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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제국 연대기 1권(12화)
제4장 풍운지절(風雲之節)(3)
1404년 맹하(孟夏)
조선국 한성부.
“전하. 적당(敵黨)이 광주까지 내려왔나이다. 몽진(蒙塵)하셔야 하옵니다.”
하륜의 눈에서는 피눈물이 흐르는 것만 같았다.
이방원은 눈을 질끈 감고서는 신음성만 토해냈다.
설마하니 절치부심하여 모아서 보낸 군사가 궤멸당할 줄은 몰랐다. 이미 조정에 철령을 넘어서 조사의가 춘천성을 포위하고 있다는 전갈이 올라와 군사를 모으기로 결의가 되었을 때는 이미 춘천이 함락되고 원주로 군세가 돌아간 상황이었고, 조정으로부터 아무런 소식을 듣지 못하고 있던 강원도 관찰사 여칭(呂稱)이 조사의의 겁박에 못 이겨 1만의 군사로 싸워 보지도 않고 원주성문을 열어 들어다 바치니 조사의의 휘하의 반군은 이내 그 숫자가 5만에 이르게 된 것이다.
군사를 징발하러 원주성으로 온 조영무는 원주성이 함락된 줄 모르고 성문을 열라 청하다 사로잡혀서 포로가 되었고, 풍해도도절제사 유양이 군사 1만 2천을 끌고 가평으로 내려왔을 때는 이미 5만의 군세가 여주와 이천을 지나 광주로 들어서고 있었다.
급하게 유양이 끌고 온 풍해도 병력에다가 도성 주변을 호위하는 병력을 끌어모아 광주에서 맞섰으나, 3월 27일 결국 풍해도도절제사 유양이 이끄는 2만 5천의 군사와 물경 5만의 조사의 군의 결전은 예견된 대로 조사의 군의 압승으로 끝나고 말았다.
조사의 군은 여기서 한강을 건너 도성으로 진입할 것을 결의했는데, 문제는 한강을 건너는 것이 되어 근처의 목선을 징발해다가 부교(浮橋)를 놓느라 시간을 잠시 지체하고 있었다.
“몽진을 하지 않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겠는가?”
“적군이 이미 한강 코앞에까지 들어와 있나이다. 도성을 방비하는 2천의 병력으로는 저들의 군세를 막을 수 없나이다. 어서 나갈 채비를 하셔서 몽진을 결행하시옵소서.”
이방원은 대답이 없었다.
그는 북악산을 멍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이제 떠나면 과연 살아서 이 북악(北岳)을 다시 볼 수 있을까 그런 생각이 문득 스치고 지나갔다.
죄의 업보가 많았다. 그의 손에 죽은 사람이 몇이었던가. 형제들은 얼마나 또 괴로워했는가. 문득 지금쯤 개경 인덕궁(人德宮)에서 세파에 개의치 않고 유유자적하며 격구나 즐기고 있을 상왕 이방우가 떠올랐다.
같은 형제인데도 어쩜 이리 다를 수 있을까 하고 그의 어머니는 이야기하곤 했었다.
‘그러나 나는 형님처럼 살 수 없었다. 내 길은 내가 뚫고 스스로 개척해 나가야 했다. 한때나마 지존의 자리에 앉지 않았던가. 이렇게 잠시 후퇴하더라도 끝이 아니리라.’
마음을 가다듬은 이방원은 자신을 따르는 조정신료들을 불러 모으고 아들 양녕을 위시한 가솔들을 끌어모아 채비를 갖추게 했다.
“하륜. 그대 말대로 도읍을 다시금 옮길 때 무악 땅으로 했었어야 하는 일이 아닌가 모르겠네. 아버님을 달래고자 다시 도읍을 한양으로 옮겼으나 아버님께서는 동북면으로 들어가시어 이렇게 군세를 일으켜 나를 괴롭히시니 어찌하면 좋단 말인가.”
“우선 몸을 피하시옵소서. 개경에도 상왕 전하와 방간이 있으니 불길한 지세이나이다. 우선은 강화로 들어가 항전을 준비하시옵소서. 몸을 피하고 계시는 동안 서북면의 군사들이 풍해도를 넘어 조사의를 벌하러 내려올 것이나이다.”
하륜의 말에 이방원은 고개를 끄덕였다.
비록 이런 지경에 처했으나 이방원의 기세는 여전히 현현했다. 이런 일 따위에 엎드려 굴복할 그가 아니었다. 그 스스로 아버지의 모사꾼 삼아 조선을 건국했고 돌아오지 않는 왕자를 취하기 위해 험한 길도 마다하지 않았던 사람이 아니었던가.
이제 태상왕이 물러나면서 개성으로 되돌렸던 도읍도 다시 한양으로 옮겨와 국체(國體)를 일신하고, 호족들의 사병을 혁파하여 군권을 나라에서 다스리고, 적법한 세자를 내세워 천년을 내릴 왕조의 반석을 닦는 와중에 일이 지나친 것인지 모자랐던 것인지 이런 참변이 일어나고야 말았으나 이방원은 아직까지 자신의 운과 모략을 믿고 있었다. 어차피 모든 것이 쉽게 이루어지리라고 여기지 않았다.
새 도성의 서문인 돈의문(敦義門)을 나와 강화 행궁으로 가는 몽진길은 내내 침통한 분위기였다. 하륜, 민무구, 민무질, 이숙번 등이 시종(侍從)하며 강화도로 향했다. 강화도까지는 백 리 길이었다.
그리 가더라도 머물 곳이 마땅치 않을 터였으나 지금은 뾰족한 수가 없었다. 그나마 예전의 고려행궁(高麗行宮)이 있으니 가서 보수해서 쓰면 될 것이다.
이틀을 꼬박 말을 타고 걷고 해서야 겨우 김포에 다다라 바다를 건너 강화에 들어설 수 있었다. 잠시 행장을 푸는 사이에 이방원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안 좋은 소식들 뿐이었다.
이방원의 총애를 받으며 왕자의 난에서 큰 몫을 하여 그 무훈(武勳)이 드높던 이숙번이 임금을 시중 보며 들려온 소식을 전해 주었다. 모두 다 가히 좋지 않았다.
“조사의가 한양에 입성하고 군사를 주둔시킨 다음 송도로 향하고 있다고 하나이다. 가서 상왕을 뫼셔 온 다음 함주에서도 태상왕을 뫼셔 와 사직을 바로잡는다고 큰소리를 치고 있다 하나이다.”
“서북면의 군사는 아직인가?”
“서북면도절제사 이빈(李彬)에게 파발이 도달하였나이다. 군사 2만을 끌고 풍해도로 들어섰다고 하나이다.”
“그걸로 충분하겠는가?”
“조사의의 기세가 높나이다. 군사도 5만이니 다른 병력이 필요하나이다.”
“삼남(三南)에서 병력을 모으기는 힘들겠는가?.”
“실은 탐라의 김세훈이 병력을 이끌고 전라도에 상륙해 이미 전주읍성이 함락되고 파죽지세로 진군하고 있다 하나이다. 대략 5천의 군세이나 그 병사들의 기세가 드높고 보총으로 무장하여 가는 곳마다 대항치 못하고 스러지고 있다고 하나이다.”
이방원은 갑자기 허리가 아픈 듯한 느낌에 시달렸다. 이것이 단장(斷腸)의 느낌인가 싶을 정도였다. 도무지 머리가 아파 앞으로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계획이 떠오르질 않았다.
“하륜을 들라하라.”
막힌 곳이 있으면 언제나 지모로 뚫어 주던 하륜이 필요했다.
이숙번이 하륜을 불러오자 이방원은 그를 가까이 앉히고서는 꾀주머니를 열어 보라 재촉했다.
“한 가지 방법이 있나이다.”
“무엇인가. 말해 보아라.”
“그러나 이 방법은 지금 벌어진 난을 덮고 왕좌를 다시 되찾을 수는 있으나 앞으로 사직(社稷)에 누가 될 수도 있나이다.”
“지금은 우선 이 난국을 타개할 때다. 말해 보아라.”
“김세훈과 손을 잡으시옵소서.”
“그 역도와 말인가!”
“김세훈은 탐라국의 국사를 잇겠다고만 했을 뿐 왕실에 거역하겠다고는 공식적으로 말하지 않았나이다.”
“그러나 거병해서 지금 전라도와 충청도를 휘젓고 있다지 않느냐?”
“무력을 시위(侍衛)하는 것이나이다. 그의 군사를 이용한다면 능히 조사의는 진압이 가능하니 그에게 차사를 보내어 함께할 뜻을 전하십시오. 탐라국주 제주공(濟州公)에 봉하고 공가(公家)의 사직(社稷)을 세우게 하소서. 그리고 뜻하는 대로 하게 둔 다음에 조정으로 불러 벼슬을 시키거나 외방에 묶어 두고 대마도처럼 다루면 될 일이나이다.”
“괜찮겠는가?”
“원하신다면 일전 제주에 다녀온 연고도 있고 하니 제가 직접 김세훈에게 다녀오겠나이다. 지금은 그 방법밖에 없나이다. 서북면 2만 군세만으로는 도무지 조사의를 뚫을 방법이 없나이다.”
“그럼 부탁하겠네.”
이방원은 며칠 사이 부쩍 늙은 것 같은 모습이었다.
하륜은 그 모습을 보며 그 범 같은 인물이 다시 기운을 찾게 해 주고 싶었다. 이방원을 용상에 올리기 위하여 함께 호종한 세월이 얼마던가. 하륜은 여기 와서 그 일을 헛되게 하고 싶지 않았다.
하륜이 교지(敎旨)를 받아 파발을 달려 남으로 향하니 이때가 음력 4월, 맹하(孟夏)에 접어들어 열흘째의 날이었다. 이때 김세훈은 이미 충청도 공주성에서 항복을 받아 그곳에서 기거하며 잠시 숨고르기를 하고 있었다.
1404년 맹하(孟夏)
조선국 충청남도 공주목(公州牧).
하륜이 이틀 밤낮으로 말을 달려 공주(公州)에 도달하였을 때는 이미 전라도와 충청좌도의 방백(方伯)들이 모두 기함(氣陷)하여 세훈에게 항복하거나 달아나거나 산첩(山疊)에 틀어박힌 뒤였다.
이로서 조사의의 난군(亂軍)이 영길도와 강원도를 취탈하고 경기에 들어와 도성을 점거하였고, 세훈이 전라, 충청의 양도에서 군세를 자랑하고 있으니 이미 팔도가 동북과 남서로 군세에 찢겨 있는 판국이라 하륜은 식겁하고 세훈에게 매달릴 수밖에 없는 형편이었다.
“주상 전하께오서는 귀공이 역심을 품고 있다고 여기지 않으시오니 이제 군세를 의탁하여 조사의의 난세를 진압하신다면 숭록대부(崇祿大夫) 탐라국주(耽羅國主)에 임하고 제주공(濟州公)의 자리를 약조하리니 탐라땅에 봉작(封爵)하고 사직을 세울 수 있게 하리니 뜻하고자 하는 바를 이루실 수 있을 것이옵니다.”
하륜의 청에 세훈은 일갈했다.
“내가 지금 전라와 충청 양도를 내 권하(權下)에 놓고 주상은 강화에 틀어박혀 있으며 내가 일찍이 조정에서 벼슬을 한 연유가 없는 바, 내가 지금의 금상을 좇아서 그 하찮은 작위와 벼슬을 탐해야 할 이유가 있다면 말해 보라.”
“예로부터 나라와 사직이 위급 지경에 처했을 때 군사를 거병하여 임금을 겁박하는 일의 끝이 좋지 아니하였나이다. 옛 전한(前漢)의 적법한 황통을 끌어내린 왕망의 예가 그리하였고, 후한(後漢)의 황통을 적멸한 위(魏)의 성세도 오래가지 못했나이다. 하물며 당(唐)의 측천(則天)을 이야기하여 무엇하오리이까. 그러니 옛 주(周)나라의 예를 따르시어 역도를 토벌하는데 종군하시어 그 공을 삼아 분봉(分封)하시는 것이 가장 신하로서 아름답게 하는 도리인 줄 압니다.”
“네가 지금 나에게 근왕(勤王)의 적부(適否)를 논하고자 하나 네가 섬기는 임금 또한 고려의 왕통을 능멸하고 나라를 개창하여 아비와 형을 겁박하고 아우는 참살하며 동복형제들을 죄다 운신조차 못하게 만들어 왕위를 탈취하였으니, 태상왕이 노여움에 조사의를 일으키고 나 또한 정안군 방원의 성정됨을 보아 왕위에 올려 두는 것이 그르지 못하다고 생각하여 이렇게 군세를 일으킨 바 되었다. 그런데 나더러 고금의 무도한자들을 논하면서 어찌하여 네 주인은 왕망과 측천의 예에 함께 올려놓지 아니한가?”
세훈의 일갈에 하륜의 표정이 새하얗게 변했음은 따로 이를 필요가 없을 것이다. 지난 십수 년 간의 정쟁(政爭)으로 정안군 이방원이 왕위에 오른 과정은 누구보다도 하륜 자기 자신이 잘 알고 있었다. 바로 그와 함께 꾀를 내고 지략을 짜 모은 것이 자기의 맡은 바 소임이 아니었던가.
그러나 막상 왕위에 올려놓고 자신도 정승(政丞)의 대반(大盤)에 올라놓고 보니 세상이 거꾸로 보이는 것임에야. 내가 왕실의 적통을 뒤흔드는 것은 대의가 있기 때문이요 남이 내게 그리하는 것은 난신적자(亂臣賊子)의 패륜으로 취급하는 것은 제 눈의 티끌은 보지 못하는 탓이다. 하륜은 더 이상 뭐라 할 말이 없어 그저 땀만 삐질거리며 애꿎은 다리만 후들거리고 있었다.
세훈 또한 이런 상황을 과히 예견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가 기억하는 실제 역사에서 조사의는 평안도로 들어갔다가 관군 4만에 의해 쉽게 토평되었다. 그래서 때맞춰 남쪽으로 들어가 관군을 분산시켜 조사의의 명줄을 좀 늘여 준 다음에 그 기세가 쇠하면 태상왕과 조사의의 구원군이 되어 한양을 점탈(占奪)하고 태상왕이나 상왕을 보위에 돌려놓으면 그 다음은 그들을 다루기 쉬울 일이었다.
태상왕의 든든한 배신들은 이미 왕자의 난을 거치며 참살되었고, 주변에 지금 남아 있는 자들은 머리는 없고 쭉정이들뿐이었다. 게다가 태상왕의 보령이 얼마 남지 않아 상왕이 그 자리를 다시 되물려 받게 된다면 세훈이 섭정공(攝政公)이니 하는 자리를 만들어 국사를 일람(一覽)하는 것도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그러나 생각 외로 조사의가 너무 선전을 해주었고, 도리어 정안군 이방원이 쫓겨나 강화로 도망쳤으니 처음 뜻한바대로 하자니 이미 조사의와 강현등의 기세가 등등하여 다 끝난 일에 수저 하나 올리는 모양새밖에 되지 않겠다.
그렇다고 이방원을 등에 업자니 이방원 속하(屬下)들의 기세가 여전히 등등하고 이방원 자신이 큰 모사꾼이라 정략(政略)하는 데에 거침없는 인물이니 지금 구멍 나 가라앉아 가는 배를 수선해서 한양으로 올려 보내주어도 결국은 또 지루한 힘겨루기를 하여 시간을 소모하는 일밖에 남지 않을 것이었다.
게다가 자칫 잘못해 팽이라도 당하는 상황이 올 경우는 이 모든 것을 이방원이 좋으라고 한 일밖에 되지 않을 것이니 구차할 일이다. 어찌 되었든 이제 와서 하륜의 말을 좇아 이방원에게 종군(從軍)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하 공의 말하고자 하는 바는 잘 알겠으나 나는 정안군 방원을 좇아 갈 수는 없소. 그리 알고 돌아가시오.”
“그럼 도대체 어찌할 요량이시나이까?”
“두고 보면 알게 되겠지.”
하륜을 겁박하여 축객(逐客)해 보내 버리고서 세훈은 홀로 자작하며 생각을 정리했다.
이 상황에서 18세기의 플린트록 방식의 소총인 보총으로 무장한 5천 군대로 15세기 조선군을 격퇴하고 나라를 새로이 개창한다거나 하는 일은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그러나 당장 왕이 되겠다고 하는 욕심이 생기는 것도 아니었고 무리수를 띄워 이씨 왕조의 사직을 닫게 한다면 명에서 무슨 트집을 잡을지 모르는 일이었다.
산업을 일으키고 군사를 양병(養兵)한 뒤라면 명에서 어떤 식으로 나와도 대처가 가능하지만 지금은 5천의 정예가 전부였다. 이들은 지금 시대의 10배에 달하는 군세도 능히 막아낼 수 있을 터이지만 지금 바로 이들만 가지고 나라의 팔도(八道)를 장악하고 명의 간섭을 막아내기는 힘들다는 것이 세훈의 생각이었다.
‘명분이 필요하다.’
제대로 되지 않더라도 명분이 있으면 될 일이었다. 명분만 있으면 몇 만의 군세를 등에 업는 것과 다를 것이 없었다.
명분을 얻는다는 것은 마음대로 다를 수는 있으나 적법(適法)한 군주를 앞에 내세운다는 것과 다를 바 없는 말이었다. 전에 최해산에게도 이른바처럼, 마전군에서 왕씨의 제사를 모시는 공양왕의 조카 왕조도 생각해 보지 않은 것은 아니었지만 이미 고려의 삼한갑족(三韓甲族)이니 유신들이 절멸하고 뿔뿔이 흩어진 지금 굳이 왕씨를 내세우는 것은 명분만 찬연할 뿐 국정을 장악하는 데에 실속이 없었다.
그렇다면 이성계의 자손들 중 하나를 택해야 하는데 후처 강씨 소생의 두 아들은 왕자의 난 때 이미 죽었고, 전처 한씨 소생의 장남 진안군 방우와 덕안군 방연은 이미 유명을 달리 했으니 도리가 없었다.
진안군 방우의 적손(嫡孫)을 명분 삼아 올릴 수는 있으나 그건 이미 조사의와 태상왕이 생각하고 있는 바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었다. 영안군 방과는 이미 왕위를 받았다가 방원에게 물려주고 상왕으로 앉아 있으니 이미 그 활용 가치가 다 했다고 할 수 있겠고, 남은 것은 익안군 방의와 회안군 방간뿐이었다.
그러나 이중 방간은 그 스스로도 욕심이 많을 뿐더러 이미 방원과 세력 다툼에서 크게 패해 명분이 좋지 않은 인물이니 결국 남은 것은 익안군 이방의뿐이었다.
실제 역사에서는 올해 9월에 졸(卒)하고야 마는 인물이니 이제는 꼭 그렇게 되리라 할 수 없으나 잔명이 얼마 남지 않았을 테니 성격이 유하고 심약한 그를 왕위에 떠밀어 올리면 정권을 장악하기도 쉬울 뿐더러 대세(對世)의 명분도 좋을 뿐더러 태상왕까지도 구슬러 볼 수 있는 노릇이었다.
익안군이 응하고 말고의 문제는 아니었다. 세훈에게는 그로 하여금 그렇게 하게 할 수 있는 충분한 힘이 있었다. 게다가 익안군의 아들 이석근(李石根) 또한 체모가 작고 성품이 어리석으며 재능도 없고 다만 술만 좋아해서 사람들이 복인(福人)이라 부르는 인물이니 후계 또한 안전할 일이었다.
‘우선은 한성으로 들어가 익안군의 신병을 확보해야겠다. 상왕을 보필한답시고 조사의는 한성의 최소의 군병만 남기고 개경으로 올라갔으렸다!’
이제 결정을 내려졌으니 출사(出師)만이 남은 일이다. 왕자 하나가 필요하다면 구하면 될 일이다. 조사의는 태상왕을 등에 업고 있고 이방원은 스스로 법통(法統)을 이어 왕이 되었다 하니, 그 다른 핏줄인 익안군은 세훈이 등에 업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