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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화
2장 : 준비하다
『서기 2330년, 겨울! 마침내 일렉트론 휴머니티 최고의 선물이 찾아왔다!』
박력 있는 음악과 함께 광고가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정지운은 광고를 보며 혀를 찼다.
‘생각보다 보름이나 늦게 나왔군. 준비할 시간이 충분해서 다행이긴 하지만…… 명일이 이 자식은 대체 어디서 뭘 하고 있는 거야? 연락도 안 되고.’
그는 신경 손상으로 평생의 꿈을 잃어버린 친구를 생각해 내며 머리가 아파 오는 걸 느꼈다.
명일은 성실한 성격이기는 하지만 독하지는 않았다. 그런데 그때의 명일은 눈에 독기를 품고 있었다.
다크 게이머가 된다고 하면 그 독기는 바람직하다.
하지만 이렇게 연락이 안 되면 문제였다.
그때, 손목에 찬 커뮤니케이터가 신호를 보내 왔다.
‘어? 이건 명일이 번호다!’
급히 커뮤니케이터의 버튼을 눌렀다. 통신이 연결되어, 망막 투영으로 명일의 화상이 나타났다.
“야, 너 지금까지 뭘 하고 있었던 거야?”
명일은 표정 변화 없이,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오랜만이다.』
귀에 끼워 둔 이어폰에서 명일의 목소리를 들은 지운은 깜짝 놀랐다.
3개월 전에 만난 명일은 바위같이 굳어져 있었는데, 지금 들은 목소리에서는 강한 자신감이 느껴졌다.
게다가 얼굴도 태양에 그을리기는 했지만 전보다 훨씬 건강하게 느껴졌다.
“……얼굴을 보아하니 괜찮은 거 같긴 한데. 어디 가서 막노동이라도 했냐?”
『자세한 건 만나서 이야기하자. 항상 만나던 데서.』
“휴, 그렇게 하자. 할 이야기가 엄청나게 많아. 사전 조사야 끝내 놓기는 했지만…….”
통신이 끊어지자, 지운은 서둘러 외출 준비를 했다.
그들이 만나는 장소는 종합여가센터! 여러 종류의 여가 시설들이 모여 있는 건물이다.
높이 200층에 달하는 거대한 건물로, 언제나 인파로 북적이는 장소이기도 했다.
약속 장소는 150층에 있는 가상현실 카페였다.
만나자마자 한 소리 퍼부으려고 준비하고 있던 지운이었지만, 막상 명일의 모습을 보자 깜짝 놀랐다.
계절이 상당히 추운데도, 명일은 반팔이었다.
건강하게 그을린 피부. 두껍지는 않지만 질기고 단단한 근육이 팔뚝을 감싸고 있었다.
옷을 그다지 두껍게 입지 않았기 때문에, 팽팽하게 긴장되었으면서도 탄력을 느낄 수 있는 근육이 보였다. 이전과는 다른 당당한 체구였다.
무엇보다 눈!
자신감을 잃고 굳어져 있던 표정에 여유가 느껴졌고, 형형하기까지 한 눈빛은 강렬한 인상을 주었다.
“정말 오랜만이다.”
“야…… 한명일. 너 진짜 좀 문제 있지 않냐? 3개월간 연락도 끊기고…… 얼마나 걱정했는지 알아?”
“미안하다. 사실 연락할 수 없는 곳에 있었거든.”
‘연락할 수 없는 곳?’
지운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적어도 국내라면 연락할 수 없는 곳이 있을 리 없다. 대체 어디에 갔었던 것일까?
“어디에 있었는데?”
“그 이야기는 너무 길어질 것 같으니 천천히 하자고. 나도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모르겠다. 여하튼, 그동안 몸을 만들었다. 보면 알겠지만 꽤 힘들었어.”
그러고 보면 피부에는 흉터도 상당히 보였다.
“허, 어디 특수부대라도 다녀온 것같이 구네.”
그 말이 나오자 명일은 몸을 부르르 떨었다.
“차라리 특수부대가 낫겠다. 일단 주문 좀 하자.”
그러더니 명일은 홍차를 시켰다.
“괜찮겠어?”
섬세한 작업을 할 수 없는 그가 아이스티가 아닌 일반적인 차를 시키다니. 그러나 지운은 정작 홍차가 나오자,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좀 묘한 자세였지만 명일은 잔을 손가락만으로 잡았던 것이다. 대신 마시는 동작도 좀 특이했다. 마치 손목의 움직임보다는 팔 전체의 근육을 사용하는 것 같았다.
“지금은 글씨도 쓸 수 있다. 젓가락질도 가능해. 좀 엉터리지만…… 지난 3개월간 몸만 만든 게 아냐. 좀 특별한 훈련을 받았어.”
지운은 얼마나 엄청난 노력을 했는지 알 수 있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서, 신경 자체가 망가지면 물리적으로 그것을 극복하는 일은 불가능하다.
그런데 보조 도구 같은 것도 없이 묘한 방법으로 그것을 극복해 낸 것이다.
인체에 대한 지식을 가지는 것!
그것이 가상현실 다크 게이머에게 필요한 것임을 생각하면, 아주 바람직한 현상이다.
현실성을 강조하는 가상현실일수록, 본래의 능력이 어느 정도는 반영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야기가 진짜 길 것 같네. 그건 나중에 듣자. 그런데 어쩔 생각이냐?”
“다크 게이머. 해 보려고.”
지운은 고개를 끄덕였다.
친구는 사고 전보다 더욱 정신력이 강해진 것 같았다.
“상처를 거의 극복한 것 같아서 다행이다. 그런데 시간이 좀 촉박해. 너, 통신이 안 되는 장소에 있었다며? 가상현실에 접속하지도 못했지? 동화율이 떨어졌으면 곤란한데…….”
가상현실 동화율.
부단하게 가상현실에 접속하지 않으면 감이 떨어지고, 동화율 역시 저하된다.
지운이 걱정하는 것은 그것이었다.
명일의 동화율 등급은 C+. 보통 사람보다는 4단계 높지만, 다크 게이머 중에서는 평균 정도였다.
“내친 김에 여기서 시험해 보지 뭐.”
일부 가상현실 부적응 등급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접속하는 것만으로도 문제가 생길 수 있다. 그래서 가상현실 카페에도 동화율 측정 장치가 있었다.
명일은 차를 다 마시고, 동화율 측정 장치를 썼다.
장치는 가벼운 금속의 헬멧 형태였는데, 직접 신경에 접속하는 대신에 특수한 빛으로 간접적인 자극을 줌으로써 동화율을 측정했다.
헬멧의 바이저를 내리자, 기이한 빛이 명일의 망막을 투과해 간접적으로 신경 반응을 조사했다.
『고객님의 가상현실 동화율 등급은 B+입니다. 보급형 장치도 안전하게 사용하실 수 있습니다.』
결과를 본 지운의 입이 떡 벌어졌다.
“이, 이건 말도 안 돼!”
가상현실 동화율이 3개월 사이에 3단계나 오르다니!
지운의 동화율은 B. 예전 명일의 동화율에 비하면 2단계 높았다. 그런데 지금은 명일이 한 단계 더 높다.
‘이놈 어딜 다녀온 거야?’
명일을 보면 그 시간 동안 몸을 만든 게 분명한데, 가상현실 동화율까지 급격히 상승했다.
오히려 한 단계 정도는 떨어진다 해도 이상하지 않은 공백이 있었는데…….
“야, 너…… 이상한 약 같은 걸 먹은 건 아니겠지?”
가상 범죄자들 일부는 마약 종류를 사용해 억지로 동화율을 올리기도 한다. 그러나 명일은 그런 약물을 썼을 때의 반응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나한테 그럴 돈이 어디 있겠냐?”
“그거야 그렇지만…… 어떻게 이렇게 올랐지?”
“정신 수련을 좀 했었지. 명상이라거나…… 다시 생각해도 치가 떨리는군.”
지운은 갑자기 혹하는 걸 느꼈다.
“혹시, 그거 나도 배울 수 있겠냐?”
C등급이었던 명일이 그 정신 수련으로 B등급이 됐다면, 지운 자신은 A등급을 노릴 수 있을지도 몰랐다.
다크 게이머의 꿈, 동화율 A등급!
그게 가능하다면 지운의 목표는 상향 조절될 것이다.
“그게, 3개월쯤 문명사회에서 떨어져야 가능하다더군. 편리시설이라던가, 가상현실 다 포기하고……. 이것의 시작은 생각을 하지 않는 것부터인데, 현대에는 뇌를 너무 자극하는 것들이 많아서 안 된다나.”
“헉!”
24세기 문명이 주는 편리에 길들여진 지운에게는, 상상만으로도 끔찍한 이야기였다.
그는 눈앞의 친구가 외계인으로 보이기 시작했다.
“부럽기는 한데, 상상만으로도 무섭다. 포기하겠어. 어쨌든 정말 잘됐다. 어지간한 일류급보다 몸도 만들어져 있고. 동화율 랭크도 높아진 걸 보면 준비 하나는 제대로 했어. 다크 게이머 최대의 꼼수도 배울 수 있겠는데.”
“꼼수? 다크 게이머 최대의 꼼수라니?”
명일에게 있어서는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하긴 너는 모르겠구나. D랭크 이하는 별거 없어. 하지만 C등급부터는 가상현실에서 적용 가능한 꼼수가 하나씩 생겨. 사실상 이 꼼수는 다크 게이머들 최대의 무기야. 일반 게이머들은 잘 모르는 경우가 많지.”
“음…… 어려운 거냐?”
“어렵지. 하지만 너는 직업이 그거였잖아. 너라면 충분히 가능할 거야. 원래 이건 특수한 프로그래머들이 생각해 낸 기술이지만, 다크 게이머들만이 진정한 위력을 발휘할 수 있다고.”
정금사로서 신경 접속을 통해 인공지능과 교감해 온 명일은 특수한 경험을 쌓았다고 볼 수 있었다.
“기억해 둬. B등급 이상의 동화율과, 그 『비법』을 쓸 수 있어야만 상위 서열의 초대권을 받았다고 할 수 있어. C등급은 다크 게이머의 최소 조건에 불과해.”
“그럼, 이제부터 뭘 해야 하지?”
“일단 고급형 접속 장치를 사야지.”
고급형은 흔히 캡슐이라고 부르는 가상현실 접속 장치다. 장시간의 접속 동안 체력을 보존하고, 정신을 쉽게 지치지 않도록 해 주는 것이 고급형이다.
저가형, 보급형 등은 이러한 장치가 상당히 미비했다.
고급형의 가격은 800만 셀!
“……엄청 비싸군.”
“투자하는 셈 쳐. 다크 게이머의 생활 주기도 익혀야지. 수면 보조기도 고급형으로 하나 사. 내가 알기로 RT:VT 비율은 1:4라니까 필수라고 할 수 있지.”
RT(Real Time)는 바로 현실 시간, 그리고 VT(Virtual Time)는 가상 시간이다.
가상현실 동화율이 높은 사람들은 저가형을 사용해도 1:4 비율에서 적응 가능하다. 하지만 동화율이 낮다면 고급형을 사야 제대로 적응할 수 있었다.
1:4는 법적으로 가능한 최대 시간이다.
인간이 접속할 수 있는 환경은 1:4가 한계다. 그걸 넘어가면 뇌나 육체가 받는 피로가 너무 높았다.
“1:4? 진짜 빡빡하군.”
명일은 하는 수 없이 각종 장비를 구입해야 했다.
고급형 4세대 가상현실 접속 장치 일시불 800만 셀.
짧은 수면 시간으로 뇌와 몸을 편하게 쉴 수 있게 해 주는 고급형 수면 보조기, 500만 셀!
게다가 지운에게는 말하기 어렵지만, 명일이 사야 하는 것들은 그 외에도 많았다.
약품, 그것도 일반적인 약품이 아니라 약초들! 구하기 어려운 한방약들이다.
운동 기구들도 구입해야 한다.
“원래 사람이 모이면 한 곳에서 숙식 주기를 맞추고, 어울려서 해야 하는데…… 그 게임 성질상 초반에는 그게 도움이 안 될 것 같더라. 자료는 나중에 전송해 줄게.”
지난 3개월간 지운도 놀고 있던 게 아니다.
베타테스터들을 집요하게 쫓아다니며 게임의 정보를 모으고, 일렉트론 커뮤니티가 공개했던 정보도 정리했다.
사람은 자신에게 유리한 정보를 쉽게 발설하지 않는다. 다크 게이머나, 하드 유저라면 더욱 정보를 독점하고 싶을 것이다. 하지만 라이트 유저는 이야기가 좀 다르다.
주변 사람에게는 알음알음 전해지게 되어 있고, 그 주변 사람 중에는 별 생각 없는 사람도 많았다.
그렇게 새어 나온 정보는 물론, 베타테스터들에게 직접 들은 것까지 합치면 사전 조사는 충분했다.
“이거 아주 예감이 좋아. 길조가 보이는군. 대개 시작이 좋으면 마지막까지 좋지.”
지운은 손을 비비며 입맛을 다셨다.
“명일아, 사흘밖에 없다. 필요한 거 주문해 둬라.”
“……으음. 그렇군. 이왕 여기 나온 김에 처리하지.”
다크 게이머가 되기로 마음먹었음에도, 돈이 엄청나게 빠져나갈 걸 생각하자 명일은 씁쓸해지는 걸 느꼈다.
‘에이. 벌써부터 이러면 안 되지. 투자다!’
결정한 이상 할 수밖에 없다.
가상현실 카페의 접속 장치를 사용해서 주문을 했다.
일단 고급형 접속 장치와 수면 보조기와, 운동에 필요한 각종 기구들!
라스트 앤서 1년 치 이용 계약을 하고(그나마 고급형 캡슐 구입을 해서 반년은 공짜였다), 장기간 틀어박힐 수 있도록 장기 보존이 되는 식량들을 주로 구입한다.
약초와 그것들을 달이기 위한 약제용 도구까지!
보약 같은 것을 만들 일은 아니기 때문에, 그다지 비싼 것들은 아니지만 장복(長服)해야 하므로 상당한 양이 된다. 집으로 배달되도록 시간에 맞춰 주문을 하고 나자, 지운의 가상통신이 왔다.
“명일아. 『블러드 콜로세움』 계정 남아 있냐?”
블러드 콜로세움은 RPG 게임처럼 레벨을 올리며 플레이하는 것이 아니라, 순수하게 격투나 검투를 즐기는 PvP 유저들이 즐기는 게임이다.
물론 캐릭터를 성장시키지 못하는 것은 아니고, 대전게임처럼 스킬을 사용하면서도 싸울 수 있었다.
“있는데? 별로 랭크는 높지 않지만…….”
“그럼 접속해라. 방 이름이랑 비밀번호 불러 주마.”
그리고 통신이 뚝 끊겼다.
명일은 가상현실을 헤치며 접속장치에 이미 설치되어 있는 블러드 콜로세움으로 들어섰다.
순식간에 다양한 광고와 플래닛(Planet; 가상현실에서의 웹사이트)들이 시야에서 사라지고 환경이 격변했다.
쿠르르릉!
희미한 피비린내, 그리고 어두운 하늘!
낮게 깔린 채 꾸물거리며 흘러가는 구름 사이에서 번개가 그물처럼 퍼진다.
홍채와 신체 데이터를 검색하자, 이미 만들어져 있던 계정이 활성화되면서 그는 접속했다.
콜로세움 내부로 들어서자 수많은 문이 보인다.
명일은 지운이 불렀던 방 이름을 검색했다. 그러자 몸이 공간을 뛰어넘어 어떤 문 앞으로 향했다.
“응? 대전게임 방인데…… 맵이 『영웅들의 전율』?”
영웅들의 전율.
특별한 환경에서의 PvP를 선호하는 사람들이 주로 쓰는 것으로, 아주 음산하고 무서운 필드였다.
비밀번호를 입력하자, 문에 달려 있던 금속의 해골이 눈을 뜨면서 피눈물을 흘렸다.
끼이이이이익.
절규처럼 들리는 기분 나쁜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고, 명일은 암흑의 세계로 빨려 들어갔다.
도착한 곳은 음산한 풍경이었던 블러드 콜로세움 외부 이상으로 스산한 바람이 부는 곳이었다.
까악, 까악!
곳곳에 꼬챙이가 세워져 있고 거기에 꿰어진 백골에는 까마귀들이 까맣게 앉아 있다.
심의 때문인지 어딘지 모형 같은 느낌이 들기도 했지만, 얼핏 보기에는 실물과 거의 차이가 없었다.
게다가 어두운 공간에서 흘러나오는 공포감!
귀곡성이 섞인 스산한 바람이 원흉이다.
그 소리에는 『공포 주파수』라고 불리는 것이 섞여 있기에, 아무리 담대한 사람이라도 본능적으로 희미한 공포를 느낄 수밖에 없는 장소였다.
폐허, 혹은 자연재해 등에서 흘러나오는 주파수.
유전자에 새겨진 공포를 자극하는 것이기에 담력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자연스러운 반응이다.
“이제 왔냐?”
반대편에 지운의 캐릭터가 앉아 있었다.
낡은 느낌까지 실감나게 재현된 금속 갑옷에, 무기도 얼룩 같은 게 남아 있는 양날 도끼였다.
어깨에 붙어 있는 장식은 은빛의 해골!
블러드 콜로세움 이용자 중에서 500위 안에 든다는 증명이다. 상당히 높은 랭커임을 알 수 있다.
그에 반해 명일의 캐릭터가 달고 있는 문장은 단순한 백골이었다. 갑옷도 조금 부실하고, 무기도 그리 뛰어나지 않았다. 상당히 접속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대체 왜 이런 데로 부른 거야?”
“여기가 비법을 전수하기에 제일 좋거든. 일단 내가 하는 걸 잘 봐라.”
지운은 그렇게 말하더니 도끼를 들고, 갑자기 뛰어오르더니 강하게 땅을 내리찍었다.
쿠르릉!
도끼에서 우렛소리 같은 것이 들리더니, 공간을 물결치게 만드는 효과가 발생했다. 그 물결은 그대로 날아와서 명일의 캐릭터를 뒤로 펑 튕겨 버렸다.
약간 밀리는 느낌이 들었지만, 시야가 빨갛게 물들면서 캐릭터의 생명이 줄어들었음을 알 수 있었다.
“어? 산벼락 찍기잖아!”
명일은 깜짝 놀랐다. 지운이 입으로 기술 이름을 외치거나, 커맨드 동작 없이 스킬을 썼기 때문이다.
현실적인 싸움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스킬들을 끄고 싸우지만, 스킬 전투야말로 블러드 콜로세움의 묘미다.
하지만 이 스킬들은 발동에 있어 기술 이름, 혹은 커맨드 동작이라는 선행 조건이 필요했다.
동작에 맞춰서 스킬이 모두 발동하거나, 강력한 스킬을 남발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다.
“어떻게 한 거야?”
“이게 바로 다크 게이머들의 비법이지. 동화율 C등급의 비법! 너도 의외로 익숙할 거야. 이걸 게임에 써먹는 게 어려워서 그렇지…… 가능해도 시간이 많이 걸리면 의미가 없어. 실전에서 쓸 정도가 되어야 해. 이건 그야말로 비장의 수라고.”
“설명해 봐.”
명일의 표정이 진지해지자, 지운은 턱을 긁적였다.
“간단한 일이야. 가상현실에 익숙한 사람들은 매크로 없이 한 마디도 안 하고 움직일 수 있잖아.”
“아!”
버추얼 유니버스(Virtual Universe).
가상의 우주를 헤엄치는 초보들은, 일일이 검색어나 매크로를 사용해서 플래닛을 배회한다.
하지만 상당히 익숙해진 사람들은 그것 없이도, 생각이나 짧은 동작만으로도 장치에 명령을 내릴 수 있다.
그것이 더욱 능숙해지면? 게임에서 스킬의 발동 조건을 생각한 것만으로 충족시킬 수 있을지도 모른다.
“설마 게임에서도 그게 될 줄은 몰랐어.”
“특별한 동작이나 키워드가 필요한 건 무리지만, 입으로 말하는 건 생략할 수 있어. 하지만 게임에서 하는 건 유니버스에서 하는 것보다 조금 더 어렵고, 강한 집중력이 필요해. 프로텍터 때문이지.”
“그, 그렇군……!”
가상현실은 뇌에 강한 영향을 미치므로, 뇌를 보호하는 프로텍터가 없다면 문제가 생긴다.
뜨겁지 않은 부젓가락으로 화상을 입은 아이의 일화를 알고 있다면, 가상현실의 위험성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을 막아 주는 프로텍터 때문에 가상현실 게임은 버추얼 유니버스보다 조작이 조금 어렵다.
“연습해 봐. 일단 스킬 커맨드 창을 말없이 여는 것부터 시작해. 비슷한 건 해 봤잖아.”
명일은 벌써 집중하고 있었다.
버추얼 유니버스를 헤엄칠 때의 감각!
플래닛을 끌어당길 때의 느낌을 되살려 내야 했다.
다가가는 것은 자신이지만, 감각적으로는 커다란 가상공간을 직접 끌어당기는 기분이다.
하지만 그 느슨한 느낌으로는 부족했다.
강하게 집중한 지 거의 4∼5초가 지나서야, 명일은 간신히 스킬 커맨드를 열 수 있었다.
“휴, 열었다.”
“그건 그렇게 어렵지 않아. 그런데 그렇게 시간이 걸리면 실전에서는 써먹을 수 없다고.”
“알았어. 계속해 볼게.”
스킬 커맨드를 닫고, 다시 반복!
명일은 룽 노사에게 배운 명상의 감각을 되살려 냈다.
생각을 지울 수 있다면 잡념만을 배제하고, 일점으로 모아 하나만을 바랄 수도 있다.
그러나 강한 집중력만으로는 부족하다.
하나에 집중했다가, 그것을 버리고 바로 다음으로 옮겨 갈 수 있는 신속함과 탄력이 필요했다.
거의 100번 가까이 시도하자, 스킬 커맨드를 여는 감각을 잡았다. 0.1초도 걸리지 않았다.
지운은 이것을 배우는 데만 하루쯤 걸릴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래서 상당히 놀랐지만, 이왕 하는 김에 제대로 밀어붙이기로 했다.
“역시 빨리 배우는군. 그럼 다음은 스킬 발동이다.”
“이거 꽤 지치는데…….”
평소 쓰지 않던 부위를 쓰는 것 같은 느낌이다.
그것이 뇌이기 때문에, 더욱 익숙해지기 쉽지 않았다.
“계속해야지. 실전에서도 쓸 수 있어야 해.”
그렇게 다그치자, 명일은 오히려 오기를 느꼈다.
스킬 발동!
그가 쓰는 것은 얇은 검과 방패.
검과 방패를 사용하는 스킬들을 외치지 않고 쓸 수 있게 되는 데는 거의 30분이 걸렸다.
‘헉! 나는 저걸 하는 데 이틀이나 걸렸는데.’
지운은 혀를 내둘렀다.
보통 다크 게이머들은 일주일도 넘게 걸린다. 이틀 걸린 자신도 몹시 빠른 편인데, 명일은 괴물같이 빨랐다.
2급 극세정금사다운 집중력과 섬세함이었다.
‘하기야, 나노 단위의 작업을 하던 놈인데…….’
그러면서도 다그치는 건 멈추지 않았다.
“20초나 걸렸잖아. 숨 쉬듯이 자연스럽게 발동되어야 실전에서 써먹을 수 있어. 고수 입장에서는 기술을 쓴다고 예고하는 거나 마찬가지야.”
명일은 불평불만 없이 스킬을 연습했다.
그리고 또 1시간 정도가 지나자, 거의 1초 가깝게 단축할 수 있었다.
고수인 지운이 보기에는 아직 실전에서 쓸 정도는 아니었지만, 속으로는 몹시 놀라고 있었다.
‘내가 저 정도 하는 데 얼마나 걸렸더라?’
거의 열흘 정도는 걸렸다. 보통 다크 게이머들은 한 달 가까이 걸리기도 한다.
“휴, 10분만 쉬자. 머리가 너무 아프다.”
확실히 이 비법은 정신력을 많이 소모한다.
“음…… 그래? 그럼 10분만 있다가 하자. 연습은 혼자서 하고, 숨 쉬듯이 자연스럽게 되어야 해. 좀 있다가 다른 스킬로도 해 봐.”
명일은 바로 가부좌를 틀고 앉아서 명상에 들어갔다.
마음으로 작은 고리를 만든다.
그 고리는 세상을 덮을 듯이 커졌다.
그리고 순식간에 줄어들더니 흔적 없이 사라졌다.
상상의 원의 소멸.
그리고 찾아오는 것은 밤바다 같은 정적!
가상현실이라 효율은 떨어졌지만 이처럼 명상을 하면, 뇌를 제어하여 충분히 쉬게 할 수 있다.
10분을 쉬고 나자 명일은 정신력을 상당히 회복했다. 그리고 다른 스킬로 비법을 연습하기 시작했다.
‘괴물 같은 놈!’
보통 저기까지 정신을 소모하면 나가떨어져서 죽은 듯이 자던가, 아무것도 못하고 축 늘어진다.
하지만 명일은 2시간 동안 쉬지 않고 비법을 연습하여, 다크 게이머들의 비법을 거의 실전에 통용될 정도로 끌어올렸다. 이 감각만 까먹지 않고 연습한다면, 4세대 가상현실에서도 충분히 써먹을 수 있을 것이다.
“다크 게이머들은 이걸 『묵언행』이나 『사일런트 스킬』이라고 하지. 암살자 직업한테는 필수나 다름없었어. 스테이터스나 스킬, 인벤토리 열 때도 쓸 수 있거든.”
“호오…… 그럼, B등급의 비법이란 건?”
“『복원』 혹은 『피드백』이라고들 하는데…… 요거는 좀 익히기 힘들 거다. 흐흐흐흐.”
갑자기 지운은 음흉하게 웃기 시작했다.
‘네가 아무리 괴물 같은 놈이라지만, 이건 조금 무리가 있을 걸? 보통은 익히는 것도 힘들거든.’
하지만 그의 예상은 순식간에 깨지고 만다. 명일은 B등급의 비법, 『피드백』을 순식간에 익혀 보였던 것이다.
“……세상에! 대체 어디서 뭘 배우고 온 거냐? 웬만한 다크 게이머들도 모르는 비법인데.”
“천만 셀이나 냈다고.”
“천만 셀을 내고 동화율 등급을 올릴 수 있으면 난 얼마든지 낼 수 있을 것 같아. 여하튼 축하한다. 넌 이걸로 『레이드 팀(Raid Team)』 예약권을 손에 넣은 거야.”
명일도 그 사실을 깨닫고 있었다.
이것은 보스 레이드는 물론, 특수한 상황에서 필수에 가까운 최고의 비법이다.
그리고 남은 시간 동안, 명일은 비법을 가다듬어 경력 있는 다크 게이머에 못잖은 수준까지 끌어올렸다.
식량의 비축과 캡슐의 설치.
그리고 현실과 가상의 시간이 1:4 비율이므로, 거기에 어울리는 생활 주기가 필요했다.
“『라스트 앤서』는 1:4 비율인데, 4세대 게임답게 좀 더 현실성이 강조되었어. 그래서 캐릭터도 현실과 비슷할 정도로 휴식을 취해야만 해. 이것에 불만이 많은 사람들도 있긴 하던데…… 다크 게이머들에게는 딱 좋지. 자세한 부분은 조사한 자료를 봐 줘.”
“알았어.”
일렉트론 휴머니티가 자신감을 갖고 내놓은 4세대 가상현실 게임! 그것이 라스트 앤서다.
다른 게임과는 뭔가 달라도 다를 것이다.
그는 즐기기 위해 이 게임을 하는 것이 아니다.
명일은 다크 게이머가 되어야 했다.
궁극적인 목적은 양팔의 치료. 단순한 호구지책의 문제가 아니었다. 누구보다도 앞서 나가야 하기 때문에 철저하게 사전 지식을 쌓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자료는 나중에 보고, 내가 생각한 생활 주기는 이래.”
4시간 플레이! 그리고 밖에서 2시간 휴식.
1:4 비율이므로 게임 내에서는 16시간 활동하고, 접속하지 않은 동안 캐릭터는 8시간의 휴식을 취하게 된다.
잠도 수면 보조기를 이용해서 끊어서 자야 한다.
고급형 캡슐을 사용하기 때문에 플레이 하는 동안 몸은 쉴 수 있다. 정신은 밖에서 쉬면 된다.
“2시간 내로 용무는 다 해결해야 해. 외출을 할 필요가 있다거나 해도 마찬가지야.”
가상현실은 과거의 인터넷보다 더 많은 폐인을 양산한다. 그것이 게임이라면 더욱 문제가 된다. 그래서 가상현실 게임에 적용되는 법률들은 조금씩 엄격해져 갔고, 시간 가속 기술이 적용되며, 제한은 더 강해졌다.
1:4 비율이면 법적으로 접속 시간제한이 있었다.
“다크 게이머는 자기관리를 철저하게 해야 하지. 게임에 생활 주기를 맞춰야 한다는 것도 문제야. 식사도 조리 시간이 짧고 영양도 풍부한 걸 먹어야 해.”
영양제만 이용하면 내장 기관이 퇴화해서 병원에 들어갈 수도 있다. 그러면 안 된다.
명일은 중요한 것을 메모하고, 생활 주기를 작성했다.
현실에서 보내는 시간은 도합 하루에 8시간이다.
수면만 취해도 모자랄 테지만, 고급형 캡슐 이용자이므로 몸은 충분히 회복 가능!
고급 수면 보조기도 있다.
룽 노사의 수련을 거치며 꿈도 꾸지 않는 심도로 들어가는 능력도 얻었다.
그렇다 해도 익숙해지려면 상당히 피곤해질 것이다.
게다가 명일은 재활 훈련과 운동도 해야 한다. 이래저래 다른 다크 게이머보다 조건이 가혹하다.
‘식사도 조금씩 끊어서 먹는 게 좋겠군. 청소와 샤워는 하루에 한 번 반드시 해야 하니까…….’
모든 것을 염두에 두고, 집 안을 깔끔하게 정돈했다.
지운의 도움을 받아 모든 것을 정리했을 때는 서비스 개시가 코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명일의 전쟁은 이제부터 시작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