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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화
『해독약을 섭취하고 충분한 휴식을 취했습니다. 중독 상태에서 거의 벗어났습니다. 하지만 대응해독약을 섭취한 것이 아니므로 잔독이 남아 있는 상태입니다.』
스테이터스도 완전 회복되지 않았고, 엄청 피곤했다. 이 정도의 상처를 입은 것도 처음이었다.
‘이놈의 게임은 회복 속도가 느리단 말이야.’
하지만 처음과 비교하면 많이 좋아진 상태다. 체력이 70을 돌파한 지금은 50% 이상 회복력이 증가한 것이다.
그래도 좀 잤다고 상처에 완전히 딱지가 졌다.
그래서인지 배가 심각하게 고팠다.
그는 차력사들의 식사와 함께 자신의 식사를 대량으로 만들었다. 우걱우걱 먹어 치우고 나자 한숨 돌렸다.
‘모레면 다 낫겠네.’
식사가 끝나고, 핸드는 나이프 파이팅 훈련을 받게 되었다. 물론 그는 환자라서 이론부터였다.
막무가내인 지스와 달리 카담은 생각 외로 이론적인 구석이 있었다.
다짜고짜 죽어도 좋다는 기세로 진짜 단검을 던져 대기는 하지만, 그건 핸드가 죽지 않을 거라는 확신을 한 다음에 던진 것이었다.
“단검은 전투용이라도 1kg을 넘는 일은 거의 없다. 그 정도 무게가 나가면 거의 방어용 단검이지. 그런 건 민첩하게 다룰 수 없어. 내가 가르칠 것은 가벼운 단검을 사용한 싸움 기술이다. 특수한 것 말고, 보통의 단검.”
카담은 단검을 손아귀에서 핑그르르 돌렸다.
손가락을 정교하게 놀려 무게 중심을 이동시키면서 재주를 부리는 것이다.
“이런 건 잔재주에 불과하지만 상대의 눈을 현혹시키거나, 혹은 잡는 법을 바꿀 때는 쓸모가 있다.”
전투로 숙달시킨 건 아니지만, 핸드 역시 얼추 흉내는 가능했다. 민첩이 60을 넘었고, 단검 숙달도 초급 2(12)레벨. 처음에는 헤맸지만 곧 따라 할 수 있게 되었다.
『단검으로 재주를 부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 성과로 민첩이 1 증가했습니다.』
“자, 이런 재주 부리기부터 가르쳐 준 이유는 단검을 고쳐 잡는 기술이 아주 중요하기 때문이다. 단검을 잡는 법은 크게 3가지가 있거든.”
카담은 손잡이 끝을 손바닥으로 감싸듯이 약간 비틀어서 쥐는 방법, 약간 간격을 두고 쥐는 법, 마지막으로 단검을 거꾸로 쥐는 법을 가르쳤다.
“베기, 찌르기…… 다른 건 뭐죠?”
“당기기지. 명심해. 찍기가 아니야.”
“당기기? 찌르고 비틀거나 하지 않나요?”
“……그것도 나름대로 유효할지 모르지만, 단검으로 찌르고 비틀어서 추가적인 상처를 입힐 장소는 복부 정도지? 하지만 원래 비트는 건 장병(長兵)이 근육에 붙잡혔을 때, 잘 빠지지 않는 상처를 벌리고 뽑기 위해서 하는 짓이야. 단검은 섬유를 따라 당겨서 빼면 빠져.”
“즉, 찌르는 건 웬만하면 근육의 섬유 방향에 평행하게 찔러야 한다는 거군요.”
“그래. 수직으로 찌르는 건 등 뒤에서 암습을 할 때나, 이렇게 잡고 찍는 거지. 하지만 단검으로 찍는 건 현명한 방법이 아니고, 하수나 하는 짓이다.”
카담은 목각인형을 상대로 나이프를 역수로 쥐고, 들어 올려서 찍는 동작을 취했다.
“이렇게 하면 위력은 조금 있을지 몰라도, 단검이 경직된 근육에 물려서 잘 빠지지 않게 된다. 그것만이면 다행인데 동작이 커져서 반격을 당할 수도 있어.”
그러더니 카담은 다시 잡는 법을 바꾸었다.
“너도 알겠지만 단검은 지렛대의 원리를 이용할 수는 있지만, 장병에 비하면 그다지 큰 효과가 없어. 그러므로 반드시 급소를 노려야 한다.”
“…….”
“물론 상대는 그런 급소를 보호하겠지? 특히 나이프 파이팅 중이라면 말이야. 상대 역시 급소를 노린다는 걸 알 테니까. 그러므로 급소가 아닌 곳을 속임수로 노리다가, 적이 그 부분을 막으면 잽싸게 급소를 찔러야 해.”
핸드는 카담이 가르치는 잡는 법을 열심히 익혔다.
단검은 절대 강하게 쥐면 안 된다. 그렇다고 느슨하게 해야 한다는 것도 아니다.
적당히 쥐어야 하는데, 가장 어려운 요구였다.
그러나 핸드는 이미 어느 정도 요령을 알고 있어서 ‘적당히’ 쥐는 법을 습득했다.
수십 번 정도 연습하자 그럭저럭 나이프를 빨리 빼 드는 것과, 잡는 법을 고치는 기술도 몸에 익었다.
“크로스레인지의 전투 요령을 익힌 너는 단검에 금방 적응할 거야. 단검으로 주로 노려야 하는 곳은 베스트가 목…… 좌우의 혈관이다. 뭐라더라? 그래. 경부동맥.”
인체에 관해서는 카담보다 핸드가 더 잘 안다.
핸드는 혈관이나 신경을 노려야 한다는 말만 듣고도 순식간에 요령을 습득했다.
‘나이프는 짧아서 하반신을 노리는 건 어렵다. 그러므로 팔목, 팔꿈치의 동맥이 주요 목표. 근육을 베거나 찌를 때는 섬유에 평행한 방향으로 넣는 것이 이상적이지만 그건 현실적으로 어려우니까 비스듬히 넣어서 혈관을 절단하는 것이 좋겠군. 당기는 것은 회수할 때. 역수로 잡고 당길 수 있으면 최고지만, 너무 깊게 당기면 뼈에 걸려 버리지.’
나이프 파이팅에서는 상대의 팔이 돌아갈 때도 방심할 수 없다. 고수가 되면 손목의 탄력만으로도 혈관을 자를 수 있기 때문이다.
핸드는 목각인형을 상대로 단검을 쓰는 요령을 습득했는데, 카담은 핸드가 순식간에 어디를 노려야 할지를 깨닫자 혀를 내둘렀다.
“대단하군. 순식간에 적응하는데? 인체에 대해서는 나보다 더 잘 아는 것 같아.”
핸드는 격투장에서 인체파괴술을 생각하는 동안 무기를 쓸 때 어떻게 할지도 염두에 뒀던 것이다.
역시 스킬은 뭐든 올려 두고 봐야 한다.
“단검을 사용한 싸움은 트릭과 정교함이다. 민첩함은 기본 조건에 불과해. 서로가 어디를 노릴지 잘 알기 때문에, 대단히 흉험한 싸움을 하게 된다. 깜박하면 혈관이 싹둑 잘려서 피 뿜어내며 뒈지는 거지. 그게 장검 같은 무기와 달리 단검이 날카롭고 가벼울수록 좋은 이유야. 음…… 이론적인 가르침은 이 정도로 하고, 느린 속도로 천천히 겨뤄 보면 요령도 금방 익히게 될 거다.”
핸드와 카담은 나무로 깎은 단검을 쥔 채, 느린 동작으로 대련을 해 보았다.
처음에는 열 번 대련해서 열 번 다 졌지만, 핸드가 단검 전투의 요령을 익히는 속도는 대단히 빨랐다.
‘중국권법의 대련 요령 같군.’
물론 룽 노사가 가르쳐 준 지식이었다.
「중국권법의 대련 요령 가운데는 느린 동작으로 근접전 요령을 연습하는 것도 있지. 태극권에서는 손을 붙인 채 균형과 기술을 겨루기도 한다. 수준 낮은 놈들은 흉내도 낼 수 없고, 올바른 연습을 하기도 어렵지. 하지만 어떤 기술로 공방을 엮어 나갈지를 선택하면서 최적의 궤도를 이해하고 나면 현격한 기술의 발전을 이루게 되느니라.」
이 수련 후, 핸드는 지스와 근접 상태에서 손과 발 기술만으로 겨뤄 보게 되었다.
처음에는 빠른 속도로 수를 나눴지만, 조금씩 속도를 줄이면서 느린 겨루기로 흘러갔다.
‘이제 지스에게도 잘 안 맞는군.’
처음에는 때리는 대로 맞았지만, 지금은 한 합에 몇 번 정도였고 그것도 조금씩 줄어들어 갔다.
얼마 안 가서, 지스를 상대로도 수십 분 동안의 난전을 벌일 정도가 될 수 있으리라.
이렇게 느린 대련을 하면 상대의 전투경험을 간접적으로 흡수할 수 있다. 근접 상태에서 호흡 하나까지 간파하면서 수련을 하자, 스킬이 대단히 빨리 올랐다.
하루 사이에 단검 숙달만 3레벨, 안목 스킬과 격투기가 각각 2레벨이나 증가했다.
초급인데도 스킬이 잘 오른 것은, 간파와 안목의 조합 덕분이었다. 격투장에서 쌓아 온 다양한 경험으로 바탕을 마련하고 다음 단계로 나아갔기 때문이기도 하다.
스킬은 그것 하나만 매달리면 잘 오르지 않지만, 경험을 공유하는 다른 스킬들과 함께 폭넓게 올리면 이따금 폭발적으로 증가하기도 했다.
‘흠, 안목이 초급에 가까워졌어. 생각보다는 빨랐네.’
현재 안목은 견습 10레벨!
다른 스킬과 비교하면 잘 오르지 않는 편이라, 초급에 들어가면 직업을 얻기 전에는 올리기 어려울 것이다.
스킬은 견습일 때는 아주 잘 오르지만, 초급이 되면 갑자기 속도가 팍 줄어들고, 중급부터는 살인적으로 안 오른다. 아무리 유사 스킬로 밑밥을 깔아도 2레벨 이상 동시에 오르면 그건 기적이다.
‘상급 스킬 올릴 걸 생각하기만 해도 치가 떨리는군.’
물론 게임 시간으로 6개월도 안 됐는데 중급 스킬이 2개나 되는 핸드가 이상한 놈이긴 하다.
라이트 유저들은 직업에 필요한 스킬들만 알아내서 대충 올린다. 그리고 곁가지로 둘에서 셋쯤 더 익히고 견습인 채 직업 레벨을 얻었다.
하드 유저들조차도 중급 스킬을 하나쯤 찍으면 대단한 노가다를 했다고 여기는 모양이었다.
그러나 핸드는 중급 스킬만 2개. 조만간 중급 스킬이 될 거라고 생각되는 스킬도 2개다.
‘땀을 빼서 그런지 상태도 좋아졌군.’
여관에 안 가고 여기서 자는 바람에 일을 하루 쉬었지만, 어차피 한 달에 5일 정도는 쉬고 있다. 새로운 보조를 고용할 정도로 여관 경기가 좋아졌기 때문이다.
부상 중에도 수련을 했기 때문인지, 몸 상태는 괜찮았다. 땀을 흘려서 체력은 저하됐지만 잔독이 빠져나가 스테이터스는 다 회복됐다.
남은 독으로 인해 회복 속도가 조금 떨어져 있는 것을 제외하면 별문제가 없었다.
‘여관으로 돌아가자.’
핸드는 절실히 쉬고 싶었다.
하지만…… 현실은 마음대로 되지 않는 법.
긴 밤이 시작됐다.
3장 : 습격
“으이구.”
핸드는 인상을 찌푸리며 자신의 방에 들어왔다. 여관 주인의 잔소리에 귀가 아팠기 때문이다.
늦은 시간인데다 독과 출혈로 초췌해지고 안색도 나빴기 때문에 봐준 것이다.
만난 지 벌써 (게임 시간으로) 반년 가까이 되므로, 여관 주인은 핸드의 친척처럼 굴었다.
그래도 좋은 사람이었다.
초면인 그에게 일자리도 많이 소개시켜 줬고, 그로 인해 득을 보기도 했지만 손해도 보았다.
뜨내기를 도와준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자칫하면 자신의 신용도 잃게 되기 때문이다.
‘고맙긴 하지만 잔소리가 너무 심해.’
그는 툴툴거리는 것을 그만두고, 요가와 아사나를 실시했다. 반드시 몸을 풀어 줘야 피로도 잘 회복되고, 상처도 잘 나을 것이기 때문이다.
상처가 벌어지지 않아야 하기 때문에, 배가 잘 당기지 않는 동작들밖에 할 수 없었지만.
그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자네, 자고 있나?”
여관 주인의 목소리였다.
“깨 있습니다만.”
“자네에게 손님이 왔네.”
핸드는 흠칫했다.
‘손님? 누가?’
여관에 그를 찾아온 사람은 지금까지 없었다. 핸드는 생각을 정리하고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다.
“무슨 일입니까?”
복도에 서 있는 여관 주인은 심각한 표정이었다.
“이름은 로크라고 하더군. 아는 사인가?”
“예. 아는 사이입니다만…….”
‘로크? 그놈이 왜?’
같이 싸운 적이 있기는 하지만, 그걸로 사람을 신뢰하라면 좀 무리가 있는 일이다.
왠지 모르지만 마음에 안 드는 구석이 있는 것도 사실이고…… 스킬이 묘한 반응을 보이기도 했다.
“자네…… 이상한 놈들과 어울리고 다니는 거 아니지? 무기를 갖고 있던데. 적대적인 것 같지는 않지만, 그런 놈들하고 어울리면 안 좋아.”
걱정스럽게 물어오는 여관 주인을 안심시키기 위해, 핸드는 언변을 짜 내지 않을 수 없었다.
“뭐, 약방에서 지내다 보니 알게 된 사이입니다. 그런 쪽의 인간은 아니죠.”
사실은 훌륭한 도둑 길드의 스파이다.
“그럼 어쩔 수 없군…… 뭐, 사냥꾼 같기는 하던데.”
도둑 길드 소속이었다가 폭력 조직의 인간 사냥꾼이 된 놈이니 사냥꾼이란 말도 틀리지는 않다.
“내려가 보게.”
“예. 이거 참 죄송해서.”
핸드는 여전히 표정이 안 좋은 여관 주인에게 고개를 꾸벅 숙여 보이고 잽싸게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이 새끼. 왜 여관에 찾아오고 난리야? 여관 주인한테 의심을 샀잖아!’
차력사단은 그렇다 치더라도, 격투장은 물론 폭력배들과 연관되는 것이 여관 주인에게 들키면 신용 스킬이 하락하고 쫓겨날 가능성도 높다.
아래층 카운터 앞에 로크가 서 있었다. 그런데 왠지 안절부절못하는 느낌이 들었다.
그는 낮은 목소리로 소리친다는 기묘한 능력을 선보이며, 다짜고짜 핸드를 나무랐다.
“이봐, 대체 왜 이런 곳에서 숙박하는 거야? 너 제정신이 아니지? 가뜩이나 의심을 받고 있었는데 이젠 완전히 숨어 있기는 글렀네.”
“뭐? 화내고 싶은 건 나야. 지금 여관 주인에게 의심 받고 있는 거 알아?”
“미친, 그게 중요하냐? 표적인 네놈이 이런 한적한 곳에서 뭉개고 있으면 그놈들이 참 좋아하겠다. 놈들은 네가 수리곰이라는 걸 알고 있단 말이야!”
“……!”
핸드는 깜짝 놀랐다.
‘아차! 여긴 중립지대가 아니지. 라스트 앤서가 빌어먹을 정도로 리얼리티 중시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는데도 이런 실수를 하다니!’
다른 게임들은 편의를 위해 여관 지역을 중립지대로 만들어 특수 퀘스트가 아닌 한 전투가 불가능하게 한다. 그래서 핸드조차 무의식중에 여관은 안전한 장소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반응을 본 로크는 혀를 찼다.
“쯧! 아주 머리가 없는 건 아니군. 여하튼 어서 여기서 벗어나자. 놈들이 이쪽으로 오고 있단 말이다. 그놈들은 범죄도시에서도 또라이 취급이었어. 여기에 불을 질러도 이상하지 않아!”
핸드는 침묵했다.
안전을 생각하면 당장 차력사단으로 가야 한다.
로크의 반응으로 보면 몇 분 정도는 도망칠 여유가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냉정하게 생각하면 당장 피해야 하겠지만…… 핸드는 고개를 저었다.
“안 돼. 도망칠 수 없어.”
“뭐? 왜?”
“내가 간다고 해서 놈들이 이 여관에 화풀이를 하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으니까. 아니, 반드시 하겠지.”
“……아주 정의의 사자 나셨군.”
로크는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난 몇 개월이나 이 여관에서 생활했어. 거의 가족이나 마찬가지라고. 그러니 나가서 놈들을 쳐야겠다.”
이 상황에서는 보신을 중시해야 한다는 건 알고 있다. 하지만 핸드는 그 생각을 치워 버렸다.
‘이건 역할 연기(Role Playing) 게임이다. 하지만…….’
여기서 달아나면 다른 곳에서도 도망쳐야 했다. 언제까지 몸을 지키고만 있어서는 아무것도 얻지 못한다.
지금까지 얻은 것들을 버리고, 다른 곳으로 달아나 봐야 얻는 것은 없다.
시간이 지날수록 적은 강해진다고 생각해야 한다.
‘지금 쓰러뜨리지 않으면 나중은 없다!’
“적은 조직이니까 지금 죽이지 않으면 계속 커지겠지. 언제까지 도망칠 수 있을까? 그래서 나는 싸울 거다.”
“……오는 놈들 숫자가 몇인지나 알고 하는 소리냐? 30명이나 돼! 게다가 뒷골목에서 그냥 추려 놓은 놈들이 아니야. 전부 상당한 훈련을 받은 녀석들이라고.”
“그러니까…… 네가 도와줘야겠다.”
뜬금없는 핸드의 말에, 로크는 화들짝 놀랐다.
“뭐라고?”
“혼자 온 건 아니지? 난 이쪽 지형은 훤히 알아. 놈들이 여기 온 지 얼마나 됐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이 장소에서 반년이나 보냈다. 승산이 없는 싸움은 하지 않아.”
“……혼자가 아니긴 하지만 그렇게 많은 놈들하고 싸울 수는 없어.”
핸드는 고개를 저었다.
“싸울 수 없는 게 아니라 싸울 수밖에 없을걸? 내가 지금부터 널 잡으려고 하면 어떻게 될 거 같나?”
“뭐?”
얼떨떨한 표정의 로크를 보고, 핸드는 히죽 웃었다.
“적도 아닌데 싸우고 싶지는 않겠지? 나랑 싸우고 싶지 않으면 상대해 줘야겠어.”
“미친…… 너랑 있으면 안 되겠다. 그런 무모한 싸움은 할 수 없다고. 난 여기서 나가야겠어.”
그는 몸을 돌렸지만, 핸드의 말이 걸음을 붙잡았다.
“그럴 수 없을걸? 횃불이 보이기 시작했어. 놈들이 포위를 시작했다는 말이지.”
여관에 들어서는 골목 쪽에서 횃불이 흔들리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놈들은 흩어져서 이 지역을 포위할 생각인지, 다른 쪽 골목에서도 횃불을 찾을 수 있었다. 로크는 적들의 복장을 한 상태지만 이제 와 섞이는 것은 무리일 것이다.
“이봐, 나도 놈들이 전멸할 때까지 싸울 생각은 없어. 그 정도로 무모하지는 않아. 타격을 입히고 벗어날 거야. 게다가 너는 이미 검은 전갈단에서 의심을 받고 있다며? 길드의 보호를 받을 수 없는 상태에서 스파이 짓을 하다가 들키면 그대로 성과 없이 죽는 거지. 아예 한바탕 저지르고 빠져나오는 게 안전에 좋을 텐데?”
어쩔 수 없는 스파이의 생리였다.
뜨끔한 곳을 찔린 로크의 표정이 찌푸려졌다.
그러나 핸드는 채찍질만 하지는 않았다. 이제 확실한 당근을 내밀어야 했다.
“도둑 길드는 뮬란 단장에게 비장의 카드를 보호해 달라고 요청할 정도더군. 즉, 뮬란 단장과 도둑 길드의 사이에는 상당한 신뢰관계가 형성되어 있다는 거지. 도둑 길드가 그의 약점을 이용하는 걸지도 모르지만, 길드의 약점이라면 뮬란 단장도 잡고 있지 않겠어?”
뮬란 단장의 상황, 즉 슈탈바르트와 연관된 과거는 도둑 길드도 알고 있는 모양이다. 그러나 길드는 뮬란 단장의 신변을 보호한 적도 있고, 그 자체가 이미 슈탈바르트와 척을 지는 행위였다. 그 점을 미루어 보면 뮬란 단장이 도둑 길드에 영향력을 가진 것이 분명했다.
“네가 여기서 공을 세우면 내가 그를 설득해서 증언자로 내세워 주지. 한마디 하자면 뮬란 단장은 나에게 비밀을 말할 정도로 신뢰를 하고 있어.”
“끄응.”
로크는 신음 소리를 내며 이를 부득부득 갈았다. 그러더니 한숨을 푹 내쉬고 고개를 끄덕였다.
“이 개자식아. 그놈의 계획이란 걸 들어 보자.”
그 말에 핸드는 씩 웃었다.
“네가 데리고 온 게 몇 명이지?”
“두 명.”
“축하한다. 넌 4대 30으로 싸워서 승리를 쟁취한 전설의 한 명이 될 거야.”
* * *
로크는 잠깐 바깥에 나갔다 오더니 여관 주인 앞에서 호들갑을 떨기 시작했다.
“가, 강도들입니다!”
“강도?! 여, 여긴 도시 내인데.”
“저 횃불을 보십시오. 한두 놈이 아니라구요.”
여관 주인은 밖을 보더니 하얗게 질렸다.
거리가 아직 있기는 하지만 갑옷을 입고 후드를 뒤집어쓴 녀석들이 다가오고 있는 것이 보였다. 실루엣만 봐도 중무장을 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아무리 봐도 좋은 의도 같지는 않은 흉흉한 기색이었다. 여관 주인에게는 걸음걸이만 봐도 손님인지 아닌지를 알 정도의 안목이 있었다.
그때 핸드가 변죽을 올렸다.
“로엠 영감님이 요즘 자유도시 드멜에서 조직간 항쟁이 벌어졌다더니, 이런 곳까지 위험한 놈들이…….”
“드, 드멜!”
그 말을 들은 여관 주인은 문득 드멜에서 뜨내기들이 흘러들었다는 소문을 떠올렸다.
오랜 경험으로 드멜의 폭력배들이 흉악하고 살벌하다는 것은 그도 알고 있었다.
“요, 요즘 장사가 잘 된다고 생각했는데…… 으으! 어째서 이런 일이! 기부를 안 해서 이렇게 된 건가?”
여관 주인은 패닉에 빠진 것 같았다.
그 원인인 핸드는 양심에 찔렸지만, 혼란에 빠진 지금의 상황을 이용해야 했다.
“피신을 하셔야죠. 저놈들은 이미 주변을 포위한 것 같으니 남은 손님들을 데리고 지하실로 들어가십시오. 경비대가 올 때까지 저희가 입구를 지켜보겠습니다.”
“그, 그래 주겠나?”
여관 주인은 완전 겁에 질려서 제대로 된 판단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는 핸드의 말을 따르기로 하고 손님들을 깨워서 급히 지하실로 향했다.
“아 씨, 이게 무슨 일이야? 무슨 퀘스트인가?”
그런 소리를 지껄이면서 생각 없이 바깥으로 나온 인물은 바깥에서 횃불들이 줄줄이 나타나는 걸 보더니 급히 지하실로 내려갔다.
복장 같은 걸로 봐서 실력이 있어 뵈지는 않았고,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인물일 것이다.
‘플레이어인가? 생각 없는 놈이군.’
핸드는 그를 무시하고, 빈 방의 문짝을 힘으로 뜯어낸 뒤 두 겹 정도를 올려 난간에 겹쳐 놨다. 일종의 바리케이드를 만든 것이다.
“이걸로 몸을 가리고 2층에서 석궁이나 쏴.”
“……젠장. 내가 어쩌다가 이런…….”
그런 것 치고 묘하게 공포를 느끼는 것 같지 않았다.
‘나야 초보자 칭호가 있으니까 괜찮긴 한데.’
초보자 칭호가 있으면 사망 페널티가 확 줄어든다.
현실로 하루, 게임 시간으로 4일간 접속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빼면 그렇게 큰 손해는 없다.
핸드는 다른 문짝을 뜯어낸 뒤 그걸로 몸을 가리기로 했다. 두꺼운 목판이 아니라 석궁을 받아 내기에는 턱없이 부족했지만 관통하면 위력은 확실히 줄어든다. 어차피 이건 한 번밖에 쓸 생각이 없었다.
“잘 되겠지 뭐.”
농성은 상당한 효과가 있을 것이다. 놈들이 우위에 있는 한 건물에 불을 지르지는 않을 테니까.
여긴 드멜이 아니고, 녀석들은 정착한 지 얼마 되지 않았다. 쿠도르프의 경비대는 상당히 양심적인 편. 만약 뇌물을 상당히 먹였다 해도, ‘조금’ 출동 시간이 늦어지는 정도일 것이다. 그 조금이 얼마나 될지는 모르겠지만.
소동이 지나치게 커지면 돈으로 무마하는 건 불가능. 검은 전갈단은 경비대의 토벌을 당하게 될 것이다.
핸드는 녀석들이 적정 거리로 다가올 때까지 기다리고 있었다. 놈들이 다가오면 계획은 시작된다.
정면으로 들어오는 녀석들은 열 명이 채 안 될 것이다. 주변을 포위해야 하기 때문이다.
‘때가 됐어!’
그렇게 생각했지만, 기다리던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크윽. 설마 자기들끼리만 도망쳤나?’
핸드는 식은땀을 흘리기 시작했다.
그때였다. 다른 건물들의 2층에서 정면으로 쳐들어오는 적에게 화살이 날아들었다!
시간은 밤이지만 화살은 정확히 명중했다.
어둠 속에서 횃불을 들고 있으면 그야말로 날 쏴 줘∼ 하고 광고를 하는 거나 마찬가지!
거리도 가까우니 두 발 전부 머리를 맞췄다.
동료들이 느닷없이 석궁에 맞고 쓰러지자, 녀석들은 흠칫 하더니 사선을 파악한 다음 피하려 했다. 판단이 빠른 녀석들은 여관으로 달려들었다.
‘됐다! 도망가지 않았어. 로크가 일을 제대로 했군.’
로크는 도둑 길드의 동료들을 설득하여 녀석들에게 커다란 데미지를 입히기로 약속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