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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
그러나 그가 알기론 제 어머니 역시 아주 오래전 이와 같은 일을 저지른 걸로 알고 있다. 덕분에,
―어허. 그런 식으로 말하진 않았어.
아버지랑 결혼도 하지 않았던가.
엉엉― 울어 버릴 기세로 제게 대답을 요구하는 어머니의 목소리를 듣고 그가 전화를 끊어 버릴까 고민하는 사이, 주변에 있었던 건지 아버지 규영의 목소리 역시 들려왔다. 실시간으로 생중계되는 부부의 대화를 원우는 반강제적으로 들어야만 했다.
―선…… 아니, 당신이 그랬잖아요! 원우를 책임져야 할 ‘누군가’를 만나고 왔다고! 책임져야 할 일이라면 당연히 당한 거죠!
―그렇게 생각해?
―네! 그게 아니라면 누가 우리 원우 같은 강한 남자를 눕히겠어요. 아니 그전에, 정말 여자가 맞는 거죠? 설마 여자가 아니라면……
여자, 맞습니다.
원우는 한숨을 내쉬며 답하기 위해 입을 벌렸지만 그보다 먼저 규영이 희수의 의문을 풀어 주었다.
―여자 맞아. 대신 강해 보이더군.
―강하다고요?
―유도를 해서 그런가.
―유, 유도?
―여자 선수들도 웬만한 남자들을 눕힐 수 있지 않을까? 그 때문에 우리 원우가 예전의 나처럼 당했……
―으, 으악! 원우도 듣는데 무슨 소리를 하는 거예요, 진짜!
부모님이 만나게 된 계기에 대한 이야기를 그가 알게 될까 봐 두려워하는 건지, 어머니는 빽 소리를 질렀다. 이미 다 알고 있어요, 어머니. 몇 해 전 아버지와 형, 그리고 누나와의 술자리에서 유독 기분이 좋아 보이시던 아버지가 모든 사실을 털어놓았다는 걸 알 리 없는 어머니에게 말을 할까 하다 말았다. 원우는 지금쯤 아버지의 앞에서 얼굴을 빨갛게 붉히고 있을 어머니를 떠올려 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야, 차원우! 밥은 대체 언제 주냐?”
대답을 할까 말까, 전화를 끊을까 말까 등등. 몇 가지 선택의 기로에 놓여 있던 원우는 거실 쪽에서 들려오는 커다란 목소리에 인상을 썼다. 귀가 얼얼할 지경이었다. 손에 쥐고 있는 핸드폰에서는 여전히 부모님들의 대화 소리가 들려왔고, 거실에서는 밥을 달라며 아우성치는 동료들의 음성이 쏟아졌다.
‘후우.’
일단은 상황을 정리할 필요성이 있다는 걸 깨달은 그는 길게 숨을 내쉰 뒤 입을 열었다.
“어머니, 지금은 통화를 하기 꽤 곤란한 상황입니다.”
―어?
“나중에 다시 연락드릴게요.”
―원……
불효를 저질렀다. 하늘과 같으신 어머니께서 말씀을 하고 계시는데 전화를 끊어 버리다니. 양심의 가책을 느끼며 원우는 입술을 깨물었다.
“차원우우!”
한쪽의 상황은 정리되었지만 다른 한쪽의 상황은 여전히 소란스럽다. 원우는 차갑게 굳어진 얼굴을 거실 쪽으로 돌렸다. 그리고는 먹이를 기다리는 아기 새마냥 울부짖는 자신의 동료들이 있는 곳으로 터벅터벅 걸어갔다.
본인들이 운동선수라는 걸 자각하고는 있는 건지.
오랫동안 준비해 온 아시안게임이 끝난 지 3주가 흘렀고, 그 후로 한 달 동안은 그간 고된 훈련을 했던 그들에게 보상 차원에서 휴식이 주어지기는 했지만 이렇게 밤새도록 술을 마시는 건 차원우로서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아니, 그전에 왜 하필 내 집에서 술을 마시냔 말이야. 나중에 어떻게 처리하라고.
알코올이라곤 입에 대지도 않는 원우는 짜증스러운 눈을 하고 이곳저곳에 널브러져 있는 동료들을 흘긋거렸다. 물론, 마구 늘어져 있는 저 동료들 중 한 명이 어제 긴 시간 사귀어 온 여자 친구에게 거하게 차여 버렸기에 그들도 평소 입에 대지 않던 술을 마셨다는 특별한 사정이 있기는 했으나, 불만족스러운 건 마찬가지다.
원우는 곳곳에서 풍겨 오는 알코올의 알싸한 향기에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발뺌하는 그 여자를 꽉 붙들기 위한 철저한 계획을 세우고 있어도 모자랄 판에 들이닥친 빌어먹을 동료들을 아니꼬운 시선으로 바라보던 원우는 들고 있던 햇반 몇 개를 그들의 얼굴 위로 던졌다.
“오, 왔…… 악!”
서늘한 냉기를 풍기는 원우를 발견하고 씩 웃으려던 친구 강준은 정통으로 햇반을 맞고는 단말마의 비명을 질렀다. 원우는 이게 무슨 짓이냐 소리치는 그를 보며 냉랭하게 말했다.
“니들이 직접 해 먹어.”
강준은 이를 갈았다.
“손님을 뭐 이렇게 대접해!”
손님은 무슨.
“쳐들어온 건 니들이야.”
억울해하는 강준 외 2명의 씰룩거리는 입술을 못 본 척하며 원우는 근처 소파에 자리를 잡았다. 피곤하다. 아침부터 머리가 어지러울 만한 일을 두 가지나 겪어서인지 예민해졌다. 휴식이 필요해. 그는 씩씩거리며 햇반을 들고 일어나는 동료들을 흘긋거리다 리모컨으로 TV를 켰다.
아침 시간이라 그런지 교양 프로그램이 진행 중이다. 그런 류의 방송들을 즐겨 보진 않는 터라 음악 방송이나 들을까 싶어 채널을 돌리려던 그는 이상하게 익숙한 얼굴의 여자가 브라운관 안에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버튼을 누르려던 원우의 손가락은 자연스럽게 굳어졌다.
‘그 여자다.’
3주 전, 그에게 잊을 수 없는 기억을 선사해 준 바로 그 여자. 엄청난 힘을 소유한 그 여자. 그를 홀라당 흔들었으면서 발뺌하는 그 발칙한 여자. 그러니까 이름이……
<오늘의 주인공입니다! 이번 아시안게임에서 대한민국 국민들에게 금메달이라는 기쁨을 안겨 준, 유도 국가대표― 조연오 선수!>
사회자의 목소리가 끝을 맺음과 동시에 우레와 같은 박수갈채가 쏟아졌다. 사회자를 비추던 카메라는 출연자가 걸어 나오는 공간 쪽으로 향했고, 그가 기억하고 있던 수수한 모습과는 다르게 화려하게 치장을 한 여자가 몹시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손을 흔드는 모습이 보였다.
그러고 보니 이 방송은 일주일 전 원우에게도 출연을 요청했던 그 방송이었다. 하지만 방송 울렁증이 있다는 핑계를 대며 단호하게 거절했었던 자신과는 달리 조연오는 출연을 결정한 모양이었다.
원우는 평소와는 극명한 차이를 보여 주는 여자의 쑥스러워하는 얼굴을 가만히 지켜보기로 했다.
<어서 오세요, 조연오 선수.>
<아…… 바, 반갑습니다.>
<많이 쑥스러워하시네요. 방송은 처음이세요?>
<네? 아…… 네. 지금까지 한 번도 방송에 출연해 본 적이 없어서……. 그런데 정말 카, 카메라가 많긴 하네요! 하하하!>
여자는 땀을 줄줄 흘릴 기세로 소리쳤다. 기백이 넘치기도 했지만 왠지 귀엽기도 했다. 원우는 따라 웃어 버렸다. 이상한 여자야, 정말.
<너무 긴장하지 마세요. 겨우 카메라 앞인걸요. 여태껏 우리 조연오 선수가 대결해 온 상대들에 비해서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하시면 편할 거예요.>
<예? 그, 그럼 더 긴장이 되는데…….>
<흠흠. 어쨌거나, 본격적으로 조연오 선수에 대해 알아보는 시간을 먼저 가져 볼게요! 일단 영상, 보시죠!>
긴장을 풀어 주기 위해 꺼낸 사회자의 말에 더욱 당황하는 여자가 재미있었다. 그 여자의 반응에 놀란 사회자가 재치를 발휘하여 얼른 다른 곳으로 화제를 돌리는 바람에 난처한 표정을 짓는 얼굴을 보지 못했다는 것이 좀 아쉽긴 하지만.
원우는 이윽고 흘러나오는 자료 영상을 하염없이 바라봤다.
조연오.
3주 전 폐막한 아시안게임의 ―52KG급 여자 유도 결승전에서 모두의 예상을 뛰어넘고 일본의 강적을 물리치며 당당하게 금메달을 딴 올해 스물넷의 유도 국가대표 선수.
국제경기 첫 메달을, 게다가 예상치 못한 금메달을 따기까지의 과정이 TV에서 생생하게 방영되고 있었다. 저도 그녀와 같은 운동선수에다 국가대표인지라 그녀가 얼마나 노력했는지 짐작이 가능해서 원우는 TV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대체 밑반찬은 어디 있는…… 뭘 그렇게 열심히 봐?”
뜻하지 않게 접하게 된 아침 방송 덕분에 그가 예의주시했던 여자에 대한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제 긴장이 좀 풀렸는지, 카메라 앞에서 제 이야기를 거리낌 없이 늘어놓는 여자를 빤히 들여다보던 원우는 신경질을 내며 부엌에서 나오는 강준을 발견했다.
“어? 저 여자! 저 여자 그 여자 아니야?”
천하의 차원우가 대체 무엇을 보는가 싶어 덩달아 TV를 응시하던 강준의 눈동자는 금세 동그래졌다. 원우는 기겁하는 그를 의아하게 바라봤다.
“그 여자?”
강준은 세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왜, 선수촌에 있을 때 술 취해서 네 방으로 쳐들어왔던 그 이상한 여자!”
순간 몸을 움찔거렸다. 잊은 줄 알았는데, 기억하고 있었던 건가. 원우는 ‘저 여자 자원봉사자 아니었구나?’라고 중얼거리는 강준을 쳐다봤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 당시 그 여자는 ‘술’에 취했던 건 아니었다. 아무리 코를 킁킁거려도 알코올 냄새를 맡을 순 없었으니까. 뒤늦게 그 여자에게 듣기론 ‘탄산’에 취하는 특이체질을 가지고 있다고 하던데, 그게 사실인 건지는 모르겠다. 인터넷을 뒤적이니 그런 독특한 사람도 있다고는 하지만 어찌 알겠나. 그의 몸을 노리기 위해 작정을 했던 건지도.
어쨌든 강준의 오해를 굳이 정정해 줄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던 원우는 놀라워하는 그에게 심드렁하게 말했다.
“자원봉사자가 그렇게 늦은 시간에 선수촌에 남아 있겠어?”
“뭐, 그건 그렇지만. 그런데 저 여자, 그때 잘 들어갔는지 모르겠네.”
평소 원우의 무시를 한 몸에 받는 강준이지만 가끔 그를 놀라게 만든 적이 있기는 했었다.
오늘이 바로 그런 날인가.
정확하게 핵심을 짚어 버리는 강준의 말에 원우는 화들짝 놀랐다. 강준은 기억을 더듬으며 미간을 좁히다 굳어진 원우를 발견했다. 원우는 강준의 눈이 점차 가늘어지는 것을 보고 심장이 미친 듯이 뛰는 걸 느꼈다. 제기랄.
“그러고 보니 말이야.”
“…….”
“나, 저 여자가 네 방에서 나가는 걸 본 적이 없는…….’
“밥.”
“어?”
“밥, 해 줄게.”
원우는 말이 끝남과 동시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강준이 눈을 크게 뜨고 그를 응시했다.
“그럼 햇반 안 먹어도 돼?”
“어.”
“이야, 차원우 네가 웬일이냐? 밥도 다 해 주고! 역시 의리남!”
“…….”
낄낄거리며 박수를 치고는 부엌으로 달려가 다른 동료들에게 ‘원우가 밥 해 준대!’라고 외쳐 대는 강준을 보며 원우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사건의 진상을 밝혀내기 직전이었지만 밥을 준다는 말 한마디에 의심 따윈 훌훌 털어 버리는 강준은 참으로 단순했다. 원우는 안도의 한숨을 뱉어 내며 TV를 끄기 위해 리모컨을 쥐었다.
<이번엔 조금 개인적인 질문인데, 물어봐도 될까요?>
<네, 말씀하세요.>
<우리 조연오 선수는, 애인 있어요?>
여전히 조연오와의 인터뷰는 계속되고 있었고, 전원 버튼을 누르려던 원우의 움직임은 멎었다. ‘애인’이라는 단어에 소스라치게 놀라는 여자의 모습이 보였다. 얼른 부엌으로 오라 외치는 강준의 말을 잠시 한 귀로 흘리고 원우는 TV에 집중했다.
<애인…… 이요?>
얼굴을 빨갛게 붉히는 여자는 어쩔 줄 몰라 하는 것 같았다. 사회자의 짓궂은 멘트가 이어졌다.
<운동도 잘하시고 얼굴도 예쁘시니 남자들이 많이 따르실 것 같은데요?>
<그, 그런가요?>
<조 선수의 나이가 적은 편은 아닌데 애인, 있으시죠?>
“딱 보니 없구만.”
아무리 불러도 오질 않는 원우를 직접 데리러 오기로 했는지, 어느새 그의 옆자리에 선 강준이 TV를 쳐다보며 심드렁하게 말했다. 원우는 가슴을 탕탕 치며 외치는 강준의 말을 들었다.
“내 장담하지. 저 여자, 모솔이야, 모솔.”
저 역시 모솔인 주제에 연애 꽤나 해 봤다는 얼굴을 하고 있는 강준이 우습다. 원우는 혀를 끌끌 찰까 하다 픽 웃으며 TV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뭔가 말을 하려다 말고는 쓰게 웃는 연오가 입을 여는 게 시야로 들어왔다.
<안타깝지만…… 아직 애인은 없어요.>
뭐?
미간을 좁히는 원우와는 달리 큭큭 웃으며,
“거봐! 내 말 맞지?”
라고 외치는 강준의 모습은 대조적이었다.
그러나 그가 알기론 제 어머니 역시 아주 오래전 이와 같은 일을 저지른 걸로 알고 있다. 덕분에,
―어허. 그런 식으로 말하진 않았어.
아버지랑 결혼도 하지 않았던가.
엉엉― 울어 버릴 기세로 제게 대답을 요구하는 어머니의 목소리를 듣고 그가 전화를 끊어 버릴까 고민하는 사이, 주변에 있었던 건지 아버지 규영의 목소리 역시 들려왔다. 실시간으로 생중계되는 부부의 대화를 원우는 반강제적으로 들어야만 했다.
―선…… 아니, 당신이 그랬잖아요! 원우를 책임져야 할 ‘누군가’를 만나고 왔다고! 책임져야 할 일이라면 당연히 당한 거죠!
―그렇게 생각해?
―네! 그게 아니라면 누가 우리 원우 같은 강한 남자를 눕히겠어요. 아니 그전에, 정말 여자가 맞는 거죠? 설마 여자가 아니라면……
여자, 맞습니다.
원우는 한숨을 내쉬며 답하기 위해 입을 벌렸지만 그보다 먼저 규영이 희수의 의문을 풀어 주었다.
―여자 맞아. 대신 강해 보이더군.
―강하다고요?
―유도를 해서 그런가.
―유, 유도?
―여자 선수들도 웬만한 남자들을 눕힐 수 있지 않을까? 그 때문에 우리 원우가 예전의 나처럼 당했……
―으, 으악! 원우도 듣는데 무슨 소리를 하는 거예요, 진짜!
부모님이 만나게 된 계기에 대한 이야기를 그가 알게 될까 봐 두려워하는 건지, 어머니는 빽 소리를 질렀다. 이미 다 알고 있어요, 어머니. 몇 해 전 아버지와 형, 그리고 누나와의 술자리에서 유독 기분이 좋아 보이시던 아버지가 모든 사실을 털어놓았다는 걸 알 리 없는 어머니에게 말을 할까 하다 말았다. 원우는 지금쯤 아버지의 앞에서 얼굴을 빨갛게 붉히고 있을 어머니를 떠올려 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야, 차원우! 밥은 대체 언제 주냐?”
대답을 할까 말까, 전화를 끊을까 말까 등등. 몇 가지 선택의 기로에 놓여 있던 원우는 거실 쪽에서 들려오는 커다란 목소리에 인상을 썼다. 귀가 얼얼할 지경이었다. 손에 쥐고 있는 핸드폰에서는 여전히 부모님들의 대화 소리가 들려왔고, 거실에서는 밥을 달라며 아우성치는 동료들의 음성이 쏟아졌다.
‘후우.’
일단은 상황을 정리할 필요성이 있다는 걸 깨달은 그는 길게 숨을 내쉰 뒤 입을 열었다.
“어머니, 지금은 통화를 하기 꽤 곤란한 상황입니다.”
―어?
“나중에 다시 연락드릴게요.”
―원……
불효를 저질렀다. 하늘과 같으신 어머니께서 말씀을 하고 계시는데 전화를 끊어 버리다니. 양심의 가책을 느끼며 원우는 입술을 깨물었다.
“차원우우!”
한쪽의 상황은 정리되었지만 다른 한쪽의 상황은 여전히 소란스럽다. 원우는 차갑게 굳어진 얼굴을 거실 쪽으로 돌렸다. 그리고는 먹이를 기다리는 아기 새마냥 울부짖는 자신의 동료들이 있는 곳으로 터벅터벅 걸어갔다.
본인들이 운동선수라는 걸 자각하고는 있는 건지.
오랫동안 준비해 온 아시안게임이 끝난 지 3주가 흘렀고, 그 후로 한 달 동안은 그간 고된 훈련을 했던 그들에게 보상 차원에서 휴식이 주어지기는 했지만 이렇게 밤새도록 술을 마시는 건 차원우로서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아니, 그전에 왜 하필 내 집에서 술을 마시냔 말이야. 나중에 어떻게 처리하라고.
알코올이라곤 입에 대지도 않는 원우는 짜증스러운 눈을 하고 이곳저곳에 널브러져 있는 동료들을 흘긋거렸다. 물론, 마구 늘어져 있는 저 동료들 중 한 명이 어제 긴 시간 사귀어 온 여자 친구에게 거하게 차여 버렸기에 그들도 평소 입에 대지 않던 술을 마셨다는 특별한 사정이 있기는 했으나, 불만족스러운 건 마찬가지다.
원우는 곳곳에서 풍겨 오는 알코올의 알싸한 향기에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발뺌하는 그 여자를 꽉 붙들기 위한 철저한 계획을 세우고 있어도 모자랄 판에 들이닥친 빌어먹을 동료들을 아니꼬운 시선으로 바라보던 원우는 들고 있던 햇반 몇 개를 그들의 얼굴 위로 던졌다.
“오, 왔…… 악!”
서늘한 냉기를 풍기는 원우를 발견하고 씩 웃으려던 친구 강준은 정통으로 햇반을 맞고는 단말마의 비명을 질렀다. 원우는 이게 무슨 짓이냐 소리치는 그를 보며 냉랭하게 말했다.
“니들이 직접 해 먹어.”
강준은 이를 갈았다.
“손님을 뭐 이렇게 대접해!”
손님은 무슨.
“쳐들어온 건 니들이야.”
억울해하는 강준 외 2명의 씰룩거리는 입술을 못 본 척하며 원우는 근처 소파에 자리를 잡았다. 피곤하다. 아침부터 머리가 어지러울 만한 일을 두 가지나 겪어서인지 예민해졌다. 휴식이 필요해. 그는 씩씩거리며 햇반을 들고 일어나는 동료들을 흘긋거리다 리모컨으로 TV를 켰다.
아침 시간이라 그런지 교양 프로그램이 진행 중이다. 그런 류의 방송들을 즐겨 보진 않는 터라 음악 방송이나 들을까 싶어 채널을 돌리려던 그는 이상하게 익숙한 얼굴의 여자가 브라운관 안에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버튼을 누르려던 원우의 손가락은 자연스럽게 굳어졌다.
‘그 여자다.’
3주 전, 그에게 잊을 수 없는 기억을 선사해 준 바로 그 여자. 엄청난 힘을 소유한 그 여자. 그를 홀라당 흔들었으면서 발뺌하는 그 발칙한 여자. 그러니까 이름이……
<오늘의 주인공입니다! 이번 아시안게임에서 대한민국 국민들에게 금메달이라는 기쁨을 안겨 준, 유도 국가대표― 조연오 선수!>
사회자의 목소리가 끝을 맺음과 동시에 우레와 같은 박수갈채가 쏟아졌다. 사회자를 비추던 카메라는 출연자가 걸어 나오는 공간 쪽으로 향했고, 그가 기억하고 있던 수수한 모습과는 다르게 화려하게 치장을 한 여자가 몹시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손을 흔드는 모습이 보였다.
그러고 보니 이 방송은 일주일 전 원우에게도 출연을 요청했던 그 방송이었다. 하지만 방송 울렁증이 있다는 핑계를 대며 단호하게 거절했었던 자신과는 달리 조연오는 출연을 결정한 모양이었다.
원우는 평소와는 극명한 차이를 보여 주는 여자의 쑥스러워하는 얼굴을 가만히 지켜보기로 했다.
<어서 오세요, 조연오 선수.>
<아…… 바, 반갑습니다.>
<많이 쑥스러워하시네요. 방송은 처음이세요?>
<네? 아…… 네. 지금까지 한 번도 방송에 출연해 본 적이 없어서……. 그런데 정말 카, 카메라가 많긴 하네요! 하하하!>
여자는 땀을 줄줄 흘릴 기세로 소리쳤다. 기백이 넘치기도 했지만 왠지 귀엽기도 했다. 원우는 따라 웃어 버렸다. 이상한 여자야, 정말.
<너무 긴장하지 마세요. 겨우 카메라 앞인걸요. 여태껏 우리 조연오 선수가 대결해 온 상대들에 비해서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하시면 편할 거예요.>
<예? 그, 그럼 더 긴장이 되는데…….>
<흠흠. 어쨌거나, 본격적으로 조연오 선수에 대해 알아보는 시간을 먼저 가져 볼게요! 일단 영상, 보시죠!>
긴장을 풀어 주기 위해 꺼낸 사회자의 말에 더욱 당황하는 여자가 재미있었다. 그 여자의 반응에 놀란 사회자가 재치를 발휘하여 얼른 다른 곳으로 화제를 돌리는 바람에 난처한 표정을 짓는 얼굴을 보지 못했다는 것이 좀 아쉽긴 하지만.
원우는 이윽고 흘러나오는 자료 영상을 하염없이 바라봤다.
조연오.
3주 전 폐막한 아시안게임의 ―52KG급 여자 유도 결승전에서 모두의 예상을 뛰어넘고 일본의 강적을 물리치며 당당하게 금메달을 딴 올해 스물넷의 유도 국가대표 선수.
국제경기 첫 메달을, 게다가 예상치 못한 금메달을 따기까지의 과정이 TV에서 생생하게 방영되고 있었다. 저도 그녀와 같은 운동선수에다 국가대표인지라 그녀가 얼마나 노력했는지 짐작이 가능해서 원우는 TV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대체 밑반찬은 어디 있는…… 뭘 그렇게 열심히 봐?”
뜻하지 않게 접하게 된 아침 방송 덕분에 그가 예의주시했던 여자에 대한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제 긴장이 좀 풀렸는지, 카메라 앞에서 제 이야기를 거리낌 없이 늘어놓는 여자를 빤히 들여다보던 원우는 신경질을 내며 부엌에서 나오는 강준을 발견했다.
“어? 저 여자! 저 여자 그 여자 아니야?”
천하의 차원우가 대체 무엇을 보는가 싶어 덩달아 TV를 응시하던 강준의 눈동자는 금세 동그래졌다. 원우는 기겁하는 그를 의아하게 바라봤다.
“그 여자?”
강준은 세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왜, 선수촌에 있을 때 술 취해서 네 방으로 쳐들어왔던 그 이상한 여자!”
순간 몸을 움찔거렸다. 잊은 줄 알았는데, 기억하고 있었던 건가. 원우는 ‘저 여자 자원봉사자 아니었구나?’라고 중얼거리는 강준을 쳐다봤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 당시 그 여자는 ‘술’에 취했던 건 아니었다. 아무리 코를 킁킁거려도 알코올 냄새를 맡을 순 없었으니까. 뒤늦게 그 여자에게 듣기론 ‘탄산’에 취하는 특이체질을 가지고 있다고 하던데, 그게 사실인 건지는 모르겠다. 인터넷을 뒤적이니 그런 독특한 사람도 있다고는 하지만 어찌 알겠나. 그의 몸을 노리기 위해 작정을 했던 건지도.
어쨌든 강준의 오해를 굳이 정정해 줄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던 원우는 놀라워하는 그에게 심드렁하게 말했다.
“자원봉사자가 그렇게 늦은 시간에 선수촌에 남아 있겠어?”
“뭐, 그건 그렇지만. 그런데 저 여자, 그때 잘 들어갔는지 모르겠네.”
평소 원우의 무시를 한 몸에 받는 강준이지만 가끔 그를 놀라게 만든 적이 있기는 했었다.
오늘이 바로 그런 날인가.
정확하게 핵심을 짚어 버리는 강준의 말에 원우는 화들짝 놀랐다. 강준은 기억을 더듬으며 미간을 좁히다 굳어진 원우를 발견했다. 원우는 강준의 눈이 점차 가늘어지는 것을 보고 심장이 미친 듯이 뛰는 걸 느꼈다. 제기랄.
“그러고 보니 말이야.”
“…….”
“나, 저 여자가 네 방에서 나가는 걸 본 적이 없는…….’
“밥.”
“어?”
“밥, 해 줄게.”
원우는 말이 끝남과 동시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강준이 눈을 크게 뜨고 그를 응시했다.
“그럼 햇반 안 먹어도 돼?”
“어.”
“이야, 차원우 네가 웬일이냐? 밥도 다 해 주고! 역시 의리남!”
“…….”
낄낄거리며 박수를 치고는 부엌으로 달려가 다른 동료들에게 ‘원우가 밥 해 준대!’라고 외쳐 대는 강준을 보며 원우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사건의 진상을 밝혀내기 직전이었지만 밥을 준다는 말 한마디에 의심 따윈 훌훌 털어 버리는 강준은 참으로 단순했다. 원우는 안도의 한숨을 뱉어 내며 TV를 끄기 위해 리모컨을 쥐었다.
<이번엔 조금 개인적인 질문인데, 물어봐도 될까요?>
<네, 말씀하세요.>
<우리 조연오 선수는, 애인 있어요?>
여전히 조연오와의 인터뷰는 계속되고 있었고, 전원 버튼을 누르려던 원우의 움직임은 멎었다. ‘애인’이라는 단어에 소스라치게 놀라는 여자의 모습이 보였다. 얼른 부엌으로 오라 외치는 강준의 말을 잠시 한 귀로 흘리고 원우는 TV에 집중했다.
<애인…… 이요?>
얼굴을 빨갛게 붉히는 여자는 어쩔 줄 몰라 하는 것 같았다. 사회자의 짓궂은 멘트가 이어졌다.
<운동도 잘하시고 얼굴도 예쁘시니 남자들이 많이 따르실 것 같은데요?>
<그, 그런가요?>
<조 선수의 나이가 적은 편은 아닌데 애인, 있으시죠?>
“딱 보니 없구만.”
아무리 불러도 오질 않는 원우를 직접 데리러 오기로 했는지, 어느새 그의 옆자리에 선 강준이 TV를 쳐다보며 심드렁하게 말했다. 원우는 가슴을 탕탕 치며 외치는 강준의 말을 들었다.
“내 장담하지. 저 여자, 모솔이야, 모솔.”
저 역시 모솔인 주제에 연애 꽤나 해 봤다는 얼굴을 하고 있는 강준이 우습다. 원우는 혀를 끌끌 찰까 하다 픽 웃으며 TV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뭔가 말을 하려다 말고는 쓰게 웃는 연오가 입을 여는 게 시야로 들어왔다.
<안타깝지만…… 아직 애인은 없어요.>
뭐?
미간을 좁히는 원우와는 달리 큭큭 웃으며,
“거봐! 내 말 맞지?”
라고 외치는 강준의 모습은 대조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