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위/아래로 스크롤 하세요.





혈왕전서 1권 (16화)
5장. 괄목상대(刮目相對) (4)


“서린아, 어떤 일을 하건 평상심을 잃으면 안 되는 것이다. 평상심을 잃으면 평소에 잘하던 것도 실수를 하게 마련이다. 지금 너는 날이 섬뜩하게 서 있는 칼을 들고 있는 어린아이와 같다. 평상심을 잃는다면 다른 이들뿐 아니라 자신에게도 해를 입힐 수 있는 것이다. 나이니 망정이지, 방금 네가 돌린 것에는 다른 이라면 생명을 잃을 정도의 힘이 담겨 있었다. 언제나 삼극정법을 이용해 항상 마음을 다스리도록 해라.”
“명심하겠습니다…… 할아버지.”
실수를 했음을 알기에 서린이 고개를 숙였다.
“조금 있으면 가야 할 곳이 있으니, 궤짝 안에 들어 있는 옷을 챙겨서 갈아입어라.”
서린은 할아버지의 말에 짐을 넣어 두는 궤짝을 열었다. 그곳에는 양반가에서만 입는 도령복이 들어 있었다.
“할아버지, 이것을 입고 나돌아 다니다 잡히면 물고가 날 텐데, 어찌 이것을 입으라고 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넌 그것을 입은 자격이 있는 사람이다. 이 나라 조선의 건국 공신인 충열공의 자손이라면 충분히 입을 수 있고말고.”
‘내가 충열공의 자손이라니? 할아버지도 그렇고 나 또한 양반의 자손이라는 것인가? 도대체 알 수가 없으니…….’
자신이 양반의 자손이라는 것이 잘 믿어지지가 않았다.
충열공의 자손이라는 한 노인의 말에 의문이 들었지만 묻지는 않았다.
할아버지에게 학문을 배우며 자신이 반가의 자손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옷을 갈아입은 서린은 한 노인과 함께 행랑채를 나섰다. 방을 나서자 그곳에는 가마 한 대가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다.
“어서, 올라타거라. 도착할 때까지 바깥으로 얼굴을 보이지 말도록 하고.”
“예, 할아버지.”
한 노인의 권유에 가마에 올라탄 서린은 의문에 잠겼다.
어디를 가는 것이기에 양반들이나 타는 가마를 타고 행차를 나서는 것인지 못내 불안했다.
‘어디를 가시는 것인지는 모르지만 알게 되겠지…….’
지난 시간동안 내기의 성숙만큼이나 어느 정도 마음이 성숙해진 서린이었다.



6장. 입궁면담(入宮面談) (1)


‘이제 도착했나 보구나.’
가마를 타고 한 시진을 갔을 때, 멈춰 서는 것을 느끼며 서린은 목적지에 다 왔음을 알 수 있었다.
“어서 내리거라.”
“여기는?”
가마에서 내린 서린은 놀라움을 금할 수 없었다.
“그래, 이곳은 임금이 계시는 궁궐라는 곳이다.”
“이곳이 궁궐이라는 말씀이에요?”
“그래, 전에 네가 만났던 사람이 이 나라 조선의 대비마마셨다.”
“예?”
서린은 할아버지의 말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나라님이 게시는 대궐에 왔다는 것도 그렇고, 구중궁궐 깊은 곳에 게시는 대비마마를 만났단 사실도 어린 서린이에게는 놀라운 사실이었다.
“어서 가자. 대비마마께서 기다리시겠다.”
서둘러 대비전을 향하자는 재촉에 서린은 궁금한 듯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내시를 따라 걷기 시작했다.
‘허허! 내가 잘하는 것인지…… 저 치기 어린 아이를 그곳에 보내려 하다니…….’
서린의 신기해하는 모습을 보며 한 노인은 서린이 아직은 어린 소년임을 느낄 수 있었다.
자신이 잘하고 있는 것인지 회의가 일기 시작했다.
앞으로 피의 길을 걸어야 할지도 모르는 서린의 앞날이 걱정스러웠던 것이다.
자신의 형이 보내온 편지를 보면 서린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 혹시나 하는 생각에 대비전을 향하는 한 노인의 마음은 무겁기 그지없었다.
‘이 아이가 견뎌 낼 수 있을런지 모르겠다. 하지만 이미 패는 던져졌으니 저 아이가 잘 해내기를 기대하는 수밖에.’
서린을 바라보는 한 노인의 눈가엔 안쓰러운 빛이 스쳤지만 이내 사라졌다. 이제는 어찌해도 되돌릴 수 없는 일이 되었기 때문이다.
“어서 오십시오.”
상궁 하나가 두 사람을 기다리고 있었다.
“안에 계신가?”
“기다리고 계시옵니다. 따라오십시오.”
두 사람은 상궁의 안내로 대비전으로 갈 수 있었다.
“대비마마! 기다리시던 분들이 들었사옵니다.”
“어서 드시라고 해라.”
상궁의 전언에 허락의 말이 떨어졌다.
“드시지요.”
“고맙네.”
한 노인은 서린의 손을 잡고 대비전으로 들어섰다.
‘저분이 대비마마라니, 게다가 저 소년은 …….’
서린은 전에 보았던 곱게 생긴 미부인을 볼 수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지난날 자신의 스승의 집에서 판을 벌일 때 대청마루에 앉아 있던 소년 또한 볼 수 있었다.
“서린아, 어서 인사를 올리도록 해라. 대비마마와 주상전하시니라.”
“예에?”
“주상전하를 뵙습니다.”
서린은 소년이 이 나라 조선의 임금이라는 말에 허둥대며 큰절을 하기 시작했다.
나라님을 이렇게 가까이서 볼 수 있는 사실에 서린의 몸이 떨려 왔다.
“서린아, 주상께서 너에게 할 이야기는 내가 들어서는 안 되는 것이니 그만 나가 보도록 하겠다. 어떤 이야기를 듣더라도 자중하기를 바란다.”
“하, 할아버지.”
갑자기 자리를 비운다는 말에 서린이 할아버지를 쳐다보았다.
“걱정하지 마라.”
서린을 다독인 한 노인은 임금과 대비에게 가볍게 눈인사를 한 후 대전을 나섰다.
‘허어, 어찌 저런 아이를 사지로 내몰아야 하는 처지에 놓였다는 말인가?’
임금은 한 노인이 나가자 어쩔 줄 모르는 서린의 모습을 보면서 마음이 착잡함을 금할 수 없었다.
나라의 수치를 씻기 위함이라지만 이렇듯 어린 사람을 사지로 내몬다는 것이 못내 마음에 내키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비록 대비전의 엄명으로 벌인 일이지만 가까이서 본 서린의 모습은 이제 갓 치기를 벗어난 어린 소년이었던 것이다.
“서린이라 들었다. 나를 본 적이 있느냐?”
“예, 주상전하. 전에 판윤대감 댁에서 본 적이 있사옵니다.”
마음이 떨리기는 했지만 서린은 차분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예법에는 어긋나는 말이었지만 앞에 앉은 두 사람은 서린을 탓하지 않았다.
“그래 오늘 네가 이곳에 온 연유를 알고 있느냐?”
“모르고 있사옵니다. 할아버님을 따라 이곳에 왔을 뿐, 제가 어떤 연유로 이곳에 왔는지 아는 바가 없사옵니다.”
이유를 알지 못하기에 서린은 속으로 의문을 삼키며 대답했다.
“그럼 지금부터 내가 하는 이야기를 잘 듣도록 해라. 이것은 왕실과 관련된 일이며, 이 나라의 씻을 수 없는 국치와 관련된 일이다. 또한 네 형과도 관련이 된 일이니 명심하여 들어야 할 것이다.”
‘혀, 형과 관련 된 일이라는 말인가?’
서린은 형과 관련되어 있다는 말에 긴장하기 시작했다. 말을 꺼내는 서두가 의미심장했기도 했지만 형과 관한 일이라기에 애써 참으며 기다렸다.
“석년의 일이었다. 승하하신 명종 대왕께옵서는…….”
임금이 입을 열어 설명을 시작했다.
형이 중원으로 간 것은 승하한 명종 대왕과 관련된 일 때문이었다.
불과 일 년을 조금 넘게 재위하다 승하한 명종 대왕의 일은 어린 서린이에게는 놀라움을 주기에 충분했다. 그것은 명종 대왕이 중원이라 불리는 곳에서 온 이들에 의해 참살을 당했다는 것 때문이었다.
명종 대왕이 승하하던 날 밤, 무엇인가 찾기 위해서 범궐한 자들을 막을 수가 없었다고 한다. 이 땅을 수호하는 무인들 중 뛰어나다는 무인들이 대궐을 지키고 있었지만 손 한번 제대로 써 보지 못하고 참변을 당했다는 것이다.
서린은 그들이 중원에서 무림이라 불리는 곳에서 온 자들이 분명하다는 것을 임금인 소년으로부터 들을 수 있었다.
“돌아가신 선왕께오서는 사사로이는 삼촌이 되시는 분이고, 나를 아껴 주신 분이었다. 원래부터 잔병치레가 잦으신 분이었으나, 그렇게 돌아가셨을 줄은 나도 몰랐다. 나 또한 선왕께서 신병을 얻어 승하하셨다고 생각했었으나 보위에 오른 후 대비마마께서 하신 말씀을 듣고는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대비마마께서는 이런 국치를 씻고 저 오만한 무리들에게 징계를 내리고자 하셨고, 나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이 땅의 숨어 있는 무인들을 고르고 골라 무림이라는 곳으로 보냈지만 허사였다. 선왕을 시해한 역도들은 징치도 하지 못하고, 무림으로 보냈던 이들은 죽었는지 살았는지 알지 못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네 형 또한 그중에 하나였으니, 이 서찰을 한번 읽어 보도록 해라.”
부르르르.
서린은 몸을 떨며 임금이 건네는 서찰을 조심스럽게 받아 들었다.
‘진정하자, 진정해야 한다. 형이 죽었다는 말을 아니니까.’
서린은 떨리는 마음을 진정시키며 받아든 서찰을 읽기 시작했다.

전하! 신 전하의 명을 받잡고 무리를 따랄 중원으로 왔사 오나, 이제 신 혼자 남아 통한의 글을 올리나이다.
신이 이곳에 와서 느낀 것은 광대무변한 대륙의 크기와 수많은 무인들의 각축장인 무림이라는 거대한 세력의 무서움이었사옵니다.
그들은 관의 간섭도 불허하며 자신들만의 세계를 구축하고 있었사옵니다. 신등은 돌아가신 선왕을 해한 무리들을 찾고자 가 보지 않은 곳이 없었나이다.
하오나, 선왕전하를 해한 무리들의 단서는 찾지도 못하고 알 수 없는 무리들에게 쫓겨 하나둘, 생을 달리하는 지경에 이르렀나이다.
그러나 죽어 간 폐하의 신하들은 헛된 죽음을 맞지는 아니 하였나이다. 신과 함께 살아남은 충열공의 후손은 이제 저들의 근거지로 보이는 곳으로 가옵니다.
천혈옥이라 하여 대대로 중죄인들만 가둔다는 곳에 저들의 흔적이 남아 있음을 안 저희들은 그곳으로 가옵니다. 살아 나온다고 장담을 못하기에 떠나기 전에 이 서찰을 전하께 보내나이다.
아무도 살아남을 수 없다는 천간지옥으로 떠나는 불충한 신하들을 용서하시옵소서.
마지막 가는 길이라 살 생각이 없는 신이오나 전하께 청이 하나 있사옵니다.
신은 일가붙이가 없어 염려가 덜하오나 충열공의 후손은 나이 어린 동생이 있어 심중의 불편을 덜 수 없사옵니다.
전하께옵서는 신등을 살피사, 충열공의 마지막 후손인 서린이라는 아이를 은혜로 살펴 주시기 바라옵나이다.

피로 쓰여진 글을 읽으며 서린은 떨리는 마음을 주체할 수 없었다.
편지 속에 거론되고 있는 동생이 바로 자신이었기 때문이었다.
형이 명나라로 갔다는 것은 익히 알고 있었지만 이런 사명을 띠고 명나라를 떠났다는 사실은 모르고 있었다.
그런데 형이 다시는 돌아올 수 없을지도 모르는 사지로 떠났다는 사실에 서린은 불안한 마음을 떨쳐 버릴 수 없었다.
‘형이 아직 죽은 것은 아니다. 아니, 반드시 살아 있을 것이다.’
천혈옥이라는 곳에 들어갔지만 형의 죽음이 확인된 것은 없다는 것을 상기하며 서린은 마음을 추슬렀다.
“너도 예상하겠지만 네 형 선주는 바로 이 나라 건국의 일등공신인 충열공의 후손이다. 너 또한 마찬가지고 말이다. 이 혈서를 받은 것은 이 년 전이었다. 고르고 고른 무인들이 그렇게 가고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길을 떠났다는 사실에 짐과 대비마마는 고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국치를 씻지도 못하고 애꿎은 인재들만 잃은 꼴이 되었기 때문이다. 해서 고민 끝에 짐은 너를 선택했다. 왕실을 유린하고 이 나라 임금을 시해한 자들에게 응징을 하기 위해 수천 년을 내려온 우리 민족의 고대 무예를 부활시키기로 한 것이다.”
‘그래서 스승님께서 나에게 무예를 가르치신 것인가?’
서린은 자신이 지금껏 무예를 익히는 이유를 이제야 알 수 있었다.
할아버지가 형을 만나 보려면 무예를 익혀야 한다고 했던 말의 진정한 뜻을 알 수 있었던 것이다.
자신보다 열 살이나 많은 형이지만, 자신의 기억 속에 남아 있는 형은 아버지와 같은 존재였다.
어떻게 응징자의 대열에 합류할 수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형이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길을 떠났다는 말에 서린은 복받쳐 오르는 설움을 감당할 수 없었다.
하지만 눈물이 쏟아지려 하는 것을 애써 참으며 다시금 이어지는 임금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지금은 슬퍼할 때가 아니었다. 차가운 이성으로 준비를 해야 할 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