 라준은 문손잡이를 잡았다. 감이란 게 있다. 은호와 마찬가지로 문호에게도 무슨 일이 생긴 것만 같았다.
잠시의 망설임은 자지러질 듯 우는 아이 때문에 단번에 사라졌다. 일단 은호부터 살리고 봐야 했다. 라준은 문을 열고 몸을 들이밀었다.
“야! ……아.”
기세 좋게 들어간 건 좋았는데, 뜻밖의 풍경에 몸이 굳었다. 방 내부는 거실과 마찬가지로 빛 한 점 없었다. 벌써 에어컨을 돌리는지 공기도 겨울 기온처럼 서늘했다.
내부 모습은 열린 문 사이로 들어온 빛 때문에 겨우 파악할 수 있었다. 라준의 자취방보다 배는 큰 방에 가구라곤 침대, 책상, 옷장이 끝이었다. 썰렁하다 못해 삭막하기까지 한 내부에 헛숨을 삼켰다.
“차문호?”
문제는 인기척도 없다는 것이다. 아무리 둘러봐도 문호가 안 보였다. 라준은 살금살금 걸으며 문호를 찾기 시작했다. 방에 딸린 욕실에도 없어 외출했나 싶어 나가려는데 어두워서 눈치채지 못한 또 다른 문이 보였다. 순간 ‘이거다’ 싶었다.
달칵.
라준은 문을 열자마자 코를 씰룩였다. 책 내음이 훅 풍겼다. 내부는 침실과 달리 은은한 조명으로 인해 훨씬 밝았다. 냄새를 잘못 맡은 게 아닌지 커다란 책장에 책이 빼곡했다. 작가라 했던가. 원보에게 스치듯 들었던 말이 떠올랐다.
“엉아.”
“응? 어디?”
라준이 방대한 책에 정신 팔린 사이 은호가 먼저 문호를 발견했다. 아이의 작은 중얼거림에 라준은 재빨리 주위를 살폈다.
“……하아. 하아…….”
“차문호!”
미약한 신음이 들렸다. 소리를 따라가니 창가에 놓인 책상 아래에 두 다리가 비죽 튀어나온 게 보였다. 기겁한 라준이 몸을 숙이려다가 휘청거렸다. 은호의 무게 때문에 엎어질 뻔했다. 덩달아 놀란 은호가 라준의 목을 꼭 껴안았다. 라준은 팔에 더 힘을 주고 무릎을 굽혔다.
창백했다. 원래도 낮은 체온으로 인해 하얀 얼굴이긴 했지만, 지금만큼은 아니었다. 핏기 하나 없는 얼굴이 경련하듯 덜덜 떨리고 있었다. 입에서는 가느다란 신음이 끊임없이 새어 나왔다. 한눈에 봐도 정상적인 상태는 아니었다.
“어이, 차문호. 괜찮냐?”
“……나가.”
“이러고 있는데 어떻게―”
“나가!!!”
상태라도 확인하려고 뻗은 손은 차갑게 내쳐졌다. 문호의 벼락같은 고함에 은호가 울음을 터뜨렸다. 라준은 손을 움켜쥐었다. 싸늘한 거부. 호모 새끼라고 악담하던 과거의 차문호가 튀어나왔다. 이마에 핏줄이 우두둑 돋았다.
“나도 나가고 싶은데, 네 꼴을 보니까 그럴 순 없겠다.”
머리꼭지까지 성질이 뻗쳤지만 라준은 아픈 사람을 나 몰라라 하지 않았다. 문호는 고통 때문인지 바닥을 득득 긁고 있었다. 생판 모르는 남도 모른 척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아픈 놈이다, 아픈 놈. 은호 때와 마찬가지로 염불 외듯 읊조린 라준이 문호의 멱살을 틀어쥐었다. 거친 손길에 문호의 미간이 와락 찌푸려졌다.
“너!”
“네, 네. 일단 나갑시다아―”
업는 것도 아닌, 짐짝을 옮기듯 질질 끌고 나갔다. 라준보다 큰 덩치라 낑낑대며 옮겼다. 칼을 문 입과 달리 문호는 제대로 된 반항 한번 해 보지 못했다. 정말 상태가 안 좋은 모양이었다.
겨우 침대까지 도달한 라준은 먼저 은호부터 내려놓았다. 그리고 문호의 등으로 돌아가 겨드랑이를 잡고 확 일으켰다.
“……!”
“읏차!”
절로 끙, 소리가 나왔다. 라준은 약간의 감정을 담아 문호를 침대에 내팽개쳤다. 좀 전의 박대를 마음에 두고 한 행동은 아니었다. 아마도.
“은호야, 네 형이다.”
라준의 말이 아니더라도 은호는 본능적으로 문호의 품에 파고들었다. 눈물은 그쳤지만, 아이의 눈은 퉁퉁 부어 있었다. 차마 아이까지 내치지는 못하겠는지 문호도 거부하진 않았다. 헐떡이던 은호의 숨이 고르게 퍼졌다. 다시 찾아온 고요에 빗소리가 파고들었다.
“억, 내 어깨야.”
라준은 마치 들으라는 듯 엄살 부렸다. 두 사람을 옮기다 보니 실제로 어깨가 뻐근하긴 했다. 문호의 눈치를 보면서 슬쩍 침대 가에 걸터앉았다. 아파서인지 문호는 별다른 말 하지 않았다.
열어 놓은 문 바깥에서 빛이 늘어졌다. 라준은 움찔 몸을 떨었다. 어둠에 익숙해진 눈이 선연한 감정을 포착했다.
커다란 방. 단출한 가구. 싸늘한 공기. 서늘한 빗소리.
어른과 아이의 얼굴에 떠오른…….
―두려움. 혹은 공포.
왜 그렇게 느꼈는지 모르겠다. 한순간 그런 느낌이 들었다. 서로에게 의지한 채 웅크린 두 사람 때문인지, 아니면 무섭게 내리는 비 때문인지 모르겠다. 라준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뒤통수를 긁적였다.
은호는 안정을 찾았는지 이내 잠들었다. 하지만 문호는 아니었다. 잔뜩 경계 어린 눈으로 라준을 노려봤다. 그래서 선뜻 손을 내밀기 어려웠다.
“좀 자라.”
“나가.”
“내가 덮칠까 봐 그래? 아니, 확 덮친다?”
“너. 내일부터 나올―”
“필요 없다고? 그럼 잘린 김에 내 멋대로 해도 되지?”
보란 듯이 라준이 입맛을 다셨다. 농담이란 걸 알아도 기분 나쁜지 문호는 대꾸도 하지 않았다. 칼로 저민 듯 아픈 머리를 부여잡을 뿐이다.
라준은 측은한 시선으로 문호를 쳐다봤다. 가슴에서부터 치고 올라오는 욕구를 꾹 눌렀다.
불을 켜고 싶다. 얼굴을 자세히 보고 싶다. 손을 잡고 싶다.
……안아 주고 싶다.
사랑 때문이라기보단 인간적인 동정이나 연민이 더 컸다. 집이 크고 돈이 많으면 뭐하나. 세상 혼자 사는 듯 사람이 추워 보였다.
지금도 문호의 곁에 설 여자는 상상하고 싶지 않다. 하지만 이렇게 홀로 아파할 바에야 그를 소중히 여길 존재가 있었으면 했다. 그게 자신이라면 더 좋겠지만, 가능성이 없단 걸 알기에 안타까울 뿐이다.
라준은 조심스럽게 일어나 방을 나왔다. 주방 서랍을 뒤져 약상자를 찾았다. 잘 사용하진 않는지 개봉도 하지 않은 의약품이 가득했다. 마침 찾던 것도 있어 라준은 쾌재를 불렀다.
다시 방으로 돌아온 라준은 어린이 해열 패치를 두 사람에게 붙였다. 은호의 이마는 다 가리는 패치가 문호에게는 작아서 우스웠다. 더는 뭐라 할 기운도 없는지 문호는 라준이 무슨 짓을 해도 맥없이 내버려 뒀다. 단지 말간 눈으로 지켜볼 뿐이었다.
“철근도 씹어 먹게 생긴 놈이 뭐 이렇게 골골대냐.”
“…….”
“호모 새끼 얼쩡대는 게 싫겠지만, 여기서 간호할 사람이 나밖에 없다. 애 잘못될까 봐 걱정되니 여기서 자고 갈 거고. 거부는 거부한다.”
대꾸도 없이 조용하니 라준은 괜히 더 말이 많아졌다. 볼에 닿는 시선이 따가웠다.
침묵이 찾아왔다. 적막 가운데 빗소리가 파고들었다. 이 정도 비면 서울 전역에 내릴지도 몰랐다. 가만히 귀 기울이고 있으려니 몸이 서서히 무거워졌다. 그제야 라준도 제가 꽤 피곤하다는 걸 느꼈다.
정신없이 우는 아이를 달래고, 덩치 큰 놈을 낑낑대며 옮기느라 체력이 바닥났다. 문호와 신경전을 벌이느라 몸뿐만 아니라 정신도 피곤한 느낌이었다. 푹, 한숨을 내쉰 라준은 뒤로 벌렁 누웠다. 침대는 꽤 넓어서 라준이 누워도 폭이 한참이나 남았다.
“야.”
“…….”
“왜 그러는지 물어봐도 아무 말 안 해줄 거…… 자냐?”
조심스럽게 건넨 말은 반응 없는 상대방 때문에 무의미하게 사라졌다. 누가 차은호 형 아니랄까 봐 잠드는 것도 금방이다. 여전히 미간은 찌푸리고 있지만, 고른 숨소리로 보아 자면서까지 아픈 건 아닌 듯했다.
라준은 손을 내밀었다. 아이를 타고 넘어간 손가락이 문호의 이마에 톡, 닿았다. 심술부리듯이 미간을 꾹꾹 문질렀다. 깨지 않을까 조마조마했는데 미동도 없다. 평소엔 갑옷이라도 두른 듯 철벽같던 상대방의 무방비 상태에 장난치고 싶은 마음이 사라졌다.
그대로 라준도 눈을 감으려다 부르르 떨면서 다시 일어났다. 미처 못 느꼈는데 까는 시트만 있을 뿐 이불이 없었다. 아무리 여름이라도 장기간 에어컨 바람을 쐬면 감기 걸리기에 십상이었다. 특히 면역력 약할 은호가 걱정이었다.
라준은 방을 뒤져 푹신한 이불 두 채를 꺼냈다. 하나는 문호와 은호 위에 두르고, 나머지 하나는 제가 덮었다. 이제야 안심하고 자려던 라준이 버둥거리며 다시 일어났다.
“아, 씨.”
은호에게 이불을 둘러 주며 살폈던 문호의 모습이 계속 떠올라서 거슬릴 지경이었다. 땀으로 온몸이 젖어 있었다. 나중에 깨어나면 찝찝할 건 둘째 치고, 땀이 식으면 몸의 체온이 더 내려갈 것이다. 라준은 ‘이건 걱정이 아니라 그냥 거슬릴 뿐이다.’라고 위안하며 욕실로 들어갔다.
다시 나온 라준의 손엔 젖은 수건이 들려 있었다. 라준은 침대 모서리를 돌아 문호에게로 가까이 다가갔다. 느릿하게 퍼지는 고른 숨소리가 귓가에 속삭이듯이 다가왔다.
차문호의 머리맡에 선 라준은 멀뚱멀뚱한 시선으로 그를 내려다봤다. 흑심은 한 톨도 없다고 생각했는데, 이다음 일을 생각하니 괜히 얼굴이 달아올랐다. 물 묻힌 수건으로 문호의 전신 구석구석을 닦―!
짝!
볼에 불이 붙었다. 번쩍 정신 차린 라준이 큼큼 헛기침했다. 하마터면 가느다란 이성이 커다란 욕망에 질 뻔했다.
“아, 아니야. 흑심 따윈 없어.”
왜 말을 더듬는 건데.
또 다른 자아가 질타했다. 수건을 쥔 손에 과도하게 힘이 들어갔다. 목구멍으로 침이 꿀꺽 넘어갔다. 아파서인지 오늘따라 문호의 얼굴이 초췌하면서도 애틋한 마음을 불러일으켰다.
홀린 듯이 얼굴을 보다 보니 라준은 과거에 이놈에게 반한 건 분위기가 아니라 외모 때문이었나, 하는 자괴감이 들었다. 순수했던 지난 감정이 속물적인 욕망으로 전락하는 기분이었다.
“야, 그냥 네가 찝찝할까 봐 그래. 이해해라. 이해하지? 이해해야 한다.”
누구에게 하는지 모를 변명을 하며 라준은 가장 먼저 반듯한 이마를 닦았다. 낯선 체온에 문호는 움찔했지만, 눈을 뜨진 않았다. 용기가 솟았다. 이마를 비롯해 볼, 목, 손목, 손까지 꼼꼼히 닦았다.
겉으로 드러난 곳을 다 닦자 가장 큰 난관이 남았다. 라준은 괜히 주위를 살피면서 문호의 셔츠 단추를 풀었다.
“……오, 짱짱한데.”
빨래판이 사람 몸에 붙어 있었다. 보기 좋게 굴곡진 근육이 보기 좋았다. 죄책감은 어디로 가고 상체를 구경하는 눈이 과도하게 빛났다. 라준은 맨 아래 단추만 남기고 모조리 푼 후 빠르게 몸을 닦았다. 배꼽 아래까지 닦은 후에야 손을 거뒀다. 아무리 라준이라도 차마 바지까진 못 벗겼다.
겨우 땀 닦아 주는 건데 탈력감이 심했다. 짝사랑 3년, 차인 건 1일. 바로 잊지는 못해도 짝사랑했던 기간만큼의 세월이 지나면 문호를 잊을 수 있을 줄 알았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누군가를 좋아하는 마음은 제 마음대로 조절할 수 없었다. 라준도 마찬가지였다. 못 잊었다. 죽고 싶을 만큼 아프지도, 세상이 무너질 만큼 슬프지도 않았지만, 때때로 문호가 생각났다. 일상의 한구석에서 나를 잊지 말라는 듯 문호가 튀어나왔다.
남들이 게이 라이프 인생을 즐길 때 라준은 허리까지 쌓인 눈에 삽질하며 문호를 떠올렸다. 사실 삽질이 힘들어서 문호를 떠올리며 견딘 것도 있다. 강원도 씨발. 제대하고 그쪽으로는 고개도 안 돌렸다.
한 1년은 우울하더니 군 생활하며 천천히 잊었다. 병장 땐 생각나지 않는 날도 많았다. 그래서 됐다 싶었다. 제대하면 화려한 게이 인생이 꽃필 줄 알았다. 터미널에서 차문호만 만나지 않았다면.
짝사랑 시계가 드디어 멈춘 줄 알았더니, 그냥 잠시 고장 난 모양이었다. 문호를 보자마자 달칵, 달칵, 지조 없이 움직였다. 못된 성질머리 아니었으면 또 머저리처럼 졸졸 따라다닐 뻔했다. 아니, 지금도 충분히 얼간이 같다. 가정부가 뭐냐, 가정부가.
실실 웃으며 단추를 잠그던 라준이 멈칫했다. 어디선가 따가운 시선이 느껴졌다. 슬쩍 시선을 따라가니 은호가 멀뚱멀뚱 라준을 보고 있었다. 잠기운이 달아난 건 아닌지 눈이 아롱아롱했다.
“애들은 이런 거 보는 거 아냐.”
라준은 단호하게 손바닥으로 은호의 눈을 덮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아이의 입에서 색색 고운 숨이 퍼졌다.

*

다음 날 오전이 되도록 비는 멈추지 않고 내렸다. 어제처럼 장대비는 아니더라도 부슬부슬 끊임없이 내렸다. 라준은 어깨를 쓸면서 에어컨을 껐다. 대신 커튼을 걷고 창문을 열었다. 더운 바람과 습기가 끈끈하게 몸에 들러붙었다. 하늘이 잔뜩 흐린 탓인지 오전임에도 초저녁처럼 날이 어두웠다.
“이제 어쩐다냐.”
형제를 간호하다 보니 어제 처음으로 외박했다. 일어나자마자 나가려고 했지만, 아직도 문호와 은호의 상태가 좋지 않았다. 이런 일은 처음이라 라준도 난감했다. 삼레기나 라준이나 감기 한번 잘 걸리지 않았고, 걸려도 서로가 병간호해 줄 만큼 살갑지도 않았다.
라준은 죽은 듯이 자는 문호와 그의 옆구리에 딱 달라붙어 새근대는 은호를 보면서 뒤통수를 벅벅 긁적였다. 죽이라도 끓여야 하나, 고민하다가 시간을 확인하곤 깜짝 놀랐다.
오전 10시.
은호가 어린이집에 등원할 때를 훌쩍 넘긴 시간이었다.
“은호야, 은호야―”
문호가 아프니 라준이라도 챙겨야 했다. 이마의 열은 다 내렸고, 상태만 괜찮다면 직접 데려다줄 생각이었다.
“우웅…….”
“은호야, 어린이집 가야지.”
“……흐으으…….”
“……!”
꿈틀거리며 눈을 뜬 은호는 갑자기 울먹이기 시작했다. 깜짝 놀란 라준이 달래려 했지만, 그보다 아이가 먼저 손길을 거부했다. 마치 처음으로 돌아간 듯 잔뜩 경계하며 몸을 옹송그렸다. 섣불리 접근했다간 경기라도 일으킬까 싶어 라준은 순순히 손을 거뒀다.
“은호, 어린이집에 가기 싫어?”
“시러어…….”
“응, 알았어.”
가기 싫다는 애를 억지로 보내는 것도 이상했다. 라준은 휴대폰을 들고 거실로 나갔다. 은호 담임선생님에게 전화 걸었다. 신호가 간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상대방이 전화를 받았다.
“안녕하세요. 저 이라준인데요.”
―네, 은호 보호자분이죠.
“예. 오늘 은호가 좀 아파서 어린이집에 못 갈 것 같아서요.”
―아, 예상했어요. 날이 흐리거나 비 오는 날에는 항상 결석했거든요.
“네?”
―처음엔 걱정 많았는데, 형 되는 분께서 아이가 비 오는 날 돌아다니는 걸 싫어한다고 해서요. 그 뒤로는 전화로 간단하게 아이 안부만 확인하고 넘어가고 있어요.
“아, 그래요.”
―은호는 어떤가요? 혹시 어디 아픈 건 아니죠?
“조금이요. 어제 열이 약간 있었는데, 오늘은 다 내렸습니다.”
―다행이네요. 음……. 은호 집 라인은 아침 9시에 어린이집 차량이 지나가니까 언제든 보내시면 돼요. 10분 정도 정차하니까 늦을 거 같으면 미리 연락해 주면 되고요. 운전기사님 전화번호는요…….
“예. 알겠습니다. 네.”
은호가 아프다는 소리에 걱정되는지 교사는 몇 가지 주의사항을 더 말한 후에야 전화를 끊었다. 그때까지 라준은 목각인형처럼 고개를 끄덕이기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