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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제국 연대기 1권(19화)
제6장 전란전야(戰亂前夜)(4)
앞으로 그가 해 주어야 될 가장 큰 일은 이 아이들에게 조금 더 나은 세상을 물려주기 위해서 자신이 가진 것을 다해 노력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어찌 보면 가장 쉬우면서도 실천하기 어려운 일인지도 몰랐다.
“현도 네가 아비에게 가르침도 주는구나.”
“그렇사옵니다. 아버님, 이 천자문 안에 세상의 진리가 담겨 있다고 스승님이 말씀해 주셨사옵니다.”
이제 겨우 다섯 살짜리 꼬맹이가 격식을 차리면서 말하는 것이 꽤나 맹랑하다고 생각했다.
문득 700년 너머에나 있을 부모님의 얼굴이 생각났다.
자신이 어릴 적 머리 좋음을 으스대며 부모님게 자랑하곤 했을 때 자신을 보시던 눈빛이 아마 세훈이 지금 아들을 보는 눈빛이리라.
마음이 정리가 되자 세훈은 지체하지 않고 나섰다. 가족과 주변의 사람들을 지키기 위해서는 우선은 명나라를 막아내야만 했다.
마음의 짐을 털어내고 지금의 위치를 좀 더 명분상 튼튼히 하기 위해서 세훈은 종친(宗親)들과 대신(大臣)들을 모아 놓고 이석근에게 말해 왕의 이름으로 조칙을 발표하게 하였다.
그것은 폐주(廢主) 이방원을 왕자의 난을 들어 역적(逆賊), 난신(亂臣)으로 규정하고 지금의 종묘와 사직을 위협하는 도당으로 몰아세우는 내용이었다.
강씨 소실로 세자였던 방석(芳碩)을 소흥세자(昭興世子)의 시호를 내려 개성부 남쪽 수륙교 인근에 사당을 세워 그 혼을 위로케 하고, 난중에 주살당한 삼봉 정도전으로는 그 가문으로 하여금 봉화공(奉化公)의 작위를 내리고 충문(忠文)의 시호를 내렸다. 남은(南誾), 심효생(沈孝生)에게도 그와 같이 하였는데, 남은은 의령후(宜寧侯)의 작위와 강무(剛武)의 시호를, 심효생은 부유후(富有侯)와 진충(盡忠)의 시호가 내려졌다.
또한 이들을 기리기 위해 삼충사(三忠祠)의 사당을 흥인지문 가까이에 지어 배향관(配享官)을 두어 그 제향을 모시도록 하였으니, 이것은 모두 이방원의 난을 역모로 다스리고 또 폐주의 정당성을 지우는 작업이었다.
이성계는 복잡한 마음으로 일절 이 일에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있다가 가장 아껴 세자로 삼았던 막내아들 방석의 사당이 개성부중에 지어지자 그곳에 들러 제문(祭文) 하나만을 놓고 쓸쓸히 돌아섰다.
아꼈던 이들은 이제 복권이 되어 사당에 배향이 되었으나, 이로서 산 아들은 역적이 되어 죽게 되었으니 그 기분이 가히 복잡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11월이 되자 명군이 압록 지척까지 진군했다는 이야기가 들려왔고, 진위대와 시위대의 편성대강이 끝난 듯하자 세훈은 지체 없이 옛 탐라군의 맹장들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제1진위대로 하여금 평양으로 진군토록 하고, 조사의에게도 서찰을 보내어 안주로 진격토록 하였으니 모두 계획했던 대로 명군의 압박이 거세지기 전에 먼저 폐주를 처단해 적의 기세를 꺾으려는 목적이었다.
진군하는 병사들이 죄다 소흥세자 방석과 왕후 강씨, 개국공신으로 충성을 다하였으나 목숨을 잃은 정도전의 죽음을 외며 진군하고 있으니 이것이 모두 이방원의 죄업으로 그 목을 옭아매는 주문(呪文)에 다름 아니었다.
1405년 계동(季冬)
조선국 평안도 평양부.
조선군 참장(參將) 고상온은 해주 주둔의 제1진위대를 이끌고 평양성이 내다보이는 대동강변까지 진격해 있었다.
제1진위대는 한성 점령 이후에 이석근은 왕위에 옹립하고 처음에 시위대(侍衛隊)로 편제한 부대로, 총 2만의 병력 중 5천이 탐라군 출신의 정예였다.
명나라의 침입이 눈 앞으로 다가오자 이 정예 병력을 수도방위와 왕실호종(王室護從)에만 사용할 수 없다는 세훈의 판단에 의해 기존 시위대는 지금의 제1진위대로 재편되어 풍해도 해주로 전진 배치되고, 새롭게 시위대를 뽑아 편성했는데 바로 그 제1진위대가 참장 고상온의 지휘 아래에 대동강변으로 육박해 들어온 것이다.
제1진위대는 조선군 최고의 정예 부대인 만큼 그 보급도 가장 우선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었는데, 군복은 신식군복으로 일체 통일되어 있고 보총 또한 가장 우수한 품질의 상태가 양호한 것들로 불출되어 있었다.
거기에 더한다면 탄약 및 식단의 지급도 우수한 편이었다. 제1진위대에는 군속(軍屬)의 종군(從軍) 취사인(炊事人)을 30인 편성하여 특별히 그 식사를 돌보도록 했기 때문이다.
고상온은 이번의 계급 개편에 따라 새로이 계급장을 부착한 개량 전립(戰笠)을 착용하고 신식군복에 각반(脚絆)을 매고 제1진위대장을 나타내는 휘장(徽章)을 두르고 단단한 가죽 군화를 신은 채로 전마 위에 올라 대동강 너머의 평양성을 보고 있었다.
고상온은 이 신식군복을 처음 입게 되었을 때를 생각해 보았다. 처음에는 단추라는 것을 어떻게 끼워서 옷을 맞춰야 하는지 몰라 한참을 고민했었다. 갖춰야 할 옷도 많고 지참해야 할 물건도 많아 도무지 이 옷을 어떻게 입어야 할지부터 고민했어야 했다.
이제 옷을 입는 것이 조금 익숙해지자 옷이 꽉 끼는 것이 불편해졌고, 옷의 모양새도 낯설고 우스꽝스럽게 느껴졌다.
그러나 입어 버릇하면서 이 군복을 입고 군사 훈련을 받기 시작하니 그 불편하던 옷이 그렇게 편하게 느껴질 수가 없었다. 아마 도포 자락을 치렁거리면서 훈련을 받았다면 그런 느낌을 느낄 수 없었을 것이라 고상온은 생각했다.
무거운 군화는 오래 달리고 뛰어도 해어지지 않았고 몸에 붙는 옷은 동작을 군더더기 없이 정확하고 간결하게 하는 것을 도와주었다. 더군다나 지급된 보총과는 완연히 짝을 이루는 완전한 군장이었다.
고상온은 세훈 또한 그 군복과 비슷하게 느껴졌다.
세훈이 자신의 매제(妹弟)가 되고 나서 많은 것이 바뀌었다. 처음에 보총을 받아 군사들과 훈련을 함께할 때만해도 세훈에 대한 경쟁심이 컸었는데, 지금은 오히려 세훈의 덕에 제주 고씨가 후작가(侯爵家)의 사직을 세우게 되었으니 오히려 감읍할 일이었다.
지방 일개 토후(土侯)가 제후(諸侯)의 반열에 오른 것이었다. 그리하여 군의 요직에 출사(出師)하여 제일 가는 정예병들을 이끌고 일선에 종군하게 되었으니 고상온은 문득 지난 수년간의 감회가 새롭기 짝이 없었다.
이제 나이는 삼십대 중반이나 작위는 후작(侯爵)에 계급은 참장(參將)에 이르렀으니 앞으로의 영예는 말할 필요도 없었다.
세훈을 실망시키지 않고 어렵게 얻어낸 내각(內閣)을 지키기 위해서는 이번 전투에서 먼저 선전하여 승리해야만 했다.
세훈의 조언으로 근대군의 운용 방침에 대해서 매일 밤 외우다시피 하며 공부하고, 아직 근대군에 대한 전략을 다룬 병서가 없으니 아쉬운 대로 기존의 제가병서(諸家兵書)를 있는 대로 모아 읽었다. 앞으로 자신의 나아갈 길은 군부(軍府)에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오늘 평양성 목전에 서니 감회가 새로울 수밖에 없었다. 비록 천해의 요새라는 평양성이나 내부가 불안하고 외부에 근심이 쌓이면 안에서부터 무너질 터였다.
“참장 어른. 부교를 설치하시는 것이 어떠하신지요?”
부관인 정위(正尉) 안정재(安定在)가 곁으로 다가와 물었다.
안정재 또한 원래 제주의 호족 집안 출신으로, 원래는 군적(軍籍)에서 빠지는 신분이나 자발적으로 탐라군에 들어와 지금은 그 재능을 인정받아 소정의 훈련을 거친 뒤에 정위(正尉)의 계급을 받아 고상온과 함께 평양으로 종군해 있었다.
“우선 대동강을 건너기는 해야 하겠군.”
“어느 쪽으로 놓으시겠습니까?”
“대동강 쪽의 성은 보다시피 강변을 따라 험준한 벽이다. 상륙할 지점도 없을 뿐더러 부교를 놓고 건너가는 동안 적군의 공격에 노출되게 된다. 보통강과 마주하는 합구(合口)에 있는 쑥섬을 통해 건너가도록 한다. 부교를 쌓는 동안은 감히 이쪽을 방해하지 못하도록 준비해 둔 천자총통과 소포(小包)를 강 너머 성벽 방향으로 쏘도록 한다.”
“명을 받들겠나이다.”
쑥섬까지 포를 전개해 평양 외성에서 가장 돌출되어 있는 거피문 방향으로 쏘아대니 적들은 화살로 응전할 뿐, 부교를 쌓는 것을 제대로 저지하지 못했다.
부교가 중간쯤 전개되었을 때 성 안에서도 보총으로 보이는 무기를 들고 나와 아래쪽으로 쏘아대니 고상온은 조금 놀랐다.
“안 정위. 적들이 쏘아대는 것이 보총 아닌가?”
“그런 것 같습니다. 일전 개성을 공략할 때 서북면으로 피난 가던 폐주의 군세와 마주쳐 200여 명의 손실을 보고 일부 무기 또한 잃게 되었는데 그때 노획한 보총이 분명합니다. 그 숫자가 많지 않을 터이니 크게 우려하실 것은 못됩니다.”
“확실히 우리 손에 있을 때는 그만한 무기가 없지만, 남의 손에 조금만 들려 있어도 무섭구나. 전방에 있는 우리 군에서는 최대한 이 보총에 대한 단속을 철저히 해야 할 것이야.”
“분부 받잡겠나이다.”
적은 탄(彈)이 모자란 듯 이내 사격을 멈추고 성의 요철(凹凸) 뒤에 숨어 화살과 투석전을 전개했으나, 앞마당으로 떨어지는 대포의 위력 앞에 부교가 전개되는 것을 숨죽이고 볼 수밖에 없었다.
이내 부교가 완성되자 우선 고상온은 포를 에워싸고 보병을 전개시키고, 그 뒤를 기병이 따라오도록 했다. 먼저 포를 에워싼 보병대가 전개되자 뒤의 후속대를 기다리지 않고 가능한 빨리 포를 안정된 위치에 설치하여 바로 공격을 가하도록 했는데, 성루(城樓)로 올라오는 적은 보병들로 해서 보총으로 쏘게 하고, 그동안 설치되는 포들은 가능한 성벽을 두드려 진입로를 확보하는 전략이었다.
반면, 기병대는 가능한 늦게 투입되어 전장 전면에 내보내지 않고 안정재의 지휘하에 모란봉 가까이 있는 내성의 칠성문(七星門)으로 유격해 들어가 적군의 퇴로(退路)를 차단토록 했다.
수비군들은 기존의 납탄으로 성벽을 두드려 봐야 성벽을 무너뜨릴 정도의 위력을 내지 못할 것이라고 여기고 성벽 가까이 다가오는 군세에 퍼붓기 위해 끓는 기름 따위를 한참 준비한 모양이었으나, 일은 생각처럼 단순하게 돌아가지 않았다.
고상온이 이끌고 온 포들은 전부 근래에 공조 산하의 화통서에서 개량된 것들로, 화약의 양과 질을 가능한 개선하고 주물 기술을 개량하여 이 포가 쉽사리 깨지지 않도록 한 다음 철제 포환(砲丸)을 넣어 단단한 석벽을 깨부술 수 있도록 개량한 것이었다.
평양성은 옛 고구려시대의 성곽이 고려왕조를 거쳐 오면서도 계속해서 그 형태를 유지하며 개보수되어 왔던 것이었으나, 좌로는 보통강, 우로는 대동강이 감싸 안고 주변에 대군을 전개시켜 성을 공격할 만한 자리가 없는 그야말로 요새(要塞)에 가까운 성이었으나, 신무기에 가까운 대포에는 준비가 전혀 안 되어 있었다.
이내 외성의 성벽이 조금씩 허물어지기 시작하고 거피문은 이미 불타올랐다.
보총대의 호위 아래에 좀 더 가까이 진격한 포수들이 비격진천뢰를 성 안으로 쏘아 올려 두드리기 시작하니 이내 성 안에서도 불이 여기저기서 솟아올랐다.
수비군은 활로 저항해 보려 하나 그 사정거리 밖에서 우선 포로 두들긴 다음에 보총대를 보내 주변을 진압하니 도무지 저항할 여력이 생기질 않았다.
안주로 보낸 5천의 병력을 제하고는 평양에 남아 있는 것은 1만 7천여 명이 전부였고, 그나마 패잔군에 가까워 이내 공격할 의지를 잃고 외성을 버리고 퇴각하기 시작했다.
덕분에 쉽게 외성으로 진입한 제1진위대의 병력은 이내 외성을 점거하고 포를 전개한 뒤, 중성(中城)을 공략하려고 했으나 예기치 못한 복병과 마주쳤다.
“적군에도 포가 있다!”
중성 성벽 가까이 앞으로 다가갔던 병사가 외치며 뒤로 후퇴해 오며 외쳤다.
고상온이 보니 정말로 외성에서 중성으로 들어가는 입구인 널찍한 중양문 문루 주변에 어림잡아 10기쯤 되어 보이는 포들이 서서 공격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 뒤로는 아까 외성에서도 보였던 150여 명쯤 되는 보총을 쥔 사수들이 중성의 성곽 곳곳에 포진하여 성벽을 뚫지 못하게 방비하고 있었다.
“겁내지 마라! 적군의 포는 겨우 10여 문이고 보총을 쥔 사수도 채 몇 백이 안 된다! 우리는 포가 40여 문이고 보총을 가진 병력이 만을 넘지 않느냐! 적군의 포와 보총을 두려워하지 말고 중성을 공격하라!”
고상온의 외침에 사기를 얻은 듯 포의 함성이 울렸고, 적군이 포를 쏘아 응사해 오나 아무래도 사격 거리와 그 숫자에서 차이 나다 보니 이내 정양문 문루가 무너지고 1만이 넘는 병력의 집중 포화에 성곽 위의 보총 사수들도 하나둘씩 자취를 감추기 시작했다.
고상온의 계책은 간단했다.
화력을 집중에서 평양성을 공격한다면 내성까지는 쉽게 뚫릴 것이다. 그러나 이방원과 그 일족, 가신들은 이미 명군의 원병이 오는 사실을 알고 있으므로 성을 빠져나가 목숨을 보전코자 할 것이었다.
그러니 그전에 이들을 사로잡아야만 했다. 병력이 중성을 뚫고 내성을 육박해 들어온다면 내성 칠성문이나 북성의 현무문을 나와 산길로 도피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안정재 정위에게 기병대를 딸려 보내 그들을 포살(捕殺)하거나 목숨만은 살린 채 잡아 오도록 한 것이다.
“내성의 문이 열려 있습니다!”
포연이 자욱한 중성으로 진입하니 이미 내성으로 들어가는 문인 정해문은 열려 있었다. 고상온의 생각대로 피난길에 일찌감치 오른 것이 틀림없었다.
“내성으로 진격해 적당을 빠짐없이 색출토록 하라. 그리고 기병 둘은 나를 따라 내성에서 나가는 문으로 향해 적군의 퇴로를 추적하여 안 정위와 합류할 수 있도록 한다!”
“예!”
명령을 받은 기병들이 따라붙자 고상온은 말을 달려 칠성문 방향으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