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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제국 연대기 1권(16화)
제5장 정족지세(鼎足之勢)(4)


1405년 계하(季夏)
조선국 평안도(平安道) 평양부(平壤府) 안학궁(安鶴宮).

안학궁(安鶴宮)은 본래 옛 고구려의 궁성으로 이곳 평양에 있던 궁이었다. 그러나 세파에 멸실(滅失)되어 그 흔적을 찾을 수 없기가 오래였는데, 이방원이 한성에서 쫓겨 이곳 평양으로 들어오면서 대충 그 터가 있는 곳 어름에다가 서른 칸 정도의 행궁(行宮)을 짓고 나서 새로 이름 붙이기는 부끄러운 크기라 옛 고구려의 궁성 이름을 따다가 안학궁이라고 붙여 놓고서는 가솔과 배신(陪臣)들을 이끌고 기거하고 있었다.
이방원은 평양으로 밀려들어 온 뒤로 반년 가까이 앓아누웠다. 도무지 이런 상황을 그 깔깔한 성정에 받아들일 수가 없었던 노릇이었다. 그렇게 심신이 진력이 다해 고생하는 동안에도, 이것을 어찌 타개하여 볼까 생각해 보았으나 앞길은 오리무중(五里霧中)이라 어찌 할지 답이 서질 않으니 답답할 따름이었다.
어찌 보면 평양은 예전 고구려의 도읍이요, 전조(前朝)에서도 서경(西京)으로 삼아 천도하고자 했던 이력이 있는 오랜 도읍이니 하고자만 한다면 이곳을 기반 삼아 다시 일어서는데 부족함이 없는 땅이라고도 할 수 있었다.
하나 이방원이 생각하기에도 이곳에서 자기의 목숨이 붙어 있는 것은 순전히 동서 양면(兩面)을 제외하고 전 조선을 장악한 것이나 다름없는 세훈이 더 이상 전선을 일으키지 않고 가만히 있는 탓이었다.
그 차지한 땅이 고려 국초(國初)의 땅과 비등하니 태상왕이 있는 동북면이나 이방원 자신이 있는 서북면이나 그 땅이 변방(邊方)이나 다름없는 것이 사실이었다.
남으로는 한 치의 땅도 더 진격할 수가 없고, 북쪽으로는 3년여 전에 명나라 황제가 여진족을 일시 토평(討平)하고 벼슬을 주어 건주위(建州衛)를 두어 그 일대를 다스리고자 하니, 건드려 봐야 남을 것도 없거니와 양측으로 적을 만들 수 있는 위험한 일이라 시도해 볼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이런 상황이니 함부로 군사를 움직일 수도 없었다.
그렇게 앓기를 몇 달을 하다, 올해 정초에 들어서부터는 이방원 자신이 기력을 회복하여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배신(陪臣)들로 정처(政處)를 꾸며 부족하나마 평안도 전역과 대동강 너머 풍해도 일부에까지 통제권을 장악케 하고, 군적을 조사하여 징병하고, 예전 한성에서 탐라에게 진상받았던 보총 100여 정과 이래저래 노획한 50여 정을 합쳐다가 부족하나마 150총으로 보총대를 만들고 화약을 만들 수 있는 건물을 지어다가 예전 군기시에서 일하다가 몽진길에 따라선 장인들로 하여금 부족하나마 화포도 10여 포 만들도록 지시했다.
그러나 이렇게 아무리 군세를 확충하고자 하여도 그 한계는 자명한 일이었다. 적의 보총대는 5천이고, 뛰어난 주조술을 지닌 장인들이 많으니 포 또한 지금쯤 충분히 만들어내고 있을 터였다.
거기에 삼남(三南)만 하더라도 군적을 들어 징병할 수 있는 군세가 족히 평안도의 10배는 넘을 터이니 처음부터 상대가 되지 않는 싸움이었다.
거기에 이렇게 혹여 궁지에 몰리면 태상왕도 결국 기를 꺾고 들어와 자신과 힘을 합쳐 주지 않을까 기대했으나, 결국 어찌된 일인지 조사의가 군권을 장악하고 태상왕은 절에 불사(佛事)를 모시러 들어간다고 하여 나오질 않으니 어찌된 형국인지 그 또한 알 수 없었다.
이방원이 곰곰이 생각해 보기에도 이것은 조사의가 자신과는 척을 진 지 오래기에 이런 상황을 생각해서 태상왕을 끌어내리고 자신이 군권을 장악한 것에 다름 아니었다.
일이 이렇게까지 되고 보니 이방원은 분노가 치밀어 올라 잠을 이루지 못할 지경이었다.
교만한 말일지도 모르나 이방원은 자신과 같은 효웅(梟雄)은 본 일이 없었다. 그 지모와 계략 그리고 호통으로 고려 왕조를 무너뜨렸고, 감히 분수에 맞지 않게 용좌에 덤비는 형제들과 간신배들은 모두 스스로 쳐 내어 결국 왕의 자리까지 오를 수 있었던 것이다.
이것은 날 때부터 이방원에게 주어진 것이 아니요, 일개 대신의 아들로서 처음부터 차례차례 쌓아 올려 만들어 나간 것이니 감히 어떤 이도 그에게 비할 수가 없는 노릇이었다.
그런 그이기에 지금의 상황도 실패라고는 생각지 아니하고 다만 잠시 몸을 굽혀 때를 기다릴 때라고 여기려 노력은 하였으나, 차마 남쪽에서 한성부를 장악하고 꼭두각시 같은 조카를 등에 업고 떵떵거리고 있을 김세훈을 생각하면 그만 노여움이 비집고 나오고 마는 것이다.
이렇게 1년여가 지날 무렵이 되니 이방원은 도무지 타개책이 나오지 않아 고심에 고심을 거듭하다 결국 하륜을 불러다가 상의를 하게 되었다.
“일이 이렇게 되어 꼼짝을 할 수 없으니 어찌해야 할지 결단이 서지 않네. 좌정승(左政丞)은 어찌 생각하는가?”
“신 하륜이 부족하나마 그간 지모를 짜 보았으나 이대로는 그저 서북면에서 버티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었나이다. 부끄러운 말이나 그나마도 김세훈의 용렬(庸劣)함이 하늘에 미쳐 더 이상 군세를 동원하지 않는 덕에 이렇게 있는 것이나이다.”
“함부로 말하지 말게!”
이방원이 일갈하여 쏘아붙이자 하륜이 넓적 엎드렸다.
“함부로 입을 놀린 소신을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다만, 간언(諫言)한 것은 사실이나이다.”
그것은 이방원 또한 잘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그러나 함께 머리를 짜내어 나라를 도모해낸 하륜에게서 그런 말을 듣는 것은 가슴이 아픈 일이었다. 마음이 상해 쏘아 붙이긴 하였으나 지금은 하륜의 죄를 질책할 때가 아니었다.
“어찌 방법이 없겠는가?”
“일전 소신이 제안한 바대로 김세훈을 이용하려다 결국은 내침 당해 결과가 이런 모양새니 감히 또 다른 계책을 상신하기가 부끄러운 일이나, 일이 참람하여 방법이 없으니 한 가지 지모를 짜 보았나이다.”
“말해 보아라.”
“전하께옵서는 대국에 주문(奏文)하여 황제 폐하께 적법한 계사(繼嗣)로 인정받아 왕위에 등극하셨으니 이를 어기고 인평군의 아들을 옹립한 김세훈은 폐하의 명을 어긴 역적이 되는 것이나이다. 지금의 대국의 황제께옵서는 황제에 이르기까지 역정이 깊었고, 지금 천하를 얻은 뒤로는 주변을 도모하여 질서를 바로잡고자 하시는 때이니 전하의 후계이신 세자 저하로 하여금 사절을 이끌고 황제 폐하께 조종(朝宗)하게 하시어 원병을 요청하시는 것이 유일한 방책일 줄 아뢰나이다.”
“천조(天朝)에 구원하는 수밖에 없단 말인가?”
“예로부터 천자는 제후의 사직에 분란이 있고, 그것이 천 리에 참람된 일이면 먼 거리라도 거병주파(擧兵走破)하여 그 질서를 바로잡곤 하였으니 하늘 아래 새로울 것 없는 사실이나이다.”
“그렇다면 사절은 언제 보내는 것이 좋겠는가?”
“일이 촉박하니 당장에라도 준비해서 보내야 할 것이나이다.”
이방원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야기가 나왔으니 더 이상 지체할 필요가 없었다. 하윤(河崙), 이거이(李居易), 성석린(成石璘), 조준(趙浚) 모두 불러다가 의론케 하니, 이것이 이방원을 따라 평양으로 몽진(蒙塵)한 대신들 중 가장 공신(功臣)들의 일파였다.
밤새 논의를 거듭한 끝에 세자 양녕을 그 필두로 삼아 예문관 대제학(藝文館大提學) 이행(李行)을 참례시켜 경사(京師)에 보내어 상주(上奏)하게 하기로 하고, 서북면으로 들어와 예물이 빈곤하니 아쉬운 대로 말 300필을 끌고 가서 황제에게 바치도록 하였다.
상주할 문구는 하륜이 작성하였는데, 다음과 같았다.

……그윽이 생각하건대, 소방(小邦)이 성조(聖朝)를 섬긴 이래로 여러 번 고황제(高皇帝)의 조지(詔旨)를 받았사온데, 화외(化外)를 구분하지 않고 일시동인(一視同仁)하셨고, 근자에 또 칙지(勅旨)를 받들어 국조의 왕위(王位)를 습유토록 허락하여 주셨으니 만세의 은덕에 다름 아닙니다. 그러나 소왕(小王)의 덕이 부족하여 성조(聖祖)에서 세운 소방의 왕실의 종사를 문란케 하고 그릇된 바로 천조의 칙유를 농단코자 하는 무리들이 거병하여 일시에 평양까지 쫓기게 되었으니 그 참람됨이 이루 말로 다할 수 없나이다. 엎드려 바라옵건대, 성자(聖慈)께서 상항(上項)의 간신들을 토벌(討伐)하도록 천병(天兵)을 내어 주시어 소방의 종사 사직을 바로잡아 예전대로 편안히 생업(生業)에 종사하게 하여 길이 성조의 은택(恩澤)을 입게 하소서.

조선국왕 (朝鮮國王)
이 방원 상주(上奏)

천자에게 아뢸 글이 완성되고, 남경행(南京行)의 행장이 완성되자 이내 갈 길이 문제가 되었다.
한성에서 사신을 보낼 때는 아직까지 바닷길을 통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이제는 서북면에 변변한 선적 하나 없으며 포구도 마땅치 않은지라 요동을 경유하여 명의 도읍 응천부로 들어가는 방안을 강구하여 보았으나 그 길이 만 리 길이라 도무지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러나 따로 대안이 없기에 고로(苦勞)를 무릅쓰고 그렇게 하길 택하는 수밖에 없었는데, 평양에서 출발하여 그 사신단이 의주(義州)를 넘어선 것은 음력 7월 11일의 일이었다.
명나라의 보선단(寶船團)을 이끈 태감(太監) 정화(鄭和)가 영락제(永樂帝)의 명을 받들어 처음으로 317척의 함대와 2만 7,000명의 병사를 출항하니 이것이 바로 같은 날의 일이었다.



제6장 전란전야(戰亂前夜)(1)


「동으론 조선이 일어나 있고, 서로는 토번이 기거하며, 남으로는 안남을 감싸며 북으로는 대적에 이르니.
○東起朝鮮,西據吐番,南包安南,北距大?.」
―명사(明史) 지리지(地理誌) 제1권



1405년
명(明) 영락(永樂) 3년 중추(仲秋)
대명국(大明國) 경사(京師) 응천부(應天府).

명의 도읍 응천부는 옛 왕조들의 도읍이 들어섰던 육조고도(六朝古都)로, 금릉(金陵), 건업(建業)의 이름으로도 불리우다 원조(元朝)에는 집경로(集慶路)라 불리다 명 태조(太祖) 홍무제(洪武帝)가 이곳을 국초(國初)의 도읍으로 삼으니 바로 응천부였다.
이 성읍은 홍무제에 의해 들어선 수십 리에 이르는 거대한 성곽과 화려한 황성(皇城)이 그 장관을 이루고 있었는데, 인구 70만의 당대 최고의 도읍이었다.
이 도읍에서 국시(國是)를 일괄하는 천자 영락제는 조선에서 들어온 사절의 내알(內謁)을 받아 이를 접견하고 있는 중이었다.
“너희들이 짐에게 가져온 글은 잘 읽어 보았다. 말 또한 잘 받았노라.”
“성은이 망극하나이다.”
“네가 조선왕의 세자이냐?”
황제가 용안(龍眼)을 부라리며 물어오자 양녕은 한순 움찔하였으나, 기백 있게 처신하리라 다짐한 대로 꼿꼿이 대답하였다.
“예, 제가 조선의 세자이나이다. 성조(聖朝)의 은택을 입어 사직을 잇도록 책봉(冊封)받았나이다.”
“그래. 네 눈과 품태(品態)가 마음에 든다. 네 아비와 나라가 감히 짐의 성지(聖旨)를 받들지 아니하고 사직을 뒤흔드는 모리배들의 손에 위태롭다 들었다.”
“옛 원나라에서 양마(養馬)하던 탐라라 하는 땅이 있사온데, 그곳 호족들이 일심하여 거병하였나이다. 그 수괴가 김세훈이라 하는 자이온대, 그 머릿속이 계모로 가득 차 뛰어난 병기를 만들고 조정과 백성의 민심을 흔들어 난중(亂中)을 틈타 도읍을 점령하고 괴뢰를 왕으로 추대하니 소신의 아비와 나라의 대신들이 부족하여 그만 요동 지척의 서변(西邊)으로 밀려나게 되었나이다.”
아홉 개의 계단 위, 높은 천좌(天座)에 앉아 있는 황제를 더 이상 감히 쳐다볼 엄두가 나지 않아 양녕은 엎드린 채로 조아렸다.
황제는 소문대로 그 생김새가 매섭고 강단이 있어 보였고, 성정이 패왕의 그것이라는 말이 틀리지 않은 듯 보였다.
황제는 양녕의 대답을 듣고서는 아무런 하교도 하지 않고 성큼 일어나 구궤의 단을 내려와 양녕 앞에 서서는 쩌렁쩌렁 울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깟 토족(土族)의 난 하나 어찌하지 못하여 나에게까지 병사를 빌러 온 너희의 모양이 한심하도다!”
“죽여 주시옵소서!”
영락제의 일갈에 대전에 들어선 양녕과 조선 사신들이 복배(伏拜)하며 죄를 청했다.
영락제는 건문제에게서 황위를 찬탈한 뒤 유명한 문사인 정염(宋濂)에게서 배워 뛰어난 글월을 자랑하던 건문제의 조관(朝官) 방효유(方孝孺)에게 황제 즉위를 찬양하고 그 덕을 기리는 표문을 지어 올리라 명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성정 곧은 방효유는 되레 순군진충(殉君盡忠), 즉 임금을 따라 죽어 충성을 다하겠노라 오히려 붓을 꺾고 등극의 조(詔)를 바쳐 올리지 않으니 영락제 주체는 이에 대노하여 구족(九族)에 더해, 방효유의 벗들과 동문(同文)들, 심지어 그의 글을 칭찬하고 자주 읽던 문사들까지 죄 잡아서 죽였던 것이다.
이른바 십족멸(十族滅)이었다.
이러한 황제의 성정이니 이 전말을 들어서 알고 있는 조선 사신들 또한 그 일갈(一喝)에 어찌 다리를 떨며 엎드리지 않겠는가.
황제는 코웃음 치며 그들을 바라보더니 이내 다시 용상으로 올라가 앉고서는 느긋한 목소리로 다시 하교(下敎)했다.
“그러나 조선왕은 짐의 천조(天朝)에서 표문을 내려 왕으로 삼은 나의 속신인데, 그것을 감히 겁박하여 왕위를 찬탈하고자 계책하고 아직도 물러서지 않고서 그릇된 자를 군주의 자리에 올려 놓고 있는 도당은 짐에게 대적하는 것과 다를 바가 하나 없다.”
“…….”
대전이 모두 고개를 들었으나 감히 황제의 말을 끊고 나서려는 자는 없었다. 영락제는 좌중을 일시하고서는 이내 손으로 용좌의 팔걸이를 두드리기 시작했다.
딱딱거리는 소리만이 대전을 조용히 감싸고 있었다.
“사정이 이러하니 부족한 제후의 잘못은 짐이 감싸 안을 수밖에 없는 노릇이 되었다. 그러니 내가 병사를 내어 너희의 임금을 돕도록 하겠다. 너희는 상황이 이러하기에 재조지은(再造之恩)을 내려 사직을 재건토록 하겠으니 이를 모쪼록 감사히 여겨 내가 보내는 장수와 천병을 받드는 데에 한 치 누도 없게 하라.”
“성은이 망극하여이다.”
“성은이 망극하여이다.”
양녕이 재차 부복(俯伏)하자 부사(副使) 이행(李行) 또한 드러눕고 그들을 호종하던 사신 일단이 모두 예를 갖춰 황제의 성지(聖旨)를 받들었다.
영락제는 그제야 흡족한 얼굴을 하고서는 좌우로 도열해 있던 대신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짐은 양영(楊榮)에게 군사 십만을 내려 동쪽의 역적들을 토평하고자 하여 양영에게 동정장군(東征將軍) 토평총병관(討平總兵官)의 지위를 제수하니 내각 대학사 해진(解縉)은 이를 받들어 양영으로 하여금 역적배들을 토벌하고 조선왕으로 하여금 그 사직을 다시 수복할 수 있도록 도우라.”
“성은이 망극하여이다.”
“만세, 만세, 만만세!”
명나라 중서성 승상이었던 호유용(胡惟庸)이 그 불충으로 옥(獄)을 당한 이래 승상의 지위가 폐지되고, 그 뒤로 명조의 재상에 상당하는 것이 내각 대학사의 수보(首輔)였다. 그 수보의 자리를 맡은 해진이 나와서 명을 받들자, 이내 대신들이 허리를 숙이며 만세를 삼창했다.
이리하여 내각 대학사 중 하나인 양영이 토벌군의 책임자가 되어 10만의 군세를 인계받으니, 양영은 소위 양사기등과 함께 3양(三楊)으로 불리는 고매한 관료로, 원래 이름은 자영(子榮)이고 그 자(字)는 면인(勉仁)으로 건안(建安)사람이었다.
건문 2년(1400년)에 진사가 되어 연왕 주체가 군사를 이끌고 건문제가 있는 남경 승천부를 칠 때, 이를 도와 입궁하여 그를 호종했다.
영락제가 황제에 자리에 오른 뒤에 문연각(文淵閣)에 들어가 한림원수선(翰林院修選)의 자리에 올라 황태자에게 시강(侍講)하는 자리까지 오른 뛰어난 학사였다. 문관이면서도 동시에 일래 무예에도 조예가 있어 영락제가 눈여겨 보았다가 조선에서의 난을 기하여 양영에게 군사를 맡겨 보내게 된 것이다.
이 양영이 입궁(入宮)하여 조칙을 받들고 이방원의 세자 양녕과 만난 것은 그 다음 날의 일이었다.
“조선의 일이 안타깝게 되었소. 하지만 이에 황상께서 불민하나마 나로 수장을 삼아 역적을 토평하라 하셨으니 세자께서는 걱정하지 말고 마음을 놓으시오.”
“한시가 급한 일입니다. 이곳 응천부에서 조선까지는 수천 리 길이라 갈 길이 머니 급히 서둘러야 하나이다.”
“세자가 하는 말은 잘 알고 있소. 군사의 조련이 곧 끝나니 황상의 명이 떨어지면 곧 출래(出來)하리다.”
세자 양녕이 보기에도 이 양영이라는 장수는 괜히 들먹이면서 군사 하나 제대로 못 다룰 위인으로 보이지는 않았다. 그 성품이 온화해 보이지는 않으나 그렇다고 제멋대로로 보이지도 않았다.
이방원의 사신들은 이 사람만 믿고 갈 수밖에 없다는 생각에 연이어 얼굴을 비추고서 이야기를 나누려 했으나 양영은 죄 거절하고서 10만 대병의 조련을 하는데만 힘썼다.
3주간의 준비를 마치자 양영이 이끄는 십만대군이 응천부 성문을 나서 먼 길을 따라 조선으로 출병하니 이것이 1405년, 명 영락 3년 음력 9월 4일의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