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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
『한 세대에 한 게임. 우리는 3세대 가상현실이 존재하는 한, 제니스를 버리지 않는다.』
즉, 일렉트론 커뮤니티가 제니스를 세대 교체한다는 말은 4세대 가상현실을 만들었다는 말이었다.
1세대는 시각과 청각, 제한된 촉각으로 끝났다.
2세대는 전자 신경 접속이라는 신기술 개발로 오감 전부를 재현할 수 있었다.
하지만 재현도가 비비했고, 공감각 등에 대해서는 아직 수준 미달. 안전장치가 불완전하다는 말도 들려왔다. 사고도 많이 났다고 한다.
3세대에 이르러서는 안전장치, 『프로텍터』의 개발과 보다 현실적인 세계구현으로 사람들을 사로잡았다. 그러나 물리엔진의 불완전함으로 아쉬움을 남겼다.
그렇다면 4세대는?
“그거…… 극비 정보 아냐? 잘못 안 거라거나.”
명일은 인상을 찌푸리며 물어보았다.
“사실 지인과 술 마시다가 나온 이야기야. 그 사람, 베타테스터더라고. 술에 취해서라기보다는 그만한 가치가 있으니까 투자해 볼 생각으로 흘린 거겠지. 이곳저곳에서 샐 거야.”
귀가 번쩍 뜨이는 것을 느꼈다.
‘베타테스터라니! 벌써 실용화된 거야?’
4세대 가상현실 게임이 서비스 단계에 가깝다는 것.
사실이라면 그야말로 대박이다.
“정식 서비스 시작은 약 3개월 뒤라는데…… 뭘 준비해야 할까 생각하다가, 믿을 만한 사람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더라. 너는 가상현실 동화율이 괜찮은 편이니까.”
가상현실 동화율이란 가상의 세계에서 얼마나 제대로 된 동작과 행동을 할 수 있느냐이다.
일반적인 가상공간에서는 그렇게 중요하지는 않지만, 섬세한 작업이 요구될 때는 이것이 필요하다.
명일의 가상현실 동화율은 C+.
보통 사람은 D에서 D-라는 걸 생각하면, 4단계 정도는 뛰어나다는 말이었다.
‘가상의 육체는 뇌와 뇌하수체를 기반으로 하지. 섬세한 작업도 다시 할 수 있겠어!’
그렇게 생각하면, 다크 게이머밖에 없는 것 같았다. 몸은 상처 입었지만 뇌에는 문제가 없으니까.
지금까지 오직 하나의 꿈만을 위해 공부를 해 왔기 때문에, 당장 새로운 직장을 구할 수도 없다. 누가 재활 훈련 중인 그를 채용하겠는가?
하지만 당장 미끼를 물지는 않았다.
“생각해 볼게.”
명일의 신중함에, 친구는 미소를 지었다.
양팔이 엉망이 되었음에도 판단력을 잃지 않았다는 걸 느꼈기 때문이다.
“다크 게이머가 되건, 되지 않건 어차피 재활은 해야 하니까 몸을 만들어 놔라. 어쨌든, 나는 기회라고 생각한다. 4세대 접속 장치와 함께 처음으로 나오는 게 게임이야. 어지간한 자신이 없으면 무리지.”
적어도 투자한 이상으로 뽑을 자신이 있었기 때문에 세상에 내놨을 거라는 말이다.
“그래. 생각해 볼게.”
명일은 잠시 쉬었던 만큼, 더욱 기세를 올려 재활 훈련을 개시했다. 적어도 일상생활 정도는 가능해야 했다.
그러나 그것은 최저 라인!
그 이상의 성과를 올려야만 했다.
“난 간다. 좀 더 자세한 걸 알아봐야 해서 말이야. 나중에 연락할 테니까 열심히 해라.”
친구는 그 말을 남기고 재활실을 나섰다.
“정지운!”
그때, 명일이 이름을 불러서 그는 멈춰 섰다. 명일은 잠시 머뭇거렸지만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고맙다.”
그 말을 듣자, 지운은 투덜거렸다.
“낯간지럽다, 임마. 21세기 드라마도 아니고…….”
하지만 두 사람의 입가에는 미소가 매달려 있었다.
* * *
수술비를 포함하여, 병원비만 1천만 셀이었다. 재활 훈련 때문에 나온 돈도 장난이 아니다.
‘보험을 들어 뒀는데도 이 정도의 돈이 빠져나가다니. 이게 다 의료보험 민영화 때문이야.’
모아야 하는 돈은 최저 10억 셀. 안전선은 30억이다.
그나마 10억 셀로 받는 수술의 근본적인 치료 확률은 50%라고 한다.
결국 완치를 바란다면 30억…….
보통 수단으로 그 정도 돈을 모으는 건 무리다.
희망은 다크 게이머.
1인 기업이라 불릴 정도의 수준까지 올라서야 했다.
‘그러고 보니…… 주식은 어떨까?’
명일은 얄팍한 기대를 품었다.
그는 일렉트론 휴머니티 주식 시세를 알아보기 시작했다. 4세대 가상현실이 등장한다면 일렉트론 휴머니티의 주식은 한층 가격이 오를 테니까.
하지만 역시였다. 아니나 다를까, 생각하는 건 다들 비슷한지 구입할 만한 상황이 아니었다.
‘이미 소문이 돌고 있었나 보군. 아니, 소문이 돌았을 즈음에는 이미 상승세가 됐겠지.’
매물은 있었지만 살 엄두가 나지 않았다.
일렉트론 휴머니티는 슈퍼파워에 속하는 기업이다.
기업임에도 불구하고, 기업을 넘어서 거대한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존재였다.
지금 분위기로는 황금주(黃金株)나 마찬가지.
개발이 진행되는 시점에서 알 만한 사람들은 다 알고 있었을 테고, 구입이나 관리에 신경을 썼을 것이다.
‘게다가 내 자본금이 그렇게 대단한 것도 아니고. 휴, 역시 가진 놈들이 더 가질 수밖에 없는 구조야.’
중소기업 정도라면 명일이 가진 3억 셀도 상당한 돈이겠지만, 매머드 기업의 입장에선 푼돈에 불과했다.
사실상 주식으로 돈을 벌 방법은 없었다.
퇴원하고 나서, 명일은 헬스클럽 등을 예약하려고 했지만 이것도 돈이 상당히 든다.
‘씁, 어쩔 수 없지.’
그는 가상현실에서 올바른 운동법 등을 충분히 숙지한 후, 근처의 자연조성 큐브(Cube)로 향했다.
자연조성 큐브는 일종의 공원이다.
하지만 천연의 공원은 아니며, 자연물들을 배치해 만들어진 인공적인 환경이라고 할 수 있었다.
지구의 자연은 상당히 파괴되었다.
때문에 아직 순수한 자연이 남아 있는 지역은, 방문할 수 있는 자가 극히 제한된다.
‘일단 뛴다!’
몸의 연소 스위치에 불을 붙이기 위해서는 탈진에 가까워질 정도로 달려야 했다.
숨이 턱에 닿고, 단내가 날 정도까지 달린다.
몇 번이나 멈춰 서 쉬고 싶었다. 물을 벌컥벌컥 마시고 대자로 드러눕고 싶어질 정도로 힘들었다.
폐는 찢어지고, 심장은 터져 버릴 것 같았다.
하지만 팔을 생각하면 견딜 수 있었다.
그 타오르는 아픔!
무거운 발에 힘을 불어넣으면서, 나태해진 자신을 채찍질한다. 튀는 불꽃이 새겨 놓은 상처를 생각하면, 이 따위 고통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물은 입을 적실 정도만 마신다. 그리고 몸이 식거나 굳어지지 않도록, 휴식 중에도 스트레칭을 한다.
첫날은 거의 시체처럼 잤다. 둘째 날도 비슷했지만, 사흘째에는 약간 여유가 생겼다.
그는 약간 견딜 만하면 운동량을 늘렸다.
질릴 만큼 달리고 나면 공원에 설치된 운동 기구들을 사용해서 근력을 길렀다.
그는 운동선수도 아니고, 보디빌더도 아니다.
전신의 근력을 길러야 했다.
그리고 압도적인 체력…… 장시간 가상현실에 있더라도 견딜 만한 몸을 완성해야만 한다.
아니, 그것조차 잊었다.
학대가 목적이라는 듯이 몸을 혹사시켰다.
식단은 고칼로리, 고단백.
소화가 잘 안 되는 식단 때문에 몸이 무거워지면 그것조차 날려 버릴 정도로 몸을 학대했다.
팔의 재활 훈련도 빼먹지 않고 계속했다.
상처가 아물어 가면서 고통은 조금씩 줄어들었지만, 섬세한 동작은 제대로 할 수 없었다.
특히 손가락으로 해야 하는 일들은 거의 불가능.
초조해질수록 더욱 달렸다.
그리고 한 달.
죽을 만큼 달리자 체력은 계속 늘어났다.
과학적인 운동법도 찾아보고, 온갖 수단을 동원했다.
하지만 운동은 단번에 성과가 오르지 않는다. 한계까지 몸을 몰아붙이고, 회복을 반복해 단기간에 체력을 길렀지만 생각 이상의 진도가 나오지 않았다.
명일은 초조함을 느끼기 시작했다.
그 이상한 노인을 만난 것은 그 무렵이었다.
* * *
무식할 정도의 질주 후, 자연조성 큐브의 기구들로 근력을 단련했다. 땀이 바닥을 적실 정도로!
‘그나저나 신경 거슬리는군.’
자연조성 큐브의 공터.
노인의 무리들이 느린 속도로 이상한 동작을 반복하고 있었다. 수십 명이 허공에 둥근 공을 만지는 것 같은 동작을 하면서, 요상한 호흡 소리를 낸다.
성과가 잘 오르지 않아서인지 전에는 신경도 쓰지 않았던 것이 몹시 불쾌했다.
벌써 『소문』이 흐르고 있었기 때문에, 명일의 초조함은 상당히 강했다. 정식 광고는 시작되지 않았지만 시한이 다가온다는 게 뼈저리게 느껴졌다.
휴식하면서 스트레칭을 한다. 몸이 부쩍 유연해지긴 했지만 이것도 그 이상의 성과는 없었다.
그때, 노인들이 담소하며 해산하기 시작했다.
‘휴! 이제야 저 소릴 안 들어도 되겠군.’
신경에 거슬리는 느려 터진 동작과 요상한 호흡 소리!
그제야 신경 거슬리는 노인들의 동작을 멍하니 보고 있었다는 걸 깨닫고, 명일은 다시 근력 운동을 시작했다.
그때 혀를 차는 소리가 들려왔다.
“쯧쯧쯧! 운동 요령도 없이 무작정 근육만 무식하게 붙이는 꼴 좀 보게…….”
순간 울컥해서 돌아보았다.
거기에는 이상한 복장의 노인이 있었다.
전체적인 색조는 남색에, 복잡한 문양이 금실로 수놓아진 모자.
비슷한 색상의 복장도 역사책에서나 흘깃 본 것 같은 엄청나게 오래된 옷이다.
쪼글쪼글 주름진 얼굴이지만 검버섯이 하나도 없고, 구부정한 느낌이 들지 않아서 나이를 짐작할 수 없었다.
목소리는 쇳소리가 섞여 카랑카랑하지만, 노인들 특유의 조금 부정확한 발음도 하지 않는다.
“끌끌. 뭘 잘했다고 눈을 부라리나? 집중력도 형편없군. 요새 자기 몸을 망가뜨리는 모습이 볼만하던데.”
“……노인장이 신경 쓰실 일이 아닙니다.”
화를 억지로 참으며, 명일은 그렇게 말했다. 하지만 노인은 코웃음을 쳤다.
“흥! 놔뒀다가는 팔만이 아니라 전신이 병신이 될 텐데, 내가 너처럼 심보가 고약한 줄 아느냐?”
“크윽!”
울컥 화가 치밀어 올라, ‘심보가 고약한 건 당신이겠지!’ 하고 쏘아붙이려던 명일은 깜짝 놀랐다.
노인은 한눈에 명일의 팔이 정상적으로 움직이지 않는다는 걸 알아차린 것이다.
‘어떻게? 힘 조절은 잘 안 되지만 운동에 그렇게 불편한 건 느끼지 못했는데.’
자연조성 큐브에서는 단순한 근력 운동만을 해 왔다.
배낭을 갖고 다니기는 하지만, 물건을 꽉 잡는 것 정도는 가능하다. 눈치챌 만한 일이 없었던 것이다.
그를 계속 쫓아다니지 않는 한 알 수가 없는 일이다.
“노인장. 계속 쫓아다니기라도 했습니까?”
“그런 짓 안 해도 훤하게 다 보인다! 끌끌, 손가락 놀리는 폼을 보고 있으면 보통 사람하고는 완전히 다른데 내가 장님이 아닌 한 모를 수가 없지. 수건과 물통밖에 없는 가방을, 무슨 철근 들듯이 하며 힘을 낭비하는 인간이 얼마나 있으려고? 불학무식한 놈 같으니!”
한 대 맞은 기분이 들었다.
가방 드는 동작. 그 하나만으로 노인은 명일의 팔이 궤멸 상태라는 걸 간파한 것이다.
그러고 보면, 이 노인은 저 요상한 동작을 하는 무리를 가르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러고 보면, 그 이상한 게 뭐였더라?’
명일은 어슴푸레한 기억을 더듬어, 자연조성 큐브의 공터에 있는 시간표를 생각해 냈다.
Tai-Chi Chuan[太極拳] 강의 - 15:00∼16:30
그도 간단한 한자 정도는 읽을 수 있다.
‘태극권?’
권법에는 아무 흥미도 없고, 접한 적도 없기 때문에 명일은 그게 뭔지 몰랐다.
“잠깐 팔 좀 보자.”
“끄악!”
노인은 갑자기 명일의 팔을 낚아챘다.
급히 팔을 당겨 빼려 했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명일은 근력이 떨어진 것이 아니다. 단지 세세한 힘의 가감을 하기 어려운 것에 불과하다. 그런데 벌써 근육이 쇠퇴했을 노인에게 이길 수가 없었다.
‘대, 대체 이 노인 뭐하는 양반이야!’
아니, 힘으로 진 것과는 다른 감각이었다. 마치 아무것도 없는 허공을 밀고 있는 듯하다!
“큭! 이, 이게 무슨 짓입니까? 으억!”
저절로 비명이 튀어나왔다.
노인은 손가락으로 팔 몇 군데를 찔렀는데, 근육이 제법 붙었는데도 스펀지를 찌른 것처럼 파고 들어왔다.
주무를 때는 사고를 당한 순간에 맞먹을 정도로 아팠다. 아무 반항을 할 수가 없을 정도였다. 팔만 보자더니, 등 근육이나 다리 근육까지 여기저기 찔러 본다.
명일이 축 늘어질 지경이 되자, 노인은 태연하게 그의 가방에서 수건을 꺼내 손을 닦았다.
“상당히 특이하군. 무골은 절대 아닌데…… 요새 무식하게 굴려서 꽤 흔적이 묻히긴 했지만, 일상적인 생활을 하는 사람들은 절대로 이렇게 근육이 만들어지지 않아. 꽤 특별한 일을 하지 않았나?”
정곡을 찔린 명일은 입을 다물었다.
“자네, 재활 훈련 중이지? 그 방식대로라면 몸이 먼저 망가질 거야. 여기저기서 짜깁기한 지식으로는 제대로 몸을 만들 수가 없네. 무슨 일을 했는지 말해 봐.”
“그, 그게…….”
퇴직하면서 각서까지 썼다. 그만큼 특별하고, 비밀스러운 직업이다. 이런 데서 말해도 좋은 건가?
하지만 초조한 상태의 명일은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자신의 옛 직업을 털어놓았다.
극세정금사(極細精金士).
명일은 그중에서도 2급 극세정금사였다.
1급 극세정금사는 인류 전체를 통틀어도 천 명 정도밖에 없는 존재지만, 2급은 10만 이상 존재했다.
극세정금사는 특별한 감각을 가진 사람들이 적어도 10년은 투자해야 얻을 수 있는 직업이었다. 그 정도 투자해야 3급 정금사가 될 수 있다.
대부분은 황인으로, 백인과 흑인의 비율은 극소했다.
가끔은 황인 외의 인종에서도 나온다. 하지만 1급 극세정금사만은 대부분 황인들 사이에서만 나타났다.
이유는 손끝의 감각 때문이다.
정금사의 일은 『특별한 금속』을 만드는 것이다.
보통은 만들어지지 않는 구조 조직을, 나노 단위에서 쌓아 올리는 것이었다.
극세정금사는 나노로봇을 대신하는 존재다.
나노로봇의 수명은 유한하고 기능에도 한계가 있다. 너무나 작기 때문에, 독립적인 지능을 줄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런 주제에 엄청나게 비싸서 나노로봇만으로 금속을 만들면 수익성이 없다.
때문에 정금사의 존재가 필요했다.
전자 신경으로 양팔을 극한의 미세 작업이 가능한 기계와 접속시킨다.
그렇게 손끝의 감각을 끌어올려, 나노로봇에 맡길 수 없는 일들을 하는 것이다.
나노미터란 미터의 10억 분의 1.
정금사들은 나노로봇을 제작하거나, 그 나노로봇을 조종하여 금속을 쌓아 올리기도 한다. 명일은 그 일을 하다가 사고를 당해, 미세한 동작을 담당하는 신경을 다쳤다.
1차 수술로 회복을 했지만 재활 훈련을 계속해야 젓가락질을 할 수 있는 수준이다.
만약 그가 1급 정금사였다면 회사에서 모든 걸 해결해 줬겠지만, 2급 정금사는 충분히 많다.
그가 뛰어난 솜씨를 갖고 있었지만, 그 정도 정금사는 얼마든지 구할 수 있는 것이다.
“호오…… 그렇군.”
노인은 나지막하게 감탄했다.
첨단 기술에 필요한 금속의 비율과 구조 조직.
정금사들은 그것을 알아야 한다. 그래서 회사는 극비사항을 알고 있는 명일을 입막음한 것이다.
신분조차 비밀이다. 극비사항을 너무나 많이 알고 있기에, 산업 스파이들의 목표가 되기 때문이다.
“자네…… 3개월 정도 시간이 있나? 내가 근치까지는 아니지만, 그에 못잖은 상태로 만들어 주지.”
“뭐, 뭐라고요? 그게 말이나 됩니까? 최고의 의사들이 근치하려면 30억이 필요하다고 한 상처란 말입니다!”
명일은 역시 이 노인이 사기꾼이 아닌가 생각했다.
그의 몸에 대해 단숨에 알아본 식견은 그렇다 치지만, 터무니없는 말이었기 때문이다.
“쯧! 서양 의술이 발전했다는 건 나도 알아. 하지만 무술의 역사는 4천 년이 넘었네. 그 심오함을 무시하지 말게. 무술가들은 의사 이상의 탐구심을 가지고 인체를 연구·개발해 온 사람들일세! 중국 무술은 2천 년도 전에 엔돌핀의 존재를 과학적으로 알아차리고 있었어.”
점점 더 사기 같다는 기분이 들었다.
심장에 마음이 있다고 주장하는 고대인들이 엔돌핀의 존재를 어떻게 알 수 있다는 말인가?
그러나 노인은 반발을 무시하고 손가락을 세 개 폈다.
“한 달에 300만 셀! 3개월! 숙식은 내가 제공하지. 내가 그 망가진 몸을 제대로 만들어 주겠네. 그 극세 어쩌고는 무리겠지만, 일상생활을 넘어서 고대 철인들도 부러워할 몸이 될 수 있어.”
“300만 셀? 됐습니다. 차라리 헬스클럽에 가고 말죠.”
“어허! 그러다 자네, 죽는다니까. 무슨 불사신인 줄 아나? 그런 식으로 근골을 깎아 먹으면 안 되네. 요즘 자꾸 팔이 떨리고, 관절에 얼음이 박힌 거 같지 않나?”
또다시 정곡을 찔린 명일이 입을 다물었다.
학대에 가까운 운동으로, 지구력과 체력은 단기간에 늘어났다. 하지만 그에 반한 부작용도 컸다.
가만히 있는데 팔이 떨린다거나, 관절에 차가운 뭔가 박힌 것처럼 기분 나쁘기도 했다.
“지금 단계라면 회복할 수 있네. 그깟 300만 셀! 내가 강의로 얼마나 받는지 알고 하는 소린가? 한 달 500만 셀이 넘어. 오히려 아주 양심적인 걸세.”
“아니, 그러니까요. 왜 그런 손해를 감수하면서까지 날 살리겠다는 겁니까?”
명일은 그것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는 만약 이 노인이, 사람 살리는 셈 친다느니 인의가 어쩌니 하면 완전히 돌아서기로 했다.
“그야…… 재밌을 것 같아서라네. 기본도 안 된 인간이 상급자의 근육을 갖고 있으니 흥미가 안 생기겠나?”
완전히 예상외의 대답!
영 믿음이 가지는 않았지만, 명일은 딱 한 달만 노인의 교육을 받아 보기로 했다.
* * *
룽치민. 그것이 노인의 이름이었다.
이름으로 보아서 중국인 같은 느낌이 들었다.
어떻게 불러야 하냐고 묻자, 노인은 이렇게 말했다.
“룽 노사(老師)라고 부르면 된다!”
훈련을 받기로 하자 룽 노사는 계좌번호를 불렀다.
선금 300만 셀. 아까워서 눈물이 날 것 같았지만, 속는 셈 치고 투자하기로 했다.
그러자, 룽 노사는 지친 명일을 질질 끌고 갔다.
“내, 내일부터 하면 안 됩니까?”
“내친 김에 오늘부터다!”
일단 집에 들러서, 장기간 숙식할 수 있도록 옷가지와 여러 세면도구 등을 챙겼다. 돈을 챙기려고 했지만 룽 노사는 짓궂은 표정을 지었다.
“쓸 곳도 없을 텐데 뭐 때문에 돈을 챙기나?”
‘쓸 곳이 없다니…… 대체 어디로 가기에?’
준비가 대략 끝나고, 룽 노사에 의해 끌려간 곳은 놀랍게도 개인 비행선 보관소!
개인 비행선이란 가벼운 금속으로 동체를 만들고 헬륨 가스를 채운 풍선을 달아 항행거리를 늘린, 경비행기와 비행선의 복합형이다.
‘한 대 50억 셀도 넘을 텐데. 엄청나게 부자였구나!’
이 정도 부자라면 확실히 아무것도 없는 명일에게 사기를 칠 것 같지는 않았다.
“……룽 노사님은 엄청 부자인데 저 같은 놈에게도 돈을 벌어야 하는 겁니까?”
“그렇게 버니까 부자지!”
속이 쓰려서 한 소리 했더니, 치명타로 반격당했다.
하긴 손해를 안 보니까 부자가 됐을 터!
풍선에 헬륨 가스가 주입되고, 연료가 모두 채워지자 곧 시동이 걸렸다.
경비행기라면 내부가 좁고 비행시간도 짧지만 이것은 개인용 비행선. 좁긴 하지만 며칠 정도 공중에서 보낼 수도 있었고 속도는 어지간한 여객기보다 빨랐다.
비행선은 비행 허가가 미리 등록되어 있는 모양인지 별다른 제지 없이 하늘을 날았다.
룽 노사는 그 비행 중, 어딘가에 통화를 걸었다.
“아, 재밌는 일이 생겨서 내 수업은 중단이야. 다른 제자 놈을 보낼 테니 그리 알아!”
떠드는 걸 보니 공원의 태극권 수업과 관련된 통화 같았다. 그다음에 이어진 통화는 더욱 기묘했다.
“국경을 넘을 거야. 여권? 언제부터 이 늙은이한테 그런 걸 따졌나? 굳이 내 제자 놈 백을 갖다 써야 해? 이전에 수속해 놓은 거 있잖아! 난 가도 된다며!”
“…….”
명일은 깜짝 놀랐다.
‘구, 국경을 넘는다고? 대체 어디로 가는 거야?’
룽 노사가 통화를 끝내자, 그는 조심스럽게 행선지를 물어보았다.
“그런데 어디로 가는 겁니까?”
“옐로스톤. 아나?”
“헉! 거, 거기는…….”
옐로스톤. 그곳은 21세기까지는 국립공원이었다.
하지만 21세기 후반, 용암 분출과 지각 변동으로 인하여 위험 지역이 되고 말았다.
200년 이상 흐른 지금은 위험도 때문에 통제받는 구역이다. 지질학자나 일부 통제기구에 허락받은 사람들만이 출입 가능한 장소인 것이다.
‘재, 재활 훈련을 하는 것뿐인데 그런 위험한 곳에 가야 하는 이유가 뭐야?’
바다를 건너, 약 10시간의 비행 끝에 비행선은 과거 옐로스톤 국립공원이라 불린 땅에 도착했다.
곳곳에서 연기가 솟아오르고 있지만 대부분의 땅은 풀과 나무에 뒤덮여 완전한 야생이었다.
비행선이 너른 공간, 아마 착륙 지점으로 만들어진 곳에 내리자마자 갑자기 룽 노사가 낄낄거리기 시작했다.
“클클클. 여기서 자네는 다시 태어나는 거야!”
명일은 으스스한 뭔가를 느꼈다.
‘……도망도 못 치겠군.’
그리고 약 3개월.
명일에게 있어 지옥과도 같은 시간이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