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혈왕전서 1권 (20화)
7장. 장백문인(長白門人) (3)


“넌 호연자의 가르침을 모두 네 것으로 만들어야 한다. 그가 가진 지식과 학문도 그렇지만 특히나 서법은 완벽하게 배워야 한다.”
“글씨 쓰는 법이 중요한가 보군요?”
“그를 만나 서법을 배우게 되면 어째서 그동안 글씨를 못 쓰게 했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도대체 어떤 서법이기에…….’
그동안 학문을 닦으면서도 절대 글을 쓰지 못하게 한 할아버지였다.
그것이 호연자의 서법과 관련이 있을 줄은 몰랐었던 서린이 궁금증이 일었다.
“궁금하겠지만 참도록 해라. 그리고 서법을 익히며 깨달은 것들은 절대 호연자에게도 알려서는 안 될 것이다.”
“알리지 말라는 말씀의 뜻을 모르겠습니다, 할아버님.”
“우선 이 정도로만 알고 있어라. 네가 그 이유를 알게 되면 호연자가 자칫 알아차릴 수도 있으니 말이다.”
“그가 믿을 수 있는 자라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믿을 수 있는 자이기는 하지만 마음을 나눌 수 있는 자는 아니다. 그가 지향하는 것은 나와는 다르니 말이다.”
“무슨 뜻인지 알겠습니다.”
이번 일에 관해서는 믿을 수 있지만 함께할 자는 아니라는 뜻이었기에 서린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그만 떠날 준비를 하도록 해라. 얼마 안 있어 장백에서 손님이 올 테니 말이다. 나도 이만 떠나도록 하겠다.”
“예, 할아버님. 다시 뵈올 때까지 평안하십시오.”
“허허허, 그러마.”
스스슷!
할아버지가 소리 없이 사라졌다.
자신 앞에서 처음 무예를 드러냈지만 서린은 놀라지 않았다. 자신의 손을 떠난 버나를 아무렇지도 않게 잡는 것을 보았을 때 어느 정도는 짐작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제는 언제 뵐지 알 수 없구나.’
자신의 곁을 떠날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기는 했지만 조금은 서운했다.
‘저 때문에 무리를 하셨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강녕하십시오, 할아버지.’
자신을 위해 세상에 다시 나왔다는 것을 알기에 조용히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한 서린은 방으로 돌아가 짐을 꾸렸다.
짐이라고는 별거 없었다.
스승의 지시로 꾸린 짐은 갈아 신을 가죽신 두 족과 괘나리 봇짐 하나뿐이었다.
짐을 꾸리고 난 뒤 잠시 눈을 붙인 서린은 집안에서 이는 서늘한 기세에 눈을 떴다.
“왔구나.”
서린은 짐을 챙긴 후 서둘러 방을 나섰다.
아직은 어두운 새벽이지만 사랑채까지 가는 데는 아무런 지장이 없었다.
사랑채로 가자 자신을 맞이하러 온 장백파의 문인들을 볼 수 있었다.
얼굴까지 내려오는 방갓을 쓰고 검은빛이 도는 무복을 입은 그들은 전형적인 무인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으음, 이상하구나. 도인이라는 이들이 저런 예기를 풀풀 풍기고 있다니…….’
어쩐 일인지 장백에서 온 무인들이 스승에게 예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무기로 보이는 것은 갖고 있지 않았으나 그들이 풍기는 예기는 서린이 보기에도 심상치 않은 것이었다.
스승의 표정도 심상치 않음을 느낄 수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스승은 눈살을 찌푸리며 질책을 마다하지 않았다.
“어이하다 장백이 이리 살벌해진 것인지…… 네놈들이 풍기는 예기로 주변의 모든 기운이 죽지 않느냐! 누누이 일렀건만! 강보다는 유를, 무보다는 예를 잃지 말라 했거늘. 쯔쯧! 아직도 이 모양이라니…….”
장백파에서 온 이들이 스승의 질책에 고개를 숙이고 있지만 기세만은 죽지 않았다.
‘순탄치만은 않겠구나.’
장백파에서는 명나라에 가서 생활하기에 불편함이 없도록 명의 풍물을 익힐 예정이다. 스승의 말에 순순히 승복하지 않는 것을 보니 장백파에서의 생활이 순탄치 만은 않을 것 같았다.
특히나 자신이 익히고 있는 것과 장백파의 무인들이 풍기는 기운이 상이함을 느끼고 있기에 은근히 걱정이 들었다.
“이놈들이 그래도!”
노기가 담기 고함이 다시 울렸다.
예기를 꺾지 않았던 장백의 문인들이 움찔했다.
성갑이 목소리에 기세를 담았기 때문이다. 성갑의 호된 질책 때문인지 장백에서 온 이들은 기세가 조금은 누그러졌다.
‘익히고 있는 무예가 그래서 그런 건가? 분명히 장백파는 도가계열의 문파라고 들었는데 정말 이상하구나.’
누그러졌다고는 하지만 아직도 날카로운 예기가 많이 남아 있어 보통 사람이 본다면 많이 두려워할 터였다.
저절로 일어나는 기세가 그렇다면 익히고 있는 무예의 특성이 분명했기에 의문이 아닐 수 없었다.
“그리 살기가 짙어서야 어찌 도인이라 하겠느냐? 앞으로 좀 더 자숙해야 할 것이다. 알아들었느냐?”
“예!”
마지못해 대답하는 분위기가 역력했다.
장백파에서 위치가 어찌 되는지는 모르겠으나, 스승의 추상같은 모습은 서린으로서도 처음 보는 것이었다.
‘스승님의 기세가 대단하구나. 역시나 조선제일의 무인이라는 명성이 허명은 아니시구나.’
서린으로서는 의외의 모습을 보여 준 스승에 대해 일말의 두려움마저 느꼈다. 장백파의 문인들을 호령할 때 스승으로부터 알 수 없는 기파가 흘러 장백파의 문인들을 압박하는 것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서린아, 이리 오너라.”
“예, 스승님.”
스승의 부름에 서린은 장백파의 문인들 옆으로 섰다.
“이 아이가 내 의발을 이은 아이다. 한 치의 소홀함도 없이 대해야 할 것이다. 알아들었느냐?”
“알겠사옵니다.”
“서린아, 이들이 너를 장백파로 안내해 줄 것이다. 장백파에 가면 장백진인을 뵙도록 해라. 너를 기다리고 계실 것이다.”
“예, 스승님.”
“사형께는 내 미리 기별을 넣어 놨으니, 그곳에 머물며 수련을 하도록 해라. 그리고 틈이 난다면 이 스승의 외숙이신 호연자(浩然子) 님을 한번 만나 뵙도록 해라. 많은 가르침을 주실 것이다.”
“알겠습니다. 스승님!”
‘호연자라는 분이 스승님의 외숙이었던 건가?’
호연자에 대한 이야기는 할아버지로부터 지난밤 들은 터였다. 장백파에 가면 자신의 앞길에 대해 이야기해 줄 사람이 스승의 외숙이라는 것이 조금은 의외였다.
“갈 길이 멀다. 어서 떠나거라.”
“그럼 기체 보존하십시오.”
어차피 정해진 길이었다. 서린은 마당에 엎드려 마지막 인사를 했다.
인사가 끝나자 장백에서 온 다섯 명의 문인들이 고개를 숙여 보이고는 서둘러 집을 나섰다.
서린도 급히 장백파의 문인들을 따라나섰다.
어둠이 가시지 않은 길이었지만 무척이나 빠른 발걸음이었다.
성갑의 집을 나선 후 장백의 문인들은 한성부를 지나 동북방으로 길을 잡았다.
험한 산세가 이어지는 산줄기를 따라가는 길이었다. 행여 사람을 만나면 안 되는 탓에 그들은 깊은 산중을 통해서 백두산으로 가려고 하는 것이었다.
산을 타기 시작한 후에 날이 밝기 시작했지만 산속이라서 그런지 아직도 어두웠다.
‘이러다 산군이라도 만나면 큰일을 치르게 될 텐데…….’
서린은 산맥의 중심을 관통하며 북으로 올라가는 장백의 문인들을 보며 요즈음 기승을 부리는 호환이라도 만나지 않을까 걱정이 되었다. 그만큼 장백파의 문인들이 뚫는 길은 깊은 산중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내 걱정을 접었다. 인적이 보이지 않는 깊은 산중으로 들어서자 다섯 사람이 갑자기 살기를 흘리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으음, 저 정도 살기라면 산군도 알아서 피해 갈 정도다. 도가계열인 장백파에 저런 사람들이 있다니, 도대체 어떤 사람들인지 모르겠구나. 말을 붙여 볼 수도 없고.’
서린은 앞서 가는 사람들이 궁금해졌지만 살기로 인해 감히 먼저 말을 붙일 수 없었다.
타타타탓!
산중으로 들어오자 진인들은 발걸음을 달리했다. 평지를 달리는 것처럼 산을 타는 그들의 모습은 한 마리 늑대를 연상시킬 정도로 빨랐다.
‘으음, 경신법을 펼치는 건가? 하지만 너무 활량하고 거친 기세다. 분명히 도문이라고 했는데…….’
풍기는 살기도 그렇고, 조선 도인들의 본향이라는 장백파에서 어찌 저런 기세를 흘리는 자들이 나왔는지 의아했다.
서린이 보기에 자신이 들은 것과는 다르게 정상적인 장백파의 문인들이 아닌 것이 분명했다.
파파팟!
이곳이 깊은 산중임을 알 수 없게 만드는 빠른 속도로 치달리는 발걸음이었다. 그들은 서린이 뒤따라오거나 상관없이 제 갈 길을 가고 있었다. 그저 자신들의 목적지를 향해 거침없이 산중을 달리는 중이었다.
‘무지하게 빠르군. 하지만 나도 뒤처질 수야 없지.’
파파팟!
서린 또한 빠르게 달리고 있었다. 그냥 달리는 것치고는 무척이나 빠른 속도였다.
경신법을 사용하는 것도 아닌데 험준한 산길을 평지를 전력으로 질주하는 것처럼 빠른 속도를 내고 있었던 것이다. 지난 시간의 수련이 없었다면 따라갈 엄두도 내지 못했을 일이었다.
‘따라가는 것은 힘들지 않지만 아무 말도 없다니 이상하다. 저 사람들은 그저 길을 가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나를 데리고 장백파로 데려가기 위해 온 것인데 말이야. 으음, 어쩌면 나를 시험하는 것인지도 모르겠구나.’
명을 받은 자들이 데리고 가야 할 사람을 상관하지 않는 것을 보면 자신을 시험해 보는 것이 분명했다.
‘응! 이상한데…….’
그동안은 그냥 따라가느라 무심히 지나쳤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샘에서 흘러나온 샘물 때문에 삼 장여의 땅이 젖어 있었다. 앞서 가던 장백파의 문인들은 분명히 젖어 있는 땅을 밟고 지나쳤는데 앞쪽에는 발자국이 하나도 남아 있지 않았다.
‘경신법이라는 것을 펼친 모양이구나.’
할아버지가 전해 준 삼극정법을 운용하며 달리고 있었다. 수련을 위해서 내기 보다는 근력으로 이들을 뒤쫓고 있었다.
하지만 장백파의 진인들은 자신과는 다른 것 같았다. 거칠어질 만도 하건만 호흡 소리는 깊이 침잠되어 있어 들리지도 않았다. 그저 바람과 같이 달린다는 표현이 맞을 것이다.
그것도 발자국 하나 남기지 않는 가벼운 몸놀림으로 이들은 산을 타고 있는 것이다.
대부분이 오르막이라 힘들만도 했건만 지친 기색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경신법을 펼친 것이다.
‘숨 쉬는 거야 할아버지가 가르쳐 주신 삼극정법 대로 하면 되는데. 저 발걸음은 영 이상하구나.’
앞서가는 자들의 발걸음을 따라 해 보고 싶었지만, 잘되지가 않았다. 가파른 산길이라 줄을 탈 때의 균형 감각과 살판을 하며 다져진 다리 힘으로 뒤쫓을 뿐이었다.
‘그냥 가벼운 느낌뿐인 것 같지만 그런 것 같지는 않다. 그리하면 저리 빠른 속도는 낼 수는 없을 테니까.’
빠른 속도는 그냥 얻어지는 것이 아님을 서린은 잘 알고 있었다.
힘을 바탕으로 해야만 걸맞는 속도가 나옴을 그간 재주를 익히며 체험한 서린이었다.
‘계속 힘을 주는 것은 아닌 것 같다. 그저 한순간 최대한 힘을 발휘해 그걸 바탕으로 몸을 앞으로 내던지듯 하는 것 같으니까. 잠시 쉴 것 같으니 생각을 정리해 보고 조금 있다가 길을 다시 나서면 한번 해 봐야겠다.’
멀리 보이는 곳에서 멈춰 서 있었다.
장백파의 문인들은 하루 정도 산길을 내쳐 달리다가 이제야 쉬려 하는 것 같았다.
장백의 문인들은 무엇인가를 염려한 듯 바위를 뒤로 한 채 전면을 경계하며 바닥에 앉았다.
―대사형! 참으로 알 수 없는 아이입니다. 아무리 사숙의 진전을 이었다지만 이제 겨우 아홉 살이라고 했는데 말입니다.
―관심을 갖지 마라. 우리와 길이 다른 아이다.
―하지만 대사형!
―내 말을 무엇으로 알아듣는 것이냐? 우린 우리 일로도 갈 길이 바쁜 사람들이다.
전음으로 질책하는 대사형 유진성(柚辰星)의 말에 입을 다문 이규백(李圭伯)은 서린을 쳐다보았다.
아무리 사문의 일 때문에 이리되었지만 볼수록 알 수 없는 아이였다.
이제 겨우 열여섯 살인 소년이 자신들을 따라 지치지도 않고 쫓아오고 있었다. 아무리 뱃속에서부터 무공을 익히고 나왔다고 해도 이런 일은 거의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후우…….”
약간은 거친 숨소리와 함께 아이가 도착했다. 대사형의 전음 때문에 살갑게 대할 수는 없지만 대단한 아이였다.
“꼬르르륵!”
‘아직은 어리구나.’
속이 허한지 배곯는 소리가 나자 부끄러운지 고개를 조아리는 소년이었다.
대사형이 뭐라고 하지 않을 것을 알기에 이규백은 품에서 가지고 온 육포 한 조각을 꺼내 배고파 하는 서린에게 건넸다.
“고맙습니다.”
서린은 인사를 한 후 이규백이 준 육포를 받아 들고는 맛있게 먹기 시작했다.
‘으음, 어째서 저 아이에게 관심을 가지면 안 되는 것인지 모르겠구나.’
이규백은 의구심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어째서 장문인이 지금 데려가는 서린이라는 아이에게 관심을 갖지 못하도록 했는지 알다가다 모를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