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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화
2장 : 적의 적은 아군
검은 전갈단.
최근 쿠도르프 시에 정착하기 위해 들어온 자들로, 기존의 조직들과 강하게 충돌하고 있었다.
“현재 내가 아는 건 그 정도일세. 아마 정착을 위해서 이권을 얻으려 하고 있겠지. 조직항쟁이 격렬해져서 큰 소동이 된 적도 있어. 최근에는 조용하더라니, 여기서 승부 조작을 하고 있었던 거군.”
뮬란 단장은 침중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으음.”
핸드는 적들의 규모가 꽤 크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적어도 혼자 힘으로 싸우는 건 힘들 것이다.
하지만 피할 수 있는 싸움이 아니었다.
‘완전 회복하려면 사흘은 걸리겠군.’
독 내성이 초급이 되면서, 몸 상태도 오히려 싸우기 전보다 더 좋아졌다.
지구력 중급 달성으로 체력 회복 속도도 빨랐다. 생명력은 그다지 회복되지 않았지만, 수십 분 사이에 스테이터스가 조금 더 회복되어 싸울 힘을 되찾았다.
로엠 노인에게 해독약을 받아먹으면 회복 속도는 더 빨라질 것이다.
“놈들이 수단 방법을 안 가린다면 돌아가는 것부터 문제가 되겠군요. 걱정인데요?”
“……걱정이라며, 왜 그리 좋아하나?”
핸드는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히죽히죽 웃고 있었다.
격투장에서 배운 것.
‘불리한 상황이라도, 상대가 누구라도 평소대로 싸운다. 꺾이면 거기서 끝이지!’
자신과 상대의 목숨을 놓고, 자신의 힘만으로 승리를 쟁취한다. 몇몇 가상현실 게임을 하면서 단 한 번도 느껴 보지 못했던 투쟁 욕구의 실감.
밑바닥까지 떨어지면 올라가는 것밖에 남지 않는다.
핸드는 이미 그것에 적응한 상태였다.
“자, 그러면 돌아가 보실까요?”
“돌아가는 것도 문제일 것 같네만.”
놈들이 방식은 아주 대범하다.
경비대에도 뇌물을 썼을 가능성이 높다.
핸드와 뮬란 단장은 이제 격투장에서 벗어나, 적들을 따돌리고 안전한 곳에 도착해야만 했다.
그는 잽싸게 원래 복장을 입은 뒤, 신분을 감추기 위한 케이프를 뒤집어썼다.
뮬란 단장 역시 케이프를 입었다.
그들은 서둘러 격투장에서 빠져나와, 평소에는 다니지 않는 골목길로 조심스럽게 움직였다.
“이런…… 가는 길마다 있군.”
약 3인 1조. 그 외에도 몇 명 정도.
놈들은 빠져나가는 골목이나 좁은 길마다 숨어 있었다. 막다른 골목 등에는 입구에만 한 명에서 두 명 정도만 오가고 있었지만, 철통같은 경계임은 분명했다.
여기서 핸드는 뮬란 단장의 묘한 재주를 알 수 있었다. 기묘한 걸음걸이로 스치듯이 미끄러지는데, 걸음 소리가 들리지 않고 기척도 없었다.
펄럭이는 옷을 입었는데도 옷깃 스치는 소리도 거의 들리지 않았다. 가까이 있는 핸드가 그랬으니 떨어진 놈들은 알아차릴 수 없었을 것이다.
“빠져나가기가 아주 어렵겠어.”
“음…… 가장 포위망이 얇은 곳이 어디죠?”
“제정신인가? 세 명, 아니 숨어 있는 놈들까지 따져서 최저 다섯 명이니 소리 없이 제압하는 건 불가능해. 보나마나 추격전을 하게 되겠지. 게다가 놈들 중 몇 명은 석궁까지 가지고 있어.”
핸드는 깜짝 놀라서 소리를 높일 뻔했지만, 급하게 입을 틀어막았다.
‘석궁?!’
아무리 격투장에서 다양한 싸움을 거쳐 온 핸드라도, 석궁이 상대라면 어쩔 도리가 없다.
이런 좁은 곳에서 석궁의 위력은 절대적이다. 불과 10미터 앞에서 발사되면 피하기도 어렵다.
뮬란 단장은 고개를 저었다.
“역시 룰을 상관하지 않는 놈들이야…… 석궁 같은 살상력 높은 병기는 엄격하게 통제되기 때문에, 뒷골목에서는 절대 사용해서는 안 돼. 뒷돈을 주고 틀어막아도 한계가 있는 법인데. 정말 어지간한 놈들이군. 그나마 군용 중쇠뇌(Heavy Cross-Bow)를 갖고 있지 않은 게 다행일까? 전부 경쇠뇌(Light Cross-Bow)야.”
물론 어느 쪽도 맞으면 죽는 건 똑같다.
“보우건도 아니고 경쇠뇌라구요?”
“……뭐, 보우건 정도면 어떻게든 해 보겠지만.”
그 정도면 핸드도 자신 있었다.
물론 쳐 내는 건 무리고 쏘는 방향을 간파하여 피하는 게 한계겠지만…….
하지만 경쇠뇌는 무리다. 위력을 본 적은 없지만, 보우건보다야 훨씬 강력할 것이다.
핸드는 머리를 움켜쥐고 싶은 기분을 맛보았다.
‘뭔 놈의 D급 퀘스트가 이래! E급하고 난이도가 천지 차이잖아?!’
식은땀이 배어 나오는 순간이었다.
그때, 툭 하고 위에서 뭔가가 떨어졌다. 발밑에 떨어진 것을 보니 돌멩이였다.
그들은 고개를 들어 위를 보았다.
등을 기대고 있는 건물의 위, 2층에서 웬 까만 머리카락의 청년이 손짓을 하고 있었다.
“이봐. 당신들, 쫓기고 있지? 지금 밧줄을 내려 줄 테니 올라오라고.”
“……뭘 믿고 올라가라는 거야?”
“서둘러. 그런 실랑이할 시간 없어. 놈들이 당신들이 안 나오니까 순찰을 돌기 시작했단 말이야.”
뮬란 단장은 고민의 기색이 역력했다.
그러나 핸드는 상대를 믿어 보기로 했다. 지푸라기라도 잡을 만큼 다급한 상황이었으니까.
약간의 위험 정도는 감수할 수밖에 없었다.
“일단 믿어 보죠. 제가 앞장서겠습니다.”
“……으음.”
뮬란 단장은 아직 망설이고 있었지만, 핸드가 2층에서 늘어뜨린 밧줄을 타고 잽싸게 벽을 오르자 할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납 벨트 때문에 중압 1단계에 가까워진 핸드였지만, 그는 힘차게 밧줄을 타고 올라갔다.
다행히 밧줄에 뭔가 발라 놓거나 요상한 수작을 부리지 않아서, 두 사람은 무사히 2층에 들어설 수가 있었다.
방 안에는 검은 머리카락의 청년 한 사람밖에 없었다.
얇은 가죽갑옷 위에 케이프를 걸친 듯 갑옷 윤곽이 보였는데, 겉으로 보기에 별 무장은 없었다.
그러나 핸드는 그에게서 이질적인 인상을 받았다.
‘뭐지? 이 감각은?’
조금 껄렁껄렁한 표정과 분위기이긴 했지만, 거기서 이질적인 인상을 받을 이유가 없다. 그런데도 어쩐지 청년의 동작이나 태도 같은 것이 핸드의 감각을 자극했다.
“음…… 놈들이 당신들을 못 찾고 주변 건물들을 뒤지기 시작하려면 5분은 걸릴 거야. 검은 전갈단에는 보스 말고는 두뇌를 굴릴 줄 아는 녀석이 거의 없거든. 그래도 대화할 시간은 짧겠네.”
청년은 밧줄을 회수하고 창을 닫더니 그렇게 말했다.
핸드는 ‘간파’를 사용해 그의 태도를 관찰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스킬로 의도를 파악하는 것이 불가능했다. 뭐라 형언하기 어려운 붕 뜬 감각만 느껴졌다.
그때 의심에 가득 찬 시선으로 청년을 노려보던 뮬란 단장이 그를 추궁하기 시작했다.
“자네…… 갑옷에 검은 전갈이 그려져 있군. 검은 전갈단 소속인가?”
“일단은.”
청년은 소속을 답하면서도, 전혀 적대적인 의사를 보이지 않았다. 그 때문인지 뮬란 단장도 싸울 생각은 없는 듯했지만, 경계심을 숨기지 않았다.
“그럼 왜 우릴 도왔나?”
“그건…….”
청년이 설명을 하려는 순간, 갑자기 쿵쿵대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건물의 문을 두들기는 모양이다.
“이런 젠장. 잠깐은 괜찮을 줄 알았더니 벌써 난리를 피우기 시작했군. 얼른 옥상으로…….”
청년은 급히 후드를 덮어쓴 다음, 얼굴에 복면을 둘렀다. 그리고 급히 빠져나갔다.
2층은 상당히 좁고 어두웠는데 바닥에 쌓인 먼지와 군데군데 있는 거미줄 덕분에 상당히 긴 시간 쓰지 않았음을 알 수 있었다.
“잠깐, 우린 아직 자네를 믿을 수가…….”
“그런 말을 할 상황이 아니래도!”
청년은 신경질적으로 내뱉고는, 복도 반대편의 목조 계단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그때, 뭔가 콰직! 하고 부서지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목조 계단에서 쿵쾅대며 올라오는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늦었군. 젠장.”
목조 계단에서 쿵쾅대며 몇 명의 사람들이 줄을 지어 올라오기 시작했다. 핸드가 지금까지 본, 검은 전갈단의 똘마니들과는 복장부터 달랐다.
몸에 케이프를 둘렀고, 청년처럼 몸에 검은 전갈이 그려진 가죽갑옷을 입은 데다 손에 석궁까지 들고 있었다. 전원 복면을 둘러서 누가 누군지 구별이 안 갔다.
“엇! 너는 로크! 네가 왜 그놈들이랑 같이 있나? 설마 네놈, 배신한 거냐!”
“어, 그래.”
그러나 조직을 배신하고, 그게 들켰는데도 청년은 조금도 겁먹은 기색이 아니었다.
“이런 미친 녀석! 전부터 네놈의 경박한 태도가 마음에 안 들었어. 여기서 처치해 주마!”
그는 잠시 망설이더니 한숨을 내쉬었다.
“휴…… 할 수 없군. 야, 쳐 버려.”
그 순간, 적들의 맨 뒤에 서 있던 인물이 움직였다. 놀랍게도 경쇠뇌를 들더니 앞에 있는 사람의 뒤통수에 대고 쇠뇌를 쏴 버린 것이다.
푸슉!
당연하게도 즉사!
화살에 머리를 관통당한 인물은 그대로 쓰러져 버렸다.
“억, 뭐야!”
갑작스러운 배신에 남은 세 명은 당황하기 시작했다.
순간, 뮬란 단장이 지팡이를 한 바퀴 돌렸다가 뽑아내며 섬광처럼 공격을 퍼부었다.
지팡이 안에 칼날을 숨겨 놓은 스틱 소드(Stick Sword)였는지, 소리 없이 빠져나온 칼날이 번뜩였다.
검광은 정면에서 석궁을 겨누고 있던 인물의 팔을 그어 버리고, 마치 뱀처럼 매끄럽게 팔을 타고 올라가 목을 반쯤 잘라 놓았다.
경동맥이 끊어지며 피가 푸와악 하고 뿜어져 나와 벽을 붉게 불들이고, 놈은 목을 붙잡은 채 허우적거렸다.
핸드는 그 순간 판단을 마치고 뛰어올랐다.
“맨 뒤에, 비켯!”
소리친 순간, 눈치 빠르게도 맨 뒤에서 석궁을 쏘았던 인물이 계단 아래로 빠져나갔다.
핸드는 벽을 박차고, 뮬란 단장을 피해 목이 반쯤 베어진 인물의 이마를 전력을 다해 걷어찼다.
퍼억!
목이 베어지고 가슴에 킥을 얻어맞은 놈은, 저항할 여지가 없이 뒤로 넘어가 버렸고 다른 녀석들까지 휘말리게 해서 계단으로 쓰러졌다.
우당탕탕!
계단 뒤로 피했던 복면인은 쓰러진 두 명이 신음하는 사이 숏소드를 꺼내 연달아 목을 찔러 버렸다.
『합동 전투로 인하여 얻어지는 경험치에 페널티를 받습니다. 종합 90의 경험치를 얻었습니다.』
“휘익! 베스트 콤비 플레이!”
검은 머리카락의 청년, 로크가 휘파람을 불었다. 그러자 복면인이 투덜거렸다.
“경박한 놈…… 이럴 줄 알았지. 이렇게 제거 못했으면 어쩔 뻔했냐? 게다가 이건 시체만 봐도 배신자가 있소∼ 하고 광고하는 꼴인데.”
“하하하. 그러니까 너한테 따라오라고 했지. 어쨌든 전부터 신경 긁고 있었잖아. 너랑 이 중 한 놈의 무기를 바꾸고 시체를 숨겨 두면 끝이지 뭐.”
“……역시 잔머리 하나는 잘 돌아가는 놈이군.”
그러더니 복면인은 투덜거리며 쓰러진 자들 중 한 명과 무기를 바꿔 들기 시작했다.
“잠깐, 내가 벤 시체로 바꿔 줬으면 하는데…… 안 되겠나? 그 시체가 남아 있으면 곤란하네.”
“왜 그러는 거요?”
복면인이 그렇게 묻자, 로크가 고개를 저었다.
“말하는 대로 해 줘라.”
그러자 복면인이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후우. 뭐, 그렇게 하지. 실랑이할 시간은 없으니까. 시체는 내가 알아서 할 테니, 올라가 봐. 그다음에 거짓 보고를 할 거니까.”
복면인은 뮬란 단장이 처치한 자와 무기를 바꾸고, 그 시체를 짊어진 뒤 잽싸게 사라졌다.
너무 전개가 빨라서 어안이 벙벙했던 핸드는, 그 대화를 듣고 상황을 대충 알 수 있었다.
‘이놈들, 검은 전갈단의 배신자들이군. 내부에서 뭔가를 하고 있었던 거야. 역시 퀘스트에 타개 방법이 숨겨져 있지 않을 리 없어.’
“자네, 배신자인 건 알겠지만 왜 우릴 돕는 거지?”
뮬란 단장은 불안한 표정으로 스틱 소드를 닦아 낸 뒤, 로크를 추궁하기 시작했다.
“그건 자리를 벗어나서 이야기합시다. 듣기 싫을 정도로 자세히 말해 줄 거요.”
그러더니 로크는 후드를 점검하고, 옥상으로 올라갔다. 하는 수 없이 두 사람은 그를 따라갔다.
옥상은 상당히 좁았다. 하지만 건물들의 높이가 대체로 비슷해서, 잘하면 건너갈 수 있을 것 같았다.
“조용히 건너뛸 수 있는 사람?”
뮬란 단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할 수 있네.”
“……난 무린데.”
핸드는 스테이터스 저하 상태인데다가, 납 벨트를 갖고 있어서 중압 1단계였다.
멍청한 짓이긴 하지만 버리고 가긴 너무 아까웠다.
“씁, 어쩔 수 없지.”
로크는 거의 소리를 남기지 않고 옥상을 건너뛰었다. 그리고 판자 같은 것들을 모아 가교를 만들었다.
중압 1단계 수준으로 무거운 핸드도, 약간 삐걱대는 소리만 남기고 넘어갈 수 있었다. 균형 잡기 스킬이 있기 때문이다.
‘정말 배워 두길 잘했다!’
균형 잡기 스킬이 없었다면, 삐끗한 순간 곤두박질. 당연히 들켜서 축 사망이었으리라.
로크는 두 사람이 모두 넘어오자, 소리 없이 가교를 해체하고 제자리에 돌려놓았다.
그런 식으로 건물들을 건너뛰어 포위망을 돌파한 뒤에 밧줄을 타고 내려와 골목으로 숨어들었다. 그리고 미리 잡아 놓은 걸로 보이는 여관방을 골라, 함께 들어섰다.
여관 주인은 수상한 복장을 한 세 사람을 보고도, 아무 말이 없었다. 보나마나 포섭된 인물일 것이다.
“이제야 좀 이야기를 할 수 있겠군. 놈들이 발광을 하겠지만 여긴 원래 있던 터전이 아니라 사방에 눈을 깔아 놓는 짓은 불가능하거든.”
그 말을 듣자, 뮬란 단장이 이제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며 물어보았다.
“음…… 자네, 도둑 길드원이군.”
“……어째서 그렇게 생각하는 거요?”
로크는 갑자기 말투마저 바꾸며 그렇게 물어보았다.
“눈을 깔아 놓는다는 말은 도적들이 좋아하는 말이라네. 가끔 도적들이 무의식중에 말하곤 하지.”
“아∼ 그렇군. 쳇! 도적 생활이 길어서 말버릇이 옮겨 버렸어. 이러면 안 되는데.”
로크는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박박 긁었다.
핸드는 뮬란 단장에게 완전히 주도권을 넘겨 줄 생각은 없었기에 입을 열었다.
“그럼 도적 길드가 검은 전갈단에 집어넣은 첩자인 모양이군. 그 외에도 꽤 많이 있고. 도적 길드가 기존 룰을 지키지 않는 놈들을 없애려는 모양이지?”
그러나 로크는 주눅 드는 기색이 없었다.
“뭐, 확실히 도적 길드가 스파이로 끼워 넣기는 했지. 그건 별로 중요한 사실이 아니야. 나는 뮬란 단장 당신에게 도적 길드의 의뢰가 있다는 걸 말해 주려고 당신들을 구해 낸 것뿐이야.”
“……흠, 어떤 의뢰를 할 생각인가?”
“길드는 차력사단의 힘을 빌리고 싶다던데.”
차력사단의 입장을 알고 있는 핸드는, 단장이 의뢰를 거절할 거라는 생각을 했다. 차력사단에 들어와 있는 사람들의 태반은 안 좋은 과거 때문에 숨어 살기로 한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특히 뮬란 단장은 상황이 나쁘다. 그가 검술을 쓴 뒤 시체를 처리해 달라고 한 것은, 슈탈바르트에서 배운 검의 흔적이 드러날 것을 걱정했기 때문이다.
“그건 조금 어려운 일일세…… 아무리 길드가 친분을 내세운다고 해도.”
“검은 전갈단은 이 도시 전체를 지배할 생각이라고. 녀석들의 출신지를 아나? 자유도시 드멜이야. 말은 자유도시지만, 범죄자들의 천국이지.”
뮬란 단장의 표정이 굳어졌다.
핸드는 베타테스터들에게서 흘러나온 지식들 중 하나를 생각해 낼 수 있었다.
자유도시 드멜.
베타테스들은 이 장소를 암흑도시라고 불렀다. 혹은 범죄자들의 소굴이라고 하는 사람도 있었다.
도적 길드의 본부가 존재하며, 그 외에도 질 나쁜 용병단이 주 거점으로 사용한다. 대륙에서 가장 많은 범죄 조직들이 난립하는 곳이기도 하다.
도적 계열 직업을 원하거나, 암흑가를 지배하는 악의 길을 선호하는 플레이어들은 이곳에서 시작하라는 말이 있었다. 워낙 유명해서 핸드도 잘 안다.
오직 힘에 의한 균형만이 존재하며, 약한 모습을 보이면 바로 잡아먹히는 장소. 그래서 드멜 태생의 조직들은 길들일 수 없는 맹수나 마찬가지다.
“놈들은 드멜에서도 아주 거칠었어. 어지간한 조직들은 손대지 않는 영역도 거침없이 손을 댔지. 경석궁으로 무장한 추살조를 대놓고 운용한 적도 있다고. 그리고 지금도 거느리고 있는 상태야.”
“그럼 타협은 불가능하겠군…….”
뮬란 단장은 두통마저 느끼는 것 같았다.
로크는 신경 쓰지 않고 말을 이어 갔다.
“나는 원래 드멜의 도적 길드에 있었는데, 놈들이 무력을 확장하는 틈을 타서 스파이로 들어갔지. 그래서 경력도 길고 내부 사정을 잘 알아. 검은 전갈단의 보스, 검은 전갈은 제대로 미친놈이야. 도시를 손에 넣으면 그때부터 쿠도르프는 제2의 드멜이 되겠지. 아란 남작이 막을 수 있을까?”
그야말로 협박과 다를 바 없는 말이었다. 뮬란 단장의 표정이 더욱 어두워졌다.
“여하튼 나는 도적 길드의 의뢰를 전했다고. 받아들일 생각이 있으면 지부장과 직접 이야기하는 게 좋겠지. 당신 지부장과 아는 사이라며?”
‘나는 어차피 싸울 생각이지만…… 이 느낌은 뭐지?’
묘한 간질거림이었다. 왠지 상대에게 간파 스킬이 잘 안 먹힌다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뭐지? 이놈이 싸우는 장면은 보지 못했지만, 왠지 기분이 이상한데. 고수인 건 절대로 아니야. 오히려 무술이라면 풋내기 수준이라고. 아까 봤던 복면인이 훨씬 움직임이 간결하고 좋았어.’
그런데 로크라는 녀석은, 핸드도 하기 어려워하는 무음 착지 같은 것을 수월하게 해냈다.
로크의 동작만 봐서는 나오기 어려운 기술이다.
그때, 로크가 핸드를 돌아보았다.
“이봐, 수리곰. 당신은 어쩔 거지?”
“도적 길드가 어쨌건 난 어차피 싸울 생각이야. 놈들의 표적은 나거든.”
그러자 로크는 혀를 내둘렀다.
“……신기한 인간이군. 놈들의 세력은 장난이 아니야. 상당한 힘을 잃고 쫓겨났지만 100명을 넘어. 도적 길드의 공세 때문에 놈들이 정신 못 차리는 동안 도망치면 되잖아. 죽을 자리를 찾는 것도 아니고.”
“전략적 후퇴는 있을 수 있지만, 패주할 생각은 없어. 그런 충고는 왜 해 주는 거지? 당신은 도적 길드 소속 아닌가? 내가 한 명이라도 더 죽이면 유리할 텐데.”
“길드에 그 정도의 의리는 없어.”
순간 핸드와 로크의 생각이 완벽히 일치했다.
‘이상한 놈!’
이해할 수 없는 놈을 만났다는 것이었다.
* * *
치료를 마친 손길이 상처 부위를 짝 하고 때렸다.
핸드는 눈앞에 불이 번쩍 하는 느낌을 받고, 상처를 붙잡은 채 웅크렸다. 가상현실인 이상 너무 큰 고통은 자연스럽게 신호로 변환되지만, 신호를 받은 육체는 고통을 당한 것과 마찬가지의 반응을 보였다.
“아오오오오오!”
상처를 붙잡고 절규하는 핸드를 본 지스는 피식거리며 남은 붕대를 구급상자에 집어넣었다.
“늑대 울음소리 같군. 엄살 부리지 마. 그 상태로도 싸웠다며? 이 정도로 괴로울 리가 없지.”
핸드는 울컥 치미는 것을 느꼈다.
‘그건 참은 거지!’
그렇게 소리치고 싶었지만, 그러면 이것도 참으라는 대응이 돌아올 것이다.
옆에서 보고 있던 카담이 혀를 찼다.
“쯧. 아직 재주넘기는 못하지만 어쩔 수 없군. 내 기준으로 보면 아직 날렵함이 모자라긴 하지만 나이프 파이팅(Knight Fighting)을 가르쳐 주마.”
“네?”
뒹굴던 핸드가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퍼뜩 들었다.
“넌 격투장에서 크로스레인지(Cross-Range)의 대결 경험을 쌓았다. 뭐 별 볼일 없는 놈들을 상대로 싸워 봐야 그다지 도움이 안 되긴 하지만. 인(In)과 아웃(Out)의 감을 잡는 게 목적이니까.”
치고 들어간 뒤, 빠져나오는 요령.
최고 근접 상태나 적정 거리에서의 대결 감각 등.
핸드가 지금까지 갈고닦은 것이다.
“원래는 격투장에서 나온 다음에 가르치려고 했지만…… 적응이 이상하게 빨라서 말이야. 자칫하다 무예승이 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면 난감하지. 머리 빡빡 밀고 수도원에 처박혀서 수업을 받고 싶진 않겠지?”
‘강한 직업이긴 하지만 그럴 순 없지.’
당연하다. 성격적으로 맞지 않기 때문이다.
무예승 계열 직업은 강력한 비법들이 많은 대신, 규율이 아주 엄격한 직업 계통이라고 말이 많았다.
베타테스터 중에서 무술을 익힌 사람들이 그 위력에 반해 무예승의 길을 가려다가 그 규율에 질려 많이 탈락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이야기가 딴 데로 샜군. 본론으로 돌아가서…… 이번에는 조금 상대가 나빠. 일단 뮬란 단장은 싸우기로 결심한 것 같지만, 우리들은 대부분 나서도 좋은 처지가 아니니까. 뮬란 단장은 특히…….”
차력사단에는 이런 시골에서 차력을 하고 있다고는 생각되지 않는 강자가 몇 명이나 있다.
지금까지 핸드에게 직접적인 가르침을 준 것은 지스, 토룬, 카담의 세 명.
그 외에 고수를 찾자면 뮬란 단장.
마지막으로 근처의 용병쯤은 순식간에 쓰러뜨릴 수 있는 강자가 두 명이나 더 있다.
일단 토룬과 카담은 나설 수 없다.
그는 과거 어떤 무가의 귀족 후계자의 대련 상대였다. 물론 대련이라고 해도 사람을 때리는 감각을 익히게 하려고 뽑은 살아 있는 샌드백이다.
아주 잔인한 성격의 귀족 후계자는 토룬을 병신으로 만들 기세로 두들겨 팼다.
토룬은 거구와 엄청난 힘을 갖고 있는 데 비해, 자신의 능력에 별 자각이 없었다. 그는 분노가 폭발해 엄청난 완력으로 후계자의 목을 부러뜨려 죽이고 말았다.
그 때문에 쫓기게 되었다가, 뮬란 단장의 도움을 받아 이름을 바꾸고 숨어 살고 있었다. 다행히 그 귀족 일가는 다른 영지와의 전쟁으로 몰락했지만, 토룬이 귀족 살해범으로 수배되어 있는 것은 변하지 않는다.
카담 역시 숨어 살아야 할 처지다.
그는 과거 도둑 길드 소속이었는데 지역별 항쟁 중 길드장을 죽여 버렸다.
도둑에게 명가가 있다면 웃기겠지만, 길드에 커다란 이권을 가진 일족이 세습을 하는 건 상인과 마찬가지다. 본래는 생포해야 하는 임무인데 유력 일족을 죽여 버려서 제거의 위협에 시달리게 되었다.
카담은 길드 생활에 진저리를 치며 그곳을 벗어나 손을 씻었지만, 여전히 위협을 당하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그 일족과 적대하던 다른 자들이 카담의 실력을 아깝게 여겼다.
길드는 뮬란 단장과의 거래를 하여 카담의 신변을 차력사단에 맡기고, 몇 년 동안은 조용히 시키기로 했다.
그래서 표면적으로 나설 수 없는 몸이다.
지스는 노예상인에게 잡혀 있었던 것을 뮬란 단장이 구해 낸 경우이다. 이미 낙인이 찍힌 상태라 탈주노예로 취급되기 쉽지만, 그것은 가리면 그만.
뮬란 단장의 은혜 때문에 차력사단에 머무르고 있는 것이며, 가장 자유로운 사람이기도 하다.
다른 차력사들도 웬만큼 전투력은 있지만 전투 경험이 있는 사람들은 별로 없었다.
남은 두 명은 쌍둥이 형제(듀란 형제라 불림)로 각각 채찍과 사슬낫의 달인이다. 핸드도 자세한 사연은 듣지 못했다. 뮬란 단장도 터치하지 않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도둑 길드와 협력해 검은 전갈단과 싸운다는 말을 듣자, 묵묵히 싸움을 준비하고 있었다.
“일단 거칠게 움직이지 않는 수준에서 가르쳐 주지. 약부터 먹고 나서.”
핸드는 고개를 끄덕이고, 로엠 노인에게서 받아 온 해독약을 먹은 뒤 잠깐의 휴식을 취했다.
그가 깨어난 것은 해가 거의 기울 무렵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