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아래로 스크롤 하세요.
17화
그리고 주의해야 할 상대를 집요하게 관찰했다.
간파와 안목 스킬의 최대 이용.
시각 스테이터스가 18을 찍으면서 핸드의 눈은 아주 매서워졌다. 관중석에서도 스타일과 주요 기술은 간단하게 확인할 수 있었다.
그가 황동 리그에서 주의해야 할 적들은 여섯 명.
백상어와 정반대의 스타일, 마치 무에타이처럼 발차기 기술을 주로 사용하는 귀상어.
흉랑의 업그레이드 판 같은, 공교롭게도 핸드의 수리곰이라는 닉네임과 같은 계열인 부엉이곰.
상당히 안정된 동작, 어딘가 가라데나 태권도의 동작 같은 냄새를 풍기는 닉네임 살무사.
마른 체구지만 손가락과 손끝 힘만으로 단련된 투사들의 피부를 찢어 버릴 수 있다는 투사 그리핀.
몸통박치기와 레슬링을 장기로 하지만 박투 대결에서도 뛰어나, 훌륭한 밸런스가 높이 평가되는 검치호.
철혈 리그까지 불과 2승만을 앞둔, 마치 유령같이 조용하면서도 부드러운 동작으로 모든 공격을 받아넘기는 황동 리그 최강의 투사 레이스(Wraith)까지.
중급 간파의 위력이 최대한 발휘되었다.
간파가 2단계, 안목 스킬이 4단계나 증가하여, 관람비로 상당한 돈을 투자한 핸드의 속 쓰림을 달래 주었다.
오른 것은 두 스킬만이 아니었다.
『액티브 스킬, 격투기가 견습을 벗어나 초급에 진입했습니다. 적과 교착 상태(Cross-Range)에서의 타격 및 방어 기술이 향상되었습니다.
스킬이 초급에 진입한 영향으로, 당신의 완력과 민첩이 1 증가했습니다.』
격투기 - 초급 11/20(액티브 스킬)
당신은 근접 상태, 비무장 상태에서의 싸움 기술을 더욱 연마했습니다.
수십 번에 걸친 싸움 경험이 당신을 이곳으로 끌어올렸습니다. 그로 인해, 카테고리가 작거나 큰 상대에 대한 페널티가 조금 줄어들었습니다.
그러나 인간형이 아닌 적, 혹은 급소가 없는 적에 대한 타격에는 여전히 페널티가 있습니다.
조건 : 철권, 완력과 민첩 각각 50 이상, 투지 개방
상세 : 스킬 레벨당 공격 속도 +1%, 비무장 타격 시 피해 +1.5%, 대인(對人) 기술 성공률 +0.2%, 무기술 계열 중 일부를 맨손으로도 재현 가능
훈련과 더불어 안목을 넓히면서, 딱히 실전이 없었음에도 격투기 스킬이 상승되었다.
마지막 성과는 시각 스테이터스 5 증가!
황동 리그 투사들의 빠른 싸움을 보면서 눈이 동작들을 따라가게 된 것이다.
그렇게 상대할 투사들의 정보를 얻은 뒤 모의전을 실시. 토룬과 지스 두 사람과 겨루면서 상대의 약점을 찌르기 위한 다양한 연습을 했다.
위협이 되는 여섯 명의 투사와는 아직 싸우지 않았다.
핸드는 두어 번 정도 황동 리그의 다른 투사들과 싸움을 벌였고, 압승을 거두었다.
그의 스타일은 웬만한 공격은 몸으로 때우고, 오히려 밀고 들어가 모든 기술을 읽어 낸 다음 격파하는 것!
도발과 반격 후 이어지는 마무리 강격도 깔끔하다.
수리곰의 경기는 고전하는 것처럼 보이다가도 어느새 상대를 능가하여 매끄러운 승리를 거두기 때문에 상당한 인기몰이를 하고 있었다. 그도 뮬란 단장 경유로 자신의 경기에 돈을 걸어, 생각보다 많은 돈을 벌었다.
‘그래도 돈보다는 투지가 오른 것이 가장 큰 성과!’
경기당 평균 2∼3의 투지가 올랐는데, 약한 자보다는 강한 자와 싸웠을 때 더 많이 증가했다.
게다가 황동 리그의 경기는 가장 약한 투사도 흉랑 수준의 경험치를 주었다.
그렇게 승승장구하고 있는데도…… 핸드는 이해할 수 없는 불안감을 느끼고 있었다.
‘이렇게 잘 나갈 때일수록 조심해야 하기는 해. 그런데, 뭔가∼ 불안하단 말이야. 대체 뭣 때문에 불안감을 느끼는 걸까? 그걸 알 수가 없어. 황동 리그의 분위기가 묘하기는 한데. 이 정체불명의 기류는 뭐지?’
황동 리그의 경기 중 몇 가지를 보면서 느낀 위화감. 그리고 이상한 시선들…….
정체를 알 수 없는 감각이라 초조함마저 느껴졌다.
‘제길! 하여튼 찝찝해.’
핸드가 그 묘한 위화감의 정체를 알게 된 것은, 경기 전날에 만난 수상한 인물 때문이었다.
철혈 리그의 경기를 보기 위해, 핸드가 지하격투장의 입장료를 내고 들어섰을 때였다.
한참 경기에 집중하고 있는데 누가 말을 걸었다.
“안녕하쇼.”
“……누구요?”
간파 스킬을 올리기 위해 집중하고 있는데 말을 걸었으니, 당연히 말이 곱게 나오질 않았다.
그러나 상대는 오히려 기분 나쁜 미소를 지었다.
“당신, 수리곰이지?”
핸드는 자기도 모르게 상대를 돌아보았다.
왜소한 체구에 쥐 같은 수염을 기른, 안대를 하고 있어서인지 한층 야비한 인상을 주는 남자였다.
“…….”
핸드는 자기도 모르게 인상을 찌푸렸다.
아무리 생각해도 좋은 용건으로 찾아온 것 같지 않았다. 경기를 보면서 느꼈던 불안감이 커지는 기분이었다.
야비한 인상의 남자는 낮게 웃었다.
“흐흐흐. 그 침묵은 대답이나 마찬가지지. 어때, 훌륭한 경기 아닌가? 누가 이길 거라고 생각하나?”
대답이 없는데도, 남자는 계속 말을 걸었다. 그러더니 느긋하게 등을 펴고 격투장을 바라보았다.
한참 경기가 벌어지고 있었다.
철혈 리그의 강자 두 사람의 싸움. 비슷한 스타일이기에 싸움은 매우 거칠었다.
그러나 지금까지 올린 안목 스킬 덕분에, 핸드는 철혈 투사들의 실력을 간파하고 있었다.
‘방어자 측이 이기겠지. 도전자의 기량은 약간 모자라. 게다가 수 싸움에서 지고 있어. 실력 자체는 비슷하지만, 방어자가 훨씬 교활하고 심리적으로 차분하다.’
그가 내린 결론은 방어자의 승리였다.
“자네는 실력 있는 파이터니까 알고 있겠지. 방어자 측이 유리해 보이지? 하지만 도박의 재미는 거기에 있는 게 아닌가? 난 도전자에게 걸었다네.”
핸드는 자신의 경기가 아니면 돈을 걸지 않기로 이미 결정하고 있었다. 아무리 안목에 자신이 있어도, 도박에 빠져들면 어떤 꼴이 나는지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럼 돈을 잃겠군.’
방어자가 유리하기 때문에, 핸드는 그렇게 생각했다.
“흠, 방어자가 이길 거라고 생각하나 보군. 그게 그렇지가 않다네. 경기의 결과는 항상 정해져 있지!”
순간 격투장에서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오기로 달려드는 도전자!
당연히 전신에 허점이 노출되었다.
하지만 방어자가 드러난 허점을 향해 주먹을 날린 순간, 도전자는 기다렸던 것처럼 몸을 수그리더니 파고들어 방어자에게 태클을 가했다.
그러고는 그대로 쓰러뜨리더니 마운트로 올라타 펀치를 날렸고, 방어자는 일어나지 못했다.
「여, 역전극―! 도전자, 흑표범이 최후까지 투지를 잃지 않고 퍼부은 공세가 기적적인 승리를 가져왔습니다! 아― 투사 골렘이 무너지는 순간입니다. 마지막 순간의 방심이 패배로 연결되다니, 이게 무슨 일입니까?」
핸드는 자기도 모르게 벌떡 일어났다.
‘일부러…… 일부러 당했다!’
방어자, 투사 골렘이 방심한 틈을 타 흑표범이 역전을 한 것처럼 보이는 경기. 그러나 중급에 도달한 간파는 그 타이밍이 사전에 약속된 것임을 꿰뚫어 보았다.
핸드는 자신도 모르게 옆자리의 남자를 노려보았다.
“낄낄낄. 이런…… 자네, 돈을 잃었나? 하지만 겉과 속은 원래 다른 거라네. 승자보다 패자가 훨씬 많이 얻었으니까 말이야. 약간…… 아주 약간 자존심을 접는 것만으로 엄청난 돈이 굴러 들어오지. 몇 푼 안 되는 파이트머니나, 불안한 승패의 결과와는 달리 말이야. 어떤가? 흥미가 생기지 않나?”
남자는 낄낄거리며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승부 조작! 이런 더러운 놈들!’
돈은 승률이 높은 쪽에 많이 걸린다.
그 때문에 승부 조작을 하려는 놈들이 생겨난다.
몇 번 정도 승률과 배당이 낮은 쪽을 이기게 함으로써 차익을 얻는 것이다.
“왜, 거부감이 드나? 처음에는 1할이야. 얻어지는 차익의 1할이면 엄청난 돈이지. 이 경기장에서는 생각보다 엄청난 돈이 움직인다네. 생각할 시간이 필요한가?”
음침한 사내의 제안(E급 퀘스트)
『당신은 날카로운 눈썰미로 지하 격투장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눈치챘습니다. 그와 함께 이름 모를 사내가 투사 수리곰에게 제안을 걸어왔습니다.
요구의 내용은 다름이 아니라 승부 조작!
그가 원하는 것은 충격적인 수리곰의 패배이며, 승승장구하는 투사의 패배로 인한 차익입니다.
그 대가로 음침한 사내가 약속한 것은 거금입니다.
투사의 긍지인가? 검은 돈인가?
매우 신중하게 검토해야 할 제안임은 분명합니다.』
생각할 시간은 필요 없었다.
“꺼져라. 난 투사 경력도 짧은 놈이긴 하지만, 더러운 돈 놀음에는 안 껴!”
핸드는 짧게, 남자의 쥐 면상을 후려쳤다.
빠악!
“으억!”
강렬한 소리와 함께, 사내는 안면을 쥐고 엎어졌다.
진심으로 때린 것은 아니었지만, 눈에서 불이 번쩍하고 코에서 피를 줄줄 쏟아 낼 정도의 펀치였다.
“이, 이 자식…… 우리가 누군 줄 알고…….”
나머지 말은 듣지도 않고 일어났다.
‘씁. 귀가 더러워졌군.’
이건 도덕이나 윤리의 문제가 아니다. 살아가는 방식의 문제였다.
거금을 벌 수 있다면, 현실도 아닌 곳에서 손을 더럽히는 것쯤 별게 아닐지도 모른다.
하지만 핸드는 이 제의를 수락하는 놈들이 격투장에 들어갈 자격이 없다는 것을 확신했다. 싸움은 단순히 단련된 육체와 기술의 경쟁이 아니기 때문이다.
룽 노사와 차력사들에게서 받은 단련은 인내와 극기를 필요로 했다. 그렇게 기른 능력을 싸우면서 확인한다.
지금까지 쌓은 노력, 의지의 겨루기!
거기에 지는 것을 당연시하는 사욕이 끼면, 그건 싸움이 아니라 쇼와 다를 바가 없다.
이름 모를 조직의 음모(D급 퀘스트)
『당신은 투사의 긍지를 선택했습니다. 음침한 사내의 제안을 거절하며, 당신은 그에게 모욕을 주었습니다.
완전한 결별 선언! 이제 타협은 없습니다.
사내는 원한을 품고 자신이 속한 조직을 움직이려 할 것입니다. 충분한 경계가 필요합니다.
- 강제적 연계 퀘스트』
처음으로 받는 D급 퀘스트!
그만큼 위험한 선택을 했다는 말이다.
그러나 핸드는 어려운 길이 그만큼 커다란 보답을 준다는 사실을 믿었다.
‘조심해야겠군.’
쥐 면상의 남자는 ‘우리’라고 했다.
게다가 거금이 움직인다는 것을 생각하면 뒷세계의 조직이 관련될지도 모른다.
불량배들의 모임인지, 아니면 전문 폭력집단인지는 알 수 없지만 몸을 조심할 필요가 있었다.
‘흠, 놈들을 조사해야겠어. 어차피 퀘스트도 해결해야 하니까. 뭐, 약간은 여유가 있겠지?’
그러나 놈들은 핸드의 생각보다 훨씬 손이 빨랐다.
* * *
다음 날 아침, 핸드는 경기를 하기 전부터 몸을 풀기 위해 격투장의 뒷문으로 향했다.
그런데 골목길을 가던 도중 묘한 느낌을 받았다.
인적이 이상할 정도로 없었던 것이다.
사람이 거의 지나가지 않는 골목이긴 하지만, 부스럭거리는 약간의 기척마저 느껴지지 않았다.
‘조심해서 나쁠 건 없지.’
핸드는 경계심을 가진 채, 조심스럽게 골목을 돌았다.
휙!
순간, 골목을 돌자마자 반짝이는 것이 날아들었다.
핸드는 급히 몸을 젖혀 그것을 피해 냈다.
“……!”
뒤집어쓴 케이프의 가슴 쪽 옷깃이 찢어져 있었다. 경계를 하고 있지 않았다면 피하지 못했을 것이다.
“퉤! 제기랄. 눈치 한번 더럽게 빠르군.”
부스럭거리며, 사방에서 발자국 소리가 들렸다.
공격에 실패한 습격자는 몇 미터 정도 물러나 나이프를 손아귀에서 빙글빙글 돌리며 핸드를 위협했다.
‘몇 명이지?’
전방을 경계한 채 좌측, 우측을 훔쳐보자 낮은 자세로 나이프를 든 놈들이 접근하고 있었다.
‘4명…… 아니, 더 있나?’
전방에 한 명, 좌우에 한 명. 그리고 눈으로 확인하지는 못했지만 후방에 1명이다.
골목길에는 더 숨어 있을 가능성이 높다. 길을 막을 인원을 준비하지 않았을 리 없다.
‘맨손으로 나이프를 든 놈들과 싸운다니…… 이건 처음인데. 잘할 수 있을까?’
게다가 전원 나름 칼을 쓸 줄 아는 것 같았다.
자세는 그다지 세련되지 않았지만 실전에서 쓰는 법을 익힌 것 같은 노련미가 풍겼다.
단검 숙달 스킬을 가진 핸드는, 안목으로 칼잡이들의 실력을 대략적으로 추측할 수 있었다.
“쳐!”
그때 좌측을 막은 남자가 달려들며 외쳤다.
전방에서 무서운 속도로 달려들며 나이프를 찔렀다.
핸드는 무의식중에 우측으로 피하려다, 등 뒤의 그림자가 다가오는 것을 발견하고 강하게 몸을 웅크렸다.
싸악!
머리 위로 등 뒤에서 휘두른 나이프가 지나갔다.
일부러 편향된 방향에서 공격함으로써, 피할 곳을 한정시키는 교활한 협공이었던 것이다.
‘역시 유도였군. 간파 스킬이 중급이라 다행이다! 아니었으면 제대로 당했겠어.’
핸드는 강하게 땅을 차면서 몸을 뒤로 젖혀 배후의 습격자의 턱을 머리로 들이받았다.
앞에서 찌른 나이프는 핸드가 뒤로 튕기며 물러나는 바람에 케이프에 살짝 닿았을 뿐이었다.
빠각!
“꾸엑!”
누런 강냉이가 튀어 오르며, 배후의 습격자가 휘청거리다 뒤로 넘어갔다.
전방의 남자는 공격이 빗나가자마자 역수로 쥐고 휘청대는 핸드에게 나이프를 내리찍었다.
‘끙!’
피하는 대신 앞으로 굴렀다.
간격 안쪽으로 들어가자 팔뚝이 핸드의 어깨를 내리쳤고, 단검은 후드에 걸렸다.
“타아아아압!”
기합을 넣으며, 핸드는 앞으로 밀어붙였다.
좌우측에서 단검을 들고 기회를 노리던 남자들이 자기도 모르게 주춤거리며 물러났다. 잘못했다가는 핸드와 바싹 붙은 동료를 찌를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덕분에 핸드는 포위망 돌파에 성공했다.
“넘어가랏!”
바싹 붙었던 남자를 팔로 강하게 밀어붙였다.
우당탕탕!
뒤로 주춤주춤 물러나던 남자는 어어 하다가 뒤로 넘어가 쓰러졌고, 핸드는 발로 쓰러진 남자의 면상을 뭉개고 지나갔다.
제대로 힘을 줘서 밟았기 때문에 코뼈가 부러지고 앞니가 줄줄이 나가는 감촉이 발을 통해 느껴졌다.
“오, 미안!”
사과를 남긴 핸드는 미친 듯이 달리기 시작했다.
그 동작이 너무 자연스러워서 남자들은 멍하니 보고 있었지만, 곧 동료의 외침에 정신을 차렸다.
“노, 놓치지 마라!”
“이런 병신들. 그 상황에서 놓치는 거냐!”
골목길에 숨어 있던 자들이 소리치며 뛰쳐나오기 시작했다. 설마 앞으로 치고 나갈 거라는 생각은 못했는지, 앞에는 한 명밖에 기다리고 있지 않았다.
“이놈, 거기 서랏!”
앞쪽 길에 숨어 있던 습격자의 동료는 저돌적인 핸드의 기세를 보고 자기도 모르게 소리쳤다.
‘멍청한 놈. 너 같으면 서겠냐?!’
핸드는 엉거주춤한 자세로 내민 단검을 발로 차서 날려 버린 뒤, 놈의 무릎을 디딤대로 밟고 올라가며 정확하게 안면 중앙에 무릎차기를 꽂아 넣었다.
뻐억!
안면이 우그러지고, 이빨이 부러지는 감촉.
‘클린 히트!’
핸드는 쾌재를 올렸다.
그는 넘어가는 기세를 죽이기 위해 낙법을 한 후, 전력으로 달려 나갔다.
지구력이 초급 10(20)레벨이라 기운차게 잘도 달렸다.
다행히 시장 한복판에서 벌어진 일은 아니었기에, 영화에서나 나올 법한 활극은 찍지 않아도 됐다.
‘아침부터 이게 뭐냐고. 근데 달리기 스킬은 없나?’
위기감보다는 그런 엉뚱한 생각이 들었다. 무기를 든 적들 사이에 포위당했는데 잘도 달아난 것이다. 머리로 생각했다기보다는, 몸이 저절로 움직였다.
격투장에 온 것은 최고의 선택이었을지도 모른다.
최고 근접 상태에서 치열한 싸움을 거듭하며, 전투의 판단력을 기를 수 있었던 것이다.
적어도 앞으로 실전에서 몸이 굳을 일은 없으리라.
‘결코 헛된 시간이 아니었어. 전투 감각을 몸으로 익힌 거야! 오, 경험치도 들어왔다!’
박치기로 턱을 박살 내서 쓰러뜨린 녀석, 밀어붙인 다음 안면을 밟아 버린 녀석, 마지막으로 진공무릎차기로 쓰러뜨린 놈까지!
모두 합쳐서 90점이나 들어왔다.
“하하하하하하!”
핸드는 웃으며 달려갔다. 이제 격투장은 코앞이다.
바로 그 방심이 문제가 되었다.
거의 격투장에 도달한 순간, 갑자기 골목에서 시커먼 그림자가 튀어나오더니 핸드를 덮쳤다.
그림자가 세워 든 단검이 불길한 빛을 발하며 핸드의 복부에 파고들었다.
푸욱!
“허억!”
질주하던 와중에도 몸을 비틀어 피해를 최소화한 핸드도 대단하지만, 찌른 놈도 장난이 아니었다.
만약 핸드가 배에 납 벨트를 두르고 있지 않았다면 들어간 단검을 비틀어 버렸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까지의 단련이 허사가 아니었는지, 찔린 그 순간. 고통을 방아쇠 삼아 핸드는 무의식적으로 상대의 턱을 후려갈길 수 있었다.
짧게 올려친, 그러나 베스트 숏 펀치!
“커억!”
부러진 이빨이 튀어 나가며, 시커먼 남자가 쓰러졌다.
핸드는 놈이 쓰러지자 상처를 눌렀다. 그는 창백하게 질린 채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지금 쓰러뜨린 놈은 왠지 질적으로 느낌이 달랐다. 감각이 날카로워진 핸드가 전혀 눈치채지 못했던 것이다.
땡그랑.
바닥에 떨어진 단검이 나뒹군다.
일반적인 나이프와 달리 펀칭 나이프(Punching Knife), 즉 찌르기 전용 무기 같았다.
“이런 젠장!”
핸드는 잔뜩 열 받아서 턱을 붙잡고 신음하는 놈을 기절할 때까지 뒈지게 밟아 버렸다.
그래서인지 출혈이 더 심해져, 바지까지 적셨다.
“제길. 마지막에…….”
뼈저린 교훈을 얻은 셈이었다.
마지막까지 방심하면 안 된다는 교훈!
상태창을 확인하자, 생명력이 거의 반 가까이 줄었다. 만약 납 벨트가 없었으면 한 방에 죽었을 것이다.
그래도 운이 좋았다.
‘제길…… 안으로, 들어가자.’
고통이면서도 고통이 아닌 묘한 감각이 느껴졌다.
4세대 가상현실은 피드백 개념보다 감각의 치환에 중점을 두고 있다. 그래서 틀림없이 가상의 몸은 고통을 느끼지만, 프로텍터로 보호되는 뇌는 그것을 신호만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아픈데 아프지 않은 묘한 감각이지만, 약한 수준의 고통은 느낀다(안 그랬으면 괴로워할 리 없다).
그때, 심각한 신호가 느껴졌다.
상처가 뜨겁게 타오르는 것 같은 감각.
그간 많이 당해서 익숙해진 감각이기도 했다. 찌릿 하고 손끝이 마비되며 헛돌았다.
『치사량의 독에 중독되었습니다! 독 내성 대항 체크 실시. 일반적인 독이 아닌 복합적인 독이므로 대항 페널티. 즉사 대항 성공. 피해의 경감에 성공.
완력과 민첩, 체력이 15 저하됐습니다. 해독하지 않으면 이 상태는 지속됩니다.』
‘젠장. 경기가 몇 시간 뒤인데……! 해독제, 해독제!’
핸드는 쓰러진 놈의 품을 뒤졌다. 하지만 놈의 소지품에는 해독약이 없었다.
블로우건, 녹색의 끈적거리는 약품이 든 약병, 바닥에 떨어진 펀칭 나이프, 금화가 열 닢쯤 든 주머니(당연히 챙겼다), 약간의 붕대, 나무로 만들어진 작은 패(牌)…….
약병의 내용물을 아주 약간 찍어서 혀끝으로 핥아 보자 독임을 알 수가 있었다.
‘이 새끼, 해독제도 안 갖고 다니는 거냐!?’
핸드는 여기저기 부러지고 터진 채 기절한 놈을 한 번 더 밟아 주려고 했지만, 독이 핑 돌면서 힘이 빠지는 바람에 그러지 못했다.
“그나저나 이놈의 냄새는…… 어디서 맡아 봤는데.”
후각이 개방된 핸드는 놈의 몸에서 나는 냄새를 느낄 수 있었다. 로엠 노인의 약방에서 맡아 본 냄새였다.
‘이건 대마초(Hashish)잖아? 그러고 보니……!’
로엠 노인에게 들은 이야기가 떠올랐다.
대마초는 극소량이면 약으로도 쓴다. 하지만 가장 대마초 소비량이 많은 곳은 암살자 길드!
암살자들은 집중력을 키우기 위해 대마초를 피며, 냄새를 지우기 위한 약물도 사용한다. 하지만 아무리 냄새를 지워도 민감한 사람은 냄새를 맡을 수 있다고 했다.
냄새 감별에 성공해서 후각이 1 증가했다는 알림이 들려왔지만, 신경 쓰이지도 않았다.
등골에 얼음이 들어간 기분이 들었을 뿐이다.
‘골치 아픈 적을 만났군.’
핸드는 습격을 계획한 놈이 상당히 치밀하고 냉철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수리곰이 지나갈 시간을 예측하고, 깡패로 보이는 녀석들을 대기시켜 놓은 것도 모자라 입구 쪽에 만약을 대비해 암살자까지 고용한 것이다.
‘솜씨로 봐서 그리 프로 같지는 않지만, 살려 둬서 어떻게 될 놈이 아니군.’
핸드는 바닥에 떨어진 펀칭 나이프를 들어서 놈의 목을 찔러 버렸다.
기분이 나빴지만, 접속을 해제하면 프로텍터로 인해 기억이 흐려질 거라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끄르르륵!”
『당신은 이름 모를 암살자를 죽임으로써, 160의 경험치를 받았습니다.』
“……이, 이거 경험치가 장난 아니잖아? 엄청 강한 놈이라는 말인데.”
그때 추격자들의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핸드는 서둘러 시체를 골목에 밀어 넣고 격투장의 뒷문을 지나 대기실로 향했다.
과연 대기실까지는 쫓아오지 않았다.
독 때문에 몸 상태가 정상이 아니긴 했지만, 핸드는 정신을 바로잡고 상처를 살펴보았다.
납 벨트가 찢어지고, 내용물도 관통되어 있었다.
그나마 납 벨트가 없었다면 독 단검은 복막을 뚫고 내장을 헤집었을 것이다.
‘젠장. 뭔 놈의 게임이 이렇게 리얼해.’
평소에는 그래서 좋아했는데, 지금은 엄청 불쾌했다.
상처를 물로 씻은 다음 로엠 노인에게 받은 연고를 몽땅 발랐다. 그리고 붕대로 처치를 했다.
근육이 끊어진 것은 아니므로 동작에 심각한 방해가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그러나 만약 상대가 상처를 눈치채면 한 방에 KO 당할지도 몰랐다.
‘상대는 저놈들과 관련이 있다고 생각을 해야겠지?’
아무리 낙관적으로 보려고 해도, 놈들의 세력이 상당히 크다는 결론밖에 나오지 않았다.
핸드는 암살자에게서 얻은 나무로 된 패를 꺼냈다.
‘이건 암살자의 징표인가?’
이름 모를 조직의 습격(D급 퀘스트)
『당신은 격투장에 가는 길에 습격을 당했습니다. 흉기를 든 자들의 공격은 훌륭하게 돌파해 냈지만, 투기장 바로 앞에는 흉악한 칼날이 숨어 있었습니다.
그 때문에 당신은 지치고 상처 입었습니다.
약간의 증거물을 확보했지만, 여전히 위기에 몰린 상태입니다. 현명하게 상황을 타개하십시오.
퀘스트 진행 경험치로 480의 경험치를 받았습니다.』
‘역시 D급 퀘스트. 진행 경험치가 E급과는 격이 다르군. 끙, 어쨌든 괴롭지만 경기를 포기할 수 없겠어.’
핸드는 나무로 된 패를 배낭에 집어넣고 주먹을 강하게 쥐었다.
승산은 희박하다. 하지만 만약 여기서 진다면, 적들의 페이스에 휘말리게 되는 것이다.
그는 이전의 경험을 살려 몸을 굴리기로 했다.
‘어째 갈수록 대응 방식이 무식해지는 것 같기는 하지만, 이럴 때야말로 근성을 불사르는 거다!’
“훅! 훅!”
컨디션은 그야말로 최악.
독 때문에 중압 1단계가 되었다.
하지만 핸드는 납 벨트를 풀지 않고 땀이 줄줄 샐 정도로 상당히 강도 높은 운동을 실시했다.
‘육체는 때로 꺾일지 모르나 근성은 불멸이다!’
이를 바득바득 갈며 몸을 굴리자 반응이 나타났다.
『체내에 남은 독을 땀을 통해 방출하고 있습니다. 손상된 스테이터스 일부가 소폭 회복되었습니다.』
『당신은 독의 고통에 굴하지 않고 신체의 정화 작용을 활성화시켰습니다. 독 내성 스킬이 1단계 오릅니다.』
『인내의 한계를 돌파했습니다. 의지 스테이터스가 2 증가합니다.』
그렇게 독이 빠진 건 좋은데, 피를 흘렸기 때문인지 어지럼증이 생겼다.
‘크윽! 그래도 한다!’
붕대를 감아서 압박한 상처가 욱신거렸다.
그런데도 핸드는 끈질기게 2시간 동안 스트레칭을 하고, 휴식을 요구하는 신체를 더욱 채찍질했다.
땀이 비처럼 쏟아진다.
핸드는 물에 적신 수건으로 몸을 닦고, 가부좌를 튼 채 육체를 최고조로 회복시키기 위한 명상에 들어갔다.
‘이기기 힘든 상황이다.’
독에 의한 데미지를 약간 회복시키기는 했다.
그러나 스태미나는 바닥! 움직일 수는 있지만, 당장 약을 먹고 쉬어야 한다고 온몸이 호소하고 있었다.
게다가 상대는 결코 약자가 아니다.
하지만 핸드는 감았던 눈을 뜨며 일어났다.
“현명하게 상황을 타개하라고? 난 그런 건 몰라. 그저…… 남김없이 간파하고 승리할 테다!”
독에 당하고, 체력도 잃었지만 핸드의 눈에서 의지의 불꽃이 강하게 타오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