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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화

9장 : 격투장


게임 시간으로 4개월이 지났다.
즉, 현실 시간으로 정확히 한 달이 지난 것이다.
‘1개월. 이제 통화 정도는 해도 되겠지.’
지운과 명일은 플레이 주기가 비슷하다. 다른 다크 게이머들도 거의 비슷한 주기를 갖고 있을 것이다.
그들은 초반에는 연락하지 않기로 했었다. 처음에는 자리를 잡기도 힘들기 때문이다.
물론 여러 명이 모여 있으면 합동으로 더 많은 일을 할 수도 있다. 그러나 두 사람은 정식 레벨을 얻기 전의 파티 플레이는 별로 의미가 없다는 데 의견을 모았다.
명일은 현실에서 직접 통화하기에는 시간이 아까웠으므로, 가상현실의 플래닛을 이용한 통신을 신청했다.
조금 시간이 지난 뒤, 지운에게 통신이 연결되었다.
『너냐? 밥 먹고 있는데 무슨 일이야?』
“진도가 어떤지 알아보려고. 벌써 한 달이나 됐잖아.”
『……별거 있겠냐? 자리 잡느라 정신없지. 그래도 난 살 만해. 시스템이 너무 불친절해서 좀 헤매긴 했지만 말이야. 일렉트론 휴머니티 녀석들, 투자 방식이 이상한 거야 예전부터 그랬지만 이번에는 너무 대담하더군.』
가상현실이 개발된 후 상당한 시간이 지났다.
단순한 게임이 아니라 체험형 게임(가상현실을 이용한 게임들을 말한다)이기 때문에, 게이머들은 편의성이라는 점에서 상당히 너그럽다. 가상현실 세대들은 가상과 현실의 시간 차이에 적응한 지 오래기 때문이다.
그러나 돈을 내고 서비스를 받는 이상, 편의성이 너무 떨어지면 욕을 먹게 마련.
라스트 앤서는 편의성이라는 점에서는 실격이다.
밑바닥에서 기어 올라가야 하는 상황!
라스트 앤서 유저들은 처음부터 인내심과 적응력을 시험당하는 것이다. 영웅적인 주인공 역할에 익숙한 사람들은 라스트 앤서에 적응하기 쉽지 않으리라.
『나는 별 불만 없어. 예상보다 느리긴 하지만 유저들도 증가 추세고.』
확실히 라스트 앤서의 난이도는 높다.
그러나 정보가 부족하고, 최적화 공식이 등장하지 않아 많은 플레이어들이 시행착오를 거쳤지만 난이도가 높은 게임도 알고 나면 의외로 쉬운 법이다.
『그냥 무조건 들이대자면 못할 것도 없는데, 사냥을 위주로 성장시키려 한 사람들이 쫄딱 망하면서 다들 조심하는 것 같아. 라이트 유저라면 모르겠지만, 하드 유저나 다크 게이머들은 피를 토했을걸?』
그런 전례가 있기에 밝혀진 사실들도 많다.
라스트 앤서의 초반 공략 요령!

「자기가 원하는 직업을 미리 선택하고 그 직업에 어울리는 스테이터스와 스킬을 갖춰 나간다.」

많은 유저들이 그것을 알아차렸다.
그래서 유니버스를 떠도는 불평이나 불만은 많이 축소되었고, 새어 나오던 정보들도 다들 숨기는 추세였다.
『패턴은 게임 시간 1개월로 평균 2레벨 증가가 적절한 것 같아. 초반 1개월은 자리를 잡는 데 쓰고, 나머지 5개월 동안 능력과 레벨을 올려서 직업을 얻는 거지. 나도 무직 6레벨은 됐어. 연구에 시간이 많이 드는 바람에 늦긴 했지만, 4개월만 더 개기면 내가 원하는 직업을 얻을 수 있을 것 같다. 주력 스킬을 고를 수 있었거든.』
명일은 침묵했다.
‘내가 너무 하드 플레이를 한 건가?’
그러고 보면 원하는 직업을 완전히 결정한 것도 아니었다. 막연히 레인저나 모험가 계통 직업을 얻고 싶다고 생각했을 뿐, 스테이터스도 주력해서 올리지 않았다.
심지어 주력 스킬도 정하지 못했다. 다양한 스킬을 습득하기는 했지만 일관성이 부족하다는 말이다.
‘이건 고민을 해 봐야겠는데?’
무조건 분야를 넓히면 깊이가 부족해진다.
스테이터스 올리기에만 정신이 팔리는 것도 결코 좋은 현상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어려운 이야긴 그 정도로 하고…… 내가 둥지를 튼 곳은 캐러밴들이 주로 지나다니는 교역도시 루마이야. 여행 관련 스킬을 얻으려고 하고 있거든. 웬만큼 능력과 자본이 되면 캐러밴들을 따라 거점을 옮길 생각이야.』
교역도시 루마이.
이곳은 베타테스터들의 의견이 반반으로 갈린 장소다.
장사 경험과 말솜씨를 겸비한 사람만이 여기서 생활할 수 있다. 요컨대 눈치가 빠르고 언변이 뛰어나야 했다.
눈치 빠른 건 몰라도, 언변이라는 점에서 핸드는 도저히 자신이 없었다. 그래서 시작 지점 후보 중에서 꽤 서열이 높았지만, 결국 탈락시켰다.
“나는 쿠도르프 시에서 시작했는데…….”
『쿠도르프 시라고? 너 미쳤냐? 최악의 장소잖아. 뭐 숨겨진 거 있나 들이댔던 사람들도 실패했다고. 건질 만한 건 지하 유적인데, 거기도 도굴하려면 금방일걸?』
“그래서 여기서 시작한 거야. 제정신인 사람들은 웬만하면 안 올 테니까.”
『……하긴 너는 게임할 때마다 항상 이상한 길만 갔었지. 그래도 랭커 못잖은 정도는 해냈고.』
“여하튼 나도 자리는 잡았어. 푸줏간에서 도축 스킬도 배웠고. 지금은 꽤 많이 받는다.”
『도축 스킬 배웠냐? 초반에는 그것만으로도 먹고살 수 있겠더라. 사냥해서 도축을 배운 사람은 거의 없어. 돈 부족하면 사냥꾼들 따라다니며 도축을 해도 될걸.』
“아직은 그럴 생각 없어. 그 인간들도 별로 돈 없잖아. 게다가 떼어먹으면 답이 안 나오고.”
『하긴 그렇군. 그건 기반이 갖춰지면 시도해 봐라. 아, 참. 난 상점 종업원이 되어서 회계랑 매매 스킬을 배웠어. 능력이 별로일 때는 역시 직장이 안정적이어야지. 숙소를 해결하니까 돈이 조금씩 모이더라고. 그러면서 물류의 흐름이라던가, 지역별 특산품 목록이나 거래 가격을 배우고 있지. 그랬더니 지역 지식이라는 게 생기더라. 너도 생각 있으면 거래소나 종합상점을 알아봐.』
역시 다크 게이머 경력이 긴 지운. 명일 못잖은 선택지를 고른 모양이었다.
“난 약방에서도 일하고 있어. 약학 지식이라는 걸 얻었지. 회계나 매매는 기회가 있으면 나도 익혀 볼까? 근데…… 혹시 게임머니 현금화 거래는 되고 있어?”
명일도 도움이 될 만한 정보를 건네고 싶긴 했지만, 아무리 능력을 키울 수 있다 해도 독을 먹거나 차력사들에게 두들겨 맞는 이야기하고 싶지 않았다.
『……시장이 형성되려면 좀 많이 걸릴 거다. 다들 내놓을 매물조차 확보하기 어려운 판이야. 벌써 개척하려고 뛰어든 사람도 있기는 하지만, 금세 낭패를 보더라.』
부르주아 게이머들은 초반에 자본을 투자하여 캐릭터를 성장시킨다. 그러나 아무리 현실에 자금이 있어도 지금은 그런 돈지랄이 불가능했다. 매물이 없기 때문이다.
『적어도 RT(현실 시간)로 한 달은 더 지나야 환전 거래가 시작될 것 같아. 그것도 꽤 초보적인 상태겠지.』
게임머니 역시 하나의 매물이다. 때문에 공식적으로 관리되며 약간이지만 거래세가 매겨진다.
방식은 환거래처럼 시세 변동이 있는 공개 거래다.
“아이템 거래는?”
『환전 거래가 시작된 다음 또 한 달은 지나야 가능하지 않을까? 이것도 꽤 희망적으로 본 거야. 라스트 앤서는 아직 초반 탈락자가 너무 많아서…… 야, 지금은 다크 게이머들 사이에서도 정보 거래가 별로 없어.』
게임머니나 아이템만이 아니라, 정보 역시 비싸게 거래할 수 있는 품목이다.
하지만 다크 게이머들조차 아직 정보 거래를 하지 못하고 있다. 정리된 것도 없고, 그만한 가치도 없기 때문이다. 지금은 남보다 앞서 나가기 위해 달릴 때였다.
“그래…… 아직 여유는 있으니까, 기다려 보자고.”
『그래야겠지. 열심히 해라. 이제 슬슬 접속해야 해.』
“아, 벌써 그렇게 됐나?”
그들은 연결을 끊고 현실로 빠져나왔다.
‘음…… 지운 녀석은 지역 간 이동이나 지리 파악부터 할 생각인 것 같군. 상인을 할 놈은 절대로 아니고, 초반 자금을 모으면서 직업 정보를 알아볼 모양인데?’
기본 전직 조건. 그것은 무직 레벨 10. 그리고 직업 조건에 맞는 스킬의 습득, 최저 스테이터스의 만족이다.
명일은 일단 스테이터스를 올릴 수 있는 대로 올리고, 스킬도 그 과정에서 차츰 습득해 갈 생각이었다.
스테이터스가 빵빵하고, 스킬도 웬만큼 익혀 놓으면 자연스럽게 직업상이 떠오를 것이다.
“쩝, 그건 됐고. 여유는 2년밖에 없다고 생각해야겠군. 그 이후로는 있는 돈을 까먹게 되는데…….”
현재 명일의 구좌에는 약 3억 셀 정도가 있다.
월 이자만으로 생활하는 것은 무리겠지만, 보통이라면 수 년 정도는 괜찮을 것이다.
하지만 명일은 약이나 재활 훈련 등으로 상당한 돈을 까먹기에 많은 자금을 필요로 했다.
그런데 정작 라스트 앤서의 거래 채널은 이용할 사람조차 없었다.
‘휴! 고민이군.’
지금으로서는 인내는 쓰지만 열매는 달 거라고 믿으면서, 계속 라스트 앤서에 집중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 일단 뮬란 단장과 로엠 노인을 믿어 보자. 스테이터스가 증가하고, 스킬도 생기고 있잖아? 이 일들을 하면서 어느 정도 자금이 모이면 돈을 내고 아카데미 같은 곳에서 공부를 하거나 수행을 받으면 돼.’
불안감은 컸지만, 접속하기로 마음을 먹자 명일은 어느새 핸드가 되어 있었다.

* * *

“네? 격투장이라고요?”
“그래. 격투장.”
중세의 격투장이라는 말을 듣자, 핸드의 뇌리에 스쳐 지나간 것은 로마의 콜로세움이었다.
검투사들의 피와 땀이 쏟아지며 죽음과 삶이 교차하는 대결, 그리고 전차들의 경주 등등!
‘아니, 그건 투기(鬪技)장인가?’
핸드가 혼란을 느끼자, 뮬란 단장은 혀를 찼다.
“쯧쯧. 표정만 봐도 알겠군. 그런 진짜 투기장을 생각하면 안 되지. 그런 진짜 사람 죽어 나가는 싸움 말고, 개싸움을 보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만든 클럽일세.”
“……그런데 왜 그런 곳에 제가 가야 하죠?”
“그야, 경험을 쌓기 위해서지!”
뮬란 단장은 핸드가 겁먹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핸드의 표정은 생각보다 아주 덤덤했다.
그도 그럴 것이, 3세대 가상현실의 경험이라고 해도 그는 PvP 계열의 게임을 꽤 하드하게 즐기던 사람이다.
그는 싸움의 철칙을 알고 있었다.
그런 경험이 없었다면, 룽 노사의 몸 만드는 비법을 그 짧은 시간 안에 익힐 수도 없었을 것이다.
핸드가 아닌 핸드의 싸움 경험은 그에게도 이어지고 있다. 게다가 이곳은 가상현실이므로, 긴장감이 조금 덜한 것도 사실이었다.
“흐음…… 의외로군. 아니, 자네가 꽤 담이 크다는 건 알고 있지만 말이야.”
“카담 씨와 진짜 단검을 주고받다 보면 뭐.”
현재 핸드의 낚아채기 기술은 초급 5(15)레벨, 그리고 단검 투척은 초급 4(14)레벨이다.
그 후에도 핸드는 카담의 동작을 흉내 내고, 그의 페인트를 필사적으로 간파하려 하면서 스킬을 습득했다.
그러던 와중 카담이 낚아채기와 단검 투척 상급 기술을 가진 캐릭터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추정 민첩은 최저 100 이상…….’
본래라면 그런 실력을 가진 인물들은, 쿠도르프 시처럼 실력을 발휘할 기회가 없는 곳에서는 보기 어렵다.
그러나 뒤집어 말하면, 사연이 있는 사람들은 그 때문에라도 이런 곳에서 숨어 산다는 뜻이기도 했다.
물론 이들과 접촉한 뒤에야 깨달은 사실이지만…….
안목 스킬이 생기고 나서야 핸드는 사연 있는 사람들 대부분이 상당한 고수라는 사실을 알았다.
그러나 낙담하지는 않았다. 차력사들에게 배울 기술이 무궁무진하다는 의미였기 때문이다.
“맨손 싸움 경험은 거의 없으니까 나쁘진 않겠군요. 그런데…… 파이트머니는 얼마나 됩니까?”
“처음에는 동전으로 시작하지. 하지만 조금 등급이 올라가면 은화를 받을 수 있을 거야. 문제는 심한 상처를 받으면 싸움을 그리 자주 할 수 없다는 거지만…….”
파이터의 비애가 바로 그것이었다.
한 번 대등한 상대와 경기를 가지면, 심한 타격을 받았을 경우 당장 생활에 문제가 생긴다.
하지만 핸드는 생활비로 쓸 돈은 충분했고, 약 같은 것은 로엠 노인이 지원해 주고 있는 상태였다.
게다가 회복력을 높여 주는 스킬까지 있으므로, 그렇게 큰 부담을 느끼고 있지는 않았다.
‘간파와 안목 스킬을 올릴 좋은 기회다!’
안목 스킬을 올리기 위해서는 뛰어난 기술만을 지켜보는 것보다는, 조금 질이 떨어지지만 자신과 수준이 비슷하거나 그보다 떨어지는 것들을 볼 필요도 있었다.
“좋습니다. 격투장에서 싸워 보죠!”
“잘됐군. 그러면 등록을 해 둘 테니, 경기가 있는 날까지 격투 훈련을 하세.”
바라던 바였다. 격투기는 무기를 사용한 싸움을 주로 경험한 핸드에게 있어서는 미지의 영역이었으니까.
‘뭐…… 그다지 깊이 배울 필요는 없겠지만. 일단 지금은 싸움에서 쓸 만한 스킬이 강격뿐이군.’
초급 5(15)레벨의 강격.
명중률 변환 한계는 30%이지만, 타격력은 45% 증가한다. 철권을 얻은 뒤 현재 핸드의 공격력은 29∼34.
최대한 명중률을 투자할 경우, 적어도 13 이상의 공격력 증가를 얻을 수 있었다.
“자, 그러면 때리는 폼 정도는 제대로 잡혔으니 누구랑 붙여 볼까? 그렇지…… 토룬, 지스!”
뮬란 단장의 호명에 의해, 핸드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큰 우락부락한 근육의 차력사(토룬)와 약간 말랐지만 날쌘 눈매와 단단한 체구를 가진 청년(지스)이 나타났다.
“드디어 우리 차례군. 두 달은 더 있어야 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제법 싹수가 보이는걸!”
“흠…… 그럭저럭 몸도 잘 만들었군. 압축도 됐고, 몸이 무거울 것 같지도 않고.”
머리를 빡빡 밀고 달라붙는 가죽옷을 입은 부담스러운 패션을 한 토룬!
핸드가 막 접속했을 때가 봄 무렵이었으니 지금 여기는 여름이 한창.
북쪽에 치우친 지역이 아니라면, 아무리 인내력이 대단해도 저런 옷은 입을 수 없을 것이다.
반대로 날쌘 눈매의 청년은 조금 헐렁헐렁한, 어쩐지 저쪽 세계의 도복이 생각나는 복장을 하고 있었다.
게다가 머리카락도 흑발이고, 눈동자도 갈색이다.
인상도 조금 동양적인 느낌이 들었다.
“자, 이들의 지시를 따라서 격투술을 배우게나.”
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퀘스트 창이 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