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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제국 연대기 1권(15화)
제5장 정족지세(鼎足之勢)(3)


1405년 중하(仲夏)
조선국 한성부.

여름이 찾아왔다. 남쪽에서부터 밀려온 구름이 어느새 하늘을 덮고 습한 장맛비를 뿌려대고 있었다. 장맛비를 매우(梅雨)라 하는 것은 매실이 단단히 익을 즘이면 오는 비라 해서인데, 세훈도 장맛비 내리는 것을 보며 대청에 앉아 그 매실의 맛을 보고 있었다.
한성으로 들어온 뒤 세훈은 경행방(慶幸坊)에 있는 정안군 이방원의 옛 집을 취하여 살고 있었는데, 이 즈음으로 해서는 조정의 인사들이 뻔질나게 드나들어 경행저(慶幸底)라는 이름으로 불리고 있었다.
세훈은 경사가 들어 행복하다는 뜻이 담긴 그 이름이 맘에 족히 들어 따로 집에 이름을 붙이지 않고 그렇게 불리도록 내버려 두고 있었다.
세훈이 이 집으로 들어와서 처음 설치한 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수세식 변기였다. 크게 맘을 먹고 예전에 장사해 둔 돈을 털어 자기로 변기를 빚고 천장 가까운 높은 곳에 물이 내려갈 수통을 설치하여 그곳에 물을 부어 두었다 줄을 당기면 물이 내려와 변기를 씻을 수 있도록 간단한 시설을 설치했는데, 다만 하수도관이라는 것이 없으니 쓸려 내려간 찌꺼기가 땅 밑에 모아두었다가 때가 되면 퍼내어 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비교적 단출한 살림에 비해 유일한 사치품이라면 사치품인 것이 이 수세식 변기였다. 세훈도 도무지 똥 막대만큼은 적응할 수 없었던 것이다.
아직까지 비단이니 종이를 이런 뒤처리에 사용할 수는 없으니 아쉬운 대로 지푸라기를 가져다 쓰느라 뒷문에 심심하면 생채기가 나긴 했지만 말이다.
세훈은 우선은 이 세수식 변기로 만족하기로 했다. 적당히 때가 되면 이것 때문이라도 펄프종이를 개발해 낼 생각이었다. 그 즈음 되어야 조금 돈푼 들더라도 휴지라도 써 볼 것이 아닌가.
그날도 매실을 같이 먹던 손님이 하나 있었는데, 다른 이가 아니라 이제는 김세훈의 가장 충직한 심복이나 다름없게 된 최해산이었다.
그는 전부터 이 변기 이야기를 듣고 내심 써 보고 싶어 하는 눈치였는데, 아니나 다를까 매실을 조금 입에 물더니 이내 배가 아프다는 시늉을 하며 화장실 쓰기를 청했던 것이다.
꽤나 시원하게 볼일을 보고 온 모양인지 대청으로 다가오는 그의 발걸음은 호호쾌쾌, 보무가 당당하기만 했다.
“합하께서는 이런 좋은 걸 혼자 쓰고 계셨나이까?”
“왜, 어떠한가. 냄새도 아니 나고 좋지?”
“그런데 자기를 가져다 변기를 빚으시다니, 이거 저 같은 놈은 분수에 맞지 않아 해 보지도 못하겠습니다 그려.”
“장안에 말이 많겠구만. 그도 그럴 것이 가장 돈들인 곳이 뒷간이라니.”
둘은 껄껄거리며 웃고서는 남은 매실을 집어 들었다.
잘 말렸음에도 불구하고 신맛이 톡톡거리는 것이 한 입 먹을 때마다 깜짝깜짝 놀라곤 했지만 또 그 맛에 계속 먹는 것을 멈출 수가 없었다.
“그나저나 공조의 일은 잘 돌아가고 있는가?”
“분부하신 대로 처결하느라 몸이 두 개라도 모자랍니다. 오늘 찾아뵌 것도 어찌어찌 시간을 내어 온 것인데…….”
“최 판서가 엄살이 심해졌구만.”
“하하! 어인 말씀을. 인천의 제철소는 이제 땅을 다지는 일에 들어가 근시일 내로 건물과 고로를 올릴 작정이나이다. 그러나 이렇게 큰 규모는 처음 하는 일인지라, 전례가 없어 건물의 구조를 짜고 고로의 형태를 잡는 일만해도 시간이 꽤나 걸려 다 지음하려면 내후년쯤은 바라봐야 할 일인 듯싶습니다.”
최해산의 말에 세훈은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백년대계를 보고 하나씩 하는 일이니 급하게 서두를 것은 없네. 빨리 지어 겉이 그럴싸한 집은 뿌리부터 일찍 무너지는 법이고, 천천히 공들여 지은 집은 설사 그 화려함이 못하더라도 백 년을 서 있는 법이네.”
“유념하겠나이다.”
세훈은 매실을 하나 더 먹고서는 가장 궁금했던 것을 물어보았다.
“화학전습원은 어찌 잘 운영되고 있는가?”
“전에 하교하신 대로 운영하고 있나이다. 아직 가르치는 이들의 배움도 부족한 터라, 올해는 학생들은 뽑지 아니하고 예전부터 탐라에서 고로나 화약을 맡아서 일을 해 보았던 젊은 장인들 위주로 선발해 한성으로 불러와 같이 공부하며 익히고 있나이다. 내년 봄에 학생들을 선발하게 되면 이들로 하여금 교수(敎授)하게 할 작정이나이다.”
“그래. 좋은 생각이네. 내가 직접 지도해 줄 수 있으면 좋겠으나 지금 나라의 국사를 움직이느라 도무지 정신이 없으니 천천히 가르쳐 줄 시간이 없네. 하지만 내가 그리고 있는 일이 홀로는 절대 할 수 없는 일이라 그대 같은 사람들의 도움이 꼭 필요한 일이네. 내가 시간 나는 대로 틈틈이 글을 써 줄 터이니 책으로 묶든가 직접 읽어서 익히던가 하여 꼭 유용하게 써먹도록 하게.”
“당연한 분부이나이다.”
최해산은 슬며시 웃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세훈을 따르기로 한 것은 정말 잘한 일이었다. 이제 나이가 서른을 넘긴 세훈은 젊은 나이에도 국정을 운영하는 일에 아무런 실수가 없었다.
최해산은 그의 사람됨이 그릇이 다르다고 생각했다. 자신도 이제 스물다섯이니 그 나이가 세훈과 얼마 차이가 나지 않았으나 세훈의 가는 길을 보면 자신과는 발걸음의 품이 달랐다.
뱁새가 황새의 발걸음을 따라하려 해도 할 수 없는 노릇이니 그저 뒤를 쫓아가며 주어진 것을 하는 것만으로도 최해산은 요즘 들어 행복함을 느끼고 있었다.
주어진 일이라 하여도 하나하나 새롭기 짝이 없고 나라의 주춧돌을 닦는 기분으로 할 수 있는 일이니 부족함을 느낄 턱이 없었다.
“매실 좀 더 드시도록 해요.”
최해산이 그런저런 생각에 넋을 빼놓고 있는 사이, 세훈의 처 고상희가 매실을 또 한 접시 내어 왔다.
“부인. 감사하오이다.”
“어인 말씀을요. 최 공께서도 많이 자시도록 해요.”
“예, 이리 챙겨 주시니 여기 오면 발걸음이 죄 떨어지지 않습니다.”
최해산이 매실을 한 움큼 베어 물면서 짐짓 과장되게 턱을 놀리자 세훈과 고상희 모두 크게 웃으며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나저나 최 공도 이제 혼기가 차고도 남으셨는데 어찌 혼사를 치르실 생각은 없으신가요?”
아무래도 세훈이 살던 22세기와는 다른 15세기의 교육을 받고 자란 여자라 그런지 고상희는 생각보다 바깥일에는 거의 관심이 없었고 집안의 소소한 일들과 자녀들, 그리고 이런 혼사(婚事) 같은 문제에만 관심이 있었다.
그러고 보니 세훈 자신도 이곳 기준으로는 장가를 늦게 든 셈이고, 고상희의 나이가 이제 스물이니 도둑장가를 간 셈이나 다름없었다. 거기에 그 사이에 아이가 둘이라니. 그러고 보면 최해산도 나이가 스물다섯에 이르러서 아직 장가를 들지 않았으니 늦기는 늦은 모양이다.
“아, 저는 그게… 양친이 모두 안 계시니 따로 혼사를 챙겨 줄 사람도 없고, 그걸 또 일도 바쁜데다 제가 직접 알아다 보기도 그렇고…….”
장가들기는 들고 싶은 모양이었다.
세훈은 껄껄 웃고서는 고상희에게 말했다.
“최 판서도 장가가 들고 싶은 모양이니 부인이 잘 좀 알아봐 주시게.”
“그럼요. 장안의 규방을 샅샅이 훑어 가장 아름답고 조신하기로 소문난 처자와 맺어드리겠사오니 최 공도 심려 마세요.”
“…….”
갑작스러운 전개에 최해산은 매실 먹던 목이 막힌 듯 꿀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세훈은 그 모습이 짐짓 재미있어 더 놀려주고 싶었지만 이쯤 해 두자 싶어 그만하고서는 다른 말로 화제를 돌렸다.
“최 판서. 보총은 탐라에서 잘 생산해서 올려 보내고 있겠지?”
서울에 고로가 없으니 아쉬운 대로 지금은 철광석을 탐라로 넉넉히 보내 강철을 뽑아낸 다음 그곳에서 보총을 만들어 오는 수밖에 없었다.
직접 돈을 들여 어렵사리 철강석을 육지로부터 수매해 올 때에 비하면 나라의 명으로 넉넉히 내려 보내니 생산하기에도 좋을 것 같았으나, 그곳에서 보총을 만드는 일에 익숙해져있던 장인들 중 많은 이들이 제철소다 화학전습원이다 해서 새 일을 맡기 위해 한성으로 올라 와 있으니, 오히려 생산량은 일전에 비해서도 준 상황이었다.
“아무래도 그 양이나 품질이 전부 다 예전 같지는 않사옵니다. 하지만 그런대로 계획한 양만큼은 차질 없이 보내주고 있나이다.”
“그렇군. 병조전서 양은계(梁殷季)에게도 일러 두었으니 보총 5천 정이 마련되면 바로 병조에 보내도록 하게. 탐라에서 올라온 5천 병력으로는 부족하네. 가능한 대로 육지의 병졸들도 보총으로 무장시키고 신식 훈련을 시켜 군대를 새롭게 일신해야 할 것이네.”
“차질 없이 시행하겠나이다.”
“그리고 포(砲)에 관한 일은 어찌 처결하고 있는가?”
“일전에 고려 말에 설치되어 선친께서 맡아 보셨던 화통도감(火桶都監)의 예가 떠올라 이번에 그렇지 않아도 공조 아래에 화통서(火桶署)를 만들어다가 보총을 제외한 포를 직접 제조하는 것이 어떨까 여쭈어 보려 했나이다.”
“그거 괜찮군. 내가 주상께 청하여 바로 교지를 내리도록 할 터이니 그리 처결하도록 하게.”
“화통서가 만들어진다면 바로 기존에 있던 대장군포, 이장군포 등을 제외하고도 천자(天字), 지자(地字), 현자(玄字), 황자(黃字)의 4총통과 불화살을 쏘아 올리는 주화(走火)도 올해 안으로 너끈히 주조해 낼 수 있나이다.”
“천자문의 천지현황이로구만. 들어본 기억이 있어.”
고개를 끄덕이던 세훈이 잠시 사랑채에 다녀오더니 최해산에게 종이 몇 묶음을 건네주었다.
“이것이 무엇이나이까?”
“직접 보게.”
최해산이 종이를 펼쳐 보니 죄다 화포에 관한 설계 도면이었다. 세훈은 기계공학을 전공한 적도 없고 게다가 화학을 전공해 화약에 관해서만 밝을 뿐, 화포에 관한 것은 그다지 자세하다고 할 수는 없으나 앞으로 등장하게 될 화포에 대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고, 거기에 최해산에게도 이래저래 화포의 주조에 관해서 배운 바가 있어 직접 새롭게 개량하여 낼 화포를 구상해 본 것이다.
그러나 아직까지는 완전히 혁신적인 것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하였기에 당장 시도해 봄직하다고 여긴 것을 뽑아낸 것이다.
“첫 번째는 신기전(神機箭)이라 이름하였네. 주화 이야기가 나와서 말인데 그것을 여기 도면에 있는 방식대로 한 번 개량해 보도록 하게. 두 번째는 비격진천뢰(飛擊震天雷)라 이름 지었는데, 이것은 발사되고 나서 바로 터지는 것이 아니라 시간을 두었다가 갑작스레 터지면서 주변의 인마(人馬)를 예기치 못하게 살상할 수 있는 무기이네. 마지막이 소포(小砲)라는 놈이네. 두엇의 장한이 들고 다니면서 바로 설치하여 사용할 수 있게 만든 놈이네.”
신기전은 세종 때에 개발되었고, 비격진천뢰는 임진년의 왜란에 사용되었던 화기다. 마지막 소포는 프랑크포, 즉 불랑기포(佛狼機砲)를 약간 손대 개량한 설계였다.
실제로 1370년대경에 유럽에서 개발되어 계속해서 개량되고 있는 포이니 시대를 앞서나간 것은 아니었으나, 아직 동양으로 건너오려면 한참 남은 일이니 역시 혁신적이라고도 볼 수 있는 물건이었다.
“내 설계가 정확치 않으니 대충 참고만 하도록 하고 직접 안전하게 주조하여 실험해 보도록 하게. 내가 화포에 관한 지식이 일천하여 건네줄 수 있는 것이 이런 떠오르는 생각들뿐이니 자네가 보기에 괜찮다고 판단하면 직접 다시 설계하여 시도해 보도록 하게나.”
“여부가 있겠나이까.”
“그야 자네가 해 주기 나름이니. 어쨌든 어차피 정확한 것이 아니니 내가 전해 준 것이 아니라 자네 스스로 완성하도록 하여 마무리가 되거든 자네 이름으로 선친이 완성하신 포들과 새롭게 나올 포들을 망라하여 그 개발법과 제원을 꼼꼼히 하여 책으로 기록하도록 해 두게. 당분간 그것을 보고 익히고 가다듬어 포를 만들어낼 장인들을 양성하여야 하니 이것 또한 부담스럽겠으나 자네 어깨에 달린 일이네. 일손이 부족할 터이니 부석소나 정탄에게 찾아가 함께 도와달라 청하도록 하게나.”
“감사하나이다. 합하께서 주시는 은혜 어찌 갚을 길이 있겠습니까.”
최해산이 갑작스레 눈물을 뚝뚝 흘렸다. 직접 화포에 관한 것을 모두 책임지고 이것을 책으로 남길 수 있도록 해 주는 것은 선친으로부터 내려온 가업(家業)을 떠나서 어떤 분야에 대하여 일가(一家)를 이룬 것을 인정해 주고 그것을 최해산의 이름으로 만대에 전해질 수 있게 해 준다는 말에 다름 아니었다.
최해산은 문득 어릴 적 보았던 늙은 아버지의 굽은 등이 떠올라 눈물을 감출 수가 없었다.
“이거, 이거. 최 판서, 왜 이러는가. 허허! 내가 장가는 꼭 보내 줄 테니 걱정하지 말도록 하게.”
이 뒤 최해산이 남긴 것이 총 3권의 「화포식(火砲式)」이었다. 이 외에도 선친 최무선이 남긴 「화약수련법(火藥修鍊法)」에다가 직접 보총에 사용될 화약을 만드는 법을 세훈에게 배우고 스스로 익힌 바를 추가해 「증보화약수련법(增補火藥修鍊法)」으로 개수해서 내니 두 책은 곧 화학전습원의 2년 과정에서 교재로도 사용되게 될 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