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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제국 연대기 1권(14화)
제5장 정족지세(鼎足之勢)(2)


아직 세훈의 생각을 이해할 만한 자들이 없이 구체적으로 언급하고 있지는 않았으나, 우선은 한성을 중심으로 공업지대를 만들어서 여러 종류의 공업이 서로에게 영향을 끼쳐 발전할 수 있는 계기가 필요했다.
게다가 한성과 개성의 두 배후지가 있으니 안성맞춤이었다. 거기에 장기적인 안목으로 보아 개성 근교 예성강 하구의 벽란도(碧瀾渡)의 기능을 다시 크게 키워 무역항으로 만들 계획까지 고려해 볼 때, 인천에다가 제철소를 짓는 것은 그 첫 발걸음이라 해도 과언이 아닌 일이었다.
일전에 탐라에 설치한 동영고로(東瀛高爐)에서 쌓은 기술을 가져와 동영고로에 있던 4개의 고로보다 2배는 크고 튼튼한 고로를 설계하여 총 20개를 설치하였는데, 이것은 당시의 세계 최초의 대규모 제철소라고 해도 좋을 규모였다.
이 제철소가 착공해서 공사에 들어가는 동안 세훈은 최해산을 불러다가 기존에 탐라에 설치해 두었던 공업료(工業僚)의 기능을 공조 소속의 탐라시무원으로 이관해 기존의 동영고로와 화학소 등의 시설은 신기술을 시험해 보는 시험장으로 전용해 쓰도록 일러 두었다.
다만 전에 설치했으나 아직 교육생을 선발 못했던 화학전습소(化學傳習所)를 화학전습원(院)으로 규모를 키워 공조 산하로 한성에다 옮기고 중인의 자제들을 중심으로 제1기 선발생을 뽑도록 하였다.
이 화학전습소에서 가르칠 교재는 세훈이 최해산과 부석소, 정탄에게 틈틈이 알려 줬던 기초 화학을 중심으로 교재를 편성했는데, 화학뿐만이 아니라 기초적인 과학 일반을 가르칠 수 있도록 교육 과정이 마련되었다.
화학전습원은 총 2년제로 첫 1년에는 <기초산학(基礎算學)>, <물상(物像)>, <기초야금(基礎冶金)>, <화학일반(化學一般)>을 배웠는데, 각각 그 교재로는 원나라 주세걸(朱世傑)의 「산학계몽(算學啓蒙)」, 김세훈이 직접 편한 물리학 교재인 「물학본원(物學本源)」, 부석소가 김세훈의 도움을 받아 쓴 「야금통종(冶金統宗)」 그리고 최해산이 역시 김세훈의 도움을 받아 쓴 「화학소론(化學小論)」이 그 교재로 사용되었고, 2년차에는 실습을 겸하여 간단한 화학 실험과 화약 제조, 기계의 원리들을 배우게 되었는데 우선적인 목적은 학자의 양성보다는 당장 실무에 투입될 수 있는 지식의 전습(傳襲)이 목적이 되었으므로 우선적인 과정은 이렇게 편성되는 수준으로 마무리되었다.
다음으로 세훈이 한 일은 송상(松商)의 대방들을 불러 모으고 나상(羅商)의 동영주상행계(東瀛洲商行契)의 오상복을 비롯한 객주(客主)들도 함께 불러 모은 일이었다.
한성 숭례문(崇禮門) 밖에 도매상가를 지을 요량이었기 때문이다. 앞으로 이뤄지게 될 교통로의 확충과 함께 물산의 집거지라는 의미에서 꼭 필요한 일이었다.
세훈은 숭례문 바깥, 용산(龍山)에다가 큰 장시의 터를 만들고 송상과 나상이 서로 협조하에 이권을 조정하도록 했다. 여기에 이제 막 형성되고 있던 경상(京商)들까지 출전하여 가게를 내는 것을 허락함으로서 크게 3무리의 상행 조직이 이 도매시장에 들어서게 되었다.
이것이 자리 잡히자 경사(京師)와 삼남(三南)의 물산이 크게 모여들게 되었는데, 이내 물건을 낱개로 팔지 않고 모개로 파는 곳이라 하여 모개전(廛)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으니, 이것이 곧 뒷날 융성하는 용산 모개시전의 전신이었다.

1405년 계춘(季春)
조선국 영길도 함주목.

이성계는 동북면의 먼 들판을 바라보고 있었다. 어릴 적 그는 들의 아들이었다. 이 땅은 이제는 먼 북쪽의 티끌처럼 밀려간 원(元)나라의 쌍성총관부(雙城摠管府)가 있던 자리였고, 그의 아버지 이자춘(李子春)은 이곳에서 몽골 벼슬을 살던 천호(千戶)였다.
이성계는 말을 달리며 자랐다. 멀리서는 동해의 바닷바람이 밀려오고 위에서는 서리 치는 고원의 찬바람이 내려왔다. 그 거룩한 자연을 벗 삼아 활을 쏘고 말을 달리면서 어른이 되어 갔던 것이다.
문득 이제 이곳에 다시 돌아와 이리 보니 세상사가 모두 티끌처럼 부질없는 것으로만 느껴졌다.
약관의 나이가 되었을 때 그는 아버지와 함께 쌍성총관부를 들어다 고려에 바치고 입조(入朝)하였다. 홍건적들의 내습을 막아내고 원나라 나하추[納哈出]의 모진 공격도 막아내었다.
최유(崔濡)도 물리치고 김삼선(金三善)과 김삼개(金三介)도 결국 그의 손에 무릎을 꿇었어야 했다. 삼남의 왜구를 물리치고 이인임을 몰아내고 나니 어느덧 피 끓던 젊은 시절도 지나가고 대업(大業)이 눈에 아른거렸다. 그렇게 회군(回軍)을 하였고 사직을 창건했다.
그러나 모든 일이 봄들에 꽃 날리듯 이렇게 찬연히 사라지고야 말았다. 그리도 괴었던 강씨도 이제는 곁에 없고 자손들도 몇 번의 정변 끝에 이제 뿔뿔이 흩어져 복왕(復王)하면 무엇하리오. 물려줄 후사도 이제는 곁에 없으니 함주왕(咸州王)이라는 것이 과히 조롱은 아니렷다. 작년의 난 이래로 기력도 많이 쇠하였다.
이성계는 조용히 내관 박만과 조사의를 불러들였다. 그 지난한 세월 동안 배극렴도, 정도전도, 이지란도 모두 불귀(不歸)의 객이 되었으니 남은 것은 이들이 전부였다.
“다들 듣게.”
박만과 조사의는 조용히 이성계의 곁에 호종(護從)하고 섰다.
이성계는 옛 쌍성총관부가 있던 영흥부가 있을 남쪽을 향해 펼쳐진 함주의 너른 들에 시선을 던지며 돌아보지 않고 말했다. 그의 호쾌하던 등이 이젠 많이 굽어 있었다.
“내가 지난 시절의 죄가 많아 결국 이리 못난 말년을 맞이하게 되었으니 나를 좇아 이까지 온 자네들 보기 미안하게 되었네.”
“어인 말씀이신지요?”
내관 박만이 손사래 치고 나섰으나 이성계는 그저 고개를 가로저을 뿐이었다.
“슬슬 하늘이 준 명(命)도 다 해 가고 있음을 느끼고 있네. 이제 늙은이가 욕심은 그만 부릴 때가 되었지. 집안 혈족이 이리저리 다 찢겨 이제 내 곁에는 후사를 물려줄 손족(孫族)도 없으니 이게 다 하사(何事)란 말이냐. 나는 이제 이지란이 그랬던 것을 좇아 칩산(蟄山)하여 불사(佛事)를 봉양하고 살며 지난날의 죄업을 속죄하고 살 것이니 조사의는 군사를 이끌고 방원에게 쫓아가 지난날의 구원(舊怨)을 잊고 종신(從臣)하기를 청하게. 내 마지막으로 아비로서, 이 나라의 창업주로서 방원에게 자네를 부탁하는 글을 써 보내 줄 터이니 나의 신변이 정리되는 대로 방원과 함께 협력하여 한성의 김가(金家) 놈의 역적을 토평하도록 하게. 사직을 바로잡으려면 이제는 그러는 수밖에 없느니.”
“알겠나이다.”
조사의는 그저 묵묵한 대답을 할 뿐이었다.
한때 한성과 개경을 손에 넣고 6만에 육박하던 군세는 매일같이 조련(調練)되어 강맹한데다가 먼 거리에서 쏘아대는 보총까지 지닌 김세훈의 군세를 당해낼 수 없었다.
그렇게 부지불식간에 다시 철령 이북으로 밀리다 보니 남은 군세는 고작 2만이었다. 이것으로는 동북면을 다독이고 버티는 것만 해도 힘든 것이 사실이었다.
그러나 방원에게 이 군세를 들어다 바치라니? 그건 안 될 일이었다. 애초에 방원에 대한 앙심을 가지고 태상왕을 등에 업고 시작한 일이었다. 일이 이렇게 된 마냥이라고 하지만 이방원만큼은 안 될 일이었다. 방원에게 태상왕은 아비인 노릇이나 자신은 그저 일개 역모배에 지나지 않는다.
‘도대체 태상왕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다. 나이가 들어서 망령이 나도 유분수지 이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방원만큼은 안 된다.’
조사의의 생각은 번잡하기 짝이 없었으나 이성계의 앞에서는 그저 고개를 조리고 나오는 수밖에 없었다. 군세를 일으킬 수 있었던 명분은 죄다 태상왕에게 있었기 때문이다.
태상왕이 없으면 2만의 군세도 허울 좋은 병력이었다. 이내 뿔뿔이 흩어져 흔적도 없이 사라질 것이다. 그러니 태상왕은 아들 방원과 화해하겠노라, 그곳에 군대를 들어다 바치라 한다.
그러나 조사의는 도저히 그럴 수 없었다. 그것은 조사의 스스로에게 있어서만큼은 도저히 할 수 없는 일이었다. 태상왕은 단순히 자신을 위해 조사의가 종군을 한 것이라 생각하고 있었으나 조사의 스스로는 방원에 대한 악랄한 복수심이 한켠에 자리하고 있었음을 부인할 수 없었다.
그것은 잔인하게 탄압받은 과거의 기억이 원령처럼 가슴 한구석에 똬리를 틀고 있는 까닭이었다.
태상왕은 부정(父精)과 사직에 대한 대의(大義)를 지니고 그런 마음을 품을 수 있는지 모르나 조사의 스스로는 방원을 용납할 수 없었다.
‘그러나 방법이 없다…….’
태상왕의 말을 어기고 방원에게 군사를 들어다 바치지 않는다 하더라도 이것은 조사의의 사병이라기보다는 동북면의 호족들이 태상왕을 위해 직접 끌고 모아서 가져다 바친 것이나 다름없는 군세였다.
태상왕이 정말로 이방원에게 모든 것을 넘겨주고 사찰에 들어가 불사의 도나 닦고 있는 다고 하면 이 군세 중 조사의에게 남아 있을 것은 얼마 되지 않는 노릇이다.
‘이렇게 된다면 어쩔 수 없다.’
조사의는 그날 저녁도 들지 않고 홀로 방 안에 앉아서 칼을 다듬으며 생각을 정리했다. 이 난국을 뚫어 보려 고민에 고민을 거듭해 보았으나 나오는 답은 한 가지였다.
그날 밤 조사의는 자신이 정말로 믿는 수하 10명을 대동하고 이성계의 거처로 난입해 들어갔다.
“조가 네놈, 이게 무슨 일이냐!”
“태상왕 전하. 소신 불민(不敏)하여 결국 이런 사단이 벌어지고 말았나이다. 소신은 도저히 방원이 놈에게 이 군세를 들어다 바치지 못하겠나이다.”
“네놈 마음에 욕심이 아직도 더럭더럭 붙어서 그것을 떼어내지도 못하는구나. 이 마당이 되어 아직도 그것 하나 버리지 못하느냐. 군신 간의 도리는 다 어디 가고 네가 어찌 이런 수작으로 나를 겁박하느냐!”
이성계는 대노하여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그러나 조사의는 이미 마음을 독하게 먹고 들어온지라 그 시선을 피하지 않고 마주 보며 말했다.
“소신은 충절(忠節)의 마음에서 이리 하는 것이니 부디 용서하시옵소서. 이곳을 떠나 영흥(永興)부중의 사찰로 모시겠나이다. 거기서 뜻하시던 바대로 불사를 모시옵소서. 다만 그곳은 앞으로 봉문(封門)하여 일이 마무리될 때까지 아무도 드나들지 못할 것이나이다. 이럴 수밖에 없는 소신을 용서하시옵소서.”
“너는 방원이 놈을 용서하지 못하겠다면서 날더러는 너를 용서하라고 하느냐?”
“일이 이렇게 된 것을 어쩔 수 없나이다. 내시 박만은 전하를 곁에서 계속해 모실 수 있도록 하겠나이다.”
밤 사이 아무도 모르게 영흥 부중의 사찰로 태상왕을 봉문하고 불사를 모시는 것을 빙자한 유폐가 조사의에 의해 자행되고, 동북면의 힘이 있으면서 조사의에게는 껄끄러운 호족들에게 이 사실을 알린다고 불러 모은 자리에서 조사의는 그들을 참살(斬殺)하고야 말았다.
이로 인해 동북면의 민심이 이지러지는 것은 알지 못하고 조사의는 군세를 억지로 단속하여 스스로 태상왕의 명을 빙자하여 쌍성대장군(雙城大將軍)이라 칭하니 이 쌍성은 곧 영흥(永興)의 옛 이름이었다.
이 소식을 들은 김세훈은 눈 하나 꿈쩍 안 하고 그저 최해산에게 이런 짧은 소회를 남겼을 뿐이다.
“일이 기왕에 이렇게 된 것이 다 이방원이 자초한 일이다. 그가 지나온 길에 흘린 피가 너무 많아 제 아비가 아들에게 주려는 군사조차 사지(死地)보다 더 가기 싫어하지 않는가.”
바로 송군불도(送軍不到) 혹은 조가습병(趙家拾兵)의 고사가 유래된 연유였다.
조가의는 영흥에서 방자하게 행동하고 태상왕은 고된 병을 얻어 사찰에서 중하게 앓고 있으나 주변에서 돌아보는 이 없이 난세지중(亂世之中)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