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혈왕전서 1권 (17화)
6장. 입궁면담(入宮面談) (2)


“네가 중원이라는 곳으로 무사히 들어갈 수 있는 안배는 모두 끝났다. 하나 위험할 것이다. 완성된 자들은 그들에게 발각될 것이 분명한 터라, 너는 무인으로서 미완성인체로 그들 속으로 잠입하여야 하니 말이다.”
“저들을 속일 방법은 있는 것이 옵니까?”
“나라의 영산인 백두에는 장백이라 칭하는 문파가 있으니 너는 그곳에서 장백의 일원으로 명으로 들어갈 준비를 하야야 할 것이다.”
“어떤 준비가 되어 있습니까?”
“그것은 나도 모른다. 알아서 좋을 것도 없고. 하지만 그곳에서 넌 철저하게 명나라 사람으로 화신하게 될 것이다. 그것이 유일한 방법이니 말이다.”
“그렇군요.”
마음이 차갑게 식은 서린은 상당한 안배가 되어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감추어진 비밀을 알아내고, 어찌하여 그들이 피로도 씻을 수 없는 불경을 저질렀는지 꼭 알아내어야 한다. 또한 기회가 닿는다면 그에 대한 징치도 너에게 맡기도록 하겠다. 나머지는 너의 할아버지께서 자세하게 알려 주실 것이다.”
“알겠습니다.”
“자.”
임금이 무엇인가를 내밀었다.
“무엇이옵니까?”
회색의 천에 싸인 것을 보며 서린이 물었다.
“서한과 함께 온 것이다. 네 형이 너에게 전하라 한 것이라고 하더구나.”
“그, 그렇습니까?”
“받아라. 다른 이에게 보이면 안 되는 물건이니 너 혼자 보도록 해라.”
서린은 떨리는 손으로 임금이 내미는 천을 받아 들었다.
천에 싸인 물건이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제법 묵직했다.
“이제 너를 볼일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네가 잘해 주리라 믿는다.”
“최선을 다하겠나이다.”
“그래, 믿으마. 그럼 이만 가 보도록 해라.”
“물러가겠습니다, 주상전하.”
서린은 일 배를 올린 후 임금에게서 받은 것을 품에 품고는 대전을 나섰다.
“따라 오시게. 어르신이 계신 곳으로 갈 것이네.”
밖으로 나오자 대전내관 하나가 한 노인이 기다리는 곳으로 서린을 안내했다.
‘으음, 내가 잘할 수 있을까?’
냉정을 유지하려 애를 썼지만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그동안 무림에 대해서는 할아버지에게 숱하게 들었다. 무림은 기라성 같은 무인들이 살아가는 세상이었다.
그런 세상에서 자신이 배운 것은 지푸라기 한 줌도 안 되는 것을 알기에 걱정이 앞서지 않을 수 없었다.
‘어차피 형을 찾으려 했던 내가 아닌가. 하지만 만약에 형에게 무슨 일이 생겼다면…….’
서린의 눈에서 불꽃이 일었다.
조용하지만 거세게 타오르는 불길이 서린의 눈에서 일렁이고 있었다. 그것은 이제 열여섯 살이 된 이가 보일 수 있는 눈빛이 아니었다.
‘어디인지 모르지만 반드시 찾아간다. 형이 살아 있다면 모르겠지만, 만약 형이 죽었다면 관련 있는 놈들은 자신이 살아 있다는 것을 저주하게 될 것이다.’
아직은 형이 살아 있는 것 같아 안심은 되지만 그래도 불안한 마음을 어쩔 수 없던 서린은 앞으로의 일을 생각했다.
‘지금까지 내가 배운 모든 것들이 이번 일을 위한 것이라면 심상치 않은 것들이다. 임금님께서 말씀하시길 고대의 무예를 깨웠다 하시니 기대를 걸 수밖에…….’
자신의 스승에게서 익힌 천간십이수와 천세결을 어느 정도 익힌 서린은 두 가지 절기에 숨어 있는 묘용에 기대를 걸고 있었다.
인간이 행할 수 있는 모든 손동작을 만들어 낼 수 있는 천간십이수와 세상의 흐름에 몸을 동화시키는 천세결은 서린이 보기에도 인세에 보기 드문 절학이었다.
자신이 놀이패에서 익힌 기예들을 접목시켜 본 결과에서 확신을 얻고 있는 것이다.
“서린아, 겁이 나느냐?”
먼저 나와 궁정을 거닐고 있던 서린이에게 한 노인이 물었다
“겁은 나지 않지만 형님이 걱정됩니다. 그리고 제가 이 일을 해낼 수 있을지도…….”
예상과는 달리 차갑게 가라앉은 서린의 목소리였다.
‘역시, 이 아이는 외유내강한 아이다. 겉으로 보기에는 여느 아이와 마찬가지지만 속에는 활화산을 품고 있으니 말이다.’
한 노인은 대궐에서부터 서린을 세심히 관찰해 왔었다.
다른 아이들 같으면 감정의 기복으로 인해 갈피를 잡을 수 없었을 텐데 나이답지 않게 앞으로의 행보를 걱정하고 있는 것을 보니 마음이 놓였다.
“걱정하지 마라. 네 형은 허술한 아이가 아니니 살아 있을 것이다. 그리고 네가 익힌 것은 그리 녹록한 것이 아니다. 실패할 것을 미리 걱정하지 마라.”
“알겠습니다, 할아버지.”
“지금은 마음이 찢어지겠지만 웃어라. 그렇게 네 마음이 얼굴 표정이나 기세로 확연히 나타난다면 네 형을 찾을 수 없을뿐더러 너마저 당하게 된다.”
“명심하겠습니다. 할아버지!”
“이제 그만 돌아가도록 하자.”
“알겠습니다. 어서 가시지요.”
서린은 궐문을 나서기 전에 다시 가마에 탈 수 있었다.
가마에 탄 서린과 한 노인은 빠른 속도로 성갑의 집으로 향했다.
한 노인은 성갑의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서린을 행랑에 머물게 하고는 사랑채를 찾았다.
“어서 오십시오, 어르신.”
“그냥 자리에 앉게.”
자리에서 일어나는 성갑을 만류하며 한 노인도 자리에 앉았다.
“이제 때가 되었네.”
“서린을 장백파로 보내기로 하신 겁니까?”
“그렇네. 자네의 제자이니, 견문을 넓히는 차원에서 보내는 것으로 알려지면 될 것이네.”
“그리 하도록 하겠습니다. 그 외에 다른 것은 준비할 필요가 있겠는지요?”
“그거면 충분할 것이네.”
“알겠습니다. 어느 정도 준비가 끝났으니 서린이를 장백으로 보내는 일에 차질은 없을 겁니다.”
“정말 미안하네.”
성갑이 처음으로 얻은 제자를 빼앗는 일이기에 한 노인이 미안함을 전했다.
“아닙니다. 서린이도 이 땅의 무인이니 말입니다. 저는 이만 등청을 해야 하니 이만 나가 보겠습니다.”
“그렇게 하도록 하게.”
두 사람은 곧바로 사랑채를 나와 집 밖으로 나섰다.
성갑은 집을 나서 관청으로 갔고, 한 노인도 볼일이 있는지 저잣거리로 갔다.
관복이 아니라 평복을 한 채 홀로 한성부에 도착한 성갑은 조용히 자신의 집무실에 들었다.
타고난 무인이었지만 문장가로도 이름을 떨치고 있는 그였기에 집무실에는 여러 가지 책자들과 한 폭의 산수화만이 놓여 있었다.
한양의 행정과 치안 사법을 관장하는 한성 판윤은 그 지위가 육조와 맞먹을 만큼 대단한 것임에도 성갑의 집무실은 검박하기 그지없었다.
“이보게 자넨 어떻게 생각하나?”
아무도 없는 곳임에도 성갑은 누군가를 향해 물었다.
“그 아이 말입니까?”
놀랍게도 뜬금없는 성갑의 물음에 허공중에서 조용한 목소리의 대답이 흘러나왔다.
암중에 있는 듯 자취를 찾을 수 없었지만 흘러나오는 목소리로 보아 성갑의 집무실에 상당한 고수가 은신해 있었던 것이다.
“희아도 그렇고, 자네도 그렇고, 그동안 그 아이를 계속 지켜보지 않았나?”
“뭐라고 말씀을 드릴 수 있는 아이가 아닙니다. 무예를 익히는 속도를 보자면 유래를 찾아보기 보기 힘든 천품을 지닌 것은 맞습니다. 그러나 그 외에는 그 아이에게서 별다른 점을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천품을 지니고 있기는 하지만 유약한 면이 없진 않아 이대로 그곳에 갔다가는 날개가 꺾일 겁니다. 어르신이 도대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도무지 모르겠습니다.”
수하의 말은 성갑도 동감하는 바였다.
“재주가 뛰어난 아이긴 하지. 하지만 성상과 어르신께서 그 어린아이를 무림에 들여놓으려 하는 뜻을 나도 모르겠네. 무혹지변이야 우리도 계속해서 조사해 온 것이 아니었나? 우리가 대적하기에도 그리 만만치 않은 곳에 완성된 무인도 아니고, 이제 막 발을 디딘 아이를 들여놓으려 하다니. 도대체 진의를 알 수 없으니 조금 답답하네.”
“그렇지만 그리 걱정하지 않으셔도 될 것입니다. 어르신이 주관하시고 계시는 일이라면 복안이 있을 것이니 말입니다.”
“그러시겠지.”
성갑은 이일의 배후에 승하한 명종 대왕의 죽음과 무관하지 않음을 느끼고 있었다. 궐내에서 벌어진 명종 대왕의 죽음에는 아직까지 많은 의혹이 있는 것이 사실이었다.
명종 대왕의 죽음과 돌아오지 않은 무인들 때문에 서린을 장백으로 보내려 한다는 것을 예측한 성갑이다.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지만 명종 대왕이 승하한 뒤 얼마 안 있어 조선에서 난다 긴다 하는 무인들이 명나라로 떠났지만 무혹지변과 같이 그중 한 명도 돌아오지 않았다는 사실이 성갑의 마음을 무겁게 했다.
자신이 한성부를 책임지고 있는 몸이지만 유일하게 한성부 내에서 자신의 힘이 미치지 않는 곳이 바로 궐이다.
자신의 우상이자 이 나라 무인들 자존심인 충열공의 뜻을 짐작할 수 없다는 사실이 못내 힘들었던 것이다.
특히나 무림이라는 곳과 얽혀 있다는 것을 유추해 낼 수 있었기에 서린의 앞날이 걱정되지 않을 수 없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 수가 없으니 걱정이다. 이제는 본질이 변해 버린 장백파와도 어느 정도 관련이 있는 것 같으니…….’
명종 대왕의 붕어 때와 같이 서린을 만났을 때 일단의 무인들이 한성부에 들어섰다.
무슨 일인지 모르지만 그자들은 한성부를 이 잡듯 뒤지고 다녔다. 흔적도 없이 그들이 사라진 것은 뒤늦게 알았다.
그중 하나가 윤견의 집에 들었다는 것을 알았다.
자신이 직접 쫓았던 일이기에 아직도 선명히 기억하고 있는 성갑이었다.
비록 윤견의 집에 들었던 자는 사라졌지만, 오랜 조사 끝에 그들이 명의 무림이라는 곳에 서 온 자들임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그와 같은 부류의 자들이 시체가 되어 발견되었다.
자신뿐만 아니라 아무도 모르는 피바람이 한성부 도처에서 벌어졌던 것이다.
그들이 누군가와 암암리에 혈전을 벌인 것이기에 여태까지 명의 무인들에 대해서는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던 성갑이었다.
그러나 죽인 대한 단서는 하나도 없었고, 죽임을 당했던 자들의 동료로 유일하게 살아남은 자도 사라져 버려 오리무중이 되어 버렸다.
‘분명 무엇인가 내가 알지 못하는 커다란 비밀이 있음이 분명하다.’
무림인들을 상대하기 위해 명으로 가는 서린의 일에는 자신이 생각하지 못한 부분이 있음을 직감할 수 있었다.
‘어차피 움직이려던 상황이다. 어느 정도 준비가 됐으니 이번 기회에 시작하자.’
고민하던 성갑은 결론을 내렸다.
서린의 일을 기회 삼아 준비해 온 일을 시작하기로 한 것이다.
“이번에 희와 자네가 서린을 따라 붙는다. 희아는 원래부터 장백의 일원이니 그리 염려할 바 없다만 네가 걱정이구나.”
“염려 놓으셔도 됩니다, 대감. 나름대로 생각해 둔 바가 있습니다.”
“자네라면 믿을 수 있지. 희아를 통해 장백으로 서신을 넣고 난 뒤니 서린이는 내달 초닷새에 떠날 것이네. 그러니 그리 알고 준비하도록 하게. 그리고 산문에 도착한 후에는 될 수 있으면 장백의 문인들과 부딪치지 않도록 하게. 아무리 장백과 내가 인연이 있다고는 하나 이제는 그들조차 믿을 수 없게 됐으니 말이네.”
“알겠습니다, 대감. 이제 한 달도 남지 않았군요. 준비를 마치면 대감께도 연락을 드리지 않고 곧바로 떠나도록 하겠습니다. 제가 없는 동안 강녕하십시오.”
“알았네.”
허공중에 울리던 말소리가 끊겼다.
“갔군!”
지시를 받은 암중의 사나이가 이내 자리를 떠난 것을 짐작한 성갑은 생각에 잠겼다.
‘희아에게는 외숙께 서신을 전하라 했으니 됐고, 저 사람이 따라 간다면 그나마 위험하지는 않을 것이다.’
성갑은 나름대로 서린에 대한 안배를 마친 후 자신의 집으로 향했다.
충열공이 아무리 삼대비예를 가르친다 해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전설에 불과했다.
알 수도 없는 글자로 쓰인 삼대비예는 이제까지 그 누구도 해석을 한 사람이 없을 정도로 난해한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비록 충열공이 이 땅의 역사상 가장 뛰어난 무인이라 해도, 그것은 변함없는 일이기에 걱정이 되는 것이었다.
실체가 밝혀지지 않은 비예보다는 서린이에게 가르치고 있는 천간십이수와 천세결만이 진정 서린을 지켜 줄 수 있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서린의 생각을 물어보지도 않고 내 마음대로 결정한 것인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서린의 성품으로 봤을 때 분명 내 청을 거절하지는 않을 것이다. 가기 전에 서린이에게 모든 것을 알려 줘야 한다.”
성갑은 남은 한 달여 동안 서린이 익히고 있는 것을 다듬어 줄 생각이었다.
처음 서린을 맞이할 때는 이 정도까지 마음을 쓸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자신의 가문에서 내려오는 절기를 습득하는 모습을 보면서 이제 자신의 대를 이을 사람은 서린밖에 없다는 확신을 가졌다.
이미 슬하에 딸밖에 없는 지금 자신의 절기를 온전히 완성해 가문을 이어 줄 사람으로 서린을 택했다.
결정적으로 이제껏 아무에게도 관심을 보이지 않던 자신의 딸이 유독 서린이에게만 성심으로 대한다는 것도 그런 결정을 하는 데 한몫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