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혈왕전서 1권 (19화)
7장. 장백문인(長白門人) (2)


“네가 익혀 온 것은 우리 가문의 절기이지만 우리 가문의 절기가 아니기도 하다.”
“스승님, 그것이 무슨 말씀이신지요?”
“천간십이수와 천세결은 너에게 고조할아버지가 되시는 충열공께서 우리 가문의 미흡한 절기를 보완하여 완성한 것이다. 그렇기에 너와 이 스승은 같은 일맥의 절기를 익힌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사연이 있었다니 놀랍습니다.”
“가문에서 내려오는 무수히 많은 절기를 두고, 너에게 이 두 가지를 가르친 것은 이유가 있어서다. 뛰어남은 둘째치더라도 이 두 가지 절기는 익혔다는 표시가 절대 나타나지 않는 다는 것 때문이다. 이 스승이 남들에게 무인으로 보이지 않는 이유 또한 이러한 특성에서 비롯된 것이기도 하다.”
강한 무력을 가진 스승이 문인으로 보이는 이유를 알았기에 서린이 고개를 끄덕였다.
“또한 이 두 가지 절예는 내기의 운용법이 어떠하건 모두 수용할 수 있다는 장점을 지니고 있다. 네가 어려서부터 익힌 기예와 쉽게 접목이 되는 것도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서린은 설명을 들으며 스승의 지도가 고심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서린아, 할아버지로부터 이야기를 들었겠지만 중원은 무서운 곳이다. 특히나 무림이라는 곳은 자신을 감추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는 곳이기도 하다. 항상 자신을 최대한 숨기고 주변을 살피는 것을 잊지 말아라. 그리고 장백파에서 어디까지 배움을 줄지는 모르겠으나 최대한 수용해 너의 것으로 만들어라. 그러면 앞으로 명에서 활보하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다.”
“명심하겠습니다.”
“그래, 이제 정말 마지막이로구나.”
“스승님 그동안 이 어리석은 제자를 가르쳐 주신 은혜는 죽어서라도 잊지 않겠습니다.”
김성갑이 말을 마치자 서린은 자리에서 일어나 고개를 조아리며 큰절을 올렸다.
“스승님, 지금은 가형의 일로 먼 타지로 떠나오나, 일을 마친 후에는 스승님의 절예를 이어 바람을 이루겠습니다.”
서린은 성갑이 자신에게 열성을 다하는 이유를 할아버지에게 들어 알고 있었다.
가문을 이을 후사가 없어 안타까운 처지에 놓여 있는 성갑에게 자신은 자식 이상의 의미가 있었다.
“그래, 이만 쉬어라. 내일이면 먼 길을 떠나야 할 테니 말이다.”
“그럼 쉬십시오.”
‘스승님, 이 제자가 스승님의 절기가 최고라는 것을 중원에 알리겠습니다.’
스승의 바람을 저버리지 않겠다는 다짐을 한 후 서린은 행랑채로 향했다.
행랑방으로 들어서자 좌정을 한 채 명상에 잠겨 있던 한 노인이 눈을 떴다.
“스승을 만나 뵙고 오는 길이냐?”
“예, 할아버님.”
“어서 자리에 앉아라.”
자리에 앉자 한 노인은 지긋한 눈으로 서린을 바라보았다.
“서린아, 중원으로 들어가는 것이 싫다면 지금이라도 말하도록 해라.”
“아닙니다, 할아버님. 형이 간 길이고 가문의 숙명이 함께하는 길임을 이미 알고 있습니다. 제가 해야 할 일이니 물러서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리 각오가 되어 있다니 다행이구나.”
그동안의 수련으로 이미 각오를 읽을 수 있었던 한 노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할아비가 너와 함께 못하는 것을 야속타 생각하지 마라. 금약에 묶여 있어 나로서도 어쩔 수 없으니 말이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래, 믿으나.”
간결하지만 믿음직스러운 대답이었다.
“장백에 가면 너를 인도해 줄 이가 있을 것이니 그의 말에 따르도록 해라. 그가 너를 중원으로 들어가게 해 줄 것이다.”
“할아버님, 말씀하시는 분이 어떤 분입니까?”
“호연자라는 사람이다. 잘 알려지지 않은 이이기는 하지만 큰 지혜를 품고 있는 사람이다.”
“호연자는 믿을 수 있는 사람입니까?”
형의 편지로 인해 할아버지와 스승을 제외하고는 누구도 믿지 않게 되었기에 서린이 물었다.
“믿을 수 있는 자이기는 하지만, 작금의 상황을 보면 그 누구도 믿을 수 없는 것이 현실이다. 조선에서 건너간 이들이 참변을 당한 것을 보면 말이다.”
“그렇다면 소손이 알아서 하겠습니다.
“생각이 참으로 깊구나. 너라면 잘 해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너에게 따로 남겨 놓은 안배가 있다.”
“안배라고 하시면…….”
“아직은 알려도 하지 마라. 베풀어진 안배는 네게 어려움이 있을 때 너를 인도하는 길잡이가 될 것이다.”
“저를 위해 많은 것을 준비하신 것 같습니다.”
“맞다. 가지고 있는 것을 전부 쏟아부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지만 그 정도로는 아직도 확신을 할 수는 없는 성황이다. 명심해라, 네 노력이 없는 한 모든 것이 소용이 없음을 말이다.”
“알겠습니다, 할아버님.”
할아버지의 당부에 서린은 굳은 어조로 대답을 했다.
“할아버님, 저는 생각할 것이 있어서 내일까지 수련장에 있을까 합니다.”
“으음, 그래! 너도 생각이 많겠지. 네가 원한다면 그리하도록 해라.”
출발할 날자가 내일로 다가오니 마음이 심난할 것도 같았다. 밤을 새운다 해도 지장을 받지 않을 것이기에 승낙을 했다.
생각을 정리할 시간은 반드시 필요한 것이었다.
행랑방을 나와 수련장으로 간 서린은 탄기선봉을 만지작거리며 앞으로 다가올 미래에 대해 생각을 했다.
굳은 결심으로 대답을 하기는 했지만 아직은 두려움이 남아 있었기에 털어 버리려는 것이다.
“아직은 아무것도 모르지만 상관없다. 형을 찾는 것이 쉽지는 않은 일이겠지만 포기만 하지 않으면 된다.”
우우우웅!
서린의 마음을 아는 것인지 탄기신봉이 진동하며 울음을 토해 냈다.
“후후후, 그동안 날 키워 줘서 고맙다. 네 덕분에 힘을 얻을 수 있었으니 말이다. 내가 이곳으로 돌아오는 날에 다시 보도록 하자.”
우우우웅!
서린의 독백에 탄기선봉은 대답으로 자신의 몸을 떨었다.
“서린아!”
문밖에서 할아버지의 음성이 들려왔다.
“나가겠습니다.”
아무리 할아버지지만 탄기선봉은 문외인에게는 보여 줘서는 안 되는 기물이었기에 서린은 서둘러 밖으로 나갔다.
“주무시지 않고 어쩐 일이십니까?”
“서린아.”
“예, 할아버지.”
“지금은 어떠냐?”
“아까보다는 마음이 편안합니다. 못난 모습을 보여서 죄송합니다.”
“아니다. 그럴 수도 있는 일이니 말이다. 마음을 완전히 굳힌 모양이니 마저 이야기를 해 줄 것이 있겠구나.”
“하실 이야기가 남아 있으시다는 말씀입니까?”
이야기가 전부 끝났다고 생각했는데 아니라는 것이 못내 이상했다.
“그래, 아까는 네 결심이 확실하지 않은 것 같아 꺼내지 못한 이야기가 있구나.”
“그러셨군요.”
“많은 이야기는 해 주지 못하겠지만 알고 가야 할 것이 있다. 그것은 당금 무림의 사정과 전후의 일이다. 중원에는…….”
단음막을 둘러 소리가 새어 나가는 것을 막은 한 노인은 서린에게 알아야 할 것들을 말해 주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먼저 임금님께서는 중원의 무림인들에게 돌아가셨고, 그것이 천우신경(天宇神鏡)이라는 거울 때문이라는 말씀이신가요?”
“그래, 그것은 우리 민족 대대로 내려오는 보물이란다. 천우신경의 비밀을 푸는 자가 천하를 지배한다는 전설을 간직한 것이지. 천우신경은 궁왕이라 일컬어지는 조선의 태조인 이성계가 얻었고, 지금까지 조선의 왕가에서 비밀리에 보관해 오고 있었다. 하지만 조선왕실에서 보관하던 그것은 중원의 무림인들에게 탈취를 당했고, 그 와중에 놈들이 쓴 독수로 선왕인 명종이 죽은 것이다.”
“어떻게 그럴 수가.”
서린은 믿을 수가 없었다.
아무리 힘을 가진 무림인들이지만 한 국가의 힘을 감당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런데 그들이 왕실을 침범하여 한 국가의 임금을 죽이고 보물을 탈취해 갔다는 사실이 믿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자신의 할아버지인 한 노인이 어쩐지 지금의 조선조에 대해 반감을 가진 것 같은 말투에서 의아함을 느꼈다.
“흉악무도한 놈들이로군요. 어찌 한낱 야인이 남의 나라 왕실로 난입하여 그런 일을 저지르다니 말입니다.”
“그들은 한낱 야인으로 치부할 수는 없다. 어쩌면 이 나라 조선보다 더한 힘을 가지고 있을 수도 있는 놈들이 바로 그들이니 말이다. 이런 일은 비단 우리뿐 만이 아니다.”
“그럼 다른 곳에서도 일어났다는 말입니까?”
“그렇다. 그 어디에서도 이런 일들이 수도 없이 일어났단다. 그로 인해 역사에서 사라진 나라들이 얼마나 많은지는 헤아릴 수 없을 지경이란다.”
“그럼 역사 속에 등장했다 어이없이 망한 나라들이 다 그랬다는 이야기입니까?”
“전부는 아니겠지만, 반 정도는 그렇다고 봐야 한다.”
“으으음.”
서린은 한낱 무림이라는 집단이 그런 힘을 가지고 있으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만큼 자신의 할아버지가 하는 이야기는 듣도 보도 못했던 이야기였기 때문이었다.
“서린아, 우리 땅에는 세 개의 보물이 존재하고 있었단다. 제일 첫 번째 보물인 천부의 힘은 하늘에 묻은 것이라 초현한 이후 아직까지 세상에 한 번도 나타난 적이 없단다. 또한 두 번째 보물인 미륵인(彌勒印)은 후세를 위한 것이라 지저 세계 깊숙한 곳에 봉인되었기에 아직은 나올 때가 아니란다. 오직 세상에 출세해 빛을 뿌렸던 것은 천우신경 하나뿐이었다. 그로 인해 우리 민족이 명맥을 유지해 오고 있는 것이지. 하지만 예상치 못하게 천우신경을 놈들이 약탈을 해 갔다. 그래서 조선왕실에서는 너를 통해 그것을 찾으려는 것이다.”
“저를 통해서요?”
“그래, 놈들이 천우신경을 노리는 것은 오래 전부터 감지돼 온 일이란다. 그래서 이 땅에 한다 하는 무인들이 놈들의 뿌리를 찾아 중원 땅을 밟았지만 모두 살아 돌아오지 못했다. 세 번에 걸쳐 이 땅의 무인들이 중원으로 떠났지만 돌아온 이는 아무도 없었던 것이다. 모두 놈들에게 당한 것이지. 그중 마지막으로 갔던 무인들 중에 네 형인 선주가 끼어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 왕실에서 너를 택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네 자질이 보기 드물게 훌륭한 것이기에 가능한 일이지만 다른 이유도 있음이다.”
“그렇다고는 하지만 어째서 저를…….”
서린은 말꼬리를 흐렸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했다. 그런 일이라면 아무리 형이 그들 중에 끼어 있다고 해도 자신이 갈 길이 아니었던 것이다.
무예를 배우기는 했지만 엄격히 말하면 무인이 아니었다.
무예란 것도 지난 이 년여 동안 자신의 스승에게서 배운 것이 전부였기에 무인이라 말할 수 없었던 것이다.
스승과 같은 많은 무인들이 이 땅에 존재하고 있음에도 자신을 중원에 보낸다는 것이 조금은 이상했기에 말꼬리를 흐린 것이다.
“안다. 네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말이다. 넌 아직 무인이 아니다. 그렇다고 무조건 무인이 아니라고 말할 수도 없는 상태다.”
“예?”
“네 스승에게서 배운 천간십이수와 천세결은 그리 녹록한 것이 아니다. 어쩌면 이 땅을 밟고 살아온 무인들의 모든 것이 담겨 있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만큼 그 크기를 잴 수 없는 무예가 바로 네가 익힌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제가 익힌 것이 그런 거라고요?”
“아직 네가 실감을 하지 못하겠지만, 장백파로 가게 되면 알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이 얼마나 뛰어난 무예인지 말이다.”
“으음.”
서린은 자신의 할아버지가 거짓말을 한다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허튼소리를 할 분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아는 까닭이었다.
“서린아, 내가 너에게 학문을 가르치면서도 글을 쓰지 못하겠는지 아느냐?”
“소손도 항상 궁금하게 생각하는 바였습니다.”
서린은 그동안 자신의 할아버지로부터 호흡법 하나와 학문을 배워 왔었다.
할아버지로부터 고절한 학문을 배우면서 한번도 글을 써 본 적이 없었다. 할아버지가 글씨를 처음부터 글씨를 쓰지 못하게 강요한 탓이었다.
“글씨 쓰는 법은 호연자라는 사람에게 배우게 될 것이다.”
“호연자라면 저를 인도한다는 분이 아닌가요?”
“그래, 그는 조선왕실에서 안배한 사람이다. 그에게서 너는 중원 문물을 배우게 될 것이 분명하다. 조선왕실에서 준비한 것이다. 다 배운 후에는 이곳에서 있었던 모든 것을 잊어야 할 것이다. 왜 그렇게 해야 하는지는 중원에 들어가 보면 알 것이다.”
“무슨 말씀이신지 잘 모르겠습니다.”
“아마도 너는 중원에서 다른 신분으로 살아가게 될 것이 분명하다. 준비하는 것을 보면 그런 느낌이 강하니 말이다. 하지만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니다.”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니요?”
“호연자에게 배워야 할 것이 중요하다.”
“무엇을 배우는 겁니까?”
“호연자가 왕실에서 준비한 사람이 분명하지만 또한 이 할아비가 안배한 사람이기도 하다.”
“할아버지가요?”
“그래, 호연자는 자신의 존재가 내가 안배한 것임을 모른다.”
“으음.”
당사자도 모르게 안배를 했다는 말에 서린이 신음을 삼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