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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제국 연대기 1권(11화)
제4장 풍운지절(風雲之節)(2)
1404년 계춘(季春)
탐라국 제주도독부(濟州都督府).
이방원이 내려 보낸 제주안무진제사라는 유귀산은 제주도에 상륙하자마자 군사들에게 붙들려 제주읍성의 조용한 곳으로 옮겨졌다. 그는 기세등등한 신식군들의 위세에 눌려 별 말도 못하고 우선은 뭔가 상황이 바뀌기를 기다리는 수밖에 없게 되었다.
그가 도착하는 와중에 세훈은 거사를 일으킬 때 잠시 유폐(幽閉)시켜 두었던 최해산을 불러다가 술 한 잔을 나누고 있었다.
“스승님. 도대체 어떻게 하실 생각이십니까? 탐라국 대도독이라니요. 조정에서 가만히 있지 않을 것입니다.”
최해산은 일이 이렇게 된 와중에도 세훈에게 꼬박 스승님이라고 부르고 있었으나, 그의 마음이 편치 않음은 얼굴에서 고스란히 드러나고 있었다. 세훈은 그 마음을 안다는 듯이 슬쩍 웃으며 대답했다.
“이미 조정에서는 가만히 있지 않고 있네.”
“그렇다면 어찌 되고 있는 겁니까?”
“하하! 어떠할지. 조정은 이미 이 일이 아니라도 뒤숭숭하다네. 북변(北邊)에서 태상왕을 등에 업고 조사의라는 자가 난을 일으켰네.”
“…….”
“그래서 임금도 이쪽까지는 당장 어쩌질 못하고 유귀산이라는 자를 거창한 직함을 붙여 내려 보냈더군. 사정을 시찰하고 어를 수 있으면 얼러서 잠시 붙들어 두었다가 내정이 마무리되면 팽(烹)해 버릴 생각인 게지.”
김세훈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소리 내어 웃으며 말했다.
최해산은 식은땀이 벌벌 나면서 몸이 오싹했지만 동시에 이 호쾌한 남자가 뭘 꾸미고 있는 것인지도 궁금해졌다.
“그런데 탐라국 국사를 잇는다 하시고서는 왜 칭왕은 하지 않으신 겁니까?”
“이 조그만한 섬에 무슨 왕인가. 그리고 나는 조선이랑 절연(絶緣)하겠다고 이 수작을 부린 게 아니네.”
“절연하겠다는 것이 아니라시면…….”
“경기도 마전군에 가면 폐주 공양왕의 조카 왕조(王?)가 작위를 습봉(襲封)해 옛 고려왕실의 제사를 받들고 있다 하지. 처음에는 명분을 등에 업고 왕씨의 복왕을 주창하려 했네.”
“쉽지 않은 일입니다.”
“물론 쉽지 않지. 그런데 지금 탐라는 이미 내륙과는 너무 다른 길을 가기 시작했어. 그러나 조선이 흔들리지 않으면 무슨 수로 그들이 받아들이겠나. 권세 있는 임금 아래에서는 나도 일을 추진할 수가 없네. 그래서 처음엔 일이 잘되면 왕씨를 옹립하려 했지. 그런데 지금 보니 굳이 그럴 필요까지도 없을 듯하네.”
최해산은 조금 흥미가 돋는 것을 느꼈다. 이제 스물셋의 젊은 청년이었다. 어릴 적에 왕조가 바뀌는 것을 보았고, 새로운 왕조에 나가 출사해 벼슬도 받았다. 그 와중에 이곳까지 오게 되었지만, 혁명(革命) 같은 이야기를 들으면 가슴이 뛰곤 하는 것이었다. 새 왕조에 대한 충성심보다는 이미 세훈이라는 인물에 대한 종맹(從盲)함이 생긴 터였다.
“지금의 금상이나 태상왕 둘 중 하나는 이번을 계기로 날개를 꺾이게 될 것이네. 그중 이기는 쪽이 아니라 지는 쪽에 붙어서 입경(入京)할 생각이네.”
“……!”
“내가 생각하는 세상은 지금 왕조의 개국건신(開國建臣)들이 주창하는 성리학의 나라가 아니네. 요지일월 순지건곤(堯之日月 舜之乾坤)의 태평성대에 주자가 있었는가? 서주(西周) 십이대(十二代)에 정호(程顥)가 어디 있었는가. 나는 상공(商工)을 크게 일으켜 백성의 의식(衣食)을 편케 하고자 하니 이들과는 함께할 수 없는 노릇이네. 이곳 탐라에서 자네가 보다시피 강한 군대를 양성하고 물재(物材)를 연구하여 많은 것을 이루었으나 이곳 탐라는 좁은 땅이라 그 한계가 있네. 그렇다고 난신적자(亂臣賊子)가 되어 나라를 도모할 수도 없는 노릇이니 그렇다면 혁명을 해야 하지 않겠는가.”
최해산은 얼이 없는 듯 그저 멍한 얼굴로 세훈을 한참을 바라보았다. 따뜻하게 데워 나왔던 소주도 이제 차분히 식어 있었다. 최해산은 식어서 싱숭맹숭한 술을 목구멍에 털어 넣고서는 안주로 나온 전을 입에 구겨 넣은 다음 말했다.
“저도 함께하게 해 주십시오.”
어렵사리 꺼낸 말이나 도리어 세훈이 가타부타 말이 없었다. 그저 최해산이 한 양으로 술이나 한 잔 더 털어 넣고 주전부리에만 젓가락이 움직이고 있을 따름이었다. 오히려 그걸 못 견디고서 최해산이 다시 주청했다.
“저도 그 대사에 함께하게 해 주십시오. 이곳에 와서 가르침을 받으면서 새롭게 눈이 많이 틔었나이다. 좀 더 가시는 세상 끝까지 옆에서 지켜보고 싶사옵니다.”
그제서야 세훈은 대답을 주었다.
“그리하도록 하게. 난 처음부터 자네를 내 사람이라 생각하고 있었네. 그래서 오늘 이렇게 따로 부른 것이 아닌가.”
“감읍하나이다.”
“앞으로 화학(化學)이라 이름 붙인 물질의 변화와 성질을 다루는 학문과 산업을 일으키고 물재를 넉넉히 할 근간이 될 철을 뽑아내고 다루는 야금술(冶金術)을 넓게 익혀 나를 대신하여 일을 해 줄 사람이 필요하네. 그 일을 자네가 맡아 주었으면 좋겠네.”
“제가 원하는 바이나이다.”
“그렇게 생각해 준다면 고맙네. 한 잔 더 들도록 하지.”
이로서 고려 말의 명장 최무선의 아들 최해산은 김세훈의 수하로 거두어졌다.
세훈은 이를 위해 동영고로의 제총소와 제련소를 합쳐 야금도감(冶金都監)을 만들고 화약과 염료를 연구하던 화학소도 크게 확대해 화공도감(化工都監)으로 만들고 이곳에 부설로 화학전습소(化學傳習所)를 설치해 화학 교육을 맡도록 했다. 그리고 이 세 기관의 상부에 공업료(工業寮)라는 기관을 설치해 공업료 판서(判書)자리에 최해산을 들어다 앉혔다.
그러나 아직까지는 훗날을 내다보고 기관의 규모를 키우고 이름만 고친 것일 뿐 크게 달라진 것은 없었다. 실제로 야금도감과 화공도감의 감사(監司)로는 기존의 부석소와 정탄이 그대로 유임되어 직책상에도 크게 변동이 없었다. 다만 이번 조선의 정란이 가라앉고 그로써 적어도 탐라만큼은 세훈 뜻대로 움직이게 된다면 이 기관들은 그때 크게 빛을 바라보게 될 것이었다.
최해산에 관련된 문제도 해결이 되자 세훈은 예전에 들여오고 남은 모든 철광석을 쏟아부어 보총 3천 정을 추가 생산하고는 군역(軍役)을 지는 모든 장정을 조사하여 추가로 병력 3천을 징집했다.
이중에는 예전에 왜구가 내입했을 때 세훈과 함께 정의읍성에서 보총대가 올 때까지 열심히 분투했던 구식군대의 사람들도 포함되어 있었는데, 세훈은 이들과 함께 제주읍성, 대정읍성의 구식군도 다시 추려 모아 1천 명을 만들고 보총의 사용법과 3주일간의 간단한 제식훈련을 마친 다음에 제주에 400, 대정과 정의에 각각 300씩 나누어 배치해서 혹여 모를 내침(來侵)에 대비토록 했다.
그렇게 하고 나니 기존의 잘 훈련된 3천의 정병에 새롭게 훈련을 받게 된 2천의 정병까지 해서 도합 5천의 신식군이 탄생했는데, 이들을 이끌고 세훈은 도해(渡海)할 생각이었다.
그 준비를 위해 기존의 훈련을 꾸준히 받고 왜구 격퇴의 전적도 있는 3천의 병사들을 우선적으로 그간 준비해 둔 신식 군복으로 통일시켰다.
18세기 유럽 군대의 제복을 참조하여 만든 이 군복은 우선 가죽 군화에 옷은 방적기로 짠 면을 재료로 하여 일전 개발한 푸른색의 쪽염료와 붉은색의 모브 합성 염료로 염색한 질 좋은 옷이었다. 허리에는 탄약을 보관할 수 있도록 띠를 두르고 주머니를 달았으며, 어깨에서 허리로 두르는 포장(布帳)은 간단히 소속대와 계급을 알아볼 수 있게 구별된 색으로 달았다.
다만 모자는 크게 고치지 않고 기존에 사용하던 전립(戰笠)을 조금만 손봐 사용하게 했는데, 기존의 탐라 병사들에게는 이것이 모두 새로운 것이라 딱히 더 이상할 바도 없었지만 세훈이 보기에는 위는 전립에 아래는 서양풍의 군복을 착용한 것이 꽤나 재밌게 보이기도 했었다.
이렇게 총과 탄약, 군복의 지급이 끝나고 추가 훈련을 마친 새롭게 징집된 2천의 병력에게도 같은 물품이 지급되고 나자 구식군대를 재편한 1천의 제주 방위군을 제외하고도 본토에 상륙시킬 수 있는 병력 5천이 나오게 되었다.
제주의 5만 인구의 십분지 일 정도 되는 인원이었다. 더 이상 병력을 늘리기는 힘들다고 판단했기에 세훈은 이 병력으로 무기의 우위와 근대식 훈련으로 조련(調練)된 병사의 사기를 무기 삼아서 조선을 도모하기로 결정했다.
목적은 왕조를 뒤집어엎는 것이 아니라 세력을 잃은 편에 붙어서 날개를 달아주고 탐라를 조정의 간섭 없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권한을 얻고 조선의 내정에도 개입하여 전반적인 개혁을 추구하는 것이었다.
일이 모두 준비되자 세훈은 조정의 명을 받고 제주에 내려온 것을 가둬 두었던 유귀산을 불러들였다.
“유 공. 우리는 지금 난신적자들이 판치는 이런 세태를 바라만 보고 있을 수 없소이다. 그래서 직접 바다를 건너 도성으로 들어가 정국을 안정시키려 하오.”
“주상 전하께서 노하셨습니다. 이제 곧 철령을 넘어온 반역도들도 철퇴를 맞고 산산이 흩어질 것이니, 이번에 확실히 엎드리지 않으시면 주상 전하의 다음 철퇴는 이곳 탐라로 올 것입니다. 김 공께서도 대도독의 칭호는 그만 버리시고 입조(入朝)하셔서 용서를 청하시옵소서.”
“이미 강을 건넜소이다. 뒤에는 물이 불어 다시 건너가지 못하겠고, 앞은 고된 산길이긴 하나 길이 보이는데 어찌 가지 않겠소. 유 공은 이번에 내륙으로 출정하는 나와 함께 건너가셔서 도성에 도착하는 대로 풀어드리리다. 사절로 온 이를 박해하지는 않을 터이니 이만 물러가 몸을 보중하고 있으시오.”
유귀산에게 통첩을 가하고 난 다음 날, 세훈은 5천의 병력을 사열하고 2천은 기병, 3천은 보병으로 나눈 연후에 이를 다시 만 명씩 편제하여 제1기병대, 제2기병대, 제1보병대, 제2보병대, 제3보병대로 나누고 각각을 고상온, 문충세, 양은계, 부상로, 고술해로 대장 삼고, 고봉지에게는 남은 1천의 병력을 통솔시켜 혹시라도 모를 외침에 대하여 탐라를 대비토록 하였다.
편제가 끝나자 세훈은 일전 징발해서 상업용으로 사용하였으나 지금 조선과의 거래가 끊겨 놀고 있는 왜선 40척을 무장시키고, 전래에 제주에 있던 규모가 있는 상선, 전선을 죄다 끌어모아 100척의 함대를 만든 다음 튼튼히 보수시키고 내륙으로 군사를 태우고 출항하니 이 출발한 날이 3월 25일의 일이요, 전라도 고창 구시포에 이 병력이 내린 것이 3월 28일의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