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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제국 연대기 1권(10화)
제4장 풍운지절(風雲之節)(1)


「안변 부사(安邊府使) 조사의(趙思義) 등이 군사를 일으켜 사람을 주군(州郡)에 보내어 군사를 조련(調練)하였다. 대호군(大護軍) 안우세(安遇世)가 마침 동북면(東北面)에서 돌아와서 역마(驛馬)를 달리어 그 연유를 고하였다. 사의는 곧 현비(顯妃) 강씨(康氏)의 족속(族屬)인데, 강씨를 위하여 원수를 갚고자 한 것이다.
○安邊府使趙思義等擧兵, 發人于州郡調兵. 大護軍安遇世適自東北面而還, 飛馹來告其由. 思義, 卽顯妃康氏之族屬也, 欲爲康氏報仇也.」
―태종실록 제7권 4년 2월 18일

「조사의(趙思義)의 난이 동북면(東北面)에서 한창인 때에 제주만호(濟州萬戶) 정의군수(旌義郡守) 김세훈이 탐라대도독을 칭하여 거병하니 이때에 이르러 남북간의 변방이 모두 난중으로 시끄럽더라.
○基時, 東北面中趙思義之亂繁, 濟州萬戶, 旌義郡守金世勳, 僭稱耽羅大都督而擧兵. 至當年, 北南路邊方搖, 所以皆亂中.」
―천항로(千恒勞), 계양록(季陽錄)


1404년 중춘(仲春)
조선국 영길도(永吉道) 함주목(咸州牧).

이성계(李成桂)가 아들 정안군의 참람(僭濫)을 보지 않으려 도성에서 내려와 고래의 근거였던 동북면으로 들어온 지도 1년여가 지났다. 이 북쪽 새된 곳에도 봄이 찾아오는지 바닷바람이 한층 유순해졌으나, 태상왕(太上王)의 마음은 그저 찬바람만이 스며들 뿐이었다.
태상왕 이성계는 나라를 열었다. 공양왕이고 우왕이고 창왕이고 죄 폐하고는 개국하여 조선(朝鮮)이라 이름하고 왕의 자리에 올라 만세에 전해질 종사(宗嗣)의 반석을 올리고자 했다.
그러나 맏아들 방우는 아비의 하는 일을 비웃으며 세자의 법통은 거들떠보지도 아니하고 고려의 망신으로 여생을 하향(下鄕)해 지내다가 나라를 개국한 지 얼마 되지도 아니해서 졸년(卒年)을 맞이하고 말았다.
넷째와 다섯째인 방간과 방원은 의붓동생이 세자가 된 것을 시기하고 그 개국의 공에 대한 보답으로 왕의 자리를 원했기에 이성계가 멀쩡히 눈 뜨고 있는 동안에 의붓동생들을 죄 쳐 죽였다.
이성계는 피눈물을 흘렸다. 결국 그 서슬퍼럼에 마음마저 심적해진 그는 유약하기 짝이 없는 둘째 놈 방과에게 왕위를 습해 주고 뒤로 물러나 앉았다.
아니나 다를까 방원은 왕위에 올라앉아 있는 제 형을 겁박하길 즐겨하더니 똑같이 왕세제의 자리를 탐내던 형 방간을 또 난을 일으켜 몰아내더니 결국 왕위에 올라 제 뜻하는 바를 이루었다.
형제끼리 싸우고 다투는 가운데에 아비도 없고 가문도 없어 죄 서로 몰아서 죽이기 바쁘니 이성계의 마음은 폭풍과도 같이 가라앉지 못했다.
방원이라는 놈은 왕위를 물려받더니 죄 뒤가 불안했던지 성석린을 보내다가 늙은 몸을 환궁(還宮)시켜 뒷방에 앉혀 놓고 대접하는 척하면서 제 정통성을 세우기에 급급했으니 그 꼴이 과해 오래 보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그 와중에 세월을 넘기다 보니 한해가 지나서야 뜻하는 바대로 함주로 다시 내려올 수 있었다.
이때에 이성계가 아끼는 후처 강씨의 척족인 조사의가 예전 왕자의 난 때에 서인으로 강등되어 전라도에서 수군으로 노역하고 있었는데, 방원이 아버지의 마음을 풀겠답시고 그 조사의를 불러다가 함주 근처의 안변(安邊) 고을의 수령으로 앉혔다.
“먼 길에 고로(苦勞)가 많았다.”
안변으로 부임하는 길에 함주에 들른 조사의는 이성계의 침전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그간 강녕하셨나이까?”
“침식을 하는 일이 괴롭다.”
조사의는 그저 엎드려 눈물을 흘릴 뿐이었다. 조사의 또한 새 왕조의 척신(戚臣)으로 기세가 등등하던 시절을 생각하면 그간 몇 년의 괴로웠던 일들이 찬연히 대비되었다.
한때 좋았던 시절을 함께했던 임금이 여기 이렇게 늙어서 내려와 앉아 있으니 가슴이 미어지지 않을 수 없는 노릇이었다. 조사의는 한참을 눈물을 짓다가 이내 몸을 바르게 고쳐 앉고 눈을 부릅뜨고서 태상왕에게 물었다.
“혹, 복위(復位)의 뜻이 있으시나이까?”
조사의의 물음에 이성계의 미간이 모아졌다.
그는 한동안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고 몸을 약간 비뚜루 앉고서는 멀리 산의 터럭만 바라보고 있었다. 조사의는 그저 묵묵히 앉아서 대답을 기다를 따름이었다. 이성계는 한참이 지나서야 입을 열었다.
“네가 그리해 줄 수 있느냐?”
“이 동북면의 호족들은 가히 뜻만 내려 주시면 군사를 이끌고 친위(親衛)할 것이나이다.”
“내가 직접 나설 수는 없다.”
“상관치 아니하나이다. 그 뜻만 회람케 하시면 될 일이나이다. 왕후마마의 종제(從弟) 강현(康顯)과는 이미 이야기가 다 되었습니다. 이곳 동북면 영길도는 원래 모두 마마의 배신(陪臣)들이오, 그 민심이 마마와 함께하는 땅이니 이곳에서 거사를 일으키면 그 실패할 일이 없을 것이나이다.”
이성계는 고개를 끄덕이고서 개경 수창궁 시절부터 옆을 지키는 내시 박만을 불러들였다. 비록 고자이나 입이 무겁고 사욕도 없으며, 오로지 이성계를 위해 일을 그치지 않는 믿을 만한 인물이었다.
“박만을 네게 붙여 주도록 하겠다. 이이가 가면 내 뜻은 충분히 전달될 것이다. 앞으로 연락할 사안이 있거든 박만을 통하도록 하고, 네가 거사를 치르면 나는 한성에서 올라오는 아무런 사절도 들이지 않겠다.”
“분부 받잡겠나이다.”
조사의는 재차 엎드려 부복했다. 한때의 빛나던 영화가 지척인데 여기서 이렇게 스러질 수는 없는 일이었다.
아마 태상왕도 같은 생각이리라. 목숨 하나 아까워서 이렇게 바람에 스며지듯 사라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어차피 영달과 멀어진 지금의 인생, 태상왕이 아니면 다시 돌아갈 곳도 없는 노릇이었다.
‘방원, 이놈! 나를 태상왕의 곁으로 보낸 것을 후회하게 될 것이다!’
조사의의 생각이 곧 이성계의 생각이었다.
이성계 또한 방원의 얼굴을 생각하면 심정이 복잡해 침식을 들 수 없는 것이었다. 이제 모든 것을 결착 지을 때가 되었다고 생각했다. 때가 무르익었으니 어찌 움직이지 아니 하리요.
그렇게 조사의가 박만을 데리고 떠난 뒤로 한동안은 이성계에게 들려오는 소식이 없었다. 도리어 방원이 자꾸 성석린이나 무학대사를 보내어 귀찮게 할 따름이었다.
이런 이들을 차마 쳐 죽일 수 없어 돌려보내다 보니 시시때때로 한성으로 돌아오라는 전갈을 지닌 이름 없는 차사(差使)들을 보내는 것이었다.
이성계는 이 일에 기어코 뿔이 나고야 말았다. 아비도 형제도 없이 죄 권력을 위해 내치고 죽이고 기름 부어 태울 때는 언제고 이제와서 이렇게 노기(怒氣)를 달래 보겠다고 사람을 보내는 일이 아니꼽기 짝이 없던 것이다.
“네놈들은 네 임금을 위해 나를 달래러 오나, 나는 추후도 그 작당에 응해 줄 생각이 없다!”
불같이 노한 음성으로 차사들이 오면 호통을 치고서는 한성으로 돌아가지 못하게 죄 죽여 버렸다.
이성계는 눈을 질끈 감았다. 이른바 절치부심(切齒腐心)이었다.
잃은 자식들과 방원의 손에서 건져주지 못한 인재들을 생각하면 눈에선 피눈물이 그치지 않았고 마음에서는 울적한 기분이 가시지 않았다. 그렇게 차사들을 물리치며 봄이 지날 무렵에 결국 조사의에게서 거병(擧兵)하겠다고 전하는 인편이 왔다.
이성계는 전갈을 적은 편지를 손에 쥐고서는 한참을 눈을 감고 있었다.
‘이제 다시 시작이다. 그러나 다시 왕위를 찾은들 어찌해야 좋단 말인가. 그래도 얼마 남지 않은 자식이니 방원을 내 손으로 죽일 수는 없는 노릇이다. 다시 방과를 후사로 잡을 수도 없고, 방간을 후사로 삼게 되면 방원을 섬기는 이들이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다. 방의가 있으나 몸이 좋지 않다 들었는데… 가료(加療)는 잘하고 있는가 모르겠구나. 그러나 모든 것은 이 난이 성공했을 때의 이야기다. 조사의가 잘해 주어야 할 텐데…….’
모든 것은 일의 수순이 정해지면 길이 보일 터였다. 이성계는 살아오며 많은 고난을 마주했으나 길을 열어 가니 갈 곳이 보였다.
원나라 벼슬을 버리고 고려에 입조(入朝)한 아버지를 따라 되놈 취급받으며 세력을 길러오고 수신(修身)하길 여러 해였다. 그 인생의 역정 끝에 올라온 것이 나라의 주인이요 조선의 임금이라는 자리였다.
“그대의 친척들이 나를 위해서 거병하였소이다. 두 번의 기회는 없소. 이번이 찬탈한 아들놈에게서 왕위를 돌려받을 마지막 기회요.”
그날 침전에 들어 신덕왕후(神德王后) 강씨의 위패를 가져다 놓고 그간 있었던 일을 말해 주었다. 이미 오래 전에 세상을 떠 이렇게 위패나 모셔 놓고 말하는 수밖에 없지만, 혼이 되서라도 이 영명한 여자는 이미 이 일에 대해서 처음부터 끝까지 소상히 알고 있을 것이다. 방원이 자기의 아들들을 쳐 죽인 것부터 이렇게 지아비를 몰아낸 것까지도.
“그대의 친척들인 조사의와 강현은 용맹한 자들이나 한 번 생각할 줄 아는 자들이니 위험한 데에는 나서지 않고, 기회가 오면 놓치지 않을 이들이오. 나는 좋은 소식이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소.”
이성계는 그게 곧 신덕왕후 강씨의 소망이 아닐까 생각했다.
그녀도 제 아들들을 쳐 죽이고 죽은 계모를 몹쓸 악녀 취급하고 있는 정안군 이방원을 용서할 수 없을 것이다. 이성계는 왠지 눈물이 흘러나와 그치지 않았다.
“방원 이놈!”
함주 찬바람에 이불 덮고 방원에 대한 끓인 속을 다스리는 동안, 영길도의 호족들을 죄다 모으고 이성계에게 충성을 바치던 일부 여진족의 군세까지 끌어모은 조사의의 군대는 파죽지세로 진격을 시작했다.
조정에서는 박순(朴淳), 송류(宋琉)를 보내 회유하고자 했으나 조사의는 가차 없이 간신배 도당이라 하여 이들을 참해 버렸고, 관군의 선봉 이천우(李天佑) 또한 조사의 일당의 기세에 결국 깃발을 꺾고 겨우 목숨만 부지해 달아났다. 조사의의 군세는 이미 철령을 넘어 회안군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1404년 계춘(季春)
조선국 한성부(漢城府) 경복궁(景福宮).

“전하! 진정하시옵소서!”
내관의 외침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지금 조선의 임금인 이방원은 분노와 격정에 사로잡혀 있었다. 어떻게 오른 용상(龍床)이던가. 아버지를 충동질해 공양왕을 밀어내고 왕의 자리로 나아가게 했다.
정몽주, 최영, 이숭인, 이색등 전조의 이름 난 명신들이 모두 그의 손에 숨을 거두었다. 이들의 목숨을 취해 왕조를 개국하게 하고 나서도 이 자리를 물려받기까지의 고난은 천 리의 가시밭길과도 같았다.
그 또한 형제들을 쳐 내며 올라오는 일이 즐겁지는 않았다. 하지만 모든 것은 대업(大業)을 위해서였다. 명의 연왕(燕王) 주체(朱?) 또한 그와 같은 마음이었을 것이다.
대업을 이루는 데에 방해가 되는 족속들은 아픈 가슴을 매어 놓고라서도 쳐 내야 할 이들이었다. 패자(覇者)가 가는 길이 달콤하지 않다는 사실은 이미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러나, 네놈들이……! 조사의, 김세훈 이놈들을 내가 구족을 멸하고 말리라!”
자신에게 반하는 세력들이 남북으로 준동하고 있었다. 북변(北邊)에서는 태상왕을 등에 업은 조사의가, 남에서는 탐라대도독을 참칭한 김세훈이 날뛰고 있었다.
피의 길을 걸어 왕위에 오른 이방원이기에 보는 시선들이 곱지 않으니 이렇게 반역을 하는 세력들이 나타나기 시작하면 찍어 눌러도 그 세력이 둘이 되고 넷이 되어 계속해서 왕좌(王座)를 겁박하려고 들고 일어날 것이었다.
이방원은 침전에 있는 모든 서랍이며 서안(書案)을 다 때려 부수고 자기를 깨트리고 칼로 요를 다 헤집어 놓고 나서도 분이 풀리지 않았다.
“이놈들!”
늦게까지 잠을 들지 못하고 분을 삭이지 못하던 이방원은 아침 일찍 퀭한 눈으로 대전으로 나서 대소신료들에게 번뜩이는 용안(龍眼)을 부라리며 좌중을 휘시(揮視)했다.
“북변과 남안의 일은 어찌 되었는가?”
임금의 서슬 퍼런 눈에 아무도 감히 대답을 들고 나서지 못했다.
한참을 있어서야 좌정승(左政丞) 하륜만이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여말(麗末)로부터 이방원이 지금의 임금 자리에 앉기까지 필사(必死)의 각오로 보위해 온 그였기에 이런 서슬 퍼런 눈에도 입을 열 수 있는 것이었다.
“신 의정부 좌정승 하륜 아뢰오. 이천우가 이끄는 진압군이 패퇴한 이래로 역도 조가의 군대가 2만이 늘어 3만에 달해 강원도 접역으로 들어서 춘천(春川)을 에워싸고 있나이다.”
“탐라의 도적 떼들은 어찌 되었는가?”
“아직까지는 옛 탐라국의 국사(國嗣)를 되돌린다고만 할 뿐 군사를 앞세워 바다를 건너지도 아니하였나이다.”
“이 도적 떼들은 감히 과인의 유(諭)도 받지 아니하고 나라를 칭하고 분국해 나간다 하니 이 얼마나 대역무도한 패위(悖爲)인가. 그리하였으면 입공(入貢)을 해 조치를 바라든가 사직(社稷)의 위를 세우려 봉작(封爵)을 바란다고 주청해도 모자랄 판에 대도독을 참칭하고 군사를 일으켜 시위하고 있으니 노여움이 가시지를 않는다.”
이방원의 목소리는 분기에 잠식되어 있었다.
혈압을 높이지 않으려 애써 삭이고 있으나 감히 대적하는 자들에 대한 노여움은 말 한마디 한마디에 씩씩거림으로 묻어 나왔다.
하륜은 그 앞에 서서 그 분기를 받고 있자니 몸이 떨려 왔지만, 이런 일은 예전에도 있었고 앞으로도 있을지 모를 일이었다. 우선은 잘 다독여 넘기는 것이 우선이었다.
“우선 다시 군사를 내어 조사의의 패륜도당을 토벌하시옵소서. 남해의 도적들보다 이들이 더 급하나이다. 이들이 회안대군(懷安大君) 방간과 합심하여 준동할 경우 도성 또한 위태롭나이다. 방간을 참하고 군사를 일으켜 북변의 도당을 먼저 처결해야 하나이다.”
“이제 와서 형제의 피를 또 볼 수는 없는 일이다. 방간 형님은 외부와 드나들 수 없으니 역적 떼가 아무리 간악하더라도 내통하기는 힘들 것이다. 오히려 사문(赦文)을 내려 안위를 보장하고 위로하도록 하라. 그리하고 군사는 얼마를 낼 수 있겠느냐?”
하륜은 임금의 말에 더 이상 토 달지 아니하고 부복했다. 회안대군 방간의 문제는 계속해서 끄집어내 봐야 지난 일의 치부만 들추는 일이었다.
“기전(畿甸)과 서해도(西海道)의 군세를 합한다면 4만을 내어 도읍에 육박하기 전에 방비할 수 있나이다.”
“조영무(趙英茂)로 동북면, 강원, 충청, 경상, 전라도 도통사(都統使)에 임명해 군사를 최대한으로 모아 역적의 군세가 강원도를 넘지 못하도록 우선 방비토록 하고, 이빈(李彬)으로 서북면도절제사(西北面都節制使)에 임명해 동북면에서 혹여 조사의에 동조해 안주와 자성으로 넘어올지 모르는 군세를 방비토록 하라. 이천우(李天佑)로 안주도도절제사를 맡겨 이를 수행하도록 하고, 김영렬(金英烈)로 동북면·강원도도안무사(江原道都安撫使)를 삼아 조영무와 함께 반란을 진압토록 하라. 유양(柳亮)은 풍해도도절제사에 임하니 군사 1만을 내어 조영무의 군세와 합류해 역당 진압에 최선을 다하도록 하라.”
“성은이 망극하나이다.”
장군들을 임하고 나니 다음 문제는 군사를 내는 것이었다. 결국 이미 반란군에 의해 궤멸된 동북면과 강원도의 군세는 제하고 서북면 또한 스스로 방비를 해야 하니 많이 낼 수 없는 노릇이라 하륜이 간언한 대로 풍해도(혹 서해도. 지금의 황해도)와 경기에서 군사 4만을 내어 춘천이 지척인 가평으로 보냈다. 여기서 일을 막지 못하면 한성까지는 백 리 안으로 지척이었다. 북변의 난에 대한 대응책이 정리되자 임금은 무겁게 입을 열었다.
“좌정승 하륜은 들으라.”
“분부 받잡겠나이다.”
“당장 북쪽의 일이 시급하여 남쪽의 도적을 척결하지 못하나 이 또한 시급을 다투는 일이다. 우선은 유귀산(庾龜山)을 제주안무진제사(濟州安撫賑濟使)로 삼아 바다 너머로 보내 역도의 하는 일을 잘 살피고 몸 성히 돌아오게 하라.”
“성은이 망극하나이다.”
하륜이 물러가고 대신들도 퇴청(退廳)하자 임금은 홀로 용상에 앉아 침중한 신음을 흘렸다.
음력 3월, 계춘(季春)의 계절이라 날씨는 슬슬 무더워지나 그저 등에서는 식은땀만 흐를 따름이었다. 태상왕을 등에 업은 조사의의 군세는 100리 간의 지척이고 남해의 도적들은 존재 자체로도 성가신 일이었다. 왕좌(王座)를 지키기가 이렇게 힘든 일인 것을 이제야 이방원은 실감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