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혈왕전서 1권 (15화)
5장. 괄목상대(刮目相對) (3)


‘그럼 스승님의 말씀은 천간십이수에 다른 것이 감추어져 있다는 말씀이구나.’
천간십이수를 특별한 절학이라 설명하기에 서린은 천간십이수에 자신이 모르는 묘용이 있음을 짐작하고 스승의 말을 경청했다.
“물론 넌 나의 말에 의문이 일 것이다. 간단해 보이는 천간십이수에 거창한 명칭이 붙은 것하고, 스승인 내가 이리 강조하는 것을 보면서 말이다.”
“그렇습니다, 스승님.”
“나도 그러했다. 어째서 그런 것인지는 훗날 알게 됐다. 천간십이수가 제 위력을 발휘하려면 천세결을 익혀야 한다.”
“천세결이요?”
“그래, 네가 천세결을 익힌다면 천간십이수에 담긴 묘용을 확실히 알 수 있을 것이다. 지금부터 구결을 알려 줄 테니 마음을 정갈히 해라.”
“예, 스승님.”
서린이 자세를 바로하자 성갑은 구결을 일러 주기 시작했다.
할아버지가 알려 주신 삼극정법이 여든한 자에 불과한 것이라면, 스승이 서린이에게 알려 주는 천세결은 일만 자로 이루어진 구결이었다.
삼극정법에 담긴 이치는 글자 하나하나가 그 오묘한 뜻을 내포한 것이라면, 천세결은 긴 문장으로 세상의 기운을 바로 쓰는 법을 자세히 설명하고 있는 것이었다.
스승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구결이 한 시진가량 지속되고, 다시 그에 대한 주해가 세 시진가량 흘러나왔을 때 천세결의 모든 설명이 끝이 나 있었다.
“서린아, 천세결에 대한 설명은 앞으로 열흘 동안 계속 반복해서 너에게 설명해 줄 테니 오늘은 대강의 뜻만 새기고 있거라!”
“아닙니다, 스승님. 스승님께서 말씀해 주신 천세결의 구결과 주해는 빠짐없이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내일부터는 저 혼자 그 뜻을 새기겠으니, 그리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서린의 느닷없는 말에 성갑은 어이가 없었다.
탄기선봉을 일 년여 만에 움직인 것은 서린의 할아버지가 있었기에 내심 가능했다고 생각했었지만 천세결은 아니었다.
자신이 장장 네 시진에 걸쳐 이야기한 것을 한 번 듣고 다 기억한다고 하니 일순 서린이 거짓말을 하는 것이 아닌지 의심이 들었다.
“그 말이 사실이냐? 비록 네 머리가 총명하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한 번 들려 준 일만 자에 달하는 구결을 다 외우고, 거기에 주해까지 외운다는 것은 믿을 수가 없는 일이다.”
“제가 한 번 해 보겠습니다. 天宇洗心始(천우세심시), 空虛不相得(공허불상득)…….”
스승의 말에 서린은 스승이 자신에게 들려 준 천세결의 구결을 빠른 속도로 외우기 시작했다.
그 속도가 어찌나 빠른지 김성갑 또한 경청하지 못하면 순서를 놓칠 뻔했다.
그리고 다시 이어지는 주해를 들으며 성갑은 서린이에게 말할 수 없는 신비감을 느끼기 시작했다.
‘믿을 수 없는 아이다. 불과 일 년 만에 탄기 선봉을 움직인 것도 믿을 수 없는 일이거늘, 무려 일만 자에 달하는 구결과 주해를 한 번 듣고 모두 외우다니. 역시 핏줄은 못 속이는 것인가?’
서린이 조선 제일 무맥의 계승자임을 알기에 성갑은 생각을 끊고 다음 말을 이었다.
“이제 되었다. 내가 외우고 있다는 것을 알았으니 앞으로 천세결을 토대로 천간십이수를 익히도록 해라. 그러면 스승이 무엇을 말하려 함인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아침에 시작한 구결의 전수가 해가 중천에 뜰 때까지 계속되었기에 성갑은 수련장을 나섰다.
오늘은 어느 때보다 등청이 늦었지만 마음만은 기쁘기 그지없었다.

스승이 나가자 서린은 스승이 전해 준 천세결을 생각하며 자리에 앉았다.
할아버지가 전해 준 삼극정법의 여든한 자의 구결은 그 글자에 담긴 의미가 광대무변하기에 두고두고 생각해야 했다.
천세결의 구결은 스승의 상세한 설명이 담긴 주해 덕분으로 어느 정도 요체를 깨달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요체는 할아버지가 알려 준 삼극정법의 요체와도 일맥상통하는 것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어느 정도 생각이 마무리되자 바닥에 놓여 있는 탄기선봉을 잡아 갔다.
지금껏 자신의 손길을 거부하던 탄기선봉을 제압할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탄기선봉을 잡은 서린은 천간십이수 중 음인수를 상기했다. 기운을 끌어들여 되돌리는 음인수는 탄기선봉에서 흘러나오는 기운은 자신에게 되돌려, 돌아 나오는 기운으로 탄기선봉을 상대하는 것이었다.
왼팔은 독맥으로 힘을 받아들이고, 오른팔은 임맥으로 기운을 받아들이는 것이기에 서린은 양손에 흘러 들어오는 기운을 차분히 받아들이고 있었다.
전에는 뼛속을 울리는 기운으로 인해 힘들었지만 지금은 스승이 전해 준 천세결을 이용해 두 줄기로 흘러들어 오는 기운을 통제하며 받아들이고 있었다.
처음에는 전과 마찬가지로 뼛속을 진동하듯 서린이에게 아픔을 주었으나 천세결이 서서히 운행되자 서린은 자신의 몸속으로 휘몰아쳐 들어오는 기운을 느낄 수가 있었다.
마치 호호탕탕한 거친 물결처럼 들어오는 기운의 파도가 느껴지기는 했지만, 이제 서린은 아픔을 느낄 수가 없었다.
자신의 몸속을 지나가는 기운의 방향을 느끼며 천세결을 운용하기 바빴기 때문이었다.
들어오는 기운을 내뿜는 탄양수와 들어오고, 나오는 기운을 제때에 끊어 주는 절맥수, 그리고 들어오고 나오는 기운을 교묘히 휘감아 와류를 일으키는 교혼수에 이르기까지 천간십이수가 한 번에 운용되고 있었다.
서린은 천세결을 이용해 자신의 몸속을 휘돌고 있는 기운의 정체성을 느껴 가며 무아지경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으음, 벌써 요체를 깨닫다니…….’
옷을 갈아입고 나온 김성갑은 등청에 앞서 창문 틈으로 수련장을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서린이 엉거주춤한 자세로 탄기선봉을 잡고 눈을 반개한 채 엉거주춤한 자세로 앉아 있었다.
다리를 벌리고 거의 직각이 되게 무릎을 구부리고는 무엇인가에 몰두하고 있었다.
‘정말, 열심이로구나.’
김성갑은 서린이 내기를 느끼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탄기선봉에서 나오는 기운을 천세결로 운용하며 천간십이수를 익히고 있는 것이었다.
‘한동안은 저러고 있을 것 같으니, 일단은 등청을 했다가 빨리 돌아와야겠구나.’
수련장을 나선 성갑은 조용히 청지기를 불러 집안 권속들에게 수련장에 접근하지 말도록 명을 내리고는 관아로 갔다.
그날 저녁, 관아의 일을 모두 마치고 돌아온 성갑은 수련장을 보고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아직도 저러고 있다는 말인가?’
아침에 등청할 때와 마찬가지로 서린이 계속해서 그 자세를 취하고 미동도 하지 않고 있었다.
‘이런, 큰일 나겠구나.’
혹시나 주화입마에 빠져 있는 것이 아닌지 염려가 돼서 수련장으로 들어가려 할 때였다.
“들어가지 말게나. 서린은 아직 아무 탈이 없으니 말이네.”
“어르신!”
“가만히 기의 흐름을 살펴보게. 그러면 내가 하는 말이 무슨 뜻인지 알게 될 테니.”
한 노인의 말에 성갑은 서린의 주변에서 일어나고 있는 기의 흐름에 주목하기 시작했다.
탄기선봉에서는 끊임없이 기운이 흘러나오고, 그 기운은 서린의 몸을 거쳐 다시 탄기선봉으로 되돌아가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그 흐름의 변화가 너무도 자연스러워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자신도 아직 탄기선봉에서 나오는 기운을 제대로 다스리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제 열다섯 살이 된 아이다. 석년의 그 누구도 이루지 못한 일인데…….’
탄기선봉의 기운을 자유자재로 다루고 있었다.
가문의 역사상 아무도 이루지 못한 일이었다.
“이제는 때가 된 것 같네.”
“때가 되었다 하심은?”
“저 아이가 깨어나면 입궐할 것이니 채비를 차려 주게. 예상 보다 빠르게 성취를 이룬 것 같으니 기대를 해도 될 것 같네. 그리고 저 아이가 궐을 나올 때 전에 내가 부탁한 대로 해 주었으면 하네. 여기는 내가 지키고 있을 테니 자네는 어서 들어가 보게.”
“알겠습니다, 어르신.”
사랑채를 향해 가는 성갑은 마음이 무거워 옴을 느꼈다.
경천(驚天)의 자질을 가진 아이에게 무엇을 기대하는 것인지 모르겠지만 자신은 소외된 것 같은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자신의 가문에서 전해지는 천간십이수와 천세결을 알려 주었기에 의발을 전수해 준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자신이 알려 주지 않아도 스스로 깨달아 가문의 절기를 완성해 가는 서린을 볼 때마다 기쁘기 그지없었다.
어명이 아니더라도 자신의 절기를 모두 전해 주고 싶을 만큼 탁월한 아이이기에 지금 한 노인의 말은 김성갑의 아쉬움을 더욱 크게 했다.
어차피 자신의 가문의 절기를 완성하도록 도움을 준 한 노인이기에 절기를 전수하는 것에 대한 아쉬움은 없었다.
다만 저런 제자를 더 이상 볼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시름에 잠긴 것이었다.

서린이 깨어난 것은 천세결을 운용하기 시작한 후부터 정확히 열흘이 지나서였다.
그동안 성갑이 수차례 한 노인에게 서린의 안부를 물으러 왔으나, 아직은 무아지경에 든 서린이 깨어나지 않았기에 돌려보냈다.
‘이제 자리를 떠도 되겠구나.’
지난 열흘간 수련장의 밖에서 서린을 보호하던 한 노인은 서린이 깨어남을 느끼고 자리를 떠났다. 서린이 깨어났기에 다음 일을 준비하기 위해서였다.
“으음, 천간십이수에 이런 묘용이 있다니 놀라운 일이다. 비록 할아버지에게 임맥과 독맥이 선천과 후천의 기운을 이끄는 통로라고는 배웠지만, 탄기선봉의 기운을 이용해 기맥을 뚫을 수 있다니 말이다. 그리고 천간십이수 자체도 천세결을 이용하면 더할 나위 없는 위력을 발휘할 수도 있으니, 참으로 알 수 없는 절기구나. 하룻밤을 꼬박 새웠으니, 스승님과 할아버지가 걱정하시기 전에 나가 봐야겠다.”
이미 열흘이나 지났는지도 모르고 있는 서린이다. 그저 자신이 변한 것에 대해 물을 요량으로 수련장을 나와 행랑으로 향했다.
“어디 가셨나 보구나. 어서 정리를 해 보자.”
방에 들어와 할아버지가 없음을 알고 서린은 탄기선봉을 잡은 후 천세결을 이용해 천간십이수를 운용하던 것을 떠올렸다.
처음 음인수를 사용해 탄기선봉을 잡고 천세결을 운용하자 주변에서 일고 있는 기의 흐름을 확연히 느낄 수 있었다.
어찌 된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자신의 몸에 흐르는 기의 흐름도 마치 보고 있는 것처럼 훤히 알 수 있었다.
“정말 희한한 경험이었다.”
기맥을 비롯해 근육 하나하나에 얽힌 모든 혈관들을 따라 흐르는 기운의 움직임을 느낄 수 있었다.
자연스럽게 천지간에 존재하는 기운을 느끼고 탄기선봉에서 나오는 기운 또한 받아들이기도 하고 내보내기도 하면서 자신의 육체가 기운들을 제어해 가던 것도 생각이 났다.
“육체가 스스로 기운을 제어하는 것을 느끼며 천간십이수의 묘용을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천간십이수는 손을 이용한 수법이기는 하지만, 병기술이기도 하다. 내 손에 병장기가 쥐어진다면 내 마음대로 다룰 수 있을 테니까.”
서린은 놀이패에 들어와 익힌 기예 중 유일하게 기물을 가지고 하는 버나를 통해 자신이 익힌 것을 시험해 보고 싶었다. 자신이 생각이 맞는지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벽에 걸려 있는 보퉁이에서 기물을 꺼냈다. 참나무로 만들어져 중심이 움푹 파인 원판이 버나다. 나무 막대기로 돌리는 버나는 서린이 좋아하는 놀이 중 하나였다.
스르르!
막대기 위에 올려진 판이 서린의 손에 돌려지기 시작했다.
빠른 속도로 판이 돌기 시작하자 서린은 서서히 천간십이수를 이용해 기운을 흘려 넣기 시작했다.
씨― 이이익!
바람을 가르는 소리와 함께 원판이 돌기를 멈춘 듯 막대기 위에서 정지했다.
하지만 자세히 보면 워낙 빠른 속도로 돌고 있기에 정지한 것처럼 보일 뿐이었다.
돌아가는 원판에서 서서히 퍼지기 시작하는 기운이 방 안을 메워 나갔다.
서린이 팔을 움직이자 막대기를 따라 원판도 움직였지만 막대기가 아래로 향하건 옆으로 향하건 원판은 막대기에 달라붙은 듯 떨어지지 않고 고속으로 회전하고 있었다.
덜컹!
피이익!!
문이 열리는 소리에 서린이 놀라자 집중이 흩어졌다. 회전하던 원판이 막대기에서 떨어져 나가며 열려져 있는 방문을 향해 빛살처럼 날아갔다.
지― 이이이익!
거북한 음향과 함께 원판은 한 노인의 손에 잡혀 회전을 멈춰 가고 있었다.
“죄송합니다, 할아버지.”
“버나를 하고 있었더냐?”
버나를 움켜잡은 한 노인이 입을 열었다.
“스승님께 배운 것을 한번 시험해 보고 있었습니다.”
“시험을 해 보고 있었더란 말이냐?”
“예.”
“허허!”
한 노인은 성갑과 서린의 향후 행보에 대해 의논을 마치고 돌아오면서 방에서 심상치 않은 기운의 흐름을 읽었다.
미리 대비를 하고 들어오기는 했지만 갑자기 날아오는 원판을 잡으며 적지 않게 놀란 그였다.
서린이 버나를 하며 놓친 원판에 담긴 경력은 자신이라도 무시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자신이 삼극정법을 가르치고 성갑이 비전을 전한지 얼마 지나지 않았는데도 기물에 자신의 기운을 담을 수 있는 경지를 보이는 서린의 성취가 놀라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