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혈왕전서 1권 (22화)
7장. 장백문인(長白門人) (5)
‘휴우 이제야 다 왔구나. 화살 맞은 멧돼지도 아니고, 육포를 먹을 때만 제외하고는 잠도 자지 않은 채 그냥 달리기만 하니 말이야.’
아무리 재주를 익히고 삼극정법을 익혔다지만 체력적으로 달리는 서린이었기에 지금까지 오는 동안 지칠 대로 지쳐 있었다.
동북쪽으로 산맥을 타고 올라 백두대간을 따라 백두산으로 향하는 험한 산길이었다.
산세는 험하고 계곡이 깊은 것은 두말할 것도 없었다. 간간히 나타나는 산군의 그림자가 어린 서린을 혼비백산하게 한 적도 여러 번이었다.
하지만 서린은 악착같이 장백오호를 쫓아왔다. 오기가 발동했던 것이다.
자신에게 말 한마디 안 하고 이곳까지 오는 이들에게 먼저 말을 걸기도 무안했다.
그저 악착같이 따라오기만 한 것이다.
그나마 하루에 한 번 육포를 먹을 때 쉬지 않았다면 지쳐서라기보다는 배가 고파서 따라오지 못했을 뻔했던 길이었다.
바닥은 이미 허물이 벗겨진 지 오래였다. 형을 찾아 떠나는 길이었기에 남에게 의지할 수는 없었다. 오로지 자신의 힘으로 버티며 가야 하는 길임을 서린은 잘 알고 있었다.
“조금 있으면 본문에 도착한다. 하지만 아직 날이 밝으니 어두워진 후에 들어갈 것이다. 이곳에서 좀 쉬도록 해라.”
한기가 도는 말투였다.
장백오호의 대사형인 유진성은 서린이에게 쉬라고 이르고는 나머지 일행을 놔두고 어디론가 떠났다.
툭!
육포 하나가 서린의 발 앞에 떨어졌다.
이규백이 던진 것이었다. 서린은 육포를 말없이 집어 입으로 우물거리기 시작했다.
‘질기기는 하지만 제법 맛있군.’
먼 길을 오는 닷새 동안 하루에 오직 한 번 주는 육포였다. 쉴 때마다 자신에게 던져지는 육포는 허기를 달랠 수 있는 유일한 식량이었다.
서린은 육포를 씹으며 자신처럼 말없이 육포를 먹고 있는 장백오호를 바라봤다.
‘저 양반은 그래도 조금 마음에 든단 말이야. 기회가 되면 고맙다고 해야겠다.’
서린은 싸늘한 기운을 풍기지만 어딘지 모르게 온후한 눈빛을 던지는 이규백이 마음에 들었다.
어째서 장백오호가 자신에게 이리 싸늘히 대하는지 모르지만 이규백에게 감사한 마음이 드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사람들이 저리 말이 없어서야. 어디…….’
원래부터 그런 것인지, 아니며 무슨 사연이 있는지. 정말 말이 없는 사람들이었다.
‘발바닥이 까진 것은 조금씩 아물어 가고 있으니 괜찮을 것이다. 하지만 무리를 했으니 몸을 충분히 풀어야 한다.’
쉬고 있는 곳은 사람들의 시선이 닿지 않는 계곡의 암석 틈바구니였다. 그렇지만 장소가 꽤나 넓어 몸을 풀어도 문제가 없을 것 같았다.
8장. 사령오아(死靈五牙) (1)
서린은 자리에서 일어나 몸 구석구석을 풀어 나갔다. 도인 체조와 비슷한 모습이었다.
―대단한 아이다.
―그렇습니다. 자신의 신체에 대해 잘 알고 있는 것을 보니 무인으로서의 자세도 되어 있군요.
몸을 풀어 나가는 모습을 보면서 장백의 호랑이들은 서린이 마음에 들었다.
지금 산문에 든 어린 제자들과는 다른 모습이었기 때문이었다.
서린은 한참 동안 몸을 풀었다.
수련장이었다면 했을 땅재주는 넘지 않았다. 자칫 스승이 욕을 먹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유진성이 돌아온 것은 해가 이미 서산으로 넘어가고 난 직후였다. 서린이 도인 체조를 마무리한 것도 그때였다.
“넌 본문의 장문인을 만나게 된다. 우리는 장문인께 너를 인계하고 나면 헤어지게 될 것이다. 그때부터 우리는 모르는 사람인 것이다. 혹, 어디선가 다시 만나더라도 우리를 아는 척하지 말기를 바란다.”
유진성이 던진 말이었다.
서린이 보기에 이들은 자신을 장백파의 장문인에게 데려다 준 후 어디론가 떠나야 하는 것 같았다.
그런데 다시 보더라도 아는 척 하지 말라는 말이 마음에 걸렸다. 그들의 표정은 마치 죽으러 가는 이들 마냥 비장하기 그지없었기 때문이었다.
“따라 와라.”
팟!
유진성은 서린을 재촉하며 신형을 돌려 빠르게 움직였다.
서린도 바짝 그의 뒤를 따랐다. 말이 끝남과 동시에 움직였기에 간격을 그리 길지 않았다.
한참을 달리던 유진성이 멈춰 섰다. 숲 한가운데 있는 조그마한 초막이 보였다.
“저기다.”
장백파라 하면 비록 변방에 위치해 있지만 요동 쪽에서는 알아주는 문파였다. 한데 장문인의 처소라는 곳이 다 쓰러져 가는 초막이라는 것이 이상했다. 서린은 자신이 진정 장백파에 온 것인지 의심이 들었다.
“저곳이요?”
“사정이 있어 장문인께서 저곳에서 너를 따로 보시자 했다. 그러니 너는 의심하지 말고 저 초막으로 가라. 우리도 그만 가 봐야 하니 말이다.”
서린의 심정을 아는 듯 유진성이 설명해 주었다.
“알겠습니다. 그동안 저를 인도해 주시느라 고생 많으셨습니다. 그럼 다음에 뵙더라도 아는 척 하지 않겠습니다.”
타다닥!
서린은 단숨에 인사를 하고는 초막을 향해 뛰었다.
“후후, 그놈 참 맹랑하군. 아는 척 하지 말라는 말이 마음에 걸렸나. 한 방 먹이고 가다니…….”
“그렇습니다, 대사형!”
서린이 한 말에 다섯 사람은 싸늘하기는 하지만 입가에 옅은 미소를 지었다. 마음을 주지 않았지만 무관심한 것은 아니었던 것이다.
지난 닷새간 그들은 서린을 그저 외인으로만 보고 있지 않았다. 이미 문파에서 축출된 것이나 다름없지만 조선제일의 무인라는 사숙의 수제자였다.
그런데 서린이 보인 성취는 그간 장백을 거쳐 간 수많은 고인들이 그 나이 때 보인 성취보다 훨씬 높은 것이었다. 나이가 문제가 아니었던 것이다.
발바닥에 허물이 벗겨지면서도 악착같이 쫓아오는 서린을 보며 근성은 물론 내공이나 여타 무인으로 갖추어야 할 조건은 모두 갖춘 것을 확인했다.
문파의 치욕을 씻기 위해 이제는 죽음을 향해 길을 떠나야 했다.
자신들이 죽음을 향해 떠나더라도 훗날 장백의 문호를 지켜 줄지도 모르는 이를 확인한 것에 기뻐하는 그들이었다.
“대사형! 저 아이가 우리에게서 장천산행(長天山行)을 배웠을까요?”
“확실하지는 않지만 기초는 다진 것 같다. 그리고 저 아이 나름대로 자신에게 맞게 익히는 것 같았다. 보면 볼수록 놀라운 아이다.”
“대사형 말씀이 사실이라면 정말 다행이네요.”
누구보다 무공에 대한 안목이 높은 유진성이었기에 이규백은 마음이 놓였다.
자신들만 익힌 장백파의 비전절기가 실전되지 않고 이어진다는 사실이 기뻤던 것이다.
사실 장백오호는 흔적을 남기지 않고 이곳까지 올 수 있었지만 그들은 일부러 흔적을 남겼다.
그것은 장백파에서도 오직 장백오호 다섯 사람만이 익힌 장천산행이라는 보신경의 흔적이었다.
서린이 장백오호를 따르면서도 고민한 것도 이 보신경 때문이었다.
다섯 사람이 남긴 흔적이 매번 달랐다.
한 군데 남겨진 다섯 사람의 흔적이 모두 달랐고, 다음에 이어진 흔적은 앞전과는 또 달랐기에 서린이 고민한 것이었다.
하지만 닷새 동안 장백오호의 뒤를 쫓으면서 서린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어렴풋이 장천산행이라는 보신경의 기초를 다질 수 있었던 것이다.
“가자! 이제는 중원으로 들어가야 할 때다.”
“예, 대사형!”
장백오호의 입에 걸렸던 미소가 지워졌다.
그와 함께 그들의 기세도 일변했다.
서린과 함께 있을 때는 상상할 수도 없는 짙은 살기를 흘리기 시작한 것이다.
장백오호는 맹호가 자신의 영역을 침범한 승냥이를 사냥하기 위해 떠나듯 살기 어린 모습으로 서쪽을 향해 날듯 산을 타기 시작했다.
“이제는 떠나셨군. 그래도 좋은 분들 같았는데…….”
서린은 이곳까지 오면서 장백오호들이 결코 살기만 짙은 사람들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오면서 그들이 보인 흔적이 그것을 증명했다.
처음 흔적을 살폈을 때 다섯 사람 모두가 제각각이었다.
그리고 다음에 발걸음에 남긴 흔적도 모두 달랐다.
앞의 흔적과도 달랐으며 다섯 사람 모두가 또 달랐던 것이다.
서린은 직감적으로 장백오호가 자신에게 무엇인가 배움을 주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이제 삼극정법과 천간십이수, 그리고 천세결을 통해 어느 정도 수습을 한 상태였다.
“진짜 다음에 만나면 아는 척을 하지 말아야 하는 건가?”
아쉬움을 삼키며 고개를 젓는 서린의 귓가로 창노한 음성이 들려왔다.
“왔으면 들어오너라!”
정말이지 사람의 가슴을 울리는 듯한 후련하니 듣기 좋은 목소리였다.
“알겠습니다.”
서린은 옷 가짐이 흐트러진 것이 없나 살핀 후 초막 안으로 들어갔다.
‘크크큭! 세상에 저런 분이 있다니…….’
안으로 들어온 서린은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찾아야 했다.
밖에서 들었던 목소리와는 천양지차인 사람이 초막 안에 앉아 있었기 때문이다.
서린보다 조금 더 큰 몸집에 큰 머리를 한 노인이 자신을 보며 앉아 있는 모습은 정말이지 웃긴 광경이었다.
“어허! 들어왔으면 앉지, 어째서 서 있는 게냐?”
목소리는 분명 자신이 밖에서 들었던 목소리가 맞았다.
‘진짜! 저분이 장백진인이 맞으신가?’
“맞으니까 어서 앉아라, 이놈아!”
‘이크!’
자신의 속내를 들킨 것 같아 황급히 자리에 앉았다.
“먼 길 찾아온 사질이라는 놈이 사백에게 인사도 없이 쪼르르 자리에 앉다니 고약한 놈이로다.”
“죄, 죄송합니다.”
서린은 얼른 일어서 앉아 있는 장백진인에게 절을 올렸다.
“내 진성이에게 너에 대한 이야기는 이미 들었다.”
“진성이요?”
“너를 데려온 아이 중 대사형이 되는 아이다.”
“아아! 그분이요.”
얼마 전 자리를 잠시 비웠던 싸늘한 유진성을 말하는 것임을 서린은 알 수 있었다.
자리를 비운 동안 장백진인을 만나 것이 분명했다.
“너를 이리로 부른 것은 본 파에 피치 못할 사정이 있어서다. 사제가 너를 부탁한다 했으니 그리할 생각이었지만 존장에 대한 예의가 이리 없으니 다시 한 번 생각해 봐야겠구나.”
아마도 조금 전 서린이 들어오며 자신의 외모에 대해 생각했던 것을 마음에 두고 있는 모양이었다.
“죄송합니다. 제가 불민하여 그만 사백께 죄를 지었습니다.”
서린은 장백진인이 화가 난 것 같아 머리를 조아리며 죄를 청했다.
‘후후후! 아직 때 묻지 않은 아이로고. 사제가 열심히 가르친 모양이로구나. 갈무리하고 있는 내기도 상당하니 큰 재목이 되겠어.’
아직은 나이가 어린 터라 계속 해서 머리를 조아리는 서린을 보며 장백진인은 마음이 기꺼웠다.
“흠흠! 네가 이리 잘못을 비니 그럼 용서하도록 하마. 네 호연자께 너를 데리고 갈 터이니 따라 나오도록 해라.”
자신의 마음을 들킬 새라 장백진인은 헛기침을 터트리며 방을 나섰다.
“알겠습니다.”
밤이 깊었음에도 자신을 호연자에게 데리고 간다는 말이 이상했지만 서린은 군말 없이 뒤를 따랐다.
처음 보면서 실수를 했기에 더 이상 장백진인의 심기를 상하게 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으으으, 따가워! 조금 쉬었다가 가면 안 되나. 이제 더 벗겨질 가죽도 없는데…….’
긴장이 풀렸던 탓인지 지난 시간 백두대간을 거쳐 오며 고달플 대로 고달팠던 발이 쓰리고 아파왔다. 쉬고 싶지만 호연자를 만나는 일이라 할 수 없이 장백진인의 뒤를 따랐다.
휘이익!
밖으로 나온 장백진인은 서린이 따라 나오자마자 신형을 날렸다.
그의 움직임은 장백오호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것이었다. 오 척의 단구였지만 마치 바람을 가르는 것 같은 속도였다.
“어!!”
갑자기 뛰쳐나간 장백진인을 보며 서린은 아차 싶었다.
경신법을 시전 하는 것을 보니 아직도 자신에 대한 노여움을 푼 것 같지 않았기 때문이다.
타다닥!
서린은 있는 힘껏 멀어지는 장백진인을 쫓았다. 장백진인은 백두산의 중턱을 향해 오르고 있었다. 마치 날아오르는 새처럼 거침이 없었다.
장백진인이 속도를 더함에 따라 서린 또한 삼극정법을 이용해 일으킨 기운을 천간십이수의 행로대로 발을 통해 움직였다.
거기에는 장백오호가 이곳에 오면서 가르쳐 준 장천산행의 묘리가 깃들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