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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제국 연대기 1권(13화)
제5장 정족지세(鼎足之勢)(1)
「초한의 다툰 바 오래되어 먹을 것이 내부(內府)에 떨어지고 백성들의 원망이 깊은 바 되어 천하의 성현(聖賢)이 아니고저 이런 참상을 끝낼 길이 없나이다. 지금 양주(兩主) 아래의 것이 그리하나이다. 만약 대장군께서 한나라를 돕는다면 한나라가 이길 것이오, 초나라를 돕는다면 초나라가 이길 것이외다. 혹여 저의 계책을 들어 쓰신다면 쌍방이 손해치 않고 그들로 하여금 서로를 세우게 하여 천하를 셋으로 나누어 솥발처럼 세워 놓으면 그 형세에는 감히 아무도 먼저 움직이지 못할 것입니다.」
○夫銳氣挫於險塞,而糧食竭於內府,百姓罷極怨望,容容無所倚. 以臣料之,其勢非天下之賢聖固不能息天下之禍. 當今兩主之命縣於足下. 足下爲漢則漢勝,與楚則楚勝. 臣願披腹心,輸肝膽,效愚計,恐足下不能用也. 誠能聽臣之計,莫若兩利而俱存之,參分天下,鼎足而居,其勢莫敢先動.」
―사기 92권 회음후열전(淮陰侯列傳) 中
1405년 정월(正月)
조선국 한성부.
지난해의 동란은 어느샌가 가라앉아 가는 것처럼 보였다. 공주에서 파죽지세로 북상한 탐라군은 한성에 남아 있던 조사의의 1만 군세를 격파하고 한성부를 점령한 다음 익안군과 그의 가솔(家率)들을 손에 넣고 개경에 있던 조사의의 군세도 몰아내니 조사의 남은 3만의 군세는 철령을 넘어 다시 함주(咸州)로 들어가 항복하지 않고 버티고 있었다.
강화도에 틀어박혀 숨을 죽이고 있던 이방원은 서북면도절제사 이빈이 끌고온 2만 5천의 군세에 편승하여 해주로 건너갔다가, 다시 평양(平壤)으로 들어가 자신이 기거하는 곳을 서경행궁(西京行宮)이라 칭하고 김세훈을 역적 모리배로 주장하며 한성으로 다시 진격할 것을 다짐하나 군세(軍勢)가 여의치 않아 서북면 일대를 점령하고 역시 조사의처럼 농성하는 것에 만족하고 있는 형편이었다.
반면 상왕(上王) 이방과와 익안군 이방의를 손에 넣은 세훈은 우선 이방과를 찾아갔다.
“상왕께서는 성정이 패륜하고 오륜을 모르는 이방원에게 겁박받아 왕위를 내놓으셨기에 이런 일이 벌어졌소이다. 이에 내가 종사의 질서를 바로잡고자 하니 선왕으로서 종법의 직통을 바로 세우기 위해 익안군 이방의를 왕위에 올려야 한다고 대전에서 한 말씀 하시오.”
이방과는 동북면에서 눈을 시퍼렇게 부라리고 있을 아버지 이성계와 서북면에서 와신상담(臥薪嘗膽)하며 기회만 노리고 있을 아우 이방원의 사나운 눈초리가 의식되지 않을 수 없었으나, 개성 수창궁에 유폐되어 지금 세훈의 보호를 빙자한 위협 아래에서는 별다른 도리가 없었다.
어차피 부평초(浮萍草)처럼 세파가 닿는 대로 떠돌다 결국 왕위에도 올라 보고 복에 없이 젊은 나이에 아우에게 양위하고 술과 격구로 시간을 보내고 있지 않았던가. 지금 또한 별 수 없는 일이었다.
다음 날이 되자마자 이방과는 보란 듯이 익안군을 수창궁으로 불러다가 왕위를 받으라고 종용하는 시늉을 하고서는 이내 동북면도, 서북면도 가지 않고 한성과 개성으로 흩어져 남아 있던 대소신료들을 모아다가 자신이 적통의 후계자가 없는 데다, 방과와 방원은 역신(逆臣)의 죄가 있으니 그보다 형이요 자중하며 오로지 가문을 위중하던 익안군 방의가 왕위를 받아야 한다고 세훈에게 시킴받은 바 대로 하문했다.
그러나 방의는 이를 건강을 핑계로 왕위를 사양하고 드러누워 버렸는데, 이것은 그의 성품상 이런 일을 맡고 싶지 않았을 뿐더러, 실제로 건강이 좋지 않았기 때문이다.
대신에 그의 아들인 이석근(李石根)이 물망에 올랐는데, 종법이 어지러운 개국 2대째에서 왕위를 가려 뽑지 아니하고 3대째로 옮겨 가는 것이 국가를 일신하는 데에 더욱 용이하다고 판단한 세훈의 적극적인 후원 아래에 익안군 이방의의 아들 이석근이 작년 10월에 왕위에 올랐다.
이를 똑같이 개성에서 꼼짝없이 포로로 잡히고만 이방간마저 지지하고 나서니, 그것이 겁박으로 인한 것이든 어찌하였든 이성계와 이방원을 제외한 이씨 종친들은 죄다 이석근을 지지하는 모양새가 되고 만 것이다.
그러나 여전히 동북면에서는 이성계가, 서북면에서는 이방원이 각각 손자와 조카의 왕위 습승(襲承)을 인정치 아니하고 서로 간에 유일한 조선국왕이라 내세우고 있었다.
그러나 평안, 영길 양도를 제외하고는 전국을 손에 넣은 김세훈은 이석근을 왕위에 올린 뒤로는 꿈쩍도 하지 않았고, 이성계와 이방원 부자는 서로 간에도 견제를 해야 했기에 김세훈이 움직이지 않으니 둘 다 서로 섣불리 움직이지 못하는 상황이 되고야 말았다. 이른바 정족지세(鼎足之勢)가 되고야 만 것이다.
이렇게 본의든 타의든 삼대(三代)가 제각기 적법한 왕통(王統)이라 주장하며 서로 땅을 잡고 웅크리고 앉아 있으니 한 땅에 왕이 셋이라, 그 행색이 초라하고 우습기 짝이 없는 일이었다.
사람들은 이를 일컬어 함주왕(咸州王), 평양왕(平壤王), 한양왕(漢陽王)이라며 국왕이 아니라 군왕(群王) 보듯이 하니 사실 진실은 이렇듯 시전에 돌아다니는 소문에 있을지 모를 일이었다.
어찌 보면 이것은 세훈이 뜻한 바 대로 움직인 것이라 할 수 있는데, 조선의 국권을 장악하기 위한 노중(路中)에서 일어나는 일임에 다름 아니었다.
세훈은 풍해도까지 장악하고 나자 군세를 일으켜 서북면과 동북면을 토벌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일부러 불안한 형국을 유지시키며 경계에 주의만 기할 뿐, 즉각적으로 이방원과 이성계를 몰아내고자 하는 의지는 보이지 않았다.
거기에는 내부의 불만 세력을 이미 존재하는 적으로 몰아가기 위한 계산과 함께, 이방원과 이성계가 서로 적대하므로 세훈에게 있어서는 굳이 토벌하지 않고도 바깥쪽에서 꼼짝 못하는 적들이 존재하므로 내정을 다스릴 시간을 벌 수 있다는 속셈도 들어 있었다.
세훈은 이석근을 통해 궁중을 장악하고서는 이내 공신(功臣)의 명부를 꾸리고 이에 따라 관직을 새롭게 나누어 주었는데, 여기에는 동서북면 어디로도 가지 않고 도읍에 남아 있던 대소신료들이 대거 포함되었다.
세훈은 이들을 한편으로는 위협하고, 한편으로는 잘 달래어 인재로 들어다 쓸 요량을 가지고 있었다.
이리하여 새해 정월이 되자 왕에게 칙유(勅諭)를 내리게 해 이방원이 중국의 눈치를 보아 종친과 공신에게 부원군(府院君)과 군(君)을 봉하도록 전년에 고친 것을 다시 고려의 오등작(五等爵), 즉 공후백자남(公侯伯子男)으로 다시 돌려 새롭게 작위와 식읍, 그리고 봉토와 벼슬을 품신하니 그 대강이 다음과 같았다.
탐라국주(耽羅國主) 진량공(津梁公)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 섭정부부사(攝政府府事) 겸 영의정부사(領議政府事) 김세훈(金世勳).
익안대원공(益安大院公) 현록대부(縣祿大夫) 이방의(李芳毅).
정의후(旌義侯) 보국숭록대부(輔國崇祿大夫) 판의정부사(判議政府事) 고봉지(高鳳知).
제주후(濟州侯) 탐라성주(耽羅星主) 숭정대부(崇政大夫) 의금부판사(義禁府判事) 고상온(高尙溫).
대정후(大靜侯) 탐라왕자(耽羅王子) 가정대부(嘉靖大夫) 개성부유수(開城府留守) 문충세(文忠世).
청주백(淸州伯) 자헌대부(資憲大夫) 판한성부사(判漢城府事) 정탁(鄭擢).
남양백(南洋伯) 통정대부(通政大夫) 병조전서(兵曹典書) 양은계(梁殷季).
여산백(礪山伯) 통정대부(通政大夫) 양면토평부사(兩面討平府事) 송거신(宋居信).
가선대부(嘉善大夫) 경상도관찰사 박신(朴信).
가선대부(嘉善大夫) 충청도관찰사 이서(李舒).
가정대부(嘉靖大夫) 경기도관찰사 황희(黃喜).
가정대부(嘉靖大夫) 강원도관찰사 조휴(趙休).
가의대부(嘉義大夫) 전라도관찰사 유관(柳寬).
가의대부(嘉義大夫) 풍해도관찰사 이지(李至).
통정대부(通政大夫) 이조전서 한상경(韓尙敬).
통정대부(通政大夫) 예조전서 이직(李稷).
통정대부(通政大夫) 호조전서 허조(許租).
통정대부(通政大夫) 공조전서 최해산(崔海山).
통정대부(通政大夫) 형조전서 심온(沈溫)
통정대부(通政大夫) 사헌부 집의(執義) 윤향(尹向).
이로서 당상관(堂上官)의 대강을 정하니, 의정부와 함께 섭정부(攝政府)를 두어 양부(兩府)의 부사를 김세훈이 겸직함으로 인하여 섭정공이자 정승(政丞)으로서 국사를 일람하고 익안군은 살아서 왕의 아비가 되었으므로 익안대원공에 봉했다.
탐라국 출신의 고씨, 문씨, 양씨들이 습작(襲爵)할 수 있는 후백(侯伯)의 자리를 나눠 받았으며, 이전부터 한성에서 벼슬 살던 송거신에게는 양면토평부사의 자리를 제수하여 북방의 군사를 일괄하여 동북면의 태상왕과 서북면의 정안군 이방원을 견제하도록 하였다.
이 외에도 기존의 사대부들이 관찰사와 각조 전서(典書)에 두루 임명되었는데, 이것은 김세훈이 부족한 탐라의 인재를 기존의 인물들 중에서 실용적 사고를 지닌 인물들을 기용하여 보충하고자 한 결과였다. 이들은 전조 고려로부터 벼슬을 하던 인물들이 태반으로, 이런 권력의 부침(浮沈)에 일희일비할 인물들이 아니라 오히려 믿음 있게 쓸 수 있었다.
특히 최해산은 공조전서에 임명하여 김세훈이 특별히 신경 쓰고 있는 국가의 공업 정책에 크게 쓰고자 했는데, 비록 탐라에서부터 연이 있다고는 하나 약관을 갓 넘긴 나이에 공조전서에 오른 것은 전례 없는 일이기도 했다.
그만큼 김세훈의 인사는 안정성을 추구하면서도 또한 파격적이기도 했는데, 왕조의 격동기인 난세(亂世)의 권력을 움켜쥔 자가 되었기에 감히 그 정책에 대하여 왈시왈부(曰是曰否)할 수 있는 자가 없었으니, 그런 이들은 모두 동북면이며 서북면으로 옛 군주를 찾아 떠났기 때문이다.
이렇게 허수아비 왕을 세워 놓고 권력을 한 손에 쥔 세훈이 이렇게 왕의 입을 빌려 칙유를 선포하니, 이것은 1강(强) 2약(弱)의 정족지세를 당분간 안정시켜 그동안 조선에서의 개혁을 도모하고자 하는 심산이었다. 이것이 서력 1405년 을유(乙酉)년 정월 원단(元旦)의 일이었다.
1405년 중춘(仲春)
조선국 한성부.
1405년은 이래저래 말도 많고 탈도 많던 해였다. 나라는 하나인데 왕실은 삼분(三分)되어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가 구설(口舌)에 오르내리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리라.
그러나 이것은 간만에 안정된 태세이기도 했다.
족히 예전 한신에게 괴통(Ø通)이 말했던 바처럼, 천하를 솥발처럼 셋으로 나누어 놓으니 아무도 쉬이 움직이지 못하는 형국이었다.
다만 다른 것이 하나 있다면 셋의 세력이 비등비등해서가 아니라 개중 강맹한 세훈이 더 이상 전란의 확대를 원하지 않고 나머지 둘을 북쪽 변방에서 옴짝달싹 못하게 꽉 묶어 두고 있는 것이었다.
그가 비록 익안대군의 아들 이석근을 왕위에 올리고 선왕 이방과와 회안대군 이방간 또한 대접하고 있으나 그 권세는 섭정부부사와 영의정부사에 이르러 종친과 신료를 막론하고 왕의 다음 가는 제일의 권세를 가지고 있었고 조정의 신료들 또한 그를 따르는 도당(徒黨)의 무리처럼 되었다.
이것은 그가 예전부터 막하(幕下)에 두던 탐라 출신의 호족들뿐만이 아니라 고려로부터 조선에 걸쳐 벼슬을 해 오던 구신(舊臣)들 또한 마찬가지였다.
이성계나 이방원과 강하게 가신(家臣)처럼 묶여 있던 자들은 이미 변방으로 떠난 지 오래였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 이르니 세간에서는 김세훈을 동한말년(東漢末年)의 위왕(魏王) 조조에 빗대기도 했는데, 그만큼 그 위세가 등등한 것은 두 번 말할 필요가 없을 정도였다.
그는 새해가 밝자마자 관선(官選)을 새롭게 조각(組閣)하여 생각하는 바대로 나라를 개혁하는 일을 도울 이들을 조목이 배치해 놓은 다음에, 권력이 집중된 이때를 놓치지 않고 새롭게 국가의 기반을 다지는 일에 몰두했다.
공조전서 최해산(崔海山)은 그중에서도 제일 바빠진 인물이었다.
그가 처음 시작한 일은 공조(工曹) 아래의 조직을 크게 개편하는 일이었다. 기존의 공조는 영조사(營造司), 야사(攻冶司), 산택사(山澤司), 상의원(尙衣院), 선공감(繕工監), 수성금화사(修城禁火司), 전연사(典涓司), 장원서(掌苑署), 조지서(造紙署), 와서(瓦署) 등으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이 기존의 조직을 모두 철폐하고서는 완전히 낯선 부서들을 집어 넣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최해산 개인이 하는 일이라기보다는 섭정공 김세훈이 가장 면밀하게 추진하는 일의 전위대로 발탁된 셈이다.
원래 이 시기 6조의 수장은 정3품의 전서(典書)였는데, 세훈은 이것의 격을 높여 최해산이 전서에 수임된 지 이틀이 채 지나지 않아 다른 조에 앞서 공조만 정2품의 판서(判書)로 올리고 그 자리에 최해산을 그대로 들어다 앉혔다.
그러고 나서 최해산은 세훈이 일러 준 대로 공조의 혁파 작업에 나섰는데, 우선 기존의 부서들을 모두 없앤 다음에 토목사(土木司), 제지사(製紙司), 제철사(製鐵司), 교통사(交通司), 화학사(化學司)의 5사로 크게 나누고 복식서(服飾署), 염료서(染料署), 조림서(稠林署)의 3서를 설치하였다. 그리고 별정 부서로 탐라시무원(耽羅試務院)을 두어 5사 3서 1원의 형태로 공조의 틀을 짜게 되었다.
최해산은 세훈에게 주청하여 각 사(司)에는 정3품의 참의(參議)를 유임하고 각 서(署)에는 정5품의 정랑(正郞)을 임명케 하니 공조의 각 사(司) 수장의 품계가 다른 조(曹)의 수장인 전서의 품계와 같을 정도의 위세였다.
이중 제철사 참의에는 부석소, 화학사 참의에는 정탄이 임명되었는데, 이들이 탐라에서 야금도감과 화공도감을 맡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들은 이제 기술이 많이 늘고 세훈에게 배운 지식 또한 상당해 세훈이 믿고 최해산에게 붙여 주어 국가의 대계를 세우게 할 만한 인재들이었다.
“그대들을 믿고 일을 맡기니 꼭 좋은 결과를 보여 주길 바라네.”
“합하(閤下)의 명을 받잡아 반드시 부족함 없이 일을 처결하겠나이다.”
이렇게 해서 가장 첫 업무로 선정된 것이 경기도 인천군(仁川郡) 연안에다가 제철소를 세우는 것이었다.
이 일에는 당시 도성의 국고에 있던 나랏돈의 거의 절반에 가까운 돈이 투입되었는데, 그만큼 새 국가의 기틀을 잡는 역사(役事)라고 할 만한 일이었다.
처음에는 세훈의 뜻대로 아산(牙山)이나 경상도 흥해(興海:지금의 포항) 또한 그 예정지로 고려되었으나 조선의 교통망이 대체 엉망이었기에 제철소를 도성에서 너무 먼 곳에 지으면 제대로 된 발전이 힘들다는 단점이 지목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