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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력의 잔재(2화)


“우와.”
전등을 켜니 화려한 주방 내부가 드러났다. 블랙 앤 화이트 콘셉트인지 하얀색 상부장, 하부장과 검은색 대리석 싱크대 상판의 조화가 심플했다. 거기에 여섯 명 정도는 앉을 수 있을 법한 대리석 식탁, 아일랜드형 조리대, 최신형 주방 기기까지. CF의 한 장면 같았다.
멍하니 서서 구경하던 라준의 얼굴이 이내 푸시시 식었다. 주부라면 모두가 탐낼 장소겠지만, 기본적인 요리만 하고 산 라준에겐 조리하는 공간일 뿐이었다.
라준은 가장 먼저 냉장고로 향했다. 스테인리스 재질의 냉장고는 크기부터가 초대형이었다. 네 칸의 문 중 냉장칸으로 추정되는 문을 열었더니 잘 포장된 채소나 생고기가 넉넉하게 들어 있었다.
“어디 보자…….”
라준은 서늘한 냉장고 내부를 뒤적거리며 저녁 식사 메뉴를 정했다. 이 정도 식재료면 오늘만이 아니라 한동안은 걱정 없을 듯했다. 먼저 채소부터 꺼내 손질하기 시작했다. 양파 껍질을 벗기고 식칼을 찾기 위해 하부장을 연 라준의 눈이 화등잔만 하게 커졌다.
“어억!!!”
기겁한 라준이 심장을 부여잡고 뒷걸음질 쳤다. 문 안쪽에서 검은색의 무언가가 꿈틀거렸다. 폴딩 도어 뒤편까지 달아난 라준은 고개만 내밀고 안을 살폈다.
문 바깥으로 통통한 손이 튀어나왔다. 뒤이어 팔과 몸통, 가는 목과 조막만 한 얼굴의 아이가 하부장 바깥으로 기어 나왔다.
“뭐― 뭐―”
라준은 말문이 막혔다. 아이가 있다는 것도 몰랐는데, 왜 싱크대 하부장에 숨어 있단 말인가. 문호를 닮은 얼굴이 아니었다면 귀신이라고 여길 뻔했다. 구불구불한 머리카락 사이로 까만 눈동자가 이리저리 움직였다. 역시 귀신은 아니었다.
안심한 라준은 언제 도망쳤냐는 듯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아이에게 다가갔다. 움찔, 하고 아이가 몸을 웅크렸다. 아이의 앞에 선 라준은 동글동글한 머리꼭지를 노려봤다.
뭐냐, 이 핏덩이는.
설마 문호의 아들일까 싶어 가슴이 철렁했다. 유부남이란 소리는 못 들었지만, 문호가 워낙 인간관계가 협소해서 라준이 모르는 사이에 결혼했을 수도 있었다. 겨우 스물셋이라 결혼했을 거라고 전혀 생각 못 했다. 아이도 딱 보니 세, 네 살은 되어 보였다. 그런데 부정하기도 힘든 게 아이의 얼굴에서 문호가 보였다. 화염처럼 질투심이 솟아올랐다.
라준이 생각에 잠긴 사이 아이가 살금살금 움직였다. 두 팔로 바닥을 짚더니 식탁 아래로 기어들어 갔다. 포동포동한 엉덩이가 이리저리 흔들리며 그림자 아래로 사라지려 했다. 라준은 쪼그려 앉아 아이의 발목을 붙잡았다.
“흐앙!”
“쉬. 괜찮아.”
말로는 괜찮다고 했지만, 정작 본인이 안 괜찮았다. 첫사랑이 결혼해 애까지 있을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멀쩡할 남자는 흔치 않을 것이다. 라준은 입을 비죽였다. 그래도 아이한테 화풀이할 생각은 없어서 살살 달랬다.
“안 잡아먹어. 엄마는?”
“흐어어어엉―!”
아이가 경기를 일으켰다. 바들바들 떨며 몸부림쳤다. 질문 하나 했다가 아이를 울려 버렸다. 라준은 당황하며 손을 거뒀다.
“엉아아아아―!”
등 뒤가 서늘했다. 아이가 손을 뻗었다. 라준은 반사적으로 몸을 움츠렸다. 어느새 다가왔는지 문호가 허리를 숙여 아이를 안았다. 거짓말처럼 아이의 울음이 멎었다. 문호는 그 상태로 거실로 가 버렸다. 뒤에 남은 라준에겐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라준은 문호의 뒷모습을 지그시 응시했다. 섭섭하기보단 의문이 더 컸다. 사람을 불러 놓고 아무것도 설명하지 않는 불친절함에, 집 내부는 밤처럼 어두컴컴한 데다, 정체 모를 아이까지 등장했다. 나름대로 생각이란 걸 해 보려던 라준은 이내 고개를 휘휘 내저었다. 복잡한 건 딱 질색이었다. 이것저것 추측하며 멋대로 재단하는 것도 성격에 맞지 않았다.
라준은 식탁을 잡고 일어섰다. 어차피 두 달은 이 집에 들락거려야 했다. 지금은 낯설어도 언젠가는 익숙해질 것이다. 그에게 중요한 건 문호와 한 공간에 있다는 사실이었다.
아직도 문호에게 마음이 남아 있는지는 모르겠다. 문호를 보면 여전히 가슴 떨리고 미련에 가슴이 답답하지만, 한편으로는 그와 잘되고 싶은 마음은 크지 않았다. 실패한 사랑이어서일까. 지금으로선 앙금처럼 남은 찌꺼기를 정리하고 싶은 마음이 더 컸다.
“쳇.”
물론, 그건 걱정할 필요 없을 듯했다. 사람을 사물 보듯 하는 데에 있던 정도 떨어질 지경이었다.
……완전히 떨어지진 않았다. 라준은 치밀어 오른 욕을 꾹 삼켰다. 이게 다 번쩍번쩍한 문호의 얼굴 때문이었다. 그 때문에 심장이 아직도 벌렁벌렁하는 거라고 라준은 애써 자신을 다독였다.

*

금원보 개새끼.
라준은 이를 갈았다. 역시 원보도 삼레기였다. 그놈이 그놈인데 배승철보다 낫다고 생각한 과거의 저에게 주먹을 날리고 싶었다. 애써 웃는 입가가 부르르 떨렸다. 최대한 선한 인상을 주려고 노력했지만, 상대방의 단호한 표정에는 바늘 하나 들어갈 틈도 없었다.
“보호자 맞다니까요.”
“네, 연락은 받았는데요. 아시죠? 요즘 세상이 워낙 험해서요. 신분증 확인 가능할까요?”
보육 교사가 손을 내밀었다. 라준은 그녀의 어깨 너머를 쳐다봤다. 분명 이곳은 대한민국인데 동화책에나 나올 법한 분홍색 성이 보였다. 건물 외벽엔 커다란 해바라기가 활짝 웃고 있고, 아치형의 간판엔 ‘해바라기 어린이집’이란 동글동글한 글씨체가 박혀 있었다.
라준은 지갑에서 순순히 신분증을 꺼냈다. 호감 가는 외모도 이곳에선 소용없었다. 보육 교사는 신분증과 라준을 번갈아 쳐다보며 확인을 마쳤다. 안전하다고 판단하자마자 환하게 웃으며 반겼다.
“맞네요. 죄송해요. 아이들을 보호하는 게 우리 일이라.”
“괜찮습니다. 당연한 일인걸요. 연약한 몸으로 고생하시네요.”
“오호호, 말이라도 고맙네요. 조금만 기다리세요. 은호 데리고 나올게요.”
서른 후반에다 두 아이의 엄마라 빈말로도 가냘픈 몸매는 아니지만, 칭찬은 언제 들어도 기쁜 법이다. 보육 교사는 홍조 띤 얼굴로 안으로 들어갔다.
라준은 울타리에 기댄 채 미간을 문질렀다. 일이 이렇게 된 건 어제에서 비롯됐다. 무시당한 게 기분 나빠도 일은 일이라 라준은 착실히 저녁 식사를 차렸다. 제가 할 수 있는 몇 없는 고급요리 중 하나인 돼지고기 두루치기를 메인으로, 밑반찬으로는 숙주나물무침과 깻잎찜, 가지볶음 등을 올렸다. 아이가 먹을 수 있게 따로 계란국까지 끓였다.
문호와 아이의 반응은 그저 그랬다. 문호야 원체 무표정이었고, 아이는 여전히 문호의 품에 안긴 채 라준 쪽으론 눈길도 주지 않았다.
“드세요.”
먼저 의자에 앉은 문호는 제 옆 의자에 은호를 앉혔다. 슬슬 눈치 보던 라준도 냉큼 맞은편에 않았다. 힐끔 닿았던 시선은 금세 떨어졌다. 쫓아낼 생각은 없는 모양이었다.
식사는 고요했다. 문호는 간간이 아이의 입에 국에 만 밥을 먹였다. 그 모습을 라준은 희한하게 응시했다. 고등학생일 때의 문호에게선 볼 수 없던 모습이었다. 항상 혼자인 데다 고독을 씹어 먹었는지 내내 무표정만 고수했었다. 그땐 그게 분위기 있어 보이고 멋있어 보였다. 이제 와 생각해 보니 문호는 그냥 남에게 관심 없는 종자였다.
어색한 침묵 속에서 라준은 꾸역꾸역 밥을 욱여넣었다. 돌연 할 일이 주어진 건 그때였다.
“내일 당신이 할 일이 있습니다.”
“네?”
“문자로 주소를 보낼 겁니다. 내일 그곳에 가서 은호를 데리고 오면 됩니다.”
“뭬? 누구요?”
“이 아이 말입니다.”
아이는 어느새 고개를 꾸벅거리고 있었다. 볼에 묻은 밥풀이 천진난만할 정도였다. 라준은 내내 궁금했던 걸 슬쩍 떠봤다.
“아……들입니까?”
“동생입니다.”
“아. 도, 동생이요. 아니, 근데 제가 왜…….”
“계약 사항에 포함했을 텐데요. 금원보에게 못 들었습니까?”
“…못 들었―!”
항의하려던 라준의 말이 끝나기 전에 문호는 아이를 안고 일어섰다. 미처 잡기도 전에 주방을 빠져나갔다. 내민 손이 허망했다.
번뜩 정신 차린 라준은 부지런히 뒷정리했다. 설거지를 끝내고 또 멍하니 있다가 집에 갈 시간이 되어서야 문호의 방을 쿵쿵 두드렸다.
“얘기 좀 합시다! 차문호 씨!”
하도 시끄럽게 굴어서인지 바로 문이 열렸다. 라준을 노려보는 문호의 시선이 날카로웠다. 라준은 기죽지 않고 제 할 말을 했다.
“이건 너무 부당합니다. 나는 아는 사이기도 하고 친구가 부탁해서 이 일을 하는 건데 어린아이 뒤치다꺼리까지―!”
말을 끝맺기도 전에 라준의 어깨가 턱, 밀렸다. 정신 차리기도 전에 멱살이 잡혔다. 코가 맞닿을 만큼 끌려갔다. 짜증 가득한 음성이 귀에 파고들었다.
“네가 나와 아는 사이이건, 호모 새끼건 나와는 상관없어. 네 할 일이나 해, 이라준.”
멱살이 풀렸다. 문이 쾅 닫혔다. 라준은 얼떨떨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뭐야, 날 기억하고 있잖아?”
좀 전의 불만은 씻은 듯이 사라졌다. 문호의 냉랭한 말도 라준에겐 별 영향 끼치지 못했다. 저절로 미소가 맺혔다.
경쾌한 걸음으로 집을 나선 라준은 나직이 중얼거렸다. ‘앞으로는 존대할 필요 없겠다.’고.
그리고 지금.
라준은 졸지에 가정부 겸 보모가 되었다. 문호 집에 갈 때가 되어서야 그에게 지시받은 일이 생각나 부랴부랴 어린이집에 들른 참이었다.
보육 교사가 차은호를 데리고 나왔다. 라준을 본 은호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금방이라도 울 것 같아 라준은 다급히 무릎을 꿇었다. 뇌물을 바치듯이 두 손을 내밀었다.
“자.”
라준의 손엔 인형이 들려 있었다. 무려 11,200원이나 투자한 뽀로로 인형이었다. 은호의 동그란 눈이 인형에게서 떨어질 줄 몰랐다. 라준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네가 아무리 낯 가려도 아이일 뿐이지. 어떤 아이가 뽀로로를 거부할쏘냐!
라준은 의기양양했다.
“흐아아아앙!”
……실패했다. 은호는 여느 아이가 아니었다. 통곡에 가까운 울음에 어린이집 교사와 라준이 쩔쩔맸다. 어쩔 줄 모르던 라준은 그냥 아이를 안아 들었다. 닿는 것조차 싫은지 은호가 한껏 버둥거렸다. 투정보다는 발악에 가까웠다.
“네 형한테 가는 거라니까. 자꾸 울면 두고 간다?”
전형적인 어린이 달래기 협박이었다. 우스운 건 항상 통한다는 거다. 은호도 바동거림을 멈췄다. 하지만 서러워서인지 눈물이 발간 뺨에 길을 내며 줄줄 흘러내렸다. 라준은 조심스럽게 눈물을 닦아 주며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그럼, 가 보겠습니다.”
“어휴, 괜찮겠어요?”
“네.”
괜찮을 때까지 어린이집에 있을 수도 없었다. 라준은 어쩔 줄 몰라 하는 교사를 뒤로한 채 어린이집을 나섰다.
터벅터벅 걷는 라준과 품에 안긴 은호의 모습은 제삼자가 보기엔 참으로 기묘했다. 아이는 훌쩍이고 청년은 세상 다 산 듯한 얼굴이었다. 지나는 사람마다 한 번씩 힐끔거릴 수밖에 없는 조합이었다.
문호 집까진 한 정거장 정도의 거리였기에 도보를 택한 라준은 여유 있는 마음을 가지려 했다. 아르바이트가 끝날 때까진 계속 은호를 마중 나갈 텐데 언제까지고 오늘처럼 애먹을 순 없었다.
“퐁당퐁당 돌을 던지자. 누나 몰래 돌을 던지자. 냇물아 퍼져라∼”
라준은 그나마 기억하고 있는 동요 한 구절을 부르며 한숨을 삼켰다. 초여름이라 아직 견딜 만할 날씨인데도 한낮을 조금 지난 시각이다 보니 피부가 따끈따끈했다. 더위에 강한 라준이 이 정도인데 은호라고 버틸 재간이 있을 리 없었다. 열이 오른 데다 하도 울어서 탈수 증상까지 보였다.
이제 집이 코앞이었지만 라준은 편의점에 먼저 들렀다. 내부에 들어서자 에어컨 바람이 선선하게 몸에 스며들었다. 움칫 몸을 굳힌 은호를 다독이며 라준은 진열대에서 대용량 요구르트를 집었다. 계산 후 빨대를 꽂아 은호에게 내밀었다.
“자, 먹어.”
“……시―”
“이거 안 먹으면 집에 안 간다.”
“히잉.”
바로 거부하려던 은호의 눈이 울멍울멍했다. 협박1과 마찬가지로 협박2도 바로 먹혔다. 요구르트와 라준을 번갈아 쳐다보던 은호가 손을 꼼지락거렸다.
라준은 아이가 편히 먹을 수 있게 창가 쪽 스툴에 앉았다. 무릎에 앉힌 은호는 신경 쓰지도 않고 바깥만 응시했다. 라준의 시선이 사라지자 은호는 조심스럽게 빨대를 물었다. 목이 마르긴 했는지 볼이 쉴 새 없이 울룩불룩했다. 도토리 저장해 놓은 다람쥐 볼 같다. 괜히 찔러 보고 싶은 마음에 손가락이 움찔거렸다.
“파!”
“풋!”
부지불식간에 웃음이 터졌다. 숨도 안 참고 먹었는지 빨대에서 입술을 떼자마자 은호의 입에서 괴상한 소리가 터졌다. 라준은 그제야 어깨에서 힘을 뺐다. 울보에 떼쟁이라 사람 힘들게 하더니 방심한 틈을 푹 찌르고 들어온다. 자신도 모르게 머리카락을 쑤석였다가 은호가 다시 울먹이려고 하자 금세 손을 뗐다.
잠시 숨을 고른 은호는 다시 빨대를 물었다. 라준은 아이의 정수리를 지그시 응시했다. 아직도 어린애는 어색하다. 정확히는 어떻게 다뤄야 할지 모르겠다. 애완동물이 아니다 보니 서투른 접근엔 경계심만 돌아왔다.
라준은 고개를 기울여 은호의 얼굴을 찬찬히 살폈다. 문호와 참 많이 닮았다. 문호와 어떤 여자의 아이라고 생각했을 땐 껄끄럽기만 했다.
문호에겐 여지도 없이 차였기에 라준이 간섭할 권리 따윈 없었지만, 그냥 마음이 싱숭생숭했다. 손톱 밑에 가시가 박힌 것처럼 거슬리는, 그런 버석거림.
그랬는데 차문호의 동생이라고 하니 썩 귀여워 보였다. 간사한 마음이었다.
은호는 객관적으로 봐도 귀여운 얼굴이다. 누가 차문호 동생 아니랄까 봐 긴 속눈썹에 코가 오뚝하고 피부가 하얗다. 가장 닮은 건 또렷한 눈매다. 빛에 닿아도 새까맣기만 한 눈을 보다 보면 자신도 모르게 홀리게 되는 것이다.
멍하니 은호를 감상하던 라준은 공기 빠진 소리에 퍼뜩 정신 차렸다. 다 먹었는지 은호는 빈 병만 꽉 쥐고 있었다.
“여기에 버리면 돼.”
라준은 테이블 밑의 일반 쓰레기통 뚜껑을 밀었다. 어서 넣으라는 듯 뚜껑을 팔랑여도 은호는 멀뚱히 보기만 했다.
“은호야?”
은호의 눈이 흔들렸다. 제 손 든 요구르트 병과 쓰레기통을 번갈아 쳐다보며 움직일 줄을 몰랐다. 무슨 의도인지 몰라 라준은 고개만 갸웃거렸다. 한참을 무언의 행동으로 표현해도 라준이 못 알아듣자 은호는 미적미적 빈 병을 쓰레기통에 버렸다. 요구르트 빈 병을 보는 눈에 미련이 한가득했다.
“아.”
그쯤에서야 라준은 무언가를 눈치챘다. 허탈한 숨이 나왔다. 이제 겨우 너덧 살의 어린아이다. 저 나이 또래의 아이라면 세상이 자기중심으로 돌아간다. 친척 조카만 봐도 그랬다. 감당하기 힘들 정도로 떼쓰는 것에 학을 떼곤 했다. 그런데 이 아이는―
라준은 찌푸린 미간을 긁적였다.
“가자.”
은호의 배와 허벅지 부근에 팔을 끼우고 번쩍 들었다. 아까와 달리 아이는 얌전히 몸을 맡겼다. 고작 요구르트 하나 사 줬을 뿐인데 경계심 한 꺼풀이 벗겨진 느낌이다. 완전히 마음을 연 건 아니지만, 기분 좋은 변화였다.
은호는 내내 쓰레기통에서 미련을 떼지 못했다. 라준이 움직이자 맥없이 고개를 숙였다. 바로 나갈 듯했던 라준은 발길을 돌려 진열대로 향했다. 등에 닿는 서늘한 냉기에 은호는 고개를 들었다. 아이의 입이 헤, 벌어졌다.
편의점을 나온 라준은 힘찬 걸음으로 다시 전진했다. 들어갈 때와 달라진 모습이 있다면 은호가 무언가를 소중하게 품고 있다는 거였다. 새 요구르트를 안은 은호가 라준을 쳐다봤다. 아이의 말간 눈이 라준을 담았다.

*

라준은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가 된 심정이었다. 낯선 세계에 떨어져 기묘한 인물과 신기한 일을 겪은 앨리스처럼, 라준도 아르바이트를 시작하면서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일과 맞부딪치기 시작했다.
일단, 이 집에 사람이라곤 형제밖에 없었다. 방에서 잘 나오지 않는 문호와 라준을 피해 다니기만 하는 은호만이 살고 있었다. 부모의 존재가 보이지 않기에 떨어져 사는 건 아닐까, 섣부른 짐작만 할 뿐이었다.
다음으론 기이한 형제의 태도였다. 나이 차가 꽤 나는 건 그렇다 치더라도 서로를 대하는 모습이 많이 달랐다. 기본적인 정이 없는 건 아닌 것 같은데, 동생 쪽이 더 집착을 보이는 경향이 있었다. 문호는 어쩔 수 없이 받아 준다는 분위기를 풍겼다.
보통 남자 형제간은 원수보다 못하다지만, 스무 살 넘게 차이 나는 형제에게까지 데면데면한 경우는 드물었다. 이 또한 자신의 편견이겠거니 하고 라준은 애써 이상한 생각을 떨쳤다.
그리고 마지막.
은호라는 아이의 행동을 라준의 상식선에선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라준도 아이를 기꺼워하는 성격은 아니라서 단시간에 친해질 거란 생각은 하지 않았다. 하지만 무려 뽀로로 인형에 요구르트 공물까지 바쳤는데, 은호는 아직도 생소한 타인을 보듯 라준을 무시했다.
문호가 얘기를 잘해 놨는지 어린이집으로 라준이 데리러 가도 첫날처럼 대성통곡하진 않았다. 다만, 당장에라도 울 준비가 되었다는 듯 발그스름한 눈가와 부들거리는 입이 라준의 죄책감을 사정없이 자극했다. 마치 범죄자가 된 기분이었다.
여기까진 어린아이 중에서도 유난히 까다롭구나, 하고 넘길 수 있었다. 문제는 집에 온 후의 행동이었다.
“은호야?”
집에 당도하자마자 은호는 냉큼 라준의 품에서 빠져나갔다. 돌아보는 일 없이 자신의 방으로 쏙 들어가 버렸다. 며칠째 이어지는 똑같은 행동에 라준도 이제 와선 포기할 지경이었다.
나직이 한숨 쉰 라준은 부지런히 움직였다. 그의 일과는 은호를 하원시킨 이후부터 시작했다. 라준 이전에도 가정부가 있었던 탓인지 집 안이 어지럽거나 하진 않았다. 먼지도 생활 먼지 수준이었다.
청소는 위에서 시작하고 아래에서 끝낸다!
집안의 대장인 고 여사―라준의 어머니―의 가르침대로 먼저 걸레로 가구부터 닦기 시작했다. 감각에 의지해 움직이던 라준은 슬쩍 문호 방문 쪽을 쳐다봤다.
요 며칠 이 집에 드나들면서 느낀 게 있다면 문호는 방에서 나오는 일이 극히 드물었다. 즉, 지금도 나올 가능성이 적다는 거였다.
라준은 슬금슬금 움직여 암막 커튼을 잡았다. 소리 안 나게 조심하면서 한쪽으로 밀었다. 막혀 있던 빛이 터지듯 내부로 파고들었다. 컴컴하기만 하던 거실이 빛으로 환해졌다.
“이제야 살 것 같네.”
냉막한 문호의 분위기 때문에 집 안에 있는 건 섣불리 건들지 못했다. 뭐 하나라도 건드리면 살벌하게 쪼일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며칠은 라준도 버텨 보려 했다. 초인적인 오감을 발휘해 어두운 집 구석구석을 깨끗이 청소했다.
하지만 빛이 있는 것과 없는 건 천지 차이였다. 아무리 꼼꼼히 청소해도 눈으로 확인할 수 없으니 답답할 수밖에 없었다. 어차피 문호는 방에서 나오지 않으니 커튼만 살짝 걷고 빨리 해치울 생각이었다.
“으, 먼지.”
빛의 산란에 흩날리는 먼지 조각이 눈에 들어왔다. 생활 먼지란 걸 알아도 더러워 보이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라준의 자취방이라면 신경도 안 썼겠지만, 이곳엔 아이가 있었다.
은호는 딱 봐도 몸이 약해 보였다. 어디선가 주워들은 얘기론 몸 약한 아이는 기관지도 안 좋을 가능성이 커서 특별히 신경 써야 한다고 했다. 특히, 서울은 중국발 미세먼지가 시시때때로 쳐들어오기 때문에 더 주의해야 했다.
라준은 멈췄던 청소를 재개했다. 가구 위의 먼지를 훔치고 박박 물걸레질했다. 창문 틈새도 빼놓지 않았다.
촤륵.
선반 아래를 닦던 라준이 멈칫했다. 다시 시야가 어두워졌다. 여기만 닦으면 끝인데 뜻밖의 방해를 받았다. 성질내며 일어서려던 라준은 흠칫했다.
“차문호?”
문호였다. 창가에 선 그는 커튼을 잡은 채 라준을 쳐다보고 있었다. 표정은 잘 보이지 않았지만, 좋지 않은 분위기는 느껴졌다. 라준은 어색하게 웃으며 손에 든 걸레를 들었다.
“청소할 때만 열려고 했어……요.”
반말인지 존댓말인지 모를 말이 튀어나왔다. 마음 같아선 반말하고 싶었지만, 상대는 고용주였다. 이런 아르바이트는 해 본 적 없으므로 라준도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커튼 걷지 마.”
“……뭐?”
“커튼도 걷지 말고, 거실 불도 켜지 마. 2층에도 올라가지 말고. 경고야.”
“그럼 어떻게 청소하……냐요.”
“주방 불 켜고 해.”
“야! 그건 너무 이상……!”
“이라준.”
“…….”
“일 그만두고 싶으면 네 멋대로 하든지.”
“아, 알았어. 알았다고.”
문호의 극단적인 말에 라준은 바로 수긍했다. 뒤늦게 “……요.”를 덧붙이는 것도 잊지 않았다.
“네가 어떻게 행동하든 별 상관 안 하겠지만, 이 집에 들어온 이상 내가 하지 말란 건 하지 마.”
“알았다……요.”
“……그냥 반말해.”
“어, 근데 진짜 켜면 안 돼? 뭐가 보여야 청소하지.”
한 번 더 요구해 봤지만, 돌아온 건 무시뿐이었다. 문호는 할 말 다 했다 싶은지 바로 방으로 들어갔다. 미련 없이 닫히는 문에 라준은 발을 쾅 굴렀다. 절로 손이 부들거렸다. 만약 삼레기가 그랬다면 이단 옆차기는 물론 머리칼 헤드뱅잉까지 하며 응징을 가했을 터였다.
“내가 참는다, 참아.”
왜 전 고용인들이 도망갔는지 이해됐다. 원보가 조건을 어긴 대가로 계약 해지된 거라고 했지만, 라준은 도망이라고 확신했다. 집이 어두운 건 둘째 치고 주인이 저렇게 까다로우니 비위 맞추기 힘들었을 것이다.
라준이야 목적이 있으니 목 끝까지 차오른 그만둔다는 소리를 겨우 억누를 수 있었다.
가구 걸레질을 마친 라준은 도구함에서 청소기를 꺼냈다. 바닥까지 걸레로 쓸고 닦으라고 할까 봐 걱정했는데 다행히 청소기 사용까진 별말 하지 않았다. 고급 청소기인지 저소음이라 봐주는 걸지도 몰랐다.
“음. 흠흠흠. 흠흠.”
거침없이 전진하던 청소기가 벽에 막혔다. 바로 방향을 돌리려던 라준이 멈칫했다. 위로 올라가는 계단이 바로 앞에 있었다. 문호가 올라가지 말라던 2층 계단이었다.
잠시 고민하던 라준은 바로 미련을 떨쳤다. 청소 귀신도 아닌데 하지 말란 곳을 굳이 할 필요는 못 느꼈다. 일이라서 열심히 하는 거지, 라준은 그다지 깔끔한 성격이 아니었다. 마무리로 은호 방문 앞을 슥 밀고선 청소기 전원을 차단했다.
달칵.
그때, 방문이 열렸다. 라준은 반가운 얼굴로 은호를 맞았다.
“아, 은호 나왔어? 형이 은호 방 청소 좀 해도 될…….”
쾅.
살짝 열렸던 문은 바로 닫혔다. 라준의 말이 끝나기도 전이었다. 환하게 웃던 얼굴이 어색하게 굳었다. 아득 깨문 입술 사이로 억눌린 소리가 새어 나왔다.
“느가 차무노 돈샌 아니를까바.”
어지간히 열받았는지 치아 곳곳에서 발음이 뭉개졌다. 라준은 콧김을 킁 내뿜곤 몸을 돌렸다. 삐진 게 딱 보였지만, 불행하게도 알아주는 사람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