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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제국 연대기 1권(8화)
제3장 자강불식(自强不息)(2)
세훈이 알기로 가장 방적에 알맞은 목화 품종은 신대륙에서 재배되는 것으로 지금 상황에서는 아무리 해도 들여올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럼 품종을 개량하는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다행히 좋은 품질은 아니나 그나마 방적을 시도해 볼 만한 종자가 몇 개 맺혔고, 이듬해가 되었을 때 세훈은 그 씨앗을 가져다가 봄이 오자 널리 파종했다. 여름이 될 때까지 짧고 성긴 면을 좀 더 잘 짜낼 수 있도록 방적기를 손보길 거듭했고, 그해 여름이 되었을 때 비로소 면을 방적기로 자아낼 수 있었다.
품질은 현대의 것에 비하면 훨씬 미치지 못하지만 생각보다 만족스러운 것이었다. 우선적으로 고용한 아낙들로 하여금 40대의 방적기를 쉴 새 없이 돌려 면을 자아내게 하는 동시에 합성 염료를 연구했다. 이미 화학소에서 비누와 화약을 다루며 이런 종류의 업무에 익숙해진 사람들을 이제는 이런 쪽으로 전문가가 되어 가는 오상복에게 시켜 모았다.
이들이 화학소 한쪽에다가 연구실을 차려 놓고 처음 한 일은 세훈이 일러 준 대로 산쪽풀을 잔뜩 모아다가 물을 먹여 가수분해(加水分解)시켜 인디고, 즉, 남(藍)을 얻어내는 일이었다.
여기까지는 쪽풀로 자연 염료를 만드는 과정과 크게 다를 것이 없었다. 이렇게 얻어진 남을 가져다가 공기를 차단한 곳에서 열을 가열해 가열분해(加熱分解)시키면 아닐린 (Aniline)을 얻어낼 수 있었다.
이 아닐린에 다시 묽은 황산을 섞어 내면 합성 염료인 모브(Mauve)가 얻어지는데, 이것은 바로 1856년 영국의 화학자 퍼킨이 최초의 합성 염료인 모브를 얻어낸 방법을 응용한 것이다.
물론 모브는 쪽풀에서 직접 인디고를 채취하지도 않았고 퍼킨은 아닐린을 인디고가 아니라 콜타르에서 정제해 사용하는 등 다른 출발점에 있긴 했지만, 세훈은 이것을 시작으로 합성 염료의 개발을 서두를 계획이었다.
그렇게 여름을 정신없이 보내고 1803년의 가을이 되자 처음으로 뽑아낸 면직물에다가 쪽풀에서 얻어낸 남색과 모브를 합성해 얻은 적색의 염료를 착색시켜 두 종류의 옷감을 얻어내는 데에 성공했다.
군복의 개량은 주로 활동하기 편하게 기능적이면서도 군율(軍律)의 엄정함을 나타낼 수 있어야 했다. 세훈은 18세기의 유럽 군복을 참조하되 화려한 모자를 넣는 대신 기존의 전립을 착용토록 하고, 셔츠와 통이 좁은 바지 그리고 단추 달린 코트 형태의 외투를 입고 그 위에 소속을 나타내고 총이나 검을 매어둘 수 있게 하는 어깨띠를 착용하도록 했다.
그리고 신은 가죽을 가져다가 혁화(革靴)를 만들었는데, 이것을 무두질할 기술을 가진 장인이 제주에 없어 마른 말고기인 건마육을 만들던 사람과 짚신 엮던 사람을 불러다가 연구하게 만들어서 겨우 만들어내었다.
이렇게 조선 최초의 방직공업, 염료공업, 군수산업은 이런 조촐한 방식으로 제주도에서 1403년 시작되었다.
1403년 맹춘(孟春)
조선국 전라도 제주도호부.
세훈이 일에 푹 빠져 있는 동안, 다른 이들도 제각기 삶을 꾸려 가기 정신이 없었다. 다들 명쾌하게 인지하고 있지는 않았지만 무엇인가 시대의 조류가 바뀌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을 느끼고는 있었다.
세훈의 처인 고상희는 뱃속에 아이를 하나 더 가졌다. 아들인 현도는 돌이 지나 이제 말을 하기 시작했고 세훈이 일로 정신없는 사이에도 탐라 성주 고봉례의 집은 아이의 웃음소리에 집안이 시끌벅적했다.
그녀는 아이를 가진 와중에도 세훈에게서 방적기 한 대를 받아와 집에 두고서 직접 옷을 잣는 일에 푹 빠져 있었는데, 집안이 집안이니 만큼 밥을 짓고 빨래하는 일은 하지 않더라도 아녀자로서 옷만큼은 직접 잣는다는 생각이었다.
그녀는 물레도 돌려 본 적이 있었는데, 방적기를 들여온 뒤로는 그 재미에 흠뻑 빠졌다. 오히려 세훈이 부족한 목화를 그만 가져가라고 할 정도였다.
고봉례는 아들 고상온과 함께 군대를 돌보는 일에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고봉례가 근대군에 대한 지식이 있을 리 만무했지만, 그가 직접 군대를 훈련시킨다기보다는 그저 참관하는 재미가 쏠쏠했기 때문이다.
반면 아들인 고상온은 달랐다. 차기 성주로서 그는 직접 천부장들과 함께 병사를 지휘하고 총을 쏘는 법도 익힐 뿐더러, 1개월간 연병장에서 뒹굴며 훈련도 받았다.
이제 서른 줄을 넘긴 그에게 있어서 체력적으로 쉬운 일은 아니었지만 매제인 세훈의 능력에 감복해 있던 터라 최소한 군무에 있어서 만큼은 그 실력을 배양하여, 아버지나 세훈 앞에서 부끄럽지 않은 차기 성주의 능력을 보여 주고 싶은 마음도 있었기 때문이다.
상업에 관해서는 세훈이 일선에서 벗어났기 때문에 오상복이 제주의 상계를 이끌고 있었다.
예전 고려 시절의 개경상인들에, 조선이 들어서면서 출사를 거부하고 장사에 뛰어든 선비들까지 더해 지금 조선의 크지 않은 상계를 좌지우지 하는 송상(松商)과 함께 나상(羅商)이라 불릴 정도로 크게 성장한 제주의 상계가 내륙의 시장에 큰 영향을 행사하는 데는 오상복의 재능 덕을 보는 면이 있었다.
그는 동영주상행계(東瀛洲商行契)라는 것을 조직해 비누, 강철, 발화기 등의 제품 및 말이나 그 말총, 해산물들은 조합 명의로 직접 고봉례에게 세를 치르고 받아 와서, 그것을 가져다가 소속된 조합원들에게 팔도에 퍼져 각기 맡은 지역에서 독점권을 가지고 장사할 수 있도록 했다.
다들 귀한 물품으로 대접받고 있어 가져가기만 하면 쉬이 팔리는지라 제주 상인들은 쉽게 돈을 모았다. 거기에 대마도 왜구의 침입 후 나포한 왜선들 중 사용이 가능한 사십여 척을 고봉례가 이들 상인에게 불하(拂下)해 주어 섬 밖으로 장사 나가는 일이 더욱 용이해졌다.
오상복의 상행 규모가 커지자 자연스레 회계 장부와 어음의 발행 필요성이 대두되었다. 특히 아직 화폐가 통용되지 않고 쌀이나 생필품으로 상행이 이루어지는 마당이니 그것을 필요한 곳으로 매번 실어 나르는 일도 쉬운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상복은 제주도와 육지의 상행 거점에 있는 물상객주(物商客主)들을 모아 취체환계(取替換契)라는 것을 만들어다가 어음을 발행하고 대금(代金)의 입체(立替), 자금의 융통을 해 주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물건을 지점에서 맡아 두고 그의 가치에 상응하는 환표(換標)를 발행해 주어 현대의 환과 같은 기행을 수행하게 하는 한편, 어음의 발행이나 취인도 해 주어 그야말로 조선에 전국적이고 안정적인 상행망을 구축했다.
이에 맞선 송상의 대항도 거셌는데, 여각(旅閣)들을 모아 송방(松房)이라는 지점을 전국에 깔아 나상의 취체환계에 대항했다. 거기에 사개송도치부법(四介松都置簿法)같은 앞선 회계술이 있었기에 새로 떠오르는 나상이 상대하기에 만만한 상대는 아니었다.
제련소의 부석소와 제철소의 정탄 또한 물건을 생산하는 동시에 스스로 연구를 꾸준히 해 나갔는데, 그들이 가끔 떠올리는 발상은 실행하기 힘든 것이라 할지라도 그 창의성만큼은 세훈도 놀랄 정도였다.
특히 둘은 야금술(冶金術)을 더욱 연마하는데 공을 들여 고로를 개선하는 작업에 몰두하고 있었다. 보다 크고 효율 좋은 고로를 만들기 위해 모양을 바꿔 보기도 하고, 공기의 흡입량을 조절하거나 숯 대신 다른 촉매를 넣어 보거나 하는 일이었다.
모든 것이 잘 돌아가고만 있는 것 같았지만 의외의 복병은 다른 데에서 나왔다.
하륜이 고봉지와 함께 포로로 잡힌 왜장 하야다와 왜구들을 이끌고 한양으로 돌아갔을 때, 경복궁의 임금은 복잡 미묘하게 사건을 처결했다.
스스로 무력(武力)으로 왕위를 탈취한 것이나 다름없는 그이기에 화약을 제멋대로 다뤄 새로운 병과(兵科)의 병력을 양성한 제주의 일은 쉽게 넘어갈 수 없는 문제였다. 게다가 아직 왕자의 난을 다툰 형은 멀쩡히 살아 있고, 위로만 태상왕, 상왕에 전대왕이 둘이나 살아 있었다.
비록 조선팔도를 호령하는 용상에 앉아 있다 하나 정당성이 없고 기반이 취약한 시점이었다. 하지만 제주의 병력 양성은 지방의 군권을 지니고 있는 도호부사의 재량으로 시작한 일이었고, 또한 실제로 대규모의 왜구 침입에서 크게 대승했으니 함부로 질책할 수도 없고 칭찬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제주만호 고봉지는 들으라.”
조선의 왕, 정안군 이방원. 원래 역사 속에서 태종의 시호를 받게 되는 임금의 목소리는 크게 침중했다.
“예. 전하.”
고봉지는 대답이 조금 떨려 나오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우선 과인은 제주 수령 고봉례와 그 속하들이 이처럼 선견지명을 가지고 왜노의 내습을 막아낸 것에 대하여 치하하노라.”
“성은이 망극하옵나이다.”
“그러나 과인은 함부로 나라에서 다루는 화약을 방백(方伯)이 취급하고 총포(銃砲)를 제작한 것을 우려하는 바이다. 이번에 그 덕으로 왜구를 퇴치하였기에 책을 하지는 않을 요량이나 제주는 앞으로 보총과 화약을 계속 생산하여 제주 진영(陣營)에서 필요한 양을 제외하고는 모두 공납(貢納)할 것이오, 이를 감독하기 위해 군기시(軍器寺) 주부(注簿) 최해산(崔海山)을 전라도병선군기점고별감(全羅道兵船軍器點考別監)에 임명하여 그 일을 감독하게 할 것이니 이에 한 점 거짓이 없도록 하라. 주부 최해산은 공신 최무선의 아들로 화약을 다루는 일가의 기전을 지니고 있으니 이 일에 부족함이 없을 것이다.”
임금의 목소리는 조금도 흐트러짐이 없었다. 감정을 드러내지 않고 천천히 따지듯이 하는 말들이 내전을 조아 오는 것처럼 느껴졌다.
임금은 잠시 좌중을 둘러보고서는 말을 이었다.
“또한 토관(土官)을 제 지역을 맡아 보는 도호부사의 자리에 임명한 것은 과인이 그 제주에게 방종하라 함은 아니었으나 이번에 왜구를 격퇴한 공이 있기에 고봉례를 비롯한 지방 군수들은 화약을 만들고 군사를 조련한 책임을 묻지 아니하고 유임(留任)하도록 하노라. 병조에서는 이를 받들어 최해산의 부임을 처결토록 하고, 고봉지는 이를 제주에 돌아가 빠지지 않고 고하도록 하여라.”
대전은 마치 서리 낀 듯 정적 속에 차가운 공기만 흘렀다. 고봉지는 얼어서 떨어지지 않을 것만 같은 입을 억지로 열었다.
“성은이 망극하옵나이다. 하명하신 일에 한 점 부끄러움 없이 처결하도록 하겠나이다.”
태종은 마치 호랑이 눈 같은 매서운 눈매를 부라리며 고봉지를 바라보았다. 과연 고려의 왕조를 무너뜨린 제1공신이며 형제를 도륙해 가며 용상에 오른 패자(覇者)의 모습 그대로였다.
고봉지는 식은땀이 흐르는 것을 느끼며 마음속으로 앞으로 제주의 행방을 점쳐 보았다.
고봉지가 화약 제조를 감독할 최해산을 대동하고 제주로 내려온 것은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화약과 총포를 만드는 과정을 옆에서 쭉 지켜보았던 고봉지였기에 최해산을 공방으로 출입시켜 감독할 수 있게 하는 것은 천근만근 마음이 무거운 일이었다.
최해산은 제주에 잘 적응하는 듯 보였다. 그는 화학소와 제총소를 뻔질나게 드나들며 본래의 생산 감독 임무보다는 화학의 개량과 총기를 연구하는데 시간을 보냈다.
그의 아버지는 유명한 여말선초의 명장 최무선이었고, 익히 아는 바대로 화약의 제조법을 들여와 화포를 생산한 인물이기도 했다. 최해산은 바로 아버지 최무선의 뒤를 이어서 배운 바대로 화약과 무기에 관해 조예가 깊었는데, 그런 그에게 제주에서 이뤄진 성과는 정말로 놀랍기 짝이 없는 것이었다.
지속적으로 생산되는 화약의 안정성은 물론이거니와 개인용 화기로 이렇게 강력한 파괴력을 가진 보총이야말로 정말 놀라운 성과라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었다. 거기에 무기에 사용하기 위해 강철을 생산하는 고로라던가, 비누, 발화기 따위도 최해산의 마음을 끌었다. 이 모든 것이 한 사람이 고안해 낸 것이란 사실이 그로 하여금 더욱 그 사실을 놀랍게 만들었다.
최해산은 그 사람, 정의 군수 김세훈을 꼭 만나보고 싶었다.
세훈은 그 당시 화학 염료를 고안해 내느라 정신이 없었는데, 일도 바쁠 뿐더러 내심 어렵사리 일구어 놓은 것을 권력을 이용해 공짜로 낼름 할 심산인 조정에서 보낸 최해선이 기꺼울 리가 없었다.
김세훈은 와병(臥病)이며 일이 바쁨을 핑계로 찾아온 최해산을 수차례 돌려보냈다.
“군수(軍需)에 관련한 일을 처결하느라 바쁘니 나중에 오시오.”
최해산은 김세훈을 찾아갈 때마다 이런 이야기만 듣고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쯤 되자 최해산도 오기가 생겼을 뿐더러 김세훈을 한번 보고자 하는 욕심도 생겨 삼 일 걸러 한 번 김세훈을 찾아가 시위하듯이 문을 두드려댔다.
결국 모브 염료의 합성이 끝날 즈음에 와서는 김세훈도 지고서 최해산을 사랑방으로 불러들여 대접할 수밖에 없었다.
“들여 주셔서 감사합니다. 최해산이라 합니다.”
최해산이 사랑에 들어와 앉으며 말했다. 그는 생각보다 젊어 보였는데, 실제로 스물셋밖에 안 된 청년이었다.
최무선이 세상을 등졌을 때 최해산은 겨우 열다섯의 나이였는데, 화약의 최무선과 목화의 문익점의 자제를 조정에 등용하여 쓰라는 권근(權近)의 주청을 받아 임금이 조정에 불러들여 군기시 주부의 자리를 내린 것이었다.
오히려 최해산이 세훈을 보고 놀랐는데, 자기와 비견해도 나이가 그리 많아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실제 전생에서의 나이로부터 따져보아도 세훈은 아직 스물아홉으로, 서른에도 이르지 않은 젊은 나이었다.
“병졸들에게 면 옷을 지어 입히고 거기에 입힐 염료를 짜내는 일에 골몰하다 보니 세상 시름 잊고 손님이 오신 줄도 모르고 지냈습니다.”
뻔한 거짓말이었지만 세훈도 최해산도 그 문제에 관해서는 더 이상 이야기하지 않았다. 세훈의 처 고상희가 내온 다상을 앞에 두고서 찻잔 위로 김이 올라가는 동안 묵묵히 한참을 두 사람은 말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