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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력의 잔재(4화)


통화를 종료한 후엔 깊은숨을 내쉬었다. 시어머니 잔소리들은 며느리처럼 머릿속이 복잡했다. 어쨌든 어린이집 일은 해결했으니 간호에만 집중할 생각이었다. 형제 상태를 보니 집에 가긴커녕 오늘 저녁도 이 집에 있어야 할지 몰랐다.
라준은 방으로 돌아가 침대로 다가갔다. 은호는 다시 잠들었는지 고른 숨소리만 들렸다. 형의 옆구리에 찰싹 붙은 자세는 변함없었다.
손을 뻗어 문호의 이마를 짚었다. 아직도 뜨끈뜨끈했다. 가만히 그러고 있으려니 습윤한 공기가 느껴졌다. 에어컨을 끄고 창문을 열어 놓은 탓에 방에 습기가 가득했다. 그렇다고 차가운 바람을 계속 틀 수도 없었다. 침대에서 일어나 에어컨 주위를 배회하던 라준은 메뉴 버튼을 보곤 얼굴이 밝아졌다. 공기청정 기능이 있었던 것이다.
“오, 요즘 시대 좋아졌네.”
겨우 스물셋 먹은 청년의 입에서 나올 말은 아니었다. 라준은 공기청정 버튼을 누르고 창문을 닫았다. 귀를 간질이던 빗소리도 바로 차단됐다. 느낌 탓인지 문호의 숨소리가 한결 가벼워진 것 같았다.
라준은 욕실로 들어가 뜨거운 물에 수건을 적셨다. 어제처럼 문호 몸을 닦아 줄 생각이었다. 수건을 짜던 라준의 입에서 돌연 웃음이 터졌다. 가정부 아르바이트하러 왔다가 갑자기 보모가 되더니, 이젠 병간호까지 하는 자신의 처지가 어쩐지 우스웠다. 게다가 계약 시간도 아니었다.
“으휴.”
그래도 냉정하게 두고 갈 순 없었다. 그러기엔 오지랖을 많이 부렸다. 나가라는 문호 말에도 꿋꿋이 버텼으니 나을 때까지는 마음껏 간섭할 생각이었다. 아파서 그런지 힘없이 라준에게 휘둘리는 문호를 보는 재미도 꽤 쏠쏠했다. 과거의 복수는 아니지만, 그의 철벽을 한 겹 정도는 벗긴 듯해 나쁘지 않았다.
밖으로 나온 라준은 먼저 은호부터 확인했다. 더위 때문인지 체온이 좀 높았다. 적셔 온 수건으로 조심스럽게 보이는 부분부터 닦았다. 수건이 지날 때마다 흠칫하긴 했지만, 은호가 눈 뜨는 일은 없었다. 고무줄 바지를 당겨 하체까지 꼼꼼히 닦은 후에야 다음 차례인 문호에게 다가갔다.
“……뭐야.”
“헉.”
막 셔츠 가장 윗단추를 풀려던 라준이 식겁하며 물러났다. 언제 일어났는지 문호가 쳐다보고 있었다. 잠에 취한 목소리가 평소보다 더 낮았다. 라준은 결백을 증명하기 위해 손에 든 수건을 붕붕 휘둘렀다. 당황해서 변명의 말도 제대로 안 나왔다.
“나, 난 닦, 아니, 네가 열나서, 아니, 몸매가 빨판, 아니!”
찰싹!
너무 팔을 휘두른 탓인지 라준의 손에서 수건이 날아가 문호의 몸에 달라붙었다. 셔츠가 순식간에 젖었다.
“…….”
“…….”
“으헉! 미, 미안.”
후다닥 수건을 집은 라준은 어설프게 웃었다. 문호는 별말 없이 옷장을 가리키며 “셔츠.” 했다. 파블로프의 개처럼 라준은 바로 반응했다. 과장 좀 보태서 바람보다 빠르게 옷장에서 셔츠를 꺼내 왔다.
“왜 아직도 여기 있어.”
“빨리 가라고 재촉 안 해도 때 되면 알아서 간다.”
“……그게 아니……. 됐고. 너, 일하는 시간 아니니까 이제 가. 오늘은 나올 필요 없어.”
“…….”
눈 뜨자마자 쫓아내려는 문호의 냉정함에 라준의 볼이 불퉁하게 부풀었다. 자고 있어서 몰랐다지만 지금껏 지극정성으로 돌본 그로서는 서운함이 컸다. 그래서 라준은 셔츠를 넘기는 대신 눈앞에서 좍 펼쳤다.
“입혀 줄게.”
“이리 줘.”
“아니면 벗고 자든지.”
“이라준.”
“어떻게 할래?”
펄럭. 펄럭.
태극기 휘날리듯 라준은 셔츠를 흔들었다. 아픈 사람 상대로 유치한 짓을 한다는 자각은 있었다. 그 증거로 얼굴이 슬슬 달아올랐다. 예민한 문호가 눈치 못 챌 리 없었다. 그는 말없이 라준을 보다가 스스로 단추를 풀기 시작했다.
툭. 툭. 툭.
유려한 손가락이 지날 때마다 속살이 드러났다. 느닷없는 노출에 라준은 미처 대응하지 못했다. 어제와 달리 커튼을 걷어 놓아서인지 빨래판 같은 상체가 고스란히 보였다. 이성으로는 눈을 돌려야 한다는 걸 알고 있는데, 본능이 그를 막았다. 꾹 다문 입안으로 침이 고였다.
“언제까지 보고 있을 거야.”
“……자.”
라준의 패배였다. 문호의 어깨가 드러나는 순간 더는 같은 공간에 있기 힘들었다. 보통 남자가 여자의 알몸에 흥분하듯, 게이인 라준에게도 문호의 알몸은 치명적일 수밖에 없었다.
바로 고개 돌리고 셔츠를 내밀었다. 손에서 빠져나가는 셔츠가 눈물 나게 아쉬웠다. 문호를 약 올릴 수 있는 건수였는데 아직 내공이 한참이나 부족했다. 부스럭, 부스럭 옷 입는 소리를 들으며 라준은 입맛을 쩝 다셨다.
“이제 움직일 만하니까 돌아가. 은호 걱정도 하지 말고.”
“……알았어. 대신 죽, 아니, 그건 바로 만들긴 힘들고, 누룽지 좀 끓여 놓고 나갈 테니까 챙겨 먹어. 못 먹는 건 아니지?”
“그냥…….”
“그냥 못 가. 너는 굶어도 애는 먹어야 할 거 아냐. 아니면 애 돌보라고 돈 줘 놓고 내버려 두길 바라? 그건 아니잖아.”
자꾸만 밀어내는 문호에게 기어코 까칠한 말이 튀어 나갔다. 한고집 하는 문호도 라준이 이렇게까지 나오니 주춤했다. 부끄러움 따위 언제 피웠냐는 듯 라준은 척척 걸어가 문호의 어깨를 잡았다. 뒤로 힘껏 밀어 침대에 눕혔다. 그리고 이불을 잡아당겨 목까지 푹 덮어 주었다.
“시간이고 돈이고, 고용주라서 그런지 참∼ 계산적이다. 시간 낭비라고 생각 안 하고, 돈도 안 받아. 이건 그냥 호의야. 두 달이 짧은 것 같아도 꽤 길거든? 너란 놈은 냉정해서 동창이라도 끝까지 타인처럼 대할 수 있나 본데, 그 시간이면 난 정 많ㅈ이 들어. 지금도 들락 말락 해. 그래서 오지랖 좀 부릴 테니까 넌 받아먹기나 하시지.”
라준은 다다다 쏘아붙였다. 더해서 열 좀 받아 보라고 아기 다루듯 문호의 가슴을 토닥토닥 두드렸다. 대번에 잘생긴 얼굴이 험악하게 일그러졌다. 라준이라고 지진 않았다. 네가 어쩔 거냐는 시선으로 맞받아치다가 살짝 후회했다. 상대는 환자인데 다혈질 기질 못 참고 너무 질렀다 싶었다. 이러다 문호가 다 나으면 칼같이 일한 돈만 받고 쫓겨날지도 몰랐다.
큼, 헛기침한 라준은 분위기를 풀기 위해 화제를 돌렸다.
“은호 어린이집에 못 간다고 대신 전화했어. 선생님이 그러는데 비 올 때마다 안 간다고 하던데. 무슨 이유라도 있어?”
“……없어.”
“아니. 뭐. 설마, 비 올 때마다 이렇게 아픈 거냐? 그래서 못 가는 거고?”
“금원보가 말하지 않았던가?”
“어?”
“네가 지켜야 할 세 가지 조건.”
“…….”
쥐 죽은 듯이 조용히 다닐 것. 쓸데없이 참견하지 말 것. 집 안에서 일어나는 일은 외부에 흘리지 말 것.
정확히 기억났다. 라준은 황당하다는 얼굴로 문호를 쳐다봤다. 그냥 걱정했을 뿐인데 절대 원칙까지 들먹이니 형제가 아픈 게 국보급 비밀이라도 되는 것 같았다.
날이 흐리다. 비가 온다. 아프다.
궂은 날씨에 몸 아픈 건 흔한 일이었다. 왜 아픈지 물어보는 게 이상한 일은 아니란 소리였다. 흔하게는 감기가 대표적이었다. 그런데 문호가 이렇게까지 나오니 오히려 수상했다. 두 사람이 아픈 것에 비밀이 있는 듯―
잠깐. 비밀?
비밀이라고 하니까 수상한 점은 있었다. 비 와서 아픈 건 흔하지만, ‘항상’ 아픈 건 이상했다. 마치 습관처럼 고역을 치른단 얘기였다. 그것도 한 사람이 아니라 두 사람 다 아픈 건 확실히 이상했다.
하지만 의문은 가슴에 묻어 두었다. 생각보다 별일 아닐 수도 있었고, 완벽한 타인인 라준이 파고들 일도 아니라고 여겼다.
“알았어. 내가 입이 있어 쥐 죽은 듯이 다니는 건 좀 힘들고, 최대한 노력할게. 뭔 말을 못하겠다, 진짜.”
“오지랖 부린다고 했으니 할 일만 하고 가.”
“오∼냐. 간다, 가.”
라준은 툴툴거리면서 몸을 일으켰다. 손을 떼는 게 아쉽긴 했지만, 한 번만 더 손대면 회를 떠 버릴 것 같은 눈빛이 부담스러웠다.
“아. 오후에 올 거야. 밥도 챙겨야 하고.”
“오지 마. 은호가 아프면 평소보다 더 예민해.”
“나랑은 그래도 낯익혔잖아.”
“그런 문제가 아냐. 내 말대로 해.”
“……알았어. 나야 쉬면 좋지.”
말은 그렇게 해도 걱정 때문에 미적거리는 마음이 가득했다. 결국, 라준은 걱정 어린 말을 다시 내뱉을 수밖에 없었다.
“그럼 무슨 일 있으면 꼭 연락해라. 내 번호 알지?”
“가.”
“꼭 연락해? 꼭!”
도움 받아야 하는 건 문호인데 어째 라준이 애원하고 있었다. 문호는 귀찮다는 듯이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썼다. 명백한 대화 차단에 라준은 입을 비죽 내밀었다.
“간다.”
그래도 이별 인사는 빼놓지 않았다.
방 밖으로 나온 라준은 주방으로 들어갔다. 압력솥을 꺼내 밥을 지었다. 다 지은 밥은 전기압력밥솥에 옮기고 압력솥에 눌어붙은 누룽지는 물 부어 끓이기 시작했다. 솔솔 고소한 냄새가 퍼졌다. 누룽지는 그냥 먹어도 맛있지만, 아플 땐 물에 불려서 먹는 게 최고였다.
다 끓인 누룽지를 국그릇 두 개에 나눠 담고, 김치도 종종 썰어 담았다. 은호 김치는 씻어서 담았다. 가지런히 올린 접시를 들고 라준은 다시 방으로 돌아갔다. 조심스럽게 협탁 위에 내려놓은 후 말 거는 일 없이 방을 나왔다. 귀찮아서 안 챙겨 먹으려 해도 이런 식으로 눈앞에 놓아두면 먹게 되어 있었다.
이제야 할 일이 모두 끝났다. 라준은 어깨를 꾹꾹 주물렀다. 잠자리가 바뀌어서인지 몸이 좀 뻐근했다. 아무래도 한잔해야 할 듯싶었다. 라준은 바로 삼레기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오늘 달리자.]
어차피 오후 출근이라 딱히 할 일 없었다. 일찍 끝난 김에 모자란 술이라도 보충할 생각이었다. 라준은 벌써 밀려오는 술기운에 입맛을 쩝쩝 다셨다.

“오, 라준이!”
바에 들어선 라준을 가장 먼저 발견한 건 고니였다. 이미 한껏 취했는지 고니는 의자 위에 올라 흐느적거렸다. 이제 한창 달릴 시각인데 벌써 취한 걸 보면 미리 위장에 술을 퍼부은 게 틀림없었다.
반갑게 맞아 주는 고니와 달리 원보와 승철은 대충 손만 까닥였다. 라준은 메시지 창을 보며 실실대는 승철의 뒤통수를 딱 때리곤 비어 있는 자리에 앉았다.
“뭐야. 벌써 먹고 있었어?”
“고니 저 새끼만 못 참고 처먹은 거야.”
원보가 주판알을 탁 튕기며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문명의 이기인 전자계산기가 있음에도 원보는 학창 시절부터 주판만 튕겼다. 라준은 질린 안색으로 입을 열었다.
“너는 집도 잘사는데 그러고 싶냐?”
“나중에 독립하려면 알뜰해야지.”
원보의 확고한 신념에 라준은 혀를 찼다. 이 중에서 가장 부자가 금원보였다. 친가는 대기업에, 외가는 정치가 집안이다. 금수저를 물고 태어난 셈이다. 하도 돈을 밝혀서 처음에는 몰랐다.
산부인과 동기인 승철과 달리 금원보와 박고니는 고등학생 때 만났다. 그때도 고니는 천원 카드놀이로 학교를 제패했고, 원보는 주판을 들고 다니며 학생을 상대로 돈놀이했다. 말이 돈놀이지 사채나 다름없었다.
배고픈 승냥이들에게 원보는 구세주이자 악마였다. 매점의 유혹을 못 이겨 빌린 돈이 갚을 땐 두 배였다. 당연히 떼먹으려는 놈들이 많았지만, 원보에게서 도망치는 건 불가능했다. 거대한 집안을 제외하고라도 스토커처럼 따라다니는데 학을 뗄 수밖에 없었다. 자기 집 화장실에 있는 원보를 보고 경기 일으킨 학생 얘기는 유명했다.
그런 놈들과 엮이지 않았으면 좋았을 텐데, 어느새 친구가 되어 질긴 악연으로 묶였다. 만남은 평범했다. 시도 때도 없이 운동장으로 달려 나가고 싶은 사내새끼들이 가장 기피하는 부 활동이 독서부였다. 잠이 많았던 라준은 당연히 독서부에 들었는데, 그곳에 원보와 고니가 있었다.
그때도 고니는 원보의 하수인이었다. 부실에 들어가자 원보의 다리를 붙잡고 추하게 질질 짜고 있는 고니가 보였다. 당시 라준은 무척 피곤한 상태였기에 땅에 엎드린 고니를 못 보고 야멸차게 짓밟고 들어갔다. 그리고 책상에 엎어져 교사가 들어오기 전까지 숙면했다. 뒤늦게 독서부에 들어온 승철까지 합류해 그 이후로는 넷이서 붙어 다녔다.
원보 집안이 재벌이란 걸 안 건 그의 집에 초대받아 갔을 때였다. 으리으리한 저택에 떡 벌어진 입을 다물기도 전에 라준과 이레기는 바로 감금됐다. 그 이후로는 지옥이었다. 이미 부모님이 허락했다는 청천벽력 같은 소식과 함께 코피와 수면장애에 시달리며 혹독하게 굴려졌다. 서울대를 목표로! 평범한 부모가 거부할 수 있는 유혹이 아니었다. 집에는 주말밖에 못 갔다.
그때도 독했던 원보는 대학교에 들어가자 마치 숙성된 듯이 더 지독하게 굴었다. 돈귀신이 따로 없었다.
“캬! 꿀떡꿀떡 넘어가는구나!”
맥주를 들이켠 고니가 오징어 다리를 잡고 탁 던졌다. 냉큼 받아먹은 승철이 뒤이어 잔을 비웠다. 고니는 라준의 잔에 맥주를 따르며 은근슬쩍 속삭였다.
“일은 할 만해? 안 힘들어?”
“집이 넓어서 짜증 나긴 한데 밥하고 청소만 하는 거라 괜찮, 금원보 개새끼야!”
대수롭지 않게 대꾸하던 라준이 테이블을 박차고 원보의 멱살을 틀어쥐었다. 원보는 흘러내린 안경을 추켜올리며 눈썹을 찌푸렸다.
“뭐야.”
“애새끼가 있다고 말을 해 줬어야지! 빽빽 우는 애 달래느라 뒈지는 줄 알았잖아!”
“아, 맞다.”
“아, 맞다? 맞다―아? 내가 너를 몰라?! 알고도 말 안 한 거잖아! 얼마 먹었냐. 나 팔아먹고 얼마 먹었냐고!”
“…….”
“애까지 돌보는데 고작 120만 원? 육아비는 어디로 갔냐?”
“네 살은 알아서 잘 큰다.”
“미친놈. 웃기는 소리 하네. 하나하나 챙겨 줘야 하드만!”
“낄낄낄. 너 애까지 보냐?”
“으하하하. 원보가 한 방 먹였네!”
날뛰는 라준과 달리 원보는 덤덤했고, 승철과 고니는 놀리기 바빴다.
“미안하다.”
사과도 성의 없었다. 원보로선 드문 사과였지만, 라준은 속지 않았다.
“꽤 많이 빼돌렸나 보네? 이 새끼가.”
“칫.”
함께한 세월이 6년 가까이 됐다. 씨도 안 먹힐 모른 척이었다. 원보는 미적미적 지갑을 꺼냈다. 명품, 그것도 고가일 게 뻔한 지갑을 여니 고작 지폐 몇 장만이 보였다. 원보는 오만상을 찌푸리며 5만 원을 라준에게 내밀었다.
“자.”
“그거 내가 준 돈이지? 소개비.”
“칫.”
원보는 5만 원 한 장을 더 꺼냈다. 총 10만 원이 라준에게로 돌아갔다. 그제야 라준이 얌전히 자리에 앉았다. 조신하기까지 했다. 고니와 승철이 손가락질하며 라준을 비웃었다. 다혈질이고 때론 귀신같은 감을 자랑하지만, 넷 중에 가장 순진한 게 라준이었다. 원보가 순순히 10만 원을 줄 리 없단 걸 라준은 깨닫지 못한 게 틀림없었다. 라준에게 준 돈 외에도 원보에겐 이득이 남았을 터였다. 하지만 원보의 원한이 무섭기에 둘은 입을 꾹 다물었다.
“자자. 이제 라준이도 왔으니, 건배!”
넷의 잔이 맞부딪쳤다. 동시에 술을 비웠다. 잔을 내려놓은 승철이 씩 웃었다.
“애는 딸렸지만 돈 많겠다. 잘생겼겠다. 함락해 봐.”
“푸웃!”
라준이 맥주를 뿜었다. 고니가 어리둥절한 얼굴로 갸웃거렸다.
“응? 집주인이 여자야? 차문호라고 하지 않았어?”
“어. 차문호. 요즘엔 남자, 여자 안 가리잖냐. 어차피 고자 새낀데 남자면 또 어때.”
“웩! 그게 뭐야!”
생각만 해도 싫은지 고니가 헛구역질하다 라준을 빤히 쳐다봤다. 죽일 듯이 승철을 노려보던 라준이 애매하게 웃었다.
“흠? 고자보단 게이가 낫나?”
“돈 많으면 난 콜.”
“으익? 금원보 너도?”
“말이 그렇다고.”
아니, 진담 같은데.
셋은 동시에 원보를 외면했다. 라준은 벌떡거리는 심장을 다독였다. 조마조마했다. 간 떨어질 뻔한 라준의 심정도 모르고 승철은 느끼하게 웃었다. 절로 이가 갈렸다. 딴에는 도와준답시고 지른 모양인데 하나도 안 고마웠다. 라준은 팔을 잡고 주먹을 내질렀다. 감자 주먹에 승철이 삐질 식은땀을 흘렸다.
“그런데 차문호면 소문 더럽지 않았냐? 깡패에 여자 막 갈아 치운다고.”
“헛소문이야.”
“그러고 보니 원보 너 차문호하고 아는 사이라고 했지? 사람 구하는 거 맡길 정도면 가깝겠네?”
“뭐, 건너건너. 우리 집안하고 연결돼 있어서.”
“헐, 네 집 대기업이잖아.”
라준이 귀를 쫑긋거렸다. 방금 고급 정보가 훅 지나갔다. 안 그런 척하면서 원보 쪽으로 고개를 죽 뺐다. 승철이 옆구리를 푹 찔렀다.
“작작해라.”
라준은 모른 척 술만 꼴딱거렸다. 고니는 호기심이 돋았는지 문호에 대해 이것저것 캐물었다.
“가정부 쓸 정도면 걔도 부자겠다. 뭐하는 집안이래?”
“걔 엄마 쪽이 좀 사는 집안이야. 더는 노코멘트.”
“에이, 그게 뭐야.”
“어디 가서 입 털지 마. 얼마 전에 차문호 상 치렀어.”
“……뭐?”
라준이 불쑥 끼어들었다. 상이라니. 그러고 보니 일전에 터미널에서 만났을 때 문호는 상복을 입고 있었다. 그것도 직계 가족이 사망했을 때 찬다는 완장도 달고 있었다.
가까운 사람이 죽은 걸까. 며칠 전에 아파하던 게 떠올랐다. 괜히 더 안쓰러워졌다. 생각에 빠진 라준 대신 고니가 은근슬쩍 물었다.
“죽은 게 누군데?”
“걔 엄마.”
“…….”
이번엔 아무도 입을 못 열었다. 아무리 촐싹대는 박고니라도 모친상 앞에선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그럼 차문호는 아버지밖에 없겠네.”
“몰라.”
“뭐? 아버지를 몰라?”
“그런 게 아니라 자세히는 모른다고. 내가 걔 아버지까지 알아야 해?”
까칠한 원보의 반응에 고니는 얌전히 입을 다물었다. 라준은 힐끔 원보를 주시했다. 분명 아는 눈치였다. 다만, 말하기 싫은 무언가가 있는 것 같았다.
무거운 분위기를 환기하려는 듯 승철이 맥주 뚜껑을 땄다.
“우리가 차문호 친구도 아닌데 뭘 그렇게 궁금해하냐. 차문호 발닦개는 이라준이구만. 그 새끼 이야기는 그쯤하고, 한 잔씩들 해.”
“오오오. 따라, 따라.”
“이번 잔은 라준이 힘내라 정도의 의미냐?”
“아니. 이라준, 개고생해라.”
“크하하하. 맞다, 맞아. 이라준 개고생.”
“씹새끼가.”
이를 가는 라준은 무시한 채 셋은 잔을 높이 들었다. 쨍, 하고 잔이 부딪쳤다.
“노예 이라준을 위하여!”
“위하여!”
라준이 합류하기도 전에 셋은 냉큼 잔을 기울였다. 어이없게 응시하던 라준이 뒤늦게 중얼거렸다.
“날 위하여.”
처량 맞은 목소리였다.

술자리는 새벽 1시경에 파투 났다. 항상 그들의 술자리는 술이 가장 약한 고니가 테이블에 머리를 박는 순간 끝난다. 오늘도 그랬다. 라준이 오기 전부터 만취 상태였던 고니가 더는 못 견디고 테이블에 머리를 박았다. 쿵, 하고 무거운 머리가 내려앉는 순간 모두 일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가위. 바위. 보!”
“아, 짜증!”
주먹 앞에서 홀로 가위를 낸 승철이 머리를 쥐어뜯었다. 그래도 암묵적인 규칙이기에 고니를 둘러업었다. 승철이 택시를 잡는 사이 원보와 라준은 담배를 태웠다. 하얀 연기가 허공에서 뿌옇게 흩어졌다.
“라준아.”
“엉?”
“차문호 집에 다른 사람은 안 드나드냐?”
“본 적 없는데? 아. 첫날에 남자 하나가 있긴 했어. 선생님 어쩌고 하는 걸 보니 출판사에서 나온 사람인 것 같던데.”
“그래. 없단 말이지.”
끝말이 미묘했다. 무언가를 품고 있는 듯 말이 의미심장했다. 라준은 원보를 힐끗거렸다. 뭔가 있었다. 예민한 놈이라 쳐다보는 걸 눈치챘을 텐데도 모르는 척한다. 대놓고 물어보려다 라준은 말을 삼켰다. 왠지 깊게 파고들면 좋은 꼴 못 볼 것 같았다.
“혹시라도 누가 찾아오면 되도록 문 열어 주지 마라. 아니면 너라도 피해 있든지.”
“누가 차문호 죽이기라도 하냐?”
“비슷해.”
“뭐?!”
화들짝 놀란 라준의 손에서 담배가 튕겨 나갔다. 정작 핵폭탄급 말을 내뱉은 원보는 무료한 얼굴로 연기를 내뱉었다.
“진짜 죽인다는 건 아니고. 그 집안 사정이 좀 복잡해. 아무튼, 오지랖 넓게 참견하다간 뒷다리 찢어지니까 그럴 땐 숨죽이고 있어. 널 위해서 하는 말이야.”
“무슨 일인지는 말 안 해줄 거지?”
“어.”
“됐다. 그때 되면 알아서 할게.”
“퍽이나.”
원보는 어떤 면에선 미련할 정도로 올곧은 친구를 한심하게 응시했다. 다혈질인 주제에 정 많고, 배려 깊은 멍청이 이라준. 가시밭길도 아무렇지 않게 퍽퍽 밟고 지나갈 둔한 이라준.
원보는 문호에 대한 라준의 마음을 눈치채고 있었다. 그래서 밀어 넣었다. 빛 한 점 들지 않는 어둠의 성에. 파란 수염의 방에. 지금도 그 결정은 후회하지 않았다. 그 집에서 문호를 끌어내기엔 이라준이 딱이었다. 제가 그 역할을 하고 싶었지만, 원보는 문호를 위해 자신을 희생할 사람이 아니었다.
모두가 제 이기를 위해 행동한다. 마음 깊숙이 걸어 잠근 빗장 하나씩은 있다. 최후의 보루를 여는 사람은 많지 않다. 하지만 이라준을 할 수 있었다. 한 사람에 대한 연정을 6년째 간직하고 있는 지독한 놈이니까.
그래서 원보는 라준을 선택했다. 성별을 떠나서 한 인간으로서 라준은 믿을 만한 놈이었다. 그래도 친구라고 일을 꾸몄음에도 마음 한구석에선 걱정을 지울 수 없었다.
“조심해라.”
라준의 어깨를 탁 친 원보가 도롯가로 걸어 나갔다. 원보는 문호에 대해 라준이 더 호기심을 가지도록 입질만 했다. 비밀이 많아 보일수록 라준은 문호에게서 눈을 뗄 수 없을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의 판도라라면 반드시 열고 싶을 테니까. 자신은 두 사람이 다치지 않도록 옆에서 잘 지켜보면 그뿐이었다.
멀어지는 원보의 등을 쳐다보던 라준이 한숨을 내쉬었다. 복잡한 심경은 씁쓸한 입맛과 함께 오래도록 라준을 괴롭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