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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제국 연대기 1권(21화)
제7장 결전지로(決戰之路)(1)
「1405년은 영락제에게 있어서 매우 중요한 해였다. 그해 그가 신뢰해 마지않는 환관 정화에게 맡긴 보선단(寶船團)이 처음으로 먼 바다를 향해 출항하였고, 동쪽 조선에서 발생한 난을 진압하기 위해 양영으로 하여금 10만의 군사를 주어 출병하게 하였다. 그러나 그가 간과했던 한 가지 불행이 그와 명나라를 향해 덮쳐 오려고 하고 있었다.
…(후략)…….」
―맹극상(孟剋想), 집사유설(輯史遺說) 중
「…(전략)…….
어느 날 절름발이 티무르가 수십의 족장을 모아 놓고 말했다.
“중국의 황제는 여러 고을을 다스리고 있는데 우리는 그 수가 50에서 60에 이르러 서로 찢겨져 있으니 이제 우리 모두를 다스릴 사람을 뽑도록 하자.”
그리하여 그들은 땅에 말뚝을 박게 되었다.
“말뚝이 있는 곳으로 뛴 다음에 누가 가장 먼저 도착하나 보도록 하자. 가장 먼저 다다른 사람이 우리의 지도자가 되리라.”
그렇게 모두가 뛰기 시작하자 그때 이미 다리를 절던 티무르는 뒤로 뒤처지게 되었다. 그러나 다른 이들이 발로 달려 말뚝에 닿기 전에 티무르는 제 모자를 던져 말뚝에 걸었다.
가장 먼저 도착한 이가 말했다.
“내가 이제 이 땅을 다스릴 사람이다.”
그러나 아크사크 티무르는 대답했다.
“내 머리가 먼저 들어왔으니 내가 지도자가 될 것이네.”
때마침 늙은이가 지나가다 말하기를,
“지도력이라는 것은 아크사크 티무르에게 있는 것이 틀림없다. 네 다리가 도착했을 때 이미 티무르의 머리가 저기 걸려 있지 않았느냐.”
그리하여 사람들은 티무르를 그들의 군주로 삼아 섬기게 되었던 것이다.」
―토볼의 킵차크 후예들에게 전해져 오는 기록에서
1405년 계동(季冬)
조선국 평안도 이주현(理州縣).
양영이 이끄는 명의 10만 대군은 요동에서 2주간 군열을 정비한 뒤4, 음력 11월의 추위 속에 다시 행군을 시작해 몇 년 전 명나라 여진족을 구슬려 벼슬을 내리고 설치한 건주위의 진영에서 이틀을 머물렀다가 다시 압록강을 건너 이주현(理州縣, 지금의 초산)의 경내로 들어섰다.
이주현은 원래 여진의 땅으로 산양호(山羊湖), 도을한(都乙漢), 봉화대(烽火臺), 등이언(等伊彦) 등을 합쳐 이주현을 설치한 지 채 몇 년이 지나지 않았는데, 근간의 서북면에서 계속된 내란으로 인하여 부임해 온 현령도 없고 그저 채 떠나가지 못한 토민(土民)들만이 궁한 삶을 이어 가는 변방의 고을이었다.
이런 상황이니 명군이 강을 넘어 이곳 이주의 성읍을 손에 넣는 것은 아무런 어려움이 없었는데, 오히려 조선군보다 주변의 혹시 모를 여진족의 준동을 걱정할 정도였다.
“조선왕 전하께서 식솔을 이끌고 당도했나이다.”
명군의 동정장군 양영은 막사 안에서 손톱을 다듬으며 소일하고 있었다.
조선 땅 경내로 들어오고 나서 안 사실은 원군을 청한 조선왕 방원의 군세가 이미 몰락지경에 이르러 반군(叛軍)이 이미 청천강 너머까지 이르러 지척에 주둔해 있다는 사실이었다.
우선은 이 조선왕의 신병을 확보해야 앞으로의 전투를 할 터이니 탈출했다는 이방원이 찾아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들어오시라 하게.”
양영이 손톱 손질을 그만두고 자세를 고쳐 앉자 이내 막사의 한쪽 거죽이 열리고 명나라에서부터 동행했던 세자 양녕과 함께 초췌하나 눈빛은 살아 있는 사내 한 명이 안으로 들어섰다.
양영은 자리에서 일어나 읍하고서는 사내에게 자리에 앉기를 권했다.
비록 그간의 고생에 몸이 상했다고는 하나, 그 기세는 한 나라를 창업하는 것을 뒷받침하기에 충분했던 이방원의 그것 그대로였다.
“먼 길에 고로가 많으셨습니다.”
“적당에 패하고 국계(國界)까지 도망친 임금이 이제 와서 무슨 더할 고로가 있겠소. 세자는 잠시 물러가 있도록 하라. 내가 양 장군과 긴히 나눌 이야기가 있느니라.”
“그리하겠나이다.”
오랜만에 얼굴을 본 세자도 밖으로 물리고 나서 이방원은 제독 양영의 눈을 뚫어질 듯이 쳐다보았다.
양영은 그 기세에 감탄했지만 그것이 그렇게 무례하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앞의 사내는 비록 패하고 몸을 살릴 곳을 찾아 이곳으로 들어온 자였으나 한 나라의 국왕이오, 대명의 제후였다. 한참을 그렇게 있고서야 이방원은 눈의 힘을 풀고서는 나직이 말했다.
“이렇게 불초한 과인을 위해 이 거병을 보내 주신 황제 폐하의 성은에 과인은 감격하였소이다. 거기에 양 제독과 같은 불굴(不屈)의 장수를 보내 주셨으니 과인이 무엇을 더 바라겠소이까. 양 제독은 반군을 토평하는데 진력을 다하여 공을 세우고 황성(皇城)으로 돌아가기를 빌겠소.”
겉으로는 양영의 공을 비는 말이나 실상은 전심전력으로 한성을 되찾고 조선을 진압하여 왕위로 다시 돌려 놓아달란 말이었다.
양영도 대충 역관(譯官)을 통해 말을 전해 듣고서는 그런 의중을 잘 알아챘다.
“전하께서는 걱정을 하지 말고 계십시오. 폐하의 성지(聖旨)를 받들어 온 원정길이니 만큼 신하된 자로서 어찌 패하여 불충을 하겠나이까.”
물론 진력을 다해 맡은 바를 처리하겠으나 그것은 그대, 조선왕을 위해서가 아니라 다 대명황제의 은덕에 보답하고 그 성지를 떠받들기 위해서라는 말이었다.
이방원도 그 말하는 의중이야 잘 알고 있었지만 더 이상 가타부타 이야기하지 않고 앞으로의 행로를 물었다.
“이제부터는 어떻게 하실 생각이시오?”
양영은 탁자 위에 펼쳐진 지도의 한쪽을 지시하며 대답했다.
“우선은 안주까지 적세가 들어와 있다 하니 우리 명군은 우선 청천강 맞은편의 정주(定州)로 들어가 남행(南行)을 준비할 요량입니다. 곧 봄이 오나 우리는 만 리 길을 겨우내 달려와 병사를 먹일 식량이 부족하니 속전속결로 평양성까지는 내달려서 그곳의 창고를 손에 넣어야 할 것입니다.”
이방원은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모든 군세를 잃고 몸만 의탁해 들어왔으니 자신이 결정할 권한은 아무것도 없었다. 다만 이렇게 아무런 손도 쓰지 못하고 그저 한성까지 명군이 뚫어 주는 길만은 갈 수 없다는 생각이었다.
“혹시 양 장군만 괜찮다면 우리 세자에게 3천 정도의 병력을 내어 선봉에 세워 줄 수 있소이까? 무릇 한 나라의 왕족으로서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이렇게 있다가는 구설(口舌)이 많을 터이니, 부족한 세자이나 병사를 지휘할 기회를 주시오.”
양영은 이방원의 부탁에 고개를 끄덕이고 읍했다.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10만 대군 중에 3천 정도를 조선 왕실에 생색내기 위해 내어 주는 것은 딱히 문제가 될 것이 없었다. 오히려 뒤로 숨지 않고 스스로 나서겠다는데 그 기백(氣魄)의 이유야 어찌 되었던 존중해 줄 생각이었다.
“뜻하는 대로 하십시오. 기병 1천과 보병 2천을 내어드릴 터이니 세자가 뜻하는 대로 지휘하게 하십시오.”
“고맙소.”
양영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어렵지 않은 일입니다.”
이렇게 군대의 갈 길이 정해지자 명군은 다시 병력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러나 명군 10만은 한 번에 움직이지 않고 1만의 병력을 지휘첨사(指揮僉事) 주문(周文)에게 내어 주어 이주성을 후방의 거점으로 삼아 지키게 하고, 이곳에 이방원과 그 식솔들인 왕후 민씨, 그리고 효녕, 충녕의 아들들의 신변을 맡겨 두었다.
거기에 아직 돌도 되지 않은 갓난아기가 있었는데, 이방원은 이주에 도달해서 한숨 돌리고 나서야 군호(君號)를 성녕이라 지어 줄 수 있었다.
다만, 세자 이제(李?), 즉 양녕대군은 동정장군 양영에게 3천의 군세를 내어 받아 동북면으로 들어간 다음, 조사의가 안주로 들어와 무주공산이나 다름없는 함주와 영흥의 두 고을을 치기로 하고 먼저 출발하였다.
남은 8만 7천의 군세는 천천히 정주를 향해 향하기 시작했는데, 그 행군이 지나간 뒤에는 땅 위에 풀 한 포기 남지 않았고, 그 발굽 위로 일어나는 먼지가 십 리 밖까지 날렸다고 하니 가히 그 군세의 규모와 위용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1406년 정월(正月)
대명국(大明國) 섬서성(陝西省) 감주위(甘州衛).
절름발이 티무르는 올해로 일흔이었다. 서 차가타이한국(汗國)의 속신(屬臣)이었던 그는 스스로 거병하여 일어나 수십 년의 세월 동안 여러 나라를 병탄하고 부족들을 무찌르고 사막과 초원과 고원을 누비며 거대 제국을 세웠다.
그러나 더 늙기 전에 무언가 더 이루어 내야 한다는 조바심이 그를 쫓고 있었고, 그래서 작년 20만의 정병을 추려 중국으로 원정을 가려던 때에 몸살이 도져 다시 반년을 누워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중국을 향해 출정했던 티무르의 병대(兵隊)는 오트라르에서 회군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재차 사마르칸트에서 반년간 요양을 취한 티무르는 다행스럽게도 건강을 회복했다.
티무르는 이것이 하느님의 뜻이라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하느님, 유일하신 알라께서는 티무르의 꿈속에 나와 창을 든 기병들과 코끼리의 대군을 내려주었던 것이다.
그 꿈을 꾸고 나서 티무르는 몸이 꽤나 호전되어 이제 다시 먼 원정을 시도해 볼 만큼의 건강도 회복했다.
티무르는 한 번도 칸(汗, Khan)의 이름을 취한 적이 없었다. 명목상으로 그는 서 차가타이한국의 칸의 신하였고, 비록 소유르가트미시(Soyurghatmsh)의 아들 마흐무드(Mahmud)의 사후 티무르는 더 이상 칸을 옹립하지 않았으나 적어도 아직까지 그는 아미르(Amir)였으며 어디까지나 차가타이 칸들의 봉신(封臣)으로서 마와라안나하르의 지배자라는 이름에 만족했다.
그는 스스로 군사적인 지모가 뛰어나지만 정치적인 처세는 부족하다고 느끼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타협하지 않고 정복하고, 부수고, 그의 말발굽 아래에 많은 민족들을 눕혔다.
그러나 이미 그의 제국은 마와라안나하르의 아미르라는 이름에 걸맞지 않게 드넓게 펼쳐져 있었다. 그러나 티무르는 그것이 몽골제국을 다시 건설하는 숙명이라고 여기고 있었다.
징기스칸의 후예인 황금씨족의 일원이 아닌 그는 칸의 칭호를 가질 수 없는 몸이었다. 그러나 적어도 그 스스로 그럴 자격이 있다는 것을 입증해 보일 수는 있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중국을 정벌해야만 했다.
“나는 다시 가야 만한다.”
티무르가 어느 날 대소 신료들을 모두 모아 놓고 말했을 때, 어느 누구도 감히 토를 달 생각을 하지 못했다.
그것은 이미 정해 놓은 뒤 하는 이야기였다. 이제 주름에 묻혀 가는 눈이었으나, 그 형형한 기색은 죽지 않고 뚫어 보듯이 좌중을 일시하고 있었다.
가을이 찾아오고 겨울로 접어들 무렵 티무르는 중국으로 가는 정벌의 길을 다시 재촉했다.
작년의 원정행을 위해 모아 두었던 군사와 비축해 둔 무기, 식량을 모두 꺼내어 다시 중국으로 가는 길을 열고자 한 것이다. 그리고 다시 20만의 군대는 검은 바탕에 붉은 세 개의 원이 그려진 삼환기(三環期)를 들고 동쪽으로 향했다.
티무르의 속국이나 다름없게 된 동 차가타이한국의 접경에 들어서서는 동 차가타이의 칸 샴 시 자한(Shams―I―Jahan)으로 하여금 직접 길잡이를 하도록 하였다.
타시켄트를 거쳐서 산맥과 사막들 사이의 길을 지나 호탄(Khotan)에 이르렀을 때는 명나라의 국계가 지척이었다.
20만의 대군은 쉬지 않고 행군을 계속해 새해가 밝아 봄이 되었을 무렵에는 이미 섬서성 감주(甘州)성 외각에 이르러 있었다.
감주의 지방관인 동지(同知) 서독(徐篤)은 채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도 파악하기 전에 성문 앞까지 육박한 티무르군을 보고서는 그만 실신하고 말았다. 난데없이 서쪽 사막을 가로지르고 나타난 20만 대군의 위용에 그저 할 말이 나오지 않았다.
이곳 감주의 감주위(甘州衛)에 주둔하고 있던 행도사(行都司)의 지휘사사(指揮使司) 장유택(張裕擇) 또한 당황스럽기 짝이 없었는데, 이건 도무지 예기치도 못한 일이라 어이가 없기 짝이 없는 노릇이었다.
비록 서쪽의 변경이라 주둔 병력이 3만 가까이 있었지만, 코끼리 부대를 앞세운 티무르의 20만 대군 앞에서는 아무 쓸모가 없는 노릇이었다.
그러나 싸우지도 않고 패배를 자인할 수는 없는 노릇이라 감주동지 서독은 파발을 섬서성의 성도인 서안(西安)으로 보내어 적의 내습을 알리게 하고, 지휘사사 장유택과 의론하여 성안에서 분연히 맞서기로 결의하였으나, 그 자신은 과중한 부담감으로 인해 몸이 급격히 나빠져 일선을 돌보지 못하고 위중한 상태에 빠지고 말았다.
지휘사사 장유택은 오롯이 이 모든 책임을 떠맡아 적을 막아내는 수밖에 없었는데, 이미 티무르의 군대는 감주성 사방을 둘러싸고 항복하기를 종용하고 있으니 그야말로 눈앞이 깜깜할 일이었다.
티무르의 아들 샤로흐가 앞으로 깃발을 쳐들고 성문 앞까지 육박한 것은 그때였다.
사절로 왔으니 성문을 열라는 종용에 장유택은 우선은 그를 들여보내는 수밖에 없었다. 20의 병력을 대동하고 위세 당당하게 감주성으로 들어와서는 몇 가지의 조건을 내걸었다.
이제 서른쯤 된 샤로흐는 상당히 훤칠한 호남으로 공격적인 목소리를 지니고 있는 사내였는데, 장유택은 20만 대군을 등에 업은 샤로흐의 기세에 눌려서 자기 성에서 접견을 하면서도 식은땀을 흘리며 하는 말을 듣고만 있을 수밖에 없었다.
“내가 당신들, 중국인들에게 할 수 있는 제안은 단 두 가지요. 항복하고 무슬림이 되던가, 아니면 풀 한 포기 남지 않고 여기서 지워지던가. 그게 나의 아버지 티무르가 해 온 방식이고, 지난 많은 나라들이 그렇게 무너지거나 신하가 되었소. 어떻게 하시겠소?”
“나와 내 휘하의 병력은 그렇게 할 수 없소이다. 이곳은 대명의 땅이오. 나는 함부로 성문을 열어다 바치라고 배우지 않았소.”
장유택은 다리가 벌벌 떨렸지만 애써 태연한 척 얼굴을 가장했다.
그는 억지로 용기를 내 거절하는 말을 할 수밖에 없었다. 바로 앞의 티무르의 20만 대군도 무섭지만 멀리 응천부에 있는 영락제 또한 무서웠다. 성을 지킬 생각도 않고 항복해 영락제에게 십족멸(十族滅)을 당하나 여기서 티무르에게 맞서다 패배해 참수(斬首)로 생을 마감하나 별 차이가 없는 노릇이었다. 오히려 막아서다 죽으면 나중에라도 사가들에 의해 쇄신(碎身)하여 충절했다는 평이라도 받을지 모를 일이었다.
“그렇다면 우리는 지금부터 적이오.”
샤로흐는 단지 그 말만을 남기고서는 다시 자기 진영으로 돌아가 아버지에게 고해 바쳤다. 더 기다릴 것도 없이 바로 전투가 시작되었다.
코끼리들로 성문을 들이받고 10만 병력이 화살을 성안으로 쏘아대며 기어오르니 막는 것이 고역이었다.
아침에 시작된 전투는 저녁 무렵까지 계속되었는데, 해가 질 무렵이 되었을 때는 성문이 거의 부서지고, 적군이 성벽을 기어오른 뒤였으며, 장유택 휘하의 군사는 겨우 3백도 남지 않았다.
패배가 임박한 느낌이 들자 그는 동지 서독을 찾아갔으나 이미 소식을 듣고 분한 마음에 유서를 남기고 목을 그어 자결한 뒤였다.
장유택은 씁쓸하게 이제 모든 것이 끝났음을 인정하는 수밖에 없었다. 장유택과 남은 병사들은 티무르에게 살아서 끌려가 치욕을 당하지 않기 위해 스스로 서독이 한 것처럼 목숨을 끊어 절개를 지키니, 여기서 바로 감주절명(甘州折命)의 고사가 나왔다.
감주의 관리와 병사들의 끼끗한 죽음과는 상관없이, 티무르의 군대는 감주성을 함락시키고 재물을 약취(掠取)한 다음 눈에 띄는 자들이 있으면 토살해 버리고서는 3일을 감주에 머물렀는데, 티무르가 시력이 많이 약해지고 몸이 좋지 않아 잠시 기력을 회복하기 위해서였다.
감주성을 함락시키는 데에 거의 2만의 군사를 잃었으나, 개전을 승전으로 이끌었으니 손실쯤이야 크게 눈여겨 둘 게 못되었다.
이제 티무르의 군대는 늙은 아버지를 대신해 막내아들이자 용장(勇壯)으로 그 명성이 자자한 샤로흐가 거의 이끌고 있었는데, 그는 아버지만큼 포악하지는 않았으나, 종교로서의 이슬람과 일족의 율법으로서의 몽골 혈통(血統)은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그의 정체성이었다.
그는 그런 이유로 이교도의 땅이자 몽골의 대칸을 패퇴시킨 명나라를 정벌할 강력한 동기를 아버지만큼이나 느끼고 있었다.
감숙성은 이제 그 시작일 뿐이었다. 1406년, 명 영락 4년, 음력 1월 4일 정초를 맞이해서 한껏 들떠 있던 감주성은 20만 티무르 대군에 의해 무너졌다. 3만의 감주위 병력이 모두 손실된 것에 비해, 티무르군의 피해는 경미해 겨우 2만 남짓이었다.
삼 일을 감주에서 머무른 군세는 이내 서안(西安)을 향해 말굽을 돌리니 1월 7일의 일이었다. 선봉에는 티무르의 막내아들 샤로흐가 서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