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혈왕전서 1권 (23화)
8장. 사령오아(死靈五牙) (2)
‘으음, 정말로 진성이의 말이 맞구나. 장천산행을 자신에게 맞게 소화해 내다니. 정말 기재라 아니할 수 없구나. 이제 겨우 열여섯 살밖에 되지 않았는데…….’
장백진인은 앞서 가며 서린을 살피고 있었다.
내딛는 발자국 소리로 서린의 성취를 가늠하고 있었던 것이다.
‘호연자께 이끌어 달라는 부탁만 있었을 뿐이니 그렇게 하고 있기만 하지만 정말 모를 일이로다.’
이런 정도의 성취라면 고금을 통 털어도 찾아보기 힘들 정도였다.
호연자라 하면 무예에 대해서는 거의 문외한이라고 할 만큼 장백파에서도 잊혀진 존재였다.
장백진인은 어째서 자신의 사제인 성갑이 서린을 호연자에게 맡기려 하는 것인지 의문이 들었다.
“다 왔다.”
장백진인이 멈추어 선 곳은 거대한 골짜기였다.
골짜기 안에 있는 거대한 암벽으로 서린을 인도한 것이다. 암벽의 밑에는 조그마한 초가가 아담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어르신.”
“…….”
“어르신, 접니다.”
“왔는가?”
다시 한 번 부르자 안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예.”
“어서 들어오게.”
“들어가자.”
장백진인의 재촉에 서린은 초가 안으로 들어갔다.
안에는 계피학발에 풍채가 좋아 보이는 노인이 앉아 있었다. 명상에 잠겨 있었던 듯 가부좌를 풀지 않은 모습이었다.
“앉게.”
“자, 앉자.”
서린이 처음 볼 때와는 달리 장백진인은 무척이나 조심하는 모습이 역력했다.
“이 아이가 한양에서 온 아이입니다.”
“천선검(天仙劍)이 보내 온 아이가 이 아이라고?”
“예, 어르신!”
“드디어 왔군. 이제 진인의 일을 끝난 것 같으니 그만 나가 보도록 하시게.”
“알겠습니다, 어르신.”
궁금할 만도 한데 호연자의 축객령에 장백진인은 말없이 방을 나섰다.
“이리 가까이 오너라.”
“예.”
서린이 가까이 다가서자 호연자는 말없이 서린의 손을 이끌어 맥문을 잡았다.
“허허허, 틀림없이 성갑이의 제자로구나. 그런데 나에게 줄 것이 있지 않느냐?”
호연자의 말에 서린은 할아버지가 준 금낭을 품에서 꺼내 호연자에게 내밀었다. 호연자는 금낭을 받아 들더니 안에서 봉서를 꺼내 들었다. 편지를 다 읽은 호연자가 서린을 깊은 눈으로 바라보았다.
“역시, 넌 어르신의 진전을 이었구나.”
“할아버님의 진전은 이었습니다.”
“할아버지?”
“저에게는 사사로이 친척이 되신다고 했습니다.”
“허허, 어르신의 희생이 너무도 크시구나. 그래, 어르신께서 너에게 당부한 것을 있을 테지?”
“말씀하시기로는 호연자님께 글 쓰는 법과 중원 문물에 대해 배우라 하셨습니다.”
“그 외에 다른 말씀은 없으셨고?”
“다 배운 후에는 무엇인가 다른 안배를 제게 베풀어 주실 것이라는 것만 들었습니다.”
“허허, 그렇구나. 드디어 어르신께서 결심을 굳히신 거로구나. 알겠다, 내 그리 해 주마.”
허허로운 웃음을 흘리며 호연자는 서린을 안쓰럽게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눈에는 더할 나위 없이 안타까운 빛이 역력했다.
* * *
백두산에는 대대로 산군(山君)이 많기로 유명했다.
각 봉우리마다 주인을 자처하는 호랑이들은 산군이라 불리며 사람들에게 경외의 대상이었다.
백두산에는 이 장여가 넘어가는 덩치를 자랑하는 산군들 또한 수두룩했다.
한번 나타나 포효하면 온 산야가 부르르 떠는 공포와 경외의 대상이 백두산 곳곳에 널려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러한 산군들도 두려워하는 이들이 있었다.
대대로 그 지위를 이어 오며 백두산 일대를 호령하는 산군들을 두려워하게 만든 존재들은 바로 장백오호(長白五虎)였다.
장백파의 문인들에게도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바로 장백파의 힘이랄 수 있는 실력이 출중한 일대제자 다섯이 바로 장백오호였다.
지금의 장백오호는 대사형 유진성(柚辰星), 둘째 박도운(朴櫂雲), 셋째 유청수(楡淸秀), 넷째 김호명(金淏命), 그리고 다섯째 이규백(李圭伯)이었다.
바로 서린을 백두산까지 데리고 온 이들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장백파 역사상 가장 짧은 시간 동안 장백오호에 머물렀던 사람들로 기억될 것이다. 그것도 오직 지금의 장문인인 장백진인의 뇌리에만 기록된 존재로 남을 것이다.
장백파의 역사를 기록한 그 어느 곳에서도 그들에 대한 기록을 찾아볼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그들이 빠르게 산야를 질주하고 있었다.
관도도 아닌 산야를 질주하는 그들에게서는 무시무시한 살기가 줄기줄기 뻗어 나왔다.
“잠시 쉬도록 한다.”
“예.”
“지금 어디까지 왔느냐?”
“어제 요하를 넘었으니, 요서 지방에 완전히 들어섰다고 보시면 됩니다.”
“그럼 북경까지는 오 일 후면 도착하겠구나?”
“별다른 일이 벌어지지 않는다면 그럴 것입니다.”
차가운 목소리로 묻는 진성의 말에 막내인 이규백이 공손히 대답했다.
“북경에는 별일이 없을 겁니다.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대사형!”
“어허!”
유진성이 목소리를 높였다.
“죄송합니다. 단주!”
“십 년을 넘게 계획한 일이다. 앞으로 다시는 이런 실수는 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알겠습니다, 단주!”
장백오호는 자신들의 명호를 지우고, 모종의 단체에 속한 것으로 꾸민 듯했다.
“아마도 그 아이가 오겠지요?”
“그럴 것이다. 호연자 님을 만나기 위해 가는 것을 보면 그 아이가 틀림없을 것이다. 육 년 전에는 준비가 부족해 어쩔 수 없었지만 이제 완벽해진 이상 계획대로 진행하겠지.”
“그렇겠지요.”
“모두들 명심해 들어라. 앞으로 더욱 세밀하게 주의를 기울여야 할 것이다. 우리의 정체가 탄로 나는 것은 상관없지만 그 아이의 놈들에게 알려진다면 모든 것이 허사다. 죽더라도 비밀을 엄수해야 할 것이다. 알겠느냐?”
“알겠습니다, 단주”
네 사람이 일제히 복명했다.
그들의 표정이나 말투는 같은 사문의 대사형을 대하는 모습이 아니었다.
오직 명에 의해 죽고 사는 상하관계만 남은 자들로 보였다.
“가자! 자리를 너무 오래 비울 수 없으니, 시간 안에 북경으로 돌아가야 한다.”
다섯 사람이 일제히 신형을 날렸다.
지금까지도 빠르게 달려 왔지만 경신법을 발휘하는 듯 그들의 발걸음은 산행임에도 불구하고 더욱 빨라졌다.
그리고 얼마 있지 않아 산해관을 볼 수 있었다.
산해관(山海關)!
하북성(河北省) 동쪽 발해만(渤海灣)에 면해 있는 중원 최대의 관문이다.
달리 천하제일관(天下第一關)이라 불리며 중원으로 침입하는 북방의 적을 막아 오던 관문이 바로 산해관이다.
산해관의 중요한 역할은 북동쪽의 유목민족으로부터 북경(北京)을 방어하기 위한 중요한 전략적 요충지다.
해안을 따라 전개되는 좁은 협곡을 지나 북경에서 훗날 만주(滿洲)라 칭해 지는 요동으로 가는 통로인 동시에 만리장성이 끝나는 곳이었다.
산유관은 오래 전에는 임유관(臨楡關)이란 이름으로 알려졌고, 거란족이 북경 북동 지방을 점령한 후에는 현으로 되어 천민현(遷民縣)이라 불렸다. 산해관이란 이름은 명대(明代)에 들어와 처음 붙여진 것이다.
산해관은 민중에서는 오래된 전란으로 인해 저승을 여는 문이라 여겨지는 곳이다.
장성 너머의 북방 민족과의 전투로 죽은 병사들이 산해관을 통해 들어왔기에 저승문을 여는 곳이라 생각되어진 것이다.
창!
차차창!
장백오호가 북경으로 돌아가는 도중 싸우는 소리를 들은 것은 바로 산해관 인근이었다. 병장기 부딪치는 소리가 다섯 사람의 발걸음을 멈추게 했다.
“단주님!”
“나도 들었다.”
“가 볼까요?”
“한시가 급하다. 쓸데없는 시비에 휘말릴 필요가 없다는 말이다.”
“단주님, 어차피 우리의 행적이 알려지는 것은 분명할 겁니다. 출행의 목적이 수련에 있었던 만큼 사령오아(死靈五牙)라면 수련 성과에 대해 시험해 볼 것입니다.”
“으음, 네 말이 맞는 것 같구나. 가 보도록 하자. 대신 경거망동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알겠습니다. 단주!”
장백오호는 빠르게 병장기가 부딪치는 소리가 나는 곳으로 향했다.
그곳은 산해관에서 멀지 않은 협곡이었다.
협곡 안에는 복면인들과 어디 출신인지 누구나 알 수 있는 사람들이 격전을 벌이고 있었다.
복면인들과 격전을 벌이고 있는 자들은 바로 개방의 인물들이었다.
남루한 누더기에 허리춤에 매듭을 지은 이들이 복면인과 맞서 싸우고 있는 중이었다.
개방인들의 허리춤에 매여져 있는 매듭의 수는 다양했다.
세 개에서 네 개가량의 매듭이 매어진 개방인들 십여 명이 서너 배에 달하는 복면인들에게 포위되어 공격당하고 있는 것이다.
“마침 잘됐군요. 개방문도들이 공격을 당하고 있다니 말입니다.”
“그렇구나. 어찌 보면 개방의 문도들과 우리는 떼려야 뗄 수 없는 사이니 말이다. 그것도 북경 분타주라면 이번 일은 반드시 참견을 해야 하는 일이다.”
“지금 나설까요? 단주!”
“아니다. 아직은 밀리는 기색이 없으니 좀 더 지켜보기로 하자. 저 뒤에 있는 자들이 나선다면 개방인들도 위험해질 테니 말이다. 이왕 빚을 지우려면 큰 것으로 지우는 것이 났겠지.”
“그렇군요.”
이규백이 바라본 곳에는 지금 세 명의 복면인들이 격전을 지켜보고 있었다.
삼엄한 기세를 흘리는 것을 보면 상당한 고수 같았다.
만약 그들이 격전에 끼어든다면 간신히 균형을 맞추고 있는 개방의 문도들이 위험해질 것은 불을 보듯 분명했다.
개방의 문도들도 그 사실을 잘 알고 있는 듯 복면인을 향해 거침없이 공격해 들고 있었다. 빠르게 포위망을 뚫고 벗어나기 위해서였다.
챙!
차차창!
“분타주,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저놈들이 아주 작정을 한 것 같습니다.”
“이대로 가다가는 전멸을 면치 못할 것이다. 저들중 하나라도 가세한다면 타구진이 급격히 무너질 테니 말이다.”
비록 열 사람이 펼치고 있는 소타구진(小打狗陣)이었으나 지금까지 복면인들의 잘 막아 내고 있었다.
하지만 자신들을 지켜보고 있는 세 명 중 한 명이라도 가세한다면 진이 무너질 것이라는 것을 개방의 북경분타주인 호걸개(岵乞짵) 주인성(朱寅星)은 잘 알고 있었다.
“으으음.”
아니나 다를까 지금의 공방이 마음에 들지 않은 듯 왼편에 서 있던 자가 슬슬 나서기 시작했다.
그의 손에는 금세라도 호곡성을 울릴 것 같은 구환도(九還刀)가 들려 있었다.
구환도는 대도(大刀)에 속하는 중병기다.
칼의 배면에 아홉 개의 고리가 달려 있어 휘두르는 순간 귀청을 찢는 호곡성(號哭聲)이 들리는 기병이었다.
끼― 이이익!
복면인의 손에 들린 구환도가 휘둘러지자 호곡성이 울렸다.
“으아악!”
귀를 찢는 소리가 장내에 울려 퍼지자 개방도 하나가 비명을 지르며 쓰러졌다.
가슴이 반으로 베어진 채 피를 흘리고 있는 모습이 즉사가 분명했다.
끼― 이이익!
“크으윽!!”
“컥!”
“크윽!!”
다시 호곡성이 들리고 개방문도가 쓰러지자 간신히 유지되는 소타구진이 급격히 무너지기 시작했다.
주위를 포위하고 있는 복면인들의 공격이 효과를 발휘한 것이다.
휘이이익!
유진성은 다급한 말을 흘리며 신형을 날렸다.
조금은 버티리라 여겼던 소타구진이 예상과는 달리 빠르게 무너졌기 때문이었다.
―안되겠다. 이러다가는 늦겠다. 너희들은 남아 있는 두 놈이 나서면 나오너라.
끼― 이이이익!
쐐애애액!!
호곡성이 울렸다.
하지만 전과는 달리 뒤를 울리는 소리가 특이했다.
탕!
호곡성 후 들리던 비명은 간데없고 병장기가 부딪치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누구냐?”
“대낮에 복면을 하고 개방도들을 해치다니 네놈들이야말로 누구냐?”
구환도를 막은 것은 유진성이었다.
그의 손에는 검은빛이 흐르는 기괴한 무기가 달려 있었다.
마치 낫과 같이 생긴 무기로 앞뒤로 날이 달려 있고, 낫의 자루에는 낫과 같은 재질로 보이는 검은색의 사슬이 달려 있는 무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