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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화

핸드는 먼저 말이나 동작 없이, 여러 종류의 창을 열 수 있는 연습을 했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창을 열 수 있도록 연습하며 도시를 둘러보기 시작했다.
‘모르는 나라에 내팽개쳐진 느낌이지만…… 이럴 때일수록 관찰을 해야 해. 다른 인간들 역시 맨땅에 헤딩을 하고 있을 테니까. 조급해할 필요는 없어.’
베타테스터들은 좀 다를 테지만, 어차피 그들의 약진은 정해져 있다. 맨몸으로 부딪쳐 보고, 그럴 수 없다면 바깥에서 남들이 정리해 놓은 자료들을 찾아보면 된다.
다행히 시간대는 봄으로 생각되는 훈훈한 날씨였다. 활동에는 별다른 지장이 없다.
핸드는 약간의 위화감을 없애기 위해 다양한 동작들을 실험하며, 쿠도르프 시를 둘러보았다.
‘대단해. 3세대 가상현실과는 천지 차이야.’
3세대 가상현실도 상당히 현실과 유사하다. 그러나 건물 하나하나를 진짜인 것처럼 만들 수는 없었다. 잘 보이지 않는 곳은 어딘가 누락이 있기도 했다.
그런데 4세대 가상현실에는 단 한 점의 누락조차 없는 듯이 보였고, 어딘지 어색했던 NPC들. 즉 인공지능 역시 사람과 거의 차이를 느낄 수가 없었다.
생업에 종사하면서 돌아다니는 모습.
시대 배경이 중세일 뿐, 거기서 느껴지는 활기를 보면 완벽하게 하나의 사회로서 구성되어 있는 것 같았다.
‘……일단 숙소를 구하자.’
접속 해제가 되어도, 통상 해제에서는 캐릭터가 남는다. 때문에 안전한 곳을 찾아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캐릭터 사용을 정지시켜야 한다.
하지만 이 캐릭터 사용 정지는 마찬가지로 안전한 장소여야 가능했고, 현실 시간으로 하루. 게임 시간으로 4일이나 지나야 풀 수 있는 것이었다.
“첩첩산중일세.”
핸드는 여관을 찾아다니기 시작했다.
그리고 조금 구석진 곳에서 약간 낡은 여관을 찾아냈다. 상당한 싸구려인데도 숙박비는 무려 하루에 은화 한 닢! 식대는 따로 내야 한다는 무지막지한 폭거였다.
‘헉! 은화 10닢이라는 게 절대 큰돈이 아니잖아.’
숙박비를 알게 되자 핸드는 창백하게 질렸다.
시세를 알아보니 주민들의 생활비로는 꽤나 큰돈이다. 하지만 여행자들에게는 거금이 될 수 없었다.
물가 설정이 왜 이따위인지 도저히 이해가 안 갔다.
‘당분간은 빵과 물이군.’
식사 한 끼에 빵 한 덩이. 그것도 최소 열량이다.
보통 게임이라면 그걸로 끝나겠지만, 핸드는 이미 베타테스터들의 자료로 제대로 된 식사를 하지 않으면 캐릭터의 체력이 감소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결국 상당한 돈이 필요했다.
핸드는 여관 주인에게 동전을 쥐어 주고, 할 만한 일들을 물어보았다.
“여행자 같은데…… 뭐 특별한 기술을 배운 적 있나?”
당연히 있을 리가 없었다.
“그렇다면, 몸 쓰는 것밖에 없겠지. 견습부터 시작해야 하는데…… 하루 정도 일하면 동전 50닢? 그 정도는 쳐 줄 걸세. 그 이하로 준다면 속지 말고 나오게나.”
그야말로 황당함의 연속이다.
‘뭐 이딴 게임이 다 있어?’
이방인에 지나지 않는 신규 유저는 그야말로 무능!
라스트 앤서에 여타의 온라인 게임에 흔히 있는―토끼나 사슴이 멍청하게 돌아다니는 『사냥터』 개념이 없다는 건 이미 알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 능력으로 사냥한답시고 들이댔다가는 순식간에 죽어 나가고 말 것이다.
“자네, 일거리를 찾는다면 내가 하나 소개해 주지. 여행자들은 믿기 어렵지만, 자네 사정이 꽤 절박해 보여서 말이야. 믿을 수 있는 사람을 찾아 주겠네.”

여행 준비 2(F급 퀘스트)
『당신은 숙소를 잡고, 친절한 여관 주인을 만나 생업을 소개 받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여관 주인은 당신을 완전히 믿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의 의심을 풀어 주고, 생업을 얻으십시오.
새로운 일터에서 일을 훌륭하게 해내 보이면 여관 주인은 당신에게 일을 맡길 수 있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퀘스트를 거절할까 생각했지만, 한 번 들이대 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게다가 핸드는 명색이 직장인이었다.
이런 식으로 소개 받고 들어가는 것과, 스스로 들이댄 것의 차이점을 잘 알고 있었다.
“소개해 주신다면 감사히 받겠습니다.”
“그래? 그렇다면 잘됐군. 내가 편지를 써 주겠네.”
여관 주인은 너덜너덜한 양피지 쪼가리를 뜯어서 소개장을 써 주었다.
그걸 읽은 핸드는 비명을 지를 뻔했다.
‘허걱! 푸줏간 일이라고?’
그러나 이왕 결심한 것. 푸줏간이 아니라 그보다 더한 일이라도 들이대 볼 수밖에.
뭔 놈의 퀘스트가 보상 하나 없는지 잘 모르겠지만, 속으로 한숨을 흘리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핸드는 여관 주인의 다음 반응에서 커다란 충격을 받았다.
“내키지 않는가?”
여관 주인은 약간 미심쩍은 기색을 내보인다. 약간 불쾌해하는 것도 같았다. 핸드는 서둘러 고개를 숙였다.
“아, 아니. 아닙니다. 정말로 감사합니다.”
푸줏간 위치의 약도를 받고, 핸드는 내심 떨면서 급히 잡은 방에 짐을 풀고 나왔다.
‘NPC일 텐데, 정말 3세대와는 다르구나! 조심해야지.’
약간 무시하는 마음이 없지 않았는데, NPC는 정말로 사람과 차이가 없는 것 같았다. 핸드가 내비친 아주 약간의 못마땅한 기색까지 읽어 낼 줄이야!
핸드는 마음가짐을 확실하게 바로잡았다.
‘그래. 나는 밑바닥 인생, 여행의 초보자 핸드다!’
핸드는 문득, 이 게임이 왜 RPG인지 알 것 같았다.
Role Playing Game(역할 연기 게임).
그는 이걸 받아들인 사람과 받아들이지 못한 사람의 차이가 벌어질 거라고 생각했다.
‘내일 공식 플래닛 게시판을 보면 항의가 빗발치겠군.’
대다수의 유저들은 이 처우를 받아들이기 힘들 것이다. 그래 봤자 게임이라는 인식이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핸드에게 이것은 즐기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그에게 있어 이것은 인생의 연장이었다.
‘좋아. 시련으로 받아들이지. 내 팔을 고치기 위해서는 자존심 따위 하찮은 것!’
핸드는 의지를 불살랐다.

* * *

푸줏간에 도착한 핸드는 소개장을 내밀고, 고개를 숙여 보였다. 입문자에게 있어 당연한 일이었다.
“흐음, 괜찮아 보이기는 하는데…… 뜨내기답지 않게 예의도 바르군. 여행자란 족속들은 머물 곳도 없는 주제에, 자기가 무슨 대단한 인물인 것처럼 생각한단 말이야. 좋아! 오늘 하루 써 보고 생각하지.”
“감사합니다. 무슨 일이든 시켜만 주십시오.”
상반신은 벗고, 거기에 천을 두른 우락부락한 남성. 푸줏간 주인 타버 씨가 핸드를 보고 한 말이었다.
푸줏간의 첫인상은 대단히 신선했다.
피 냄새가 나고, 고기가 사방에 걸려 있다.
핸드가 아는 정육점과는 상당히 분위기가 달랐다.
극단적으로 말해 정육점은 업자들에게서 고기를 구입하여, 그것을 소매하는 일만을 하는 장소다.
그러나 푸줏간은 도축부터 고기의 판매까지 모두 한다. 창고에서 처리된 고기를 숙성시키기도 하는 것이다. 벌써 냄새부터 정육점과는 달랐다.
핸드에게 처음 맡겨진 일은 청소와 칼을 닦는 것!
‘시시한 일이긴 하지만…… 이것이 중요하다.’
사회생활에서 처음 맡겨진 일은 반드시 완벽하게 해내야 한다. 핸드는 경험으로 그걸 이해하고 있었다.
타버 씨의 밑에 있는 백정들의 구박은 신경 쓰지 않고 진지한 자세로 일을 배웠다.
여기서 정금사 일을 배우기 전 견습 단계였을 때의 경험이 많은 도움이 됐다.
정금사들의 직장에는 정밀기기가 많다. 공기 샤워는 필수고, 약간의 미세먼지마저 꼼꼼하게 제거해야 했다.
청소기계의 관리부터 시작했던 기억을 되살렸다.
우물의 물을 퍼서, 먼지가 일지 않도록 꼼꼼하게 청소한다. 그것을 본 백정들의 반응이 벌써 달라졌다.
‘푸줏간 일도 잘 모르면서 제법이다!’
타버 씨의 눈빛은 그런 의미를 담고 있었다.
게다가 도마의 청소 역시 일. 칼은 손대게 해 주지 않았지만, 도마에 물을 뿌리는 것도 필요했다.
청소만 한 것이 아니다.
핸드는 푸줏간의 일을 꼼꼼하게 관찰했다.
당분간 여기서 일을 해야 한다.
만약 그다음 일을 할 수 있게 된다면, 사전에 미리 관찰해 두어야만 했다.
먼저 역학관계의 관찰!
핸드가 들어오기 전에 막내였던 백정은 청소를 핸드에게 맡기고, 다음 일을 하고 있었다.
그것이 고기를 나르는 일이었는데, 핸드는 고기 나르는 수레는 물론 고기를 나르는 법도 꼼꼼하게 관찰했다.
‘역시 상당히 지치는데…… 하지만 첫날이니까.’
핸드는 성실하게 청소를 하고, 그만한 대가를 받았다.
“일당으로 동전 50닢과 자투리 고기인가…….”
본래 버려지는 자투리인 만큼 양은 거의 되지 않는다.
그러나 그는 고기를 얻을 수 있었으므로 만족했다. 자투리 고기를 여관 주인에게 주자, 매일 가져다준다면 아침과 저녁 스튜와 빵을 식사로 주겠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이다. 이걸로 식비는 충분히 벌었다.
살코기 한 덩어리가 은화 1닢 이상의 가치가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 무난한 장사였다.
그러자, 퀘스트 창이 갱신되었다.

여행 준비 3(F급 퀘스트)
『초보 여행자는 생업을 얻고, 훌륭하게 적응했습니다. 당신은 생활의 기반을 마련할 수 있게 됐습니다.
하지만 아직도 가야 할 길은 멉니다.
당신의 일자리는 불안하고, 아직 인정받지는 못했습니다. 생업을 계속하며 나아가야 할 길을 모색하십시오.』

‘휴. 정말 지독하군. 보상이 하나도 없잖아. 아니, 보상이라면 보상이긴 하지만. 경험치는 하나도 안 올랐어. 역시 사냥을 해야 경험치를 주는 건가? 성장하지도 못했고 이대로는 여관비가 너무 비싸서 손해인데.’
핸드는 고민에 빠졌다.
역시 투 잡을 뛰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몸이 견딜 수 있을지 몰랐다.
현실의 명일과 비교하면, 핸드의 몸은 모든 면에서 빈약하기 짝이 없는 수준이었다.
“스테이터스를 쓸까?”
밤, 핸드는 여관의 자기 방에서 생각에 잠겼다.
1레벨에 주어지는 1포인트!
이걸 쓰면 조금은 도움이 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섣불리 써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직 원하는 직업조차 생각하지 않은 상태였기 때문이다.
라스트 앤서에서 1레벨당 주어지는 능력 포인트는 1.
그리고 스킬 포인트는 5레벨당 1점이라는 터무니없는 짠돌이 시스템이다.
생각을 하다가 핸드는 어깨가 뻐근해지는 느낌을 받았다. 지쳤을 때 특유의 피로감이었다.
그는 청소만 한 게 아니라 짐도 상당히 날랐다. 특히 힘들었던 것은 우물에서 물을 퍼 올리는 것이었다.
“안 되겠다. 근육을 풀어야지.”
핸드는 룽 노사에게 배운 요가 기법, 그리고 스트레칭으로 몸을 풀기 시작했다. 1시간쯤 반복하자 신기하게도 몸이 제대로 회복되는 느낌을 받았다.
‘어라? 여기서도 되네?’
핸드의 몸은 꽤 뻣뻣했지만, 한 술로 배부를 수 없다는 사실은 잘 알고 있었다.
내친 김에, 운동까지 했다.
물론 지친 상태이므로 강한 운동은 무리다.
실내에서 할 수 있는 간단한 운동을 어느 정도 하고(하는 의미가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충분히 몸을 푼 다음에는 여관의 우물을 퍼서 씻었다.
물이 흔한 지역을 선택해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만약 물이 귀한 지역이었다면, 우물 하나를 이용하는데도 돈을 내야 했을 것이다.
비교적 민심이 후한 지역을 택한 것도 지금 생각하면 훌륭한 선택이었다.
캐릭터가 피로한 상태였기에, 시간도 슬슬 되어 가는 것 같아서 핸드는 일단 잠을 자기로 했다.
‘일단 오늘은 여기서 더 할 일도 없을 것 같으니, 접속을 해제하고 다른 사람들의 상황을 알아보자.’
핸드는 시간을 계산하고 캐릭터를 침대에 눕혔다. 그리고 수면 모드로 돌린 뒤 접속을 해제했다.

* * *

“……역시 난리가 났군.”
성질도 급한 사람들이 벌써 로그아웃하여, 온갖 난리를 치고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일렉트론 휴머니티가 미쳤다는 둥, 혹은 라스트 앤서는 망작이라는 소리를 하는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누구보다 빨리 무직 레벨을 벗어나 보이겠다는 선언을 하는 사람도 보였다.
아마 하드게이머나 베타테스터일 것이다.
“음. 누구보다 빨리 한다, 라…….”
라스트 앤서는 무직 레벨을 10까지 올리면, 정식 클래스를 얻기 위한 퀘스트를 한다. 그리고 클래스를 얻으면 무직 10레벨에서 정식으로 1레벨 캐릭터가 되는 것이다.
‘최단 기간 레벨 업? 성급한 행동 같은데.’
오늘 하루 플레이만 해도, 성급한 예단으로 인해 어느 정도의 피해를 볼 수 있는지 배울 수 있었다.
라스트 앤서는 아주 신중하게, 또 하나의 현실을 체험한다는 느낌으로 진행해야 하는 게임이다.
확신은 금물이지만, 왜 일렉트론 휴머니티가 『무직 레벨』이라는 개념을 도입했는지를 따져 봐야 했다. 여타의 게임처럼 처음부터 직업을 얻고, 순식간에 강해질 수 있도록 배려하지 않은 이유가 뭘까?
‘단순한 차별화가 아니라는 생각이 드는데…… 뭐, 너무 신경 쓰지 말자. 남은 시간 동안 지식이나 머릿속에 쑤셔 넣어야지.’
베타테스터들의 자료들은 물론, 공식 사이트에 소개되어 있는 것들도 완전히 숙지하지 못했다.
명일은 자료들을 철저하게 암기하고, 몸을 단련한 뒤 시간에 맞추어 라스트 앤서에 접속했다.
그리고 접속 직후, 그 생각에 확신을 갖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