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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제국 연대기 1권(24화)
제7장 결전지로(決戰之路)(4)
전쟁이 단순한 것은 아니었으나, 현대전처럼 정보 분석을 해 가며 철두철미하게 전략을 짜고 전국 단위로 판세를 조망할 정도의 수고와 인력은 들지 않았다.
어차피 여기서 계책을 짜내어도 교통과 통신이 불편하기 짝이 없는 이 시대에서는 전방에 뛰어난 장수를 하나 보내는 것만 못한 일이었다.
“오히려 이렇게 가 주시겠다니 제가 감사할 일입니다.”
“폐주가 나를 외척이라 하여 견제를 하니 그에 대한 신망을 잃고 내가 오늘 합하 곁에 남아 있게 되었소이다. 그래서 이렇게 과분한 직책을 받게 되었으니 벼슬 값은 해야 하지 않겠소. 내가 백(伯)의 자리에 올라 종실을 세웠다 하니 방계 친척들까지 죄 달려와 감읍하고 제당을 지어 주고 조상의 위패를 가져다 모셔 놓고 하는데 그 벼슬 값을 어찌 다 하겠소이까. 이렇게라도 전장에 나가 목숨을 내어 놓고 풀어야 할 일이외다.”
송거신은 그렇게 말하고서는 이내 호탕한 웃음으로 껄껄껄 웃고서는 말했다.
“그럼 이만 이 송가는 물러가 보겠소이다. 합하께서 윤허했으니 따로 금상의 교지(敎旨)는 따로 받지 아니하고 바로 시위대를 이끌고 출발하겠소이다. 경사군의 양은계 부장과 시위대의 황희는 이 송가가 데리고 가도록 하겠소이다.”
“뜻하는 대로 가져다 쓰십시오. 좋은 소식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함부로 행동하는 사람은 아니나 확실히 격식 없고 호탕하며 거침없는 사내였다. 그러면서도 행동거지에 신중함이 배여 있으니 세훈은 송거신을 싫어할래야 싫어할 수 없었다. 오히려 가능하다면 진정으로 같은 내각의 대신 사이가 아니라 수하로 삼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할 정도였다.
이렇게 음력 2월 2일, 비변사 참모부 대장 송거신은 경사군 부장 양은계와 시위대 참장인 황희를 대동하고 완전 무장된 시위대 2만 병력을 이끌고 평양으로 향했다.
송거신은 급한 길을 재촉하여 닷새 만에 평양에 이르렀는데 이미 파발을 받고 준비하고 있던 평양의 제1진위대는 고상온의 지휘하에 안주로 즉시 출격했다.
송거신은 평양에 있지 않고 바로 고상온과 함께 시위대의 일부 병력을 차출하여 끌고 안주로 함께 나섰다. 그것이 2월 7일의 일이니, 안주성이 공격당하기 시작한 지 열흘째 되는 날이었다.
조사의의 군세는 이미 3천여 명으로 줄어 있었고, 지급 받았던 보총 500정은 쉴 새 없이 사용되어 탄약도 이제 다 떨어지고 그나마도 200정 정도는 사용할 수 없는 상태가 되어 가고 있었다.
조사의의 동지이자 심복이었던 강현도 적의 활에 맞아 전사하고, 안주성은 오늘 내일 하는 위기에 처해 있었다.
명군은 이때까지도 안주성을 둘러싼 포위를 풀지 않고 있었는데, 한때 서쪽 성벽을 넘어 일단의 병사가 진입하기도 했으나 조사의의 필사적인 방어전으로 결국 포위망을 좁힌 채로 교착상태에 빠져들게 되었다.
이것은 명군의 손실이 컸기 때문이기도 한데, 8만 7천의 군세는 어느덧 공성전 끝에 6만 내외로 줄어 있었다.
이때에 송거신과 고상온이 2만 5천의 병력을 이끌고 들어와 성을 감싸고 있는 명군을 요격하기 시작하니 이내 합전(合戰)이 벌어졌다.
“우선 저 총의 사정거리 밖으로 나가야 한다! 우리에게는 강노(强弩)와 포가 있으니 보총의 사정거리 밖에서 적군을 공격한다!”
양영의 지시에 따라 안주 성 밖 들에서 노출되어 있던 명군은 청천강 하류쪽으로 이동하여 자연적인 엄폐물들 사이로 들어가 강노와 포로 대응하기 시작했다.
이를 가만히 지켜보고 있던 송거신이 적이 피하는 방향의 반대를 취하여 고지를 점거하고 포를 설치한 다음 아래쪽으로 포격전을 시작하니, 명군의 포와 조선군의 포가 서로 사정거리는 비슷하나 고지에서 저지로 쏘는 조선군의 포가 상대적인 효율이 우세한데다가, 소포(小砲)의 속도 효율이 좋아 이내 명군의 포가 닿지 않는 이격이 발생했고, 고상온의 계책대로 송거신은 그곳에 보총병들을 3개 열대(列代)로 늘어 세워 교차 사격을 하게 하니 명군은 그 와중에 1만 이상의 병력을 잃고, 양영은 안주성을 공격하는 것을 포기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그러나 조선군의 피해도 만만치 않았는데 이미 조사의는 1만 이상의 병력과 강현이란 장수를 잃었으며, 제1진위대 2만과 시위대에서 차출한 5천 병력을 합쳐 안주성을 도우러 출전했던 2만 5천 병력 중 4천여 명이 전사해 도합 2만을 조금 넘기는 숫자만이 명군을 물리치고 안주성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조사의가 안주성에서 잘 버텨 주었고, 송거신의 재빠르고 능란한 행동으로 명군에게서 안주성을 지켜낼 수 있었으나 명군 동정장군 양영은 그렇게 임무를 쉽게 포기할 인물이 아니었다.
아직 명군은 5만의 병력이 남아 있었고, 양영은 후방이 조금 불안하더라도 더 깊숙이 들어가 평양을 직접 요격하는 길을 택했다. 그로서도 아직 본국에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알 수 없으니 그저 조선전(朝鮮戰)에 집중하고 있었던 것이다.
1406년
명(明) 영락(永樂) 4년 중춘(仲春)
대명국(大明國) 경사(京師) 응천부(應天府).
봄이 찾아왔다.
남쪽 바다에서부터 비껴 밀려오는 봄바람이 응천부 성중의 조그만 정원들에도 새싹을 틔워내고 있었다.
그러나 황궁의 분위기는 싸늘하기만 했다. 섬서성에서부터 황급히 날아온 소식 때문이었다.
수십만의 병력이 서역에서 넘어 들어와 서안까지 진군해 교전 중이라 하니 황제의 심경이 편할 리가 없었다.
그렇게 긴급히 영락제가 대전에 대신들을 불러 모아 대응책을 놓고 부심하던 차에 이제는 서안까지 함락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져 왔다.
3일 밤낮으로 성이 불타고 성중에 거하던 백성들은 모두 죽거나 끌려가 사방 백 리가 인적을 찾아볼 수 없다 하니, 가히 재앙에 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서안의 관료들은 모두 살아남지 못하고 성을 지키다 죽음을 당했다 했다.
영락제는 그 가공할 만한 위협에 숨을 죽였다. 아니, 두렵다기보다도 감히 천자의 나라에 도전해 들어와 성읍을 휘젓는 그 뻔뻔함에 분이 치솟았다.
“감히 짐을 무엇으로 보고, 그 병력이면 명나라 전체를 손아귀에 넣고 나를 꿇어앉힐 수 있을 성싶더냐!”
영락제는 분기탱천했으나 티무르는 수천 리 바깥에 있으니 이 분노를 알 턱이 없었다.
어쩌면 같은 패자(覇者)로서 이 사실을 더 잘 알기에 그렇듯 도발을 하는 것일 수도 있다.
티무르는 오스만의 술탄과 전쟁을 할 때도 그랬다. 분노한 술탄 바예지드는 이성적으로 판단치 못하고 결국에 티무르에게 패배해 쓴 굴욕을 맛보아야만 했다. 그 진위는 알 수 없으나 오죽하면 그 패배로 인해 철창에 가둬져 자신의 애첩이 티무르의 시중을 드는 것을 보고 있어야 했다고 하겠는가.
영락제의 상황도 지금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는 평생 도전과 싸워 이겨 오며 산 사람이었다. 때로는 몸을 숙이고, 모자란 척도 하고, 권력에 대한 의지가 없는 척 가장하기도 했으나 결국은 살아남아 대권을 잡는 하나의 목표로 움직여 온 정치적 동물이나 마찬가지였다.
그것은 조선의 정안공 이방원과도 꼭 닮은, 말 그대로 찬연한 군주로서의 위엄을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해 온 삶이었다.
그런 그이기에 이런 티무르의 도전이 썩 달가울 리가 없었다.
살아온 길이 한 길 쉬웠던 적이 없었지만 황제의 위에 오른 뒤로 이런 노골적이고 뻔뻔한 도전에 직면했던 적은 없었다. 방효유조차도 그저 심기를 긁어 놓았을 뿐이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수십만 대군이 이 나라를 노리고 자신의 목을 겨냥해 진군해 오고 있는 것이었다. 이런 뜻대로 되지 않는 일에 어찌 분노하지 않으리오.
그러나 이렇게 차가운 분노가 타오를수록 영락제의 머리는 차가워져 갔다. 이것이 자기 힘으로 패권을 쥐는 자들의 가장 특별한 점이었다.
“내각(內閣)의 학사들을 모두 들라 일러라.”
멀찍이 떨어져 시립해 있던 환관에게 제경(諸卿)의 입조를 일렀다. 이들은 내각 칠경(七卿)이라 하여 이른바 이부상서(吏部尙書), 호부상서(戶部尙書), 예부상서(禮部尙書), 병부상서(兵部尙書), 형부상서(刑部尙書), 공부상서(工部尙書), 좌우도어사(左右都御史)를 일컫는 말인데, 국가 시책에 있어서 중심적인 지위를 맡고 있는 자들이었다.
이해, 영락 4년의 내각은 다음과 같았다.
이부에는 이부 건의(蹇義), 호부 하원길(夏原吉), 예부 이지강(李至剛), 병부 금충(金忠), 형부 여진(呂震), 공부 송례(宋禮), 그리고 좌도어사에 진영(陳瑛), 우도어사에 오중(吳中)이었다.
이중 형부의 여진과 공부의 송례를 제하고 여섯 명의 신료가 영락제의 부름을 받아 그날 저녁 무렵 입궐(入闕)하여 황제 앞에 섰다.
“짐이 나랏일로 근심이 많아 도무지 밤에 잠을 이룰 수가 없노라.”
대신들은 그저 머리를 찧고 엎드려 하명하길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병부상서는 섬서의 일에 대하여 변명해 보아라.”
황제의 무미건조한 목소리에 병부상서 금충은 몸에서 진땀이 흘러내리는 것만 같았다.
서늘한 기운이 척추를 따라 전해져 내려왔다. 가까스로 정신을 차린 그는 황제에게 절하고 앞으로 나가 말했다.
“변방의 일이 참람되어 감히 아뢰올 말씀이 없사오나, 다만 섬서의 병력이 적의 기민하고 예측하지 못한 운용(運用)에 스스로 무너진 것이나 진배없으니, 실로 이 모든 것을 헤아리지 못하고 단단히 방비하지 못한 신의 책임인 줄 아뢰나이다. 신이 병부의 상서를 맡은 것이 올해로 삼 년째에 이르러 충분히 유비(有備)할 시간이 있었음에도 오늘의 일에 이르렀으니 어찌 죄를 청하지 아니하오리까. 관복을 벗고 백의(白衣)의 뜻으로 엎드리겠사오니 마땅한 처벌을 받게 하옵소서.”
일이 도무지 수습할 수 없게 되었으니 책임자로서 옷을 벗고 죄를 받겠다는 이야기였다. 영락제는 도무지 오히려 이런 태도에 역정이 났다.
“짐이 그딴 조잡한 변명이나 듣자고 너를 불러낸 것이 아니다! 하등 도움되지 않는 이야기는 집어치우고 이 외적을 맞아서 어찌 방비를 해야 하는지 우선 말하라!”
황제의 역정에 병부상서 금충이 우물쭈물하는 사이, 예부상서 이지강이 앞으로 나섰다.
“우선은 호광과 하남(河南)의 도위(都尉)들의 병력을 한데 모아 적의 군세를 막을 수 있게 해야 하나이다. 서안을 넘어서면 곡창과 물산이 풍부한 지역이고 또한 황도(皇都)에 가까워져 오는지라 적어도 낙수(落水)를 넘지 못하게 해야 하나이다. 하남부(河南府, 낙양)의 동쪽이 흔들리면 국조의 안위가 위험하니 필히 그 서쪽에서 병세를 맞아 격퇴시켜야 할 것입니다.”
“예부상서 이지강의 말이 옳도다. 하나 하남과 호광의 병력을 모두 모아서 대적했다가 혹여 패하고 나면 무슨 병력으로 대체할 것인가? 하남이 넘어진다면 응천부 또한 지척인 일이 아닌가?”
황제의 물음에 이번에는 좌도어사 진영(陳瑛)이 앞으로 나섰다.
부리부리한 수염에 도적 같은 눈매를 지닌 이자는 황제 앞임에도 떨림 없이 간결한 어휘를 사용하여 의중을 고했다.
“회군시키시옵소서.”
“조선에 간 병력을 말인가?”
“그렇사옵니다. 그곳의 병력 10만이면 내지(內地)의 일에 더욱 긴히 쓸 줄 압니다.”
조선으로의 출병은 영락제가 독단적으로 판단해 결정하고 지시한 일이었다. 이런 일을 상황이 위급하다고는 하나 물리라고 한 것은 보통 성정으로는 하기 힘든 일이었다.
그러나 좌도어사 진영은 눈썹 하나 꿈쩍하지 않고 이것을 고해 바쳤다.
황제 또한 그 말에 전연 불쾌해하는 기색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 말에 솔깃해져 있었다.
“그러나 그렇게 된다면 조선왕은 어찌하고, 또 그 나라 훔친 도적들은 어떻게 하겠는가?”
황제가 물었다.
그러나 진영은 역시 당황치 않고 제 할 말을 늘어놓았다.
“그 왕은 천조(天朝)로 데리고 와 그 목숨을 구해 줬으니 택은이 될 것이오, 공경이나 대부의 자리를 내려 조그만 식읍을 주고 그 자손들로 하여금 내려 주게 하면 감히 딴소리를 하지 못할 것입니다. 또한 변방의 이적(夷狄)의 군왕(群王)은 천조의 준함이 있으면 되는 일이니, 새 왕을 인정하고 책봉하여 천조의 위신을 세우면 있던 일이 없던 일이 될 것이오, 없던 일이 있던 일이 되어 조선은 일단은 천조의 말을 따를 수밖에 없을 것이나이다. 섬서의 일이 마무리되면 그때라도 다시 도모해도 늦지 않으니 우선은 내지의 우환을 심려하소서.”
“그렇다. 그 말이 매우 옳도다.”
황제는 진심으로 진영의 말을 따를 요량이었다.
우선은 아쉬운 대로 조선으로 갔던 병력을 다시 불러들이는 수밖에 없었다. 아니, 그래야만 했다.
호광성과 하남성의 병력을 죄 모아서 대응하면 그 수가 대략 10만이 조금 넘었다. 그렇다고 사천이나 산서의 병력을 쓸 수는 없는 것이, 각기 토번(吐藩)과 북적(北狄)을 막아서고 있는 병력들이라 쉬이 돌릴 수는 없었다.
그렇다면 이 병력이 패했을 때가 문제가 되는데 다시 한 번 저지할 병력을 차출하기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병력을 조금이라도 단단히 하기 위해서는 조선으로 보낸 군대가 다시 돌아와야만 했다.
“병부상서는 들으라.”
“하교하시옵소서.”
“동정장군 양영에게 급히 파발을 보내어 긴급히 병력을 그대로 이끌고 귀국하라 하라. 본조(本朝)가 지금 촉각의 위기에 처해 있으니 밖의 적보다 안의 적을 먼저 가늠할 때라. 지체 없이 명을 받드는 즉시 귀국하여 서쪽의 적당에게 맞설 준비를 하라 전하라.”
“만세, 만세, 만만세!”
대신들이 허리를 굽혀 명을 받들고, 조선으로 가는 긴 파발의 행렬이 도성 밖을 나섰다.
각 고을에 들르는 대로 말을 바꿔 가며 쉬지 않고 달려갈 전갈이었다.
그러나 조선에서는 이런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을 전혀 알지 못하고 있었으니, 동정장군 양영은 안주에서 손실을 입고 안주성을 포기한 뒤로, 평양성으로 향해 결사적으로 함락시킬 생각으로 행군을 강행하고 있었다.
들이 깨끗이 비워져 볍씨 하나 주워 먹지 못하고 곤궁한 행군이 계속되니 병사들은 지치고 말 또한 힘이 없었으나, 양영이 판단하기에는 이제는 돌아가거나 평양을 치거나 둘 중 하나였다.
그러나 장수로서 명 없이 함부로 회군할 수 없으니 이제는 창고가 넉넉하다는 평양밖에는 길이 없었다.
1406년 음력 2월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