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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대 위의 활극담>
1화
프롤로그. 책임져 주시지요
‘어찌하여…… 나는 이곳에 있는 걸까.’
얼이 빠질 지경이다.
슬쩍 고개를 돌려 보니 나보다 더 굳은 얼굴을 하고 있는 남자가 보였다.
그래, 그러니까 이 남자 이름이 뭐더라.
“차원우.”
맞아.
그런 이름이었어.
어떻게 이 이름을 잊을 수 있었을까.
대한민국의 국민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은 들어 보았을 유명인의 이름인데.
나는 다시 앞으로 얼굴을 돌렸다. 내 옆에 무릎을 꿇고 있는 남자만큼이나 훤칠하게 생긴 중년 남성의 얼굴이 시야로 들어왔다. 아마도 젊었을 때 여자 꽤나 울렸을 법한 미모를 지닌 중년 남성은 나와 차원우를 번갈아 응시했다. 그 강렬한 눈빛에 얼굴이 따가울 정도여서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정말 미치겠네.’
등 뒤로 식은땀이 줄줄 흘러내렸다.
숨 막히는 시간.
경기가 시작되기 전, 매트 위로 올라가기 직전만큼이나 아찔한 기분이 들었다. 이상하게 목이 말랐지만 갈증을 해소할 만한 건, 아무리 주위를 둘러보아도 보이지 않았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그저 입을 꾹 다물고 있는 것밖에는 없었다고나 할까. 제길.
그나저나, 이 공간 내에서 ‘긴장’이라는 걸 하고 있는 사람은 나뿐인 건가. 슬며시 눈을 이리저리 굴려 보아도 내 옆에 무릎을 꿇고 있는 남자나 우리의 맞은편에 있는 중년 남성의 표정엔 변화가 없다. 겉모습만큼이나 냉정한 이들이 아닐 수 없다며 혀를 내두르던 나는 점점 심장이 쪼그라드는 걸 느꼈다. 뭐라고 말 좀 하라고 이 인간들아.
“아버지.”
무의식적으로 숨을 죽일 만큼 팽팽했던 긴장감이 툭 끊어진 것은 내 옆에 무릎을 꿇고 있던 차원우가 드디어 입을 열었기 때문이다. 반가운 마음에 얼른 그를 쳐다보았지만 차원우는 나를 쳐다보고 있지 않았다. 그의 눈이 향한 곳은 오로지 앞. 자신이 ‘아버지’라고 부른 중년 남성이 있는 곳이었다.
‘그래.’ 하고 작게 대답하는 중년 남성의 음성에 차원우를 향했던 고개를 앞으로 돌렸다. 가라앉은 눈으로 우리 두 사람을 쳐다보고 있는 중년 남성은 차원우의 입이 열리기를 기다리는 듯했다. 그리고 그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차원우는 잠시 숨을 고르더니 천천히 입술을 달싹였다.
“어찌하면 좋습니까.”
한숨과 함께 소리를 뱉어 낸 차원우는 체념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누군가’ 소자를 책임져야 할 일이 벌어지고 말았습니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놈의 ‘책임’이라는 단어가 거슬렸기 때문이다.
노이로제가 걸릴 지경이다. 저 빌어먹을 ‘책임’이라는 단어로 인해 시달렸던 지난 몇 주가 불현듯 눈앞을 스치고 지나갔다. 이젠 반사적으로 눈물이 차오를 정도다. 그런 내 마음은 전혀 알아주지 않고 그동안 나만 보면 뱉어 내던 ‘책임’이라는 단어를 이번에도 잊지 않는 차원우의 의지에 박수를 보낸다.
신경질적인 눈빛으로 냉랭한 얼굴의 그를 노려보았지만 그 남자가 내 시선에 아랑곳할 리는 없었다. 그는 지금까지 줄곧 그래 왔던 것처럼 내가 그를 쳐다보든 말든 개의치 않고 자신의 아버지만을 바라보고 있는 중이었다.
“책임을 져? 네가 지는 게 아니라?”
중년 남성은 차원우가 한 말의 의미를 파악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 같았다.
아저씨, 당장 그 말을 이해하려 해도 쉽지 않을 거예요. 저도 그 말이 뭘 의미하는지 알아듣기까지 무려 3주나 걸린걸요. 아니, 그렇잖아요. 남자를 ‘책임’진다는 게 대체 무슨 말이냐고 정말!
울컥 감정이 솟구침과 동시에 입 밖으로 내뱉을 수 없는 말이 치밀어 올랐지만 강한 정신력으로 참아 냈다. 괜히 나섰다간 무슨 꼴을 당할지 모른다. 내 옆에 무릎을 꿇고 있는 이 남자는 지난 3주간의 행동으로 짐작하건대 무척이나 끈질긴 사람이었으니까.
작게 한숨을 흘리며 고개를 절레절레 젓던 나는 얼굴을 아래로 내리다 손목에 찬 시계를 발견하곤 화들짝 놀랐다.
벌써 5시라니!
오후 훈련을 하러 갈 시간이 지나 버렸다. 단단히 화가 나신 감독님의 얼굴이 눈앞에 선했다. 안 그래도 3주 동안이나 제대로 훈련을 못 했는데, 오늘도 이렇게 쓸데없이 시간을 낭비하는 건가. 곧 있을 대회에선 괄목할 만한 성적을 거두어야만 했기에 심장이 더욱 벌렁거렸다.
‘상황을 봐서…….’
도망쳐야겠어.
언제까지 이러고 있을 수는 없다. 억지로 잡혀 오긴 했으나 도망가는 건 충분히 내 힘으로 할 수 있을 터. 주먹을 불끈 쥐며 의지를 다졌다.
“예. 책임을 져야 합니다.”
“네가 책임을 지는 게 아니라…….’
“네, ‘누군가’ 저를 책임져야 할 일입니다.”
내가 또 다른 계략을 꾸미고 있다는 걸 알 리 없는 차원우는 침착하게 대답했다. 고개를 끄덕이는 차원우를 중년 남성은 묘한 얼굴로 응시하다 이윽고 시선을 옮겼다.
‘응?’
슬슬 다리가 저려 오는 것을 느끼며 미간을 좁히던 나는 언제 도망칠지 타이밍을 재고 있었다. 그런 내 속을 꿰뚫고 있는 것처럼 강한 눈빛을 쏘아 대는 중년 남성의 모습에 크게 당황했다. 소름이 오소소 돋아났다.
드, 들킨 건가.
입 한번 열지 않았는데 긴장감이 엄습했다. 무의식적으로 두 눈을 동그랗게 뜨며 침을 꿀꺽 삼켰다. 아까도 잠시 느꼈지만, 지금까지 선수 생활을 하면서 수많은 상대들과 대전해 왔지만 눈앞의 중년 남성처럼 나를 당혹스럽게 만드는 사람은 없었다. 이 아저씨, 정체가 대체 뭐야! 어쩐지 불편해졌다.
“책임……이라.”
그렇게 한동안 내 얼굴을 들여다보던 중년 남성은 턱 끝을 매만지며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그래. ‘누군가’ 널 책임져야 할 일이 생겼다면, 응당 그리해야겠지.”
차원우가 언급한 ‘책임’이 대체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물어보지도 않고, 그를 ‘책임져야 할’ 사람이 ‘누군지’ 또한 묻지 않는 중년 남성은 너무도 빠르게 이해를 해 버렸다.
너무 쉽게 차원우의 말을 받아들이는 그에게 ‘아저씨, 뭘 알고 하시는 소리예요?’라고 소리를 치고 싶었지만 이번에도 내 입은 꾹 다물어졌다. 일그러진 내 얼굴 따윈 깔끔하게 무시하는 걸 보면 확실히 중년 남성은 차원우의 아버지가 맞았다.
그는 다시금 차원우에게로 시선을 돌리며 물었다.
“너를 책임져야 할 그 ‘누군가’는 바로 이 아가씨겠군.”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중년 남성의 검지가 정확하게 나를 향했다. 그제야 이 두 남자의 대화에서 철저하게 배제되어 있던 ‘나’라는 존재가 화두에 오르는 순간이다. 차원우는 토끼 눈을 뜨는 나를 흘끔거리다 이내 제 아버지를 응시했다.
“예. 이 여잡니다.”
그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 당연하다는 듯 말하는 그를 보며 기가 막혔다. 물론 3주 전에 우리에게 ‘어떤 일’이 일어난 건 사실이지만 내가 자길 책임져야 하는 그런 일은 아니었단 말이다! 아, 뭐…… 내가 기억하는 선에선.
‘안 되겠어.’
여태껏 입을 굳게 다문 채 한 마디도 하지 않던 나는 이제야 내가 나설 순간이라는 것을 자각했다. 지금 나서지 않는다면 정말로 그 젠장할 ‘책임’이라는 것을 져야 할지도 모른다. 나는 얼른 외치려 했다.
“저기!”
“그런데 아가씨, 이상하게 얼굴이 익숙한데.”
말없이 내 얼굴을 쳐다보던 중년 남성이 돌연 미간을 구긴 것은 그 시점이었다. 그는 흐음 묘한 코웃음 소리까지 흘리며 말했다. 그 말에 표정이 굳어 버린 내게 얼굴을 들이민 그는 진지한 음성으로 중얼거렸다.
“어디서 봤다고. 매우 익숙…… 아.”
아?
“그러니까 이름이.”
“조연오.”
빌어먹을 차원우가 중년 남성의 기억을 살려 주었다. 그는 환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그 이름이었어. 이번 대회에서 메달을 땄었지, 아마?”
중년 남성의 말은 사실이었다. 불과 3주 전에 나는 아시안게임에서 메달을 땄다. 그것도 번쩍번쩍 빛나는 금빛 메달. 빙긋 웃는 그를 보자니 괜스레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라 나는 하하 웃었다. 일단은 긍정을 해야겠지. 그리고 다시 도망갈 기회를 찾아보자.
“예에. 물론 제가 조연오긴 한데…….”
“그런데 아가씨는 유도 선수가 아닌가. 언제부터 우리 원우랑 사귀고 있었던 거야?”
사귀긴 누가 사귑니까, 아저씨!
“아뇨. 저흰 그런 사이가 아니라…….”
“예. 결혼을 전제로 교제 중입니다.”
중년 남성이 의아해하는 것도 충분히 이해가 간다.
왜냐하면 우리는 같은 종목의 선수들이 아니었으니까. 간혹 같은 종목의 선수들끼리 눈이 맞아 교제를 하는 경우가 있기는 하지만 맨몸을 쓰는 나와 도구를 사용하는 그가 부딪힐 일은 적었다.
의문에 휩싸인 그에게 알려지지 않은 3주 전의 진상을 읊어 주기 위해 외치려고 할 때, 차원우는 그런 내 말을 과감히 끊어 버리고는 폭탄 발언을 날렸다. 그리고는 싱긋 웃으며 내게 속삭였다.
“맞지?”
* * *
“이봐요! 아까 그건 대체 뭐예요! 약속이랑 다르잖아요!”
일단 가장 큰 잘못은 이 빌어먹을 남자의 꼬임에 넘어가 버린 내게 있었다.
번 한 번만 따라오면 더 이상 귀찮게 안 할게.’
‘정말이죠?’
‘못 믿나?’
‘……좋아요. 꼭 약속해요!’
워낙 당당하게 말하기에 당연히 약속을 지킬 줄 알았던 나는 오후 훈련까지 내팽개치고 차원우를 따라나섰다. 그래, 이쯤 되면 아까 언급했던 억지로―라는 말이 틀렸다는 것을 인정할 만하다. 이미 차원우를 따라나선 시점에서 내겐 더 이상 할 말이 없다고 봐도 무방하기는 한데, 설마 그 목적지가 자기 아버지와의 약속 장소인 줄 어떻게 짐작했겠냐고!
“무슨 약속?”
조금 전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워낙 순식간에 일이 진행되었고 끝이 나 버렸던 터라 아직도 머리가 얼얼한 나를 내려다보며 차원우는 태연하게 되물었다.
순간 주먹을 뻗을 뻔했지만 초인적인 인내력으로 견뎌 냈다. 아무리 생각해도 나는 참으로 대단한 여성이 아닐 수 없다. 스스로를 자랑스럽게 여기며 흐뭇하게 웃으려다 뻔뻔한 차원우의 얼굴을 노려보며 소리쳤다.
“이번 한 번만 그쪽을 따라오면 더 이상 귀찮게 안 한다고 했었잖아요! 그런데 더 귀찮아졌어요. 이제 어떡할 거예요? 그쪽 아버지는 내가 그쪽이랑 결혼을 전제로 교제하고 있는 거라고 생각해 버린 것 같은데, 정말 어쩔 거냐구요!”
씩씩거리며 외치는 나를 가만히 응시하던 차원우는 잘난 얼굴을 빛내며 말했다.
“그럼 정말 하면 되지.”
“뭘요?”
“결혼을.”
“누구랑요?”
“나랑.”
눈앞이 새하얘졌다. 뭐라 말을 잇지 못하는 내게 차원우는 속삭였다.
“왜, 설마 그렇게 날 물고 빨고 했으면서 책임을 안 지려고 했나?”
1. 아래는 더 심하답니다
―원우야. 아버지한테…… 얘기 들었다.
이른 아침부터 전화가 걸려 왔다. 핸드폰에서 흘러나온 목소리가 어쩐지 깊은 슬픔을 안고 있다고 원우는 생각했다.
힘겹게 말을 뱉어 내면서도 끅끅, 흐느끼는 어머니가 적응이 되지 않았다. 나이가 들어서도 항상 밝고 명랑함을 유지하던 어머니의 우는 소리에 원우는 잠시 고민을 했지만 아무런 말을 뱉어 내지 못했다.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그저 당장이라도 제집으로 달려올 기세로 외치는 그녀의 말을 들어 주는 것뿐.
미간을 좁히며 핸드폰을 든 원우의 귓가에 그의 어머니 희수의 외침이 울려 퍼졌다.
―그게 사실이니? 내 아들 원우가 여자한테 당해 버린 거야? 정말로?
당해?
어머니는 문제의 핵심을 파고들기로 작정하신 것이 분명했다. 원우는 살짝 당황했다. 물론 그가 ‘여자에게’ 당한 건 사실이다. 스물여덟이 되도록 이런 일은 단 한 번도 없었기에 원우 역시 무척이나 놀랍긴 하다.
1화
프롤로그. 책임져 주시지요
‘어찌하여…… 나는 이곳에 있는 걸까.’
얼이 빠질 지경이다.
슬쩍 고개를 돌려 보니 나보다 더 굳은 얼굴을 하고 있는 남자가 보였다.
그래, 그러니까 이 남자 이름이 뭐더라.
“차원우.”
맞아.
그런 이름이었어.
어떻게 이 이름을 잊을 수 있었을까.
대한민국의 국민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은 들어 보았을 유명인의 이름인데.
나는 다시 앞으로 얼굴을 돌렸다. 내 옆에 무릎을 꿇고 있는 남자만큼이나 훤칠하게 생긴 중년 남성의 얼굴이 시야로 들어왔다. 아마도 젊었을 때 여자 꽤나 울렸을 법한 미모를 지닌 중년 남성은 나와 차원우를 번갈아 응시했다. 그 강렬한 눈빛에 얼굴이 따가울 정도여서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정말 미치겠네.’
등 뒤로 식은땀이 줄줄 흘러내렸다.
숨 막히는 시간.
경기가 시작되기 전, 매트 위로 올라가기 직전만큼이나 아찔한 기분이 들었다. 이상하게 목이 말랐지만 갈증을 해소할 만한 건, 아무리 주위를 둘러보아도 보이지 않았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그저 입을 꾹 다물고 있는 것밖에는 없었다고나 할까. 제길.
그나저나, 이 공간 내에서 ‘긴장’이라는 걸 하고 있는 사람은 나뿐인 건가. 슬며시 눈을 이리저리 굴려 보아도 내 옆에 무릎을 꿇고 있는 남자나 우리의 맞은편에 있는 중년 남성의 표정엔 변화가 없다. 겉모습만큼이나 냉정한 이들이 아닐 수 없다며 혀를 내두르던 나는 점점 심장이 쪼그라드는 걸 느꼈다. 뭐라고 말 좀 하라고 이 인간들아.
“아버지.”
무의식적으로 숨을 죽일 만큼 팽팽했던 긴장감이 툭 끊어진 것은 내 옆에 무릎을 꿇고 있던 차원우가 드디어 입을 열었기 때문이다. 반가운 마음에 얼른 그를 쳐다보았지만 차원우는 나를 쳐다보고 있지 않았다. 그의 눈이 향한 곳은 오로지 앞. 자신이 ‘아버지’라고 부른 중년 남성이 있는 곳이었다.
‘그래.’ 하고 작게 대답하는 중년 남성의 음성에 차원우를 향했던 고개를 앞으로 돌렸다. 가라앉은 눈으로 우리 두 사람을 쳐다보고 있는 중년 남성은 차원우의 입이 열리기를 기다리는 듯했다. 그리고 그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차원우는 잠시 숨을 고르더니 천천히 입술을 달싹였다.
“어찌하면 좋습니까.”
한숨과 함께 소리를 뱉어 낸 차원우는 체념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누군가’ 소자를 책임져야 할 일이 벌어지고 말았습니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놈의 ‘책임’이라는 단어가 거슬렸기 때문이다.
노이로제가 걸릴 지경이다. 저 빌어먹을 ‘책임’이라는 단어로 인해 시달렸던 지난 몇 주가 불현듯 눈앞을 스치고 지나갔다. 이젠 반사적으로 눈물이 차오를 정도다. 그런 내 마음은 전혀 알아주지 않고 그동안 나만 보면 뱉어 내던 ‘책임’이라는 단어를 이번에도 잊지 않는 차원우의 의지에 박수를 보낸다.
신경질적인 눈빛으로 냉랭한 얼굴의 그를 노려보았지만 그 남자가 내 시선에 아랑곳할 리는 없었다. 그는 지금까지 줄곧 그래 왔던 것처럼 내가 그를 쳐다보든 말든 개의치 않고 자신의 아버지만을 바라보고 있는 중이었다.
“책임을 져? 네가 지는 게 아니라?”
중년 남성은 차원우가 한 말의 의미를 파악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 같았다.
아저씨, 당장 그 말을 이해하려 해도 쉽지 않을 거예요. 저도 그 말이 뭘 의미하는지 알아듣기까지 무려 3주나 걸린걸요. 아니, 그렇잖아요. 남자를 ‘책임’진다는 게 대체 무슨 말이냐고 정말!
울컥 감정이 솟구침과 동시에 입 밖으로 내뱉을 수 없는 말이 치밀어 올랐지만 강한 정신력으로 참아 냈다. 괜히 나섰다간 무슨 꼴을 당할지 모른다. 내 옆에 무릎을 꿇고 있는 이 남자는 지난 3주간의 행동으로 짐작하건대 무척이나 끈질긴 사람이었으니까.
작게 한숨을 흘리며 고개를 절레절레 젓던 나는 얼굴을 아래로 내리다 손목에 찬 시계를 발견하곤 화들짝 놀랐다.
벌써 5시라니!
오후 훈련을 하러 갈 시간이 지나 버렸다. 단단히 화가 나신 감독님의 얼굴이 눈앞에 선했다. 안 그래도 3주 동안이나 제대로 훈련을 못 했는데, 오늘도 이렇게 쓸데없이 시간을 낭비하는 건가. 곧 있을 대회에선 괄목할 만한 성적을 거두어야만 했기에 심장이 더욱 벌렁거렸다.
‘상황을 봐서…….’
도망쳐야겠어.
언제까지 이러고 있을 수는 없다. 억지로 잡혀 오긴 했으나 도망가는 건 충분히 내 힘으로 할 수 있을 터. 주먹을 불끈 쥐며 의지를 다졌다.
“예. 책임을 져야 합니다.”
“네가 책임을 지는 게 아니라…….’
“네, ‘누군가’ 저를 책임져야 할 일입니다.”
내가 또 다른 계략을 꾸미고 있다는 걸 알 리 없는 차원우는 침착하게 대답했다. 고개를 끄덕이는 차원우를 중년 남성은 묘한 얼굴로 응시하다 이윽고 시선을 옮겼다.
‘응?’
슬슬 다리가 저려 오는 것을 느끼며 미간을 좁히던 나는 언제 도망칠지 타이밍을 재고 있었다. 그런 내 속을 꿰뚫고 있는 것처럼 강한 눈빛을 쏘아 대는 중년 남성의 모습에 크게 당황했다. 소름이 오소소 돋아났다.
드, 들킨 건가.
입 한번 열지 않았는데 긴장감이 엄습했다. 무의식적으로 두 눈을 동그랗게 뜨며 침을 꿀꺽 삼켰다. 아까도 잠시 느꼈지만, 지금까지 선수 생활을 하면서 수많은 상대들과 대전해 왔지만 눈앞의 중년 남성처럼 나를 당혹스럽게 만드는 사람은 없었다. 이 아저씨, 정체가 대체 뭐야! 어쩐지 불편해졌다.
“책임……이라.”
그렇게 한동안 내 얼굴을 들여다보던 중년 남성은 턱 끝을 매만지며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그래. ‘누군가’ 널 책임져야 할 일이 생겼다면, 응당 그리해야겠지.”
차원우가 언급한 ‘책임’이 대체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물어보지도 않고, 그를 ‘책임져야 할’ 사람이 ‘누군지’ 또한 묻지 않는 중년 남성은 너무도 빠르게 이해를 해 버렸다.
너무 쉽게 차원우의 말을 받아들이는 그에게 ‘아저씨, 뭘 알고 하시는 소리예요?’라고 소리를 치고 싶었지만 이번에도 내 입은 꾹 다물어졌다. 일그러진 내 얼굴 따윈 깔끔하게 무시하는 걸 보면 확실히 중년 남성은 차원우의 아버지가 맞았다.
그는 다시금 차원우에게로 시선을 돌리며 물었다.
“너를 책임져야 할 그 ‘누군가’는 바로 이 아가씨겠군.”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중년 남성의 검지가 정확하게 나를 향했다. 그제야 이 두 남자의 대화에서 철저하게 배제되어 있던 ‘나’라는 존재가 화두에 오르는 순간이다. 차원우는 토끼 눈을 뜨는 나를 흘끔거리다 이내 제 아버지를 응시했다.
“예. 이 여잡니다.”
그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 당연하다는 듯 말하는 그를 보며 기가 막혔다. 물론 3주 전에 우리에게 ‘어떤 일’이 일어난 건 사실이지만 내가 자길 책임져야 하는 그런 일은 아니었단 말이다! 아, 뭐…… 내가 기억하는 선에선.
‘안 되겠어.’
여태껏 입을 굳게 다문 채 한 마디도 하지 않던 나는 이제야 내가 나설 순간이라는 것을 자각했다. 지금 나서지 않는다면 정말로 그 젠장할 ‘책임’이라는 것을 져야 할지도 모른다. 나는 얼른 외치려 했다.
“저기!”
“그런데 아가씨, 이상하게 얼굴이 익숙한데.”
말없이 내 얼굴을 쳐다보던 중년 남성이 돌연 미간을 구긴 것은 그 시점이었다. 그는 흐음 묘한 코웃음 소리까지 흘리며 말했다. 그 말에 표정이 굳어 버린 내게 얼굴을 들이민 그는 진지한 음성으로 중얼거렸다.
“어디서 봤다고. 매우 익숙…… 아.”
아?
“그러니까 이름이.”
“조연오.”
빌어먹을 차원우가 중년 남성의 기억을 살려 주었다. 그는 환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그 이름이었어. 이번 대회에서 메달을 땄었지, 아마?”
중년 남성의 말은 사실이었다. 불과 3주 전에 나는 아시안게임에서 메달을 땄다. 그것도 번쩍번쩍 빛나는 금빛 메달. 빙긋 웃는 그를 보자니 괜스레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라 나는 하하 웃었다. 일단은 긍정을 해야겠지. 그리고 다시 도망갈 기회를 찾아보자.
“예에. 물론 제가 조연오긴 한데…….”
“그런데 아가씨는 유도 선수가 아닌가. 언제부터 우리 원우랑 사귀고 있었던 거야?”
사귀긴 누가 사귑니까, 아저씨!
“아뇨. 저흰 그런 사이가 아니라…….”
“예. 결혼을 전제로 교제 중입니다.”
중년 남성이 의아해하는 것도 충분히 이해가 간다.
왜냐하면 우리는 같은 종목의 선수들이 아니었으니까. 간혹 같은 종목의 선수들끼리 눈이 맞아 교제를 하는 경우가 있기는 하지만 맨몸을 쓰는 나와 도구를 사용하는 그가 부딪힐 일은 적었다.
의문에 휩싸인 그에게 알려지지 않은 3주 전의 진상을 읊어 주기 위해 외치려고 할 때, 차원우는 그런 내 말을 과감히 끊어 버리고는 폭탄 발언을 날렸다. 그리고는 싱긋 웃으며 내게 속삭였다.
“맞지?”
* * *
“이봐요! 아까 그건 대체 뭐예요! 약속이랑 다르잖아요!”
일단 가장 큰 잘못은 이 빌어먹을 남자의 꼬임에 넘어가 버린 내게 있었다.
번 한 번만 따라오면 더 이상 귀찮게 안 할게.’
‘정말이죠?’
‘못 믿나?’
‘……좋아요. 꼭 약속해요!’
워낙 당당하게 말하기에 당연히 약속을 지킬 줄 알았던 나는 오후 훈련까지 내팽개치고 차원우를 따라나섰다. 그래, 이쯤 되면 아까 언급했던 억지로―라는 말이 틀렸다는 것을 인정할 만하다. 이미 차원우를 따라나선 시점에서 내겐 더 이상 할 말이 없다고 봐도 무방하기는 한데, 설마 그 목적지가 자기 아버지와의 약속 장소인 줄 어떻게 짐작했겠냐고!
“무슨 약속?”
조금 전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워낙 순식간에 일이 진행되었고 끝이 나 버렸던 터라 아직도 머리가 얼얼한 나를 내려다보며 차원우는 태연하게 되물었다.
순간 주먹을 뻗을 뻔했지만 초인적인 인내력으로 견뎌 냈다. 아무리 생각해도 나는 참으로 대단한 여성이 아닐 수 없다. 스스로를 자랑스럽게 여기며 흐뭇하게 웃으려다 뻔뻔한 차원우의 얼굴을 노려보며 소리쳤다.
“이번 한 번만 그쪽을 따라오면 더 이상 귀찮게 안 한다고 했었잖아요! 그런데 더 귀찮아졌어요. 이제 어떡할 거예요? 그쪽 아버지는 내가 그쪽이랑 결혼을 전제로 교제하고 있는 거라고 생각해 버린 것 같은데, 정말 어쩔 거냐구요!”
씩씩거리며 외치는 나를 가만히 응시하던 차원우는 잘난 얼굴을 빛내며 말했다.
“그럼 정말 하면 되지.”
“뭘요?”
“결혼을.”
“누구랑요?”
“나랑.”
눈앞이 새하얘졌다. 뭐라 말을 잇지 못하는 내게 차원우는 속삭였다.
“왜, 설마 그렇게 날 물고 빨고 했으면서 책임을 안 지려고 했나?”
1. 아래는 더 심하답니다
―원우야. 아버지한테…… 얘기 들었다.
이른 아침부터 전화가 걸려 왔다. 핸드폰에서 흘러나온 목소리가 어쩐지 깊은 슬픔을 안고 있다고 원우는 생각했다.
힘겹게 말을 뱉어 내면서도 끅끅, 흐느끼는 어머니가 적응이 되지 않았다. 나이가 들어서도 항상 밝고 명랑함을 유지하던 어머니의 우는 소리에 원우는 잠시 고민을 했지만 아무런 말을 뱉어 내지 못했다.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그저 당장이라도 제집으로 달려올 기세로 외치는 그녀의 말을 들어 주는 것뿐.
미간을 좁히며 핸드폰을 든 원우의 귓가에 그의 어머니 희수의 외침이 울려 퍼졌다.
―그게 사실이니? 내 아들 원우가 여자한테 당해 버린 거야? 정말로?
당해?
어머니는 문제의 핵심을 파고들기로 작정하신 것이 분명했다. 원우는 살짝 당황했다. 물론 그가 ‘여자에게’ 당한 건 사실이다. 스물여덟이 되도록 이런 일은 단 한 번도 없었기에 원우 역시 무척이나 놀랍긴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