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혈왕전서 1권 (18화)
6장. 입궁면담(入宮面談) (3)


행랑방으로 들어선 서린은 자리에 앉아 조심스럽게 품에 있는 것을 꺼냈다.
“분명히 형이 떠날 때 입고 있었던 옷자락이다.”
기다란 물건을 싸고 있는 천은 잊을 수가 없는 것이었다. 바로 형이 입었던 옷 중 일부였기 때문이다.
베로 만든 옷에 물을 들이려고 했을 때 자신의 잘못으로 얼룩이 졌었다. 얼룩이 꼭 매화꽃 같다고 말하자 그렇다며 환하게 웃던 형의 모습이 아직도 기억에 선명했다.
서린은 떨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천을 풀었다.
“피리구나.”
천에 싸여 있던 것은 거무튀튀하게 때가 꼬질꼬질하게 끼어 있는 피리였다.
날라리를 그렇게 잘 불던 형이었다. 중원으로 들어가 그 대신 불던 것 같았다.
“크으윽.”
투투투둑!
참고 있던 눈물이 쏟아졌다.
형의 유품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눈물을 흘리고야만 것이다.
“혀엉! 크흐흐흐흑!”
서린은 손때가 묻은 피리를 품고 오열했다.
누군가 있었다면 애써 참을 수도 있었겠지만 지금은 혼자였기에 마음껏 울 수 있었다.
그렇게 소리 죽여 울던 서린은 마음이 어는 정도 진정이 되자 피리를 입에 가져다 댔다. 피리를 불면 중원으로 간 형의 얼굴을 떠올릴 수 있을까 해서였다.
호흡을 가다듬으며 피리에 숨을 불어넣었다.
마음과는 달리 소리가 나지 않았다. 다시 숨을 가다듬어 피리를 불었지만 역시나 소리가 나지 않았다.
“어째서 소리가 나지 않는 거지?”
막혀있나 싶어 피리를 살폈지만 이상은 없었다.
“날라리를 부는 법대로 호흡을 해서 그런가? 어디!”
서린은 할아버지가 가르쳐 준 호흡법을 멈추고 보통의 호흡으로 피리를 불었다.
삘― 리리리리!
때가 묻어 있기는 하지만 상당히 좋은 것인지 맑은 소리가 피리를 타고 흘러나왔다.
“후우, 제대로 나는구나. 다시 불어 보자.”
소리가 마음에 든 서린은 다시 피리를 불기 시작했다.
청아한 피리 소리가 행랑을 나와 성갑의 집안 구석구석으로 퍼져 나갔다.
‘형이 불었다면 분명히 할아버지가 알려 주신 호흡대로 했을 텐데…….’
곡이 끝나 가며 한 가지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 형이라면 절대로 다른 호흡으로 피리를 불지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이었다.
서린은 급히 멈추고 원래의 호흡으로 되돌아와 피리를 불었다. 역시나 피리에서는 소리가 나지 않았다.
“분명히 뭔가 있다.”
정신을 집중하고 있었기에 자신의 호흡을 따라 나가는 기운이 무엇인가에 막히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 때문에 소리가 나지 않는 것이 분명했다.
‘계속 불어 보자.’
서린은 기운을 집중했다. 조금 전 보다 강한 기운으로 호흡을 따라 피리 속으로 밀어냈다.
‘이 정도 기운이면 박살이 났을 텐데 그렇지 않은 것을 보면 보통 피리가 아니다.’
서린에 피리에 비밀이 담겨져 있음을 직감했다.
보통 사람이 그냥 불게 되면 소리가 나지만, 자신이 하는 호흡으로 불면 아무 소리가 나지 않는다는 것이 그것을 증명했다.
‘형이 나에게 뭔가를 남긴 것이 분명하다.’
서린은 호흡을 통해 자신이 가진 기운을 전부 밀어내며 피리를 불었다.
삑!
툭!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피리에서 뭔가가 빠져나와 바닥으로 떨어졌다.
두툼한 반지처럼 생긴 것이었다.
“안쪽에 붙어 있다가 기운에 밀려서 말려 나왔구나.”
종이보다 얇은 가죽 같은 것이 돌돌 말려 반지와 같은 모양이 된 것이었다.
피리 안 면에 붙어 있다가 기운에 밀려서 말려 나온 것이 분명했다.
서린은 조심스럽게 말린 부분을 풀었다.
무늬를 보니 뱀가죽이 분명했다. 검은색의 뱀가죽은 무척이나 정말 얇았다.
통으로 벗겨 내 피리 안쪽에 비밀스럽게 붙인 것이 틀림없었다.
“형이 남긴 것이라면 그냥 이것만 있지는 않을 것이다.”
서린은 눈을 크게 떠 피리와 같은 모양을 하고 있는 뱀가죽을 살폈다.
눈으로는 아무것도 발견할 수 없었다. 그냥 검은빛이 도는 뱀가죽일 뿐이었다.
“크으, 아무것도 없다니…….”
실망감이 가슴을 맴돌았다. 허무함 때문인지 서린은 계속 가죽을 어루만졌다.
“뭐지?”
손끝에서 뱀이 본래 가지고 있었을 무늬와는 다른 것이 느껴졌다.
서린은 천간십이수를 응용해 손끝의 감각을 최대한 높였다.
“하하하, 있다.”
아주 미세하게 느껴지는 촉감을 통해 뱀가죽의 겉면에 누군가 남긴 세필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었다.
“필적을 보면 형이 남긴 것이 틀림없다.”
글자 한 자가 겨우 쌀 한 톨도 되지 않았지만, 서린은 글씨의 흔적을 통해 형이 남긴 것임을 알 수 있었다.
서린은 감각을 더욱 집중해 손끝으로 형이 남긴 이야기를 읽어 나갔다.

서린아!
이 글을 발견했다면 너도 어느새 많이 성장해 있겠구나. 할아버지가 알려 주신 호흡을 어느 정도 완성하지 않으면 볼 수 없는 글이니 말이다. 형이 없어도 잘 자라 준 것 같아 고맙다.
정말 보고 싶구나.

“크흐흐흑, 형!”
자신에 대한 그리움이 묻어나는 글귀에 서린의 눈에서 다시 눈물이 떨어졌다.

이 글을 읽었다면 아마도 넌 중원으로 들어올 준비를 하고 있을 것이다. 운명이 네게 강요할 테니 말이다. 하지만 형은 네가 가문의 숙명에서 벗어나 그냥 평범한 삶을 살았으면 좋겠구나. 이곳에서의 삶은 지옥이나 마찬가지지 말이다.

형의 당부에 서린은 가슴이 먹먹했다.
자신을 생각하는 형의 마음을 생각하며 다음 글귀를 읽어 나가던 서린은 몸을 떨지 않을 수 없었다. 형이 위험하게 된 이유를 알 수 있었기 때문이다.

원래 너에게 이런 것을 남겨서는 되지 않지만, 이리 남긴 것은 누군가 배신자가 있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서다. 중원으로 넘어오고 얼마 되지 않았는데 우리는 쫓기기 시작했다. 요녕에서부터 사천까지 대륙을 횡단하며 도주를 해야 했고 끊임없이 쫓겨 다녔다.
쫓기는 동안 우리는 세 번의 도움을 요청했지만, 도움을 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오히려 도움을 요청하면 곧바로 우리를 죽이려는 무리들이 나타났다. 배신자가 있음이 틀림없다.
피리에 이리 남기는 것도 배신자를 염두에 두지 않을 수 없어서다. 믿을 수 있는 자가 아무도 없는 상황이니 말이다.
서린아!
네가 중원으로 들어오지 않기를 바라지만, 혹시라도 들어오게 된다면 배신자를 주의해라. 왕실에서 너를 쓰려 한다면 될 수 있으면 피해라. 배신자는 왕실에 있는 누군가 중 하나같으니 말이다.

글을 읽던 서린의 손끝에 점점 자신도 모르게 힘이 들어가기 시작했다.

사랑하는 서린아!
보고 싶은데 볼 수가 없구나. 이제 돌아오지 못할지도 모르는 곳으로 들어가게 됐으니 언제 또 보게 될지 모르겠다. 내가 없더라도 금수강산에서 잘 살아다오. 그것이 돌아가신 부모님께 효도하는 길이고, 형을 위하는 일이니 말이다. 다시 한 번 당부 하지만 이곳으로는 절대 오지 마라, 절대 말이다. 하늘이 허락하면 다시 볼 수도 있겠지만, 그렇지 않아 걱정이다.
위험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지금 널 다시 볼 수 있기를 하늘님께 빌어 보는구나. 내가 없더라도 건강하게 잘 있어라.

같은 길을 걷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과 자신이 잘 살기를 바라는 당부를 담은 형의 편지를 눈물이 글썽거리는 눈으로 보며 서린은 피리를 움켜쥐었다.
“형, 어떻게 내가 형을 내버려 둘 수 있겠어. 기다려! 내가 갈 때까지만 살아서 기다려. 반드시 찾아갈 테니까. 크윽!”
세간에 알려진 남사당패와는 확연히 다른 행보를 보이는 꼭두쇠 일행과 어려서부터 특별한 것을 가르쳐 주는 할아버지로 인해 자신을 중심으로 뭔가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던 서린.
형이 관련되어 있는 것 같기에 언제나 촉각을 곤두세웠지만 얻을 수 있는 정보는 한계가 있어 참고 있었지만 이제는 아니었다.
스승과 할아버지로부터 배운 것들이라면 중원에 들어가 형을 구할 수 있을 것이기에 서린이 계속해서 이어지는 편지를 살폈다.
형이 남기 글을 아직 많이 남아 있었다. 읽어 내려가는 동안 서린의 눈빛을 점점 굳어만 갔다.
자신이 맡은 임무와 중원으로 들어가 겪었던 고난에 대한 이야기가 자세히 적혀 있었다.
읽어 가는 동안 어째서 형이 자신이 이번 일에서 빠지기를 원했는지 충분히 알 수 있는 내용이었다.
“누군가 있다. 중원과 조선을 아우르는 거대 세력이 말이다. 주상전하도 그렇고, 할아버지와 스승님께서 이리 조심히 움직이시는 것도 그 때문일 것이다.”
유민으로 위장하여 중원으로 들어선 후 실수한 것이 없음에도 쫓기기 시작한 것을 보면 형의 행적은 조선을 떠나기 전부터 알려진 것이 분명했다.
더군다나 요녕에서부터 사천까지 그 방대한 거리를 끊임없이 쫓아왔다는 것은 방대한 정보망과 이에 필적하는 세력을 보유하고 있는 것을 뜻했다.
“할아버지와 스승님이 원하시는 것을 어느 정도 충족시켰다고는 하지만 아직 멀었다. 장백에서의 안배가 무엇일지는 모르지만 스스로 지켜 낼 수 있는 힘이 있지 않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것이다. 장백으로 가기 전에 얼마 전에 찾아낸 것들을 완전히 내 것으로 만들어야 한다.”
길고 긴 싸움이 될 터였다.
형을 찾는다고 해도 돌아올 수 있는 길이 아니었다. 자신이 죽거나 정체를 모르는 적들이 모두 멸절되지 않는 한 끝나지 않을 싸움이었다.



7장. 장백문인(長白門人) (1)


떠나는 것이 확정 된 후 성갑은 서린이에게 전력을 다했다.
자신이 익혀 온 천간십이수의 묘용과 그 운용법에 대해서 상세히 설명하면서 서린이 운용의 묘를 살려 실제로 사용할 수 있도록 도왔다.
뿐만 아니라 가문에서 보관하고 있던 천고의 영약도 서린을 위해 과감히 써 버렸다.
절대적으로 부족한 기운을 채우기 위해서였다.
그렇게 기운을 채운 후 탄기선봉에서 흘러 들어오는 막강한 기운을 천세결을 사용해 서린의 몸이 완벽한 신체로 탈바꿈할 수 있도록 전력을 다했다.
성갑의 열성과 지도가 큰 힘이 되었는지 서린이 장백으로 출발하기 전 탄기선봉을 한 자나 움직일 정도가 되었다.
그런 모습을 보며 성갑은 기함을 토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무리 자신이 전력을 기울였다고 해도 서린 스스로가 운용할 수 있는 기운이 절정에 이르지 않는 한 불가능한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이 모든 변화는 형이 남긴 편지를 읽은 후 서린의 각오가 변한 탓이었다.
서린은 잠을 거의 자지 않고 명상을 이용해 피로를 풀면서 수련에 전력을 다했다.
스승과 할아버지가 가르쳐 주는 것을 받아들여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데 피나는 노력을 기울였던 것이다.
그렇게 수련에 매진하며 한 달여의 시간이 지나 떠나기 전날이 되자 성갑은 사랑채로 서린을 불렀다.
“부르셨습니까?”
“그래, 어서 앉아라.”
자리에 앉는 서린의 얼굴이 초췌하기 그지없었다.
수련으로 인한 것이라 기꺼워야하지만, 성갑의 마음은 편치 않았다.
“서린아.”
“예, 스승님.”
“이제 내일이면 장백으로 떠나게 된다. 진인사대천명이라고 했으니 너무 마음을 쓰지 마라. 심기가 흩어지면 네가 하고자 하는 일에 차질이 될 수도 있으니 말이다.”
“알겠습니다.”
“그래, 그동안 전심전력하였으니 네 노력이 헛되지는 않을 것이다.”
후회 없이 수련에 매진했지만 아직도 미진한 것 같아 마음에 걸렸던 서린은 스승의 위안에 조금은 안도할 수 있었다.
“서린아, 내가 너를 부른 것은 알려 줄 것이 있어서다.”
길을 떠나기 전에 하는 스승의 마지막 당부라 생각했기에 서린은 자세를 바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