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위/아래로 스크롤 하세요.




대한제국 연대기 1권(23화)
제7장 결전지로(決戰之路)(3)


사태는 엄중했다. 여기서 막아내지 못하면 하남(河南)과 호광(湖廣)의 수백의 거읍(巨邑)들이 고스란히 적에게 노출되고 마는 일이다.
“우선은 오늘 여기에 혈서를 쓰고 죽기를 각오해 적을 맞이하는 수밖에 없겠소. 우선 악 포정사께서는 상주문(上奏文)을 하나 지어 휘하의 검매(檢枚) 하나로 하여금 황도(皇都)로 이 사정을 알리도록 하시는 게 좋겠소이다.”
안찰사 장익기의 말을 악현승이 가납하여 혈서가 쓰여지고, 파발은 남경 응천부로 향했다.
그리고 같은 날, 바미야르를 내어 보내 시위하던 선봉대장 샤로흐가 직접 샴시르[曲刀]를 빼어 들고 감주에서 요구했던 것처럼 무슬림으로 개종하고 조공을 바치거나 몰살을 당하거나의 양자택일을 요구하고 나왔다.
이제 선택의 여지가 없다는 사실이 명확해지자 서안의 관료들과 군대, 백성들은 성 문 밖에 있는 대군을 향해 전열을 가다듬을 수밖에 없었다.
티무르의 본진은 다음 날 성 외각까지 이르렀다.
처음 바미야르가 시위하는 샤로흐가 서안에 도달했을 때는 얼핏 보기에 4, 5만에 불과했으나, 천천히 후방을 약탈해 가며 행군해 온 본진이 다다르자 그 숫자가 물경 20만이었다. 사마르칸트에서부터 끌고 온 대군은 큰 손실 없이 서안까지 이르러 있었다.
“적에게 투항을 권유해 보았으나 듣지 않았습니다.”
아버지 티무르가 도착하여 진을 꾸리자 샤로흐는 지체 없이 아버지를 찾아와 보고했다. 티무르는 장기간의 행군에 지친 듯 노쇠한 어깨를 들썩이며 말했다.
“알라의 말을 섬기지 않겠다는 자들은 필요 없다. 거부를 한다면 늘 그래 왔듯이 그들의 가축과 여자와 물건만 취하면 될 일이다. 소아시아에서 기독교도들에게 했듯이 말이다.”
티무르가 말하는 기독교도들이란 4년 전인 1402년, 오스만의 술탄 바예지드와 전쟁을 벌이던 당시 오스만의 도읍 부르사를 약탈하고 소아시아를 휘젓던 중 로도스 기사단이 차지하고 있던 요새 스미르나를 말하는 것이었다.
스미르나의 수사총독(修士總督) 기욤 드 문트에게 그와 스미르나의 기독교도들이 무슬림으로 개종하면 죽을 목숨을 사해 주겠다고 티무르가 으름장을 놓았으나, 결국 이들은 저항하여 티무르에게 몰살당하고 말았다.
이를 두고 종교적인 관점에서, “오스만 술탄이 7년간 공격 끝에도 얻지 못한 스미르나를 티무르가 채 보름도 되지 않아 정복했다. 무슬림들은 신을 찬양하며 성읍으로 들어가 원수의 머리를 감사의 제물로 바쳤다.”라고 평한 이도 있었다.
무함마드 이래의 비교적 온건히 종교적 자유를 인정해 주었던 칼리프들과는 다르게 이 몽골 혈통의 유목 전사인 티무르는 자신이 믿는 신앙에 대한 강요를 아무렇지 않게 피정복자들에게 하는 이였다.
같은 무슬림들이 다스리는 나라들 사이에서는 이것이 문제될 것이 없었으나 소아시아나 러시아에서 기독교도들과 충돌했을 때는 반드시 종교를 문제 삼아 정복의 구실을 만들어내곤 했던 것이다.
오죽하면 델리의 술탄들이 힌두교도들에게 관대하다는 이유로 인도로 진격하여 북 인도를 쑥대밭으로 만들어 놓고 약탈한 뒤 돌아올 정도였다.
이런 상황이니 이교도의 본산이나 다름없는 중국의 경내(境內)에 들어와서 계속해서 개종을 요구하는 것은 티무르에게 있어서는 일종의 전쟁 명분이었다. 그리고 그와 똑같이 서안에 행하라고 아들 샤로흐에게 말하고 있는 것이었다.
“하지만 눈앞의 도시는 큰 성읍이라 군대로 짓밟으면 저희 또한 많은 것을 잃게 될 것입니다. 알라께서는 이유 없는 살인을 좋아하시지 않으십니다.”
전장에서는 거침없으나 막후(幕後)에서는 아버지를 진정시키는 역할을 맡아 오던 샤로흐였다.
그는 굳이 20만 대군을 서안성 하나를 초토화시키는데 필사적으로 소모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러나 티무르는 눈을 부라리며 강경하게 아들을 다그쳤다.
“네놈이 이제 나이가 차더니 그간의 공훈(功勳)을 믿고 아비에게 기어오르는구나! 이것은 내가 해 온 방식이오, 신께서는 지난 40년을 그렇게 내 어깨 위에서 지켜 주시며 내가 하는 일을 모두 허락하셨다! 내가 살아온 것이 신의 뜻을 증명해 주거늘 너는 어째서 내 말에 토를 다느냐! 네가 내 궁중의 건방진 자식이로구나!”
티무르의 벽력성에 샤로흐는 꼬리를 마는 수밖에 없었다.
“아버님, 용서하십시오. 말씀하신 바 받들어 한 치 다르지 않게 시행하겠나이다.”
“그래. 그렇게 해야 나의 아들이다. 내게 인정받는 아들들이 내 땅과 유산을 분취(分取)할 수 있다. 너는 너 스스로 내가 성취한 것들을 물려받을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해야만 해.”
늙은 티무르의 목소리는 가래가 낀 듯 찌그러져 갈라졌다.
막사 안에서 가죽 담요를 칭칭 감고서 찡그린 얼굴로 술을 들이키는 이가 바로 그 위대한 정복자였다.
샤로흐는 그런 아버지의 모습을 한 번 눈여겨 두고서는 간단한 군례를 취하고선 밖으로 나왔다.
“바미야르, 이제 아버님이 말씀하신 대로 더 이상의 타협 없이 성을 공격하겠다.”
“이제 곧 밤이옵니다.”
“상관없다. 어차피 초원을 달리던 이들에게 낮눈과 밤눈이 따로 있고 말을 달리다 눕는 시간이 따로 있더냐. 지금 즉시 전열을 가다듬고 성을 공격하기 시작한다.”
“명을 받들겠사옵니다.”
이내 서안성 밖에 진을 친 티무르의 군영 위로 뿔 나팔 소리가 길게 퍼지고, 동물 가죽을 팽팽하게 당겨 만든 북과 구리 나팔의 기이한 페르시아풍의 진군 신호들이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그렇게 시작된 공성전은 20만의 군세가 서안성을 2중, 3중으로 포위하고 지치지 않고 공격을 하니 이내 채 이틀이 지나지 못해 함락의 조짐을 보였다.
전투의 승패를 가로지은 결정적인 계기는 서안성에서 참정(參政) 상약(尙躍)이 몰래 도망치려다가 바미야르 휘하의 병졸들에게 잡혀 온 것이었다.
샤로흐는 이자를 직접 데려다가 심문했다.
“네가 저 성의 수뇌인가?”
“그렇지 않소. 나는 그저 성 안에서 사무를 책임지던 관리일 뿐이오. 저 안에는 아직도 병사를 지휘하는 무관과 이 지역을 책임지는 높은 관리들이 있소이다.”
틀린 말은 아닌 것이, 목숨을 어떻게든 부지해 보려 도망쳐 나온 상약과는 달리 악가(岳家)와 장가(張家)는 아직 안에 남아 필사적으로 싸우고 있었다.
“그럼 네가 모시는 이들도 아직 남아 싸우고 있는데 너는 홀로 목숨을 부지해 보려 이렇게 도망쳐 나온 게로구나.”
“나, 나는… 그, 시키는 대로 할 테니 목숨만, 목숨만 살려 주시오!”
“목숨이라… 네가 할 일은 따로 있다.”
“그, 그게 무엇입니까. 뭐든지……!”
그러나 상약은 더 이상 목숨을 구걸할 수 없게 되었다.
샤로흐가 고개를 가로젓자 바미야르가 뒤에서 그의 목을 쳐 버려 더 이상 구명할 생명도 남지 않게 된 것이다.
샤로흐는 그 시체를 몇 조각으로 나누어 투석기에다 넣고서는 성 안으로 던졌다.
높은 관리가 도망친 사실만으로도 기세가 꺾일 판인데, 그 도망이 성공하지 못하고 죽어서 몸이 찢긴 채로 성안으로 되돌아오니 그만 서안성의 병졸들은 사기를 급격히 잃고 말았다.
그때부터는 일방적인 공세였다.
16만 대군이 성벽에 달라붙어 이내 함락시키고 성안으로 진군해 들어오니 성 안의 관리들은 이내 샤로흐의 포로가 되어 티무르가 보는 앞에서 처형되고, 성안에 있던 병정들과 남자들도 모두 도륙되었다.
여자들은 겁간당하거나 반항하다 죽음을 맞이하고, 성내에는 피비린내가 진동했다.
이 서안성을 얻는데 티무르 군의 손실은 겨우 3만이었다. 섬서성을 휘젓는 동안 도합 7만의 군세를 잃었으나 그러고도 여전히 13만의 군세가 명나라의 심장부를 향해 시시각각 진격하고 있는 셈이었다.
그렇게 3일 밤낮으로 서안성이 불타니, 이 서안성은 곧 옛날의 장안이었다.
이날의 일은 후한 말에 이각과 곽사가 동탁이 죽은 뒤 성으로 난입해 불을 태운 뒤로 그 고도(古都)가 겪은 많은 참화들 중에서도 가장 큰 것이었다.
무수한 전각(殿閣)과 성루(城樓), 당송(唐宋)으로부터 내려오는 수많은 기물(奇物)과 전적(典籍)이 한 줌의 재로 변하니 옛 한당(漢唐)의 왕조가 이곳에 도읍을 정할 때도 이처럼 비참한 지경은 상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1406년 중춘(仲春)
조선국 한성부.

동정장군 양영이 8만 7천의 군사를 이끌고 청천강을 넘어 조사의가 지키고 있는 안주성을 공격하기 시작했단 소식이 한성까지 들려온 것은 음력 1월이 끝나 갈 무렵이었다.
언젠가 소식이 들려오리라고는 생각하고 있었지만 아직 강원도의 제2진위대는 출정할 준비가 끝나지 않았다.
평양에서의 병력 교대가 이루어지고 제1진위대가 전방으로 나서 안주성을 돕기에는 시간이 촉박하기 짝이 없는 노릇이었다.
세훈은 장계를 잡고 있는 손을 꼭 쥐었다. 갑작스러운 명군의 침공 소식을 듣고 준비를 서둘러 진행했는데도, 이렇게 시간이 지연되어 안주성이 위기해 처하는 상황이 된 것이다.
만약에 안주가 뚫리면 평양까지는 지척이었고, 평양마저 내어 주고 나면 한성까지 명군을 막을 군사력이 없었다.
삼남의 진위대들은 명목상 편성에 지나지 않았고, 보총이나 포의 지급도 거의 되지 않은데다가, 이들을 한성으로 불러 모을 때쯤이면 이미 전쟁의 승패가 가늠되어질 가능성이 높았다. 어떻게든 막아야만 했다.
“합하. 참모부 대장(大將) 여산백(礪山伯) 송거신(宋居信) 경이 뵙기를 청하고 있나이다.”
밖에서 호위를 서고 있던 나장이 불러 외치자 세훈은 송거신으로 하여금 들어오게 하였다.
30대 후반의 한창 나이의 호인인 송거신은 거침없이 세훈의 맞은편에 털썩 앉고서는 거두절미하고 말했다.
“시위대를 보내시지요.”
“시위대를 말씀입니까?”
“이 상황에서는 도성을 따로 방비한다는 것이 의미가 없소이다. 합하께서는 강원도의 진위대가 준비가 되면 평양으로 보내려 하셨소만, 강원도의 군적(軍籍)이 제대로 되어 있질 않아 목표한 병력을 아직 모으지 못했으니 우선은 징집이 완료되고 훈련도 끝난 시위대를 평양으로 보내고 평양의 진위대를 안주로 보내셔야 할 일이외다.”
세훈이 송거신의 말을 들어보니 과연 그른 구석이 없었다.
젊어서부터 전장에서 잔뼈가 굵은 사람이라 말 한마디 허투루 하는 법이 없었다.
세훈은 이 송거신이 믿음직하게 느껴졌다. 젊음의 기백과 기력은 이제 예전 같지는 못하나, 형형하게 빛나는 눈동자는 이제 패기와 지혜를 가득 품고 있었다. 손가락 하나 움직이고, 말 한마디 하는 데에도 신중함이 깃들어 있는 사람이었다.
“송 대장께서 그렇게 말씀하시니 제가 듣기에도 그렇게 하는 것이 옳아 보입니다.”
“합하께서는 아직 나보다 젊으시니 이런 말씀 드리기가 그렇소만, 사람은 나이를 먹어야 제 구실을 하는 법이외다. 그리고 어차피 강원도는 부족한 병력이나마 이제 뺄 수가 없으니 다른 방법이 없소이다.”
“강원도의 병력을 뺄 수 없게 되었다니요?”
“방금 제2진위대에서 참모부로 온 파발이 전한 바에 따르면, 폐주의 맏이 양녕군이 명군에게서 병사 수천을 받아 동북면을 휘젓고 이제 강원도로 진군하려 한다고 하외다. 조사의가 안주로 들어갔으니 주인 없는 땅을 휘저으며 전란에 지친 백성들을 구휼하는 시늉하며 기세가 등등하다 하오.”
“그렇습니까. 이거 일이 갈수록 복잡해지는 모양입니다.”
세훈은 한숨이 나왔다.
물론 모든 것을 손바닥 안에 놓고 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았으나, 전혀 고려치 못한 의외의 변수들이 허를 찌르고 있었다.
특히 이방원이 탈출에 성공한 것이나, 그 아들 양녕군이 명군에게서 병력을 빌려 동북면으로 진격할 것은 예측하지 못한 일이었다.
이럴 줄 알았다면 조사의를 안주로 보내지 않고 오히려 동북면을 지키게 한 다음, 평양 쪽의 방비를 더욱 튼튼히 해서 명군이 오길 기다렸다가 그곳에서 맞았을 것이다. 그러면 애꿎은 병력을 전방 너머로 보내 분산시키지 않고도 후방을 튼튼히 해 명군을 협격(挾擊)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제아무리 사람이 머리를 굴려 본다 하나 세상 흘러가는 흐름을 뒤흔들 수는 없는 노릇인 듯합니다.”
세훈의 푸념에 송거신은 걸쭉하게 웃었다.
“이만한 것도 충분히 잘하셨소. 합하께서는 너무 많은 것을 바라시는구려. 촉한의 제갈량도 끝내 한중을 넘지 못했고, 지모가 그렇게 뛰어났다는 한신도 제가 팽당할 것은 가늠치 못했소이다. 그 태공망(太公望)마저도 천하를 오시했으나 제 집안은 다스리지 못해 처덕(妻德)이 없었거늘 이만큼 하셨으면 충분하외다. 전쟁은 한 사람의 지모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니, 오늘 이 송거신이가 이렇게 합하께 부족한 머리나마 빌려드리려 오지 않았소.”
“감사히 받겠습니다. 정말 송 대장이 아니었으면 저는 오늘 패책(敗策)만 생각하고 있었을지 모를 일입니다.”
“그럼 이 송가의 청 하나만 들어주시오.”
송거신이 느닷없는 제의를 해 오자 세훈은 궁금증이 일었다.
갑작스레 무슨 청을 하려는지 당황스럽기도 했으나 그것이 무엇이든 가급적이면 들어주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만큼 세훈은 오늘 송거신의 머리 덕분에 마음이 조금 편해진 것을 느끼고 있었다.
“시위대는 황희가 맡고 있고 그 위의 경사군은 양은계가 책임지고 있소. 그러나 나는 이 애송이들이 도무지 믿음직하지가 못하오. 어차피 비변사에는 합하께서 계시니 내가 직접 시위대를 이끌고 평양으로 가 명군을 맞서려 하오. 부탁이니 합하께서는 이 송가의 부탁을 들어주셨으면 좋겠소이다.”
“정말 가시렵니까?”
“나는 예전 폐주에게 범이 달려들었을 때도 물러서지 않고 이 손으로 때려잡은 사람이외다. 그것이 8만 대군으로 바뀌어도 달라질 것은 없소. 아직 혈기 방자할 나이이니 비변사에 앉아 장계만 들여다보느니 차라리 군세를 이끌고 밖으로 나서겠소. 그냥 장수 하나 전장으로 보내면 된다 이렇게 생각하면 될 일이니 합하께서는 윤허해 주시길 바라외다.”
세훈은 잠시 생각해 보았다.
송거신의 말마따나 비변사의 참모부는 그가 없어도 세훈이 어떻게든 굴려갈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