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혈왕전서 1권 (14화)
5장. 괄목상대(刮目相對) (2)
여자아이는 줄 위에서 서린이 했던 동작을 그대로 흉내 내고 있었다.
앞으로 가고, 뒤로 가고 줄을 가지고 놀았다.
그리고는 공중으로 치솟았다 내려오기를 반복했다. 몇 번을 반복했을까, 갑자기 몸을 뒤집으며 신영을 회전시켰을 때였다.
내려오면서 줄을 잘못 밟아 균형을 잃은 듯 여자아이는 줄 밖으로 떨어져 내렸다.
휘리릭!
탁!
용이 구름 위에서 몸을 뒤집듯 신영을 뒤집은 여자아이는 한 바퀴 선회하며 땅에 안전하게 착지하였다.
여자아이는 서린의 몸놀림과 자신의 움직임을 비교해 보고는 머릴 갸웃거리며 침울한 표정을 지었다.
스슷.
나타날 때와 마찬가지로 여자아이는 홀연히 수련장에서 사라졌다.
* * *
“서린아.”
“예, 할아버지.”
“네가 이곳에 온 지도 어느덧 일 년을 훌쩍 넘겼구나. 그래 이제는 철봉을 잘 잡을 수 있게 됐느냐?”
“아니요. 그놈 앙탈이 심해서 아직도 반항을 해요. 하지만 오늘 그놈을 한 치 정도 움직였어요. 그러니 얼마 지나지 않아서 들 수 있을 것 같아요.”
“호오, 그렇다는 말이냐?”
서린의 말에 한 노인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지난 시간은 탄기선봉의 수련을 통해서 손의 쓰임새에 대해 알기만을 바랐을 뿐이었다.
그런데 한 치를 움직였다는 것은 이미 어느 정도 자신이 원하는 기운을 서린이 얻고 있다는 것을 뜻했기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서린이에게 무예에 대해 알려 줄 필요성을 느낀 한 노인은 차분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 갔다.
“서린아, 네가 학문이외에 의술도 너에게 알려 주며 사람의 신체에 대해서 강론한 것을 기억하고 있느냐?”
“할아버지가 말씀하신 것은 모두 기억하고 있어요. 사람이 어떻게 움직이는지 말이에요. 몸 안에 흐르는 기혈 그리고 근육의 움직임을 할아버지가 모두 설명해 주셨잖아요.”
“기억하고 있다니 다행이다. 그러면 지금부터 말하는 것을 명심해서 듣도록 해라.”
한 노인은 서린이에게 사람이 가지고 있는 기운에 대해 설명하기 시작했다.
한 노인이 주로 설명한 것은 사람이 가지고 있는 선천지기와 후천지기에 관한 것이었는데 이는 서린이 익히고 있는 호흡법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는 것이었다.
“인체에서 불(火)이 내려가는 길을 임맥(任脈)이라고 하고, 물(水)이 올라가는 길을 독맥(督脈)이라 한다. 독맥은 등줄기를 따라 흘러가고, 임맥은 복부를 따라 흐른단다.”
“할아버지, 저도 알아요. 요즘에 그걸 느끼고 있거든요.”
“그래, 너도 어느 정도 느끼고 있을 것이다. 독맥은 뼈의 속에 있는 기운이 흐르는 길을 말한다. 이것은 들숨 때 하강하고, 날숨 때 상승하며, 끊임없이 순환하는데, 이러한 순환을 돕기 위해 두개골의 봉합과 천골(薦骨)이 움직이기도 한단다. 임맥(任脈)은 중심적 뿌리라 할 수 있는 상중하 삼단전(三丹田)을 관통하는 길이다. 간단하게 말하면 주로 입에서 항문까지 통하는 구멍을 형성하는 길을 의미한단다. 즉, 독맥은 뼈에 쌓여 있는 곳으로 음중(陰中) 양(陽)을 의미하고, 임맥은 구멍이 뚫려 있는 곳으로 양중(陽中)의 음(陰)을 의미하는 것이지. 독맥에서는 불의 기운이 성하여 끊임없이 순환하며 기운을 식히는데, 이 기운은 사람이 본디 선천적으로 가지고 태어나는 것으로, 선천지기(先天之氣) 또는 원기(原氣)라고 한다. 그와는 반대로 임맥은 속이 텅 비어 있는 통로로 외부의 기운을 끊임없이 받아들여 기운을 얻는 데 후천적으로 섭취한 것이라 하여 후천지기(後天之氣)라 하며 종기(宗氣)라고 한단다. 바로 이 원기(原氣)와 종기(宗氣)가 합쳐져 진기(眞氣)를 이루어 인체 내 십이경락을 주도하며, 오장육부와 전신의 생명 활동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다. 내 말을 알아듣겠느냐?”
“예, 할아버지.”
“내가 너에게 가르쳐 준 호흡법은 바로 선천의 기를 이끌어 내어 후천의 기를 인도하는 것이란다. 너에게 호흡을 하며 충좌를 하도록 한 것도 바로 이런 순환을 보다 원활하게 하기 위한 것 때문이란다. 비록 화(華)의 일족들이 이 두 기운은 태어나서 서서히 막히기에 뚫어 주어야 상승의 경지에 도달한다고 한다마는 그 말은 말도 되지 않는 이야기다. 아마도 그들의 사상이 편협한 데서 나오는 소치라 생각하지만, 넌 바른 법을 배웠으니 그리 알고 지금부터 내가 하는 이야기를 잘 듣거라.”
한 노인은 서린이에게 날라리를 불 때 쓰는 호흡이라며 가르쳐 준 것에 대해서 더욱 세세히 서린이에게 설명을 해 주기 시작했다.
서린이 배운 호흡법은 서린의 가문이 무예의 길로 나서며 대대로 전해져 오는 호흡법이었다.
그것은 독맥이라 불리는 뼛속의 선천지기를 일으켜 천지간의 기운을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호흡법이었다.
자연지기가 자연스럽게 몸 안으로 유입되어 순환하여 후천지기를 쌓는다. 그리고 종내에는 선천지기와 합하여 온전한 기운을 이끌어 내는 최상의 호흡법이었던 것이다.
“옛 태곳적 화하(華夏)는 태일(太一)에서 양의(兩儀)를 낳고, 양의에서 다시 음양이 생겨나고, 그것에서 만물이 태어나며 다시 태일로 돌아간다고 하였다. 양의에서 다시 사상이 생겨나고 사상에서 팔괘가 생겨난다고 하였으니 어찌 보면 천지간의 이치가 거기에 있다 할 것이다. 하지만 우리 가문의 무예는 이와 그 맥을 같이 하나, 또 다르다. 태곳적 우리 가문의 뿌리인 청구(靑丘)는 태일(太一)에서 삼의(三儀)을 낳았다 여겼다. 이는 곧 삼극이라, 여기서 육효가 생긴다고 여겼느니라. 하늘을 천일로 땅을 지일로, 그리고 이를 조화롭게 하는 것을 태일이라 여겼다는 말이다. 임독양맥은 하늘과 땅의 기운이 순환하는 것이다. 그들은 선천과 후천의 기운을 토대로 세상을 바라본다. 하지만 우리 가문에서는 이 선천과 후천의 기운을 인간이 조화롭게 다스리는 데 그 역점을 둔다고 할 것이다. 비록 화하가 성(盛)하여 세상의 모든 이치가 선천과 후천의 도리 대로만 흘러간다고 여기고 있으나 이는 잘못된 것이다. 진정한 도리는 인간이 그 중심에 있다는 것에서 출발하는 것이 우리 가문의 공부인 것이다.”
서린은 말이 트이는 순간부터 강론을 통해 한 노인으로부터 세상의 이치에 대해 공부해 왔었다.
그렇지만 지금 한 노인이 하는 이야기는 처음 들어 보는 것이었다.
선천과 후천의 기운을 통해 양생의 도를 터득한다는 것은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관조자적 입장에서의 인간이 그 모든 기운을 주관한다는 것을 말이다.
“할아버지 그럼 세상의 모든 기운과 이치가 인간을 중심으로 돌아간다는 것인가요?”
“그렇단다. 양의를 표방하는 화하의 이치와 삼극을 표방하는 청구의 이치 중 어느 것이 세상을 주관하는 참다운 이치인가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이를 두고 화하와 우리가 끊임없이 논쟁을 벌여 온 것은 도를 이루려는 자들의 오래된 숙원 때문이었다. 바로 어떤 것이 바른 도인가, 라는 점이다. 그러나 화하가 말하는 것은 여러 번 실현이 되었다. 양의에서 비롯된 이치를 꿰뚫은 자들로 인해 그 증거가 나타났으니 말이다. 하지만 삼극의 이치를 꿰뚫은 자들은 여태까지 나온 이가 없었기에 삼극의 이치가 외면 받아 온 것이 작금의 현실인 것이다. 무예로 도를 이루려는 이들도 마찬가지다. 양의로 대성한 자는 많아도 삼극으로 대성한 자는 없었기에 항상 화하의 일족들은 청구의 일족을 업신여겨 왔었다. 이로 인해 우리 민족은 대륙으로부터 끊임없는 침략의 대상이 되었던 것이다. 하나 우리 가문에서는 삼극으로 무예의 끝을 볼 수 있는 하나의 법이 전해지니, 그것이 바로 내가 너에게 상시로 수행하라 이른 삼극정법(三極正法)이다.”
“제가 할아버지께 배운 호흡법의 이름이 삼극정법이라는 것이었군요.”
서린은 이제야 자신이 익히고 있는 호흡법의 진정한 이름을 알 수 있었다.
“중원에서 삼극정법의 껍데기만을 토대로 만든 삼재심법이라는 것이 있어 천시 여긴다. 하나 그것에 담긴 이치를 바라볼 수 있는 자가 있다면 삼재심법에서도 양의에 버금가는 성취를 이룰 수 있음을 화하의 일족들은 알지 못한다. 그러니 삼극정법 속에 담긴 오묘함이야말로 궁극에 이른 바른 이치인 것이다.”
“할아버지가 알려 주신 삼극정법이 그렇게 대단한 거예요?”
서린은 한 노인이 알려 준 호흡법을 어렸을 때부터 익히며 날라리를 불려고 했지만, 별로 특이한 것은 못 느꼈었다.
다만 재주를 넘을 때와 탄기선봉을 이용한 수련 후 뼈마디의 진동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이 특별하면 특별한 것이었다.
지금 할아버지의 설명을 듣고 보니 자신이 익힌 것이 아주 특별한 것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
“물론이다. 넌 아마 탄기선봉을 드는 수련을 하며 충좌를 통해 일부 뼛속이 진동하는 현상을 느꼈을 것이다. 이는 선천의 기가 의지대로 움직이기 시작했다는 증거다. 이제부터 네 스승이 전해 주는 천세결(天洗結)을 익히기 시작하면 후천의 기운 또한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선천과 후천의 기운을 완전히 느끼고, 그 두가지 기운을 관조할 수만 있다면 넌 아마도 삼극정법의 바른 법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이제부터 그 삼극정법에 대한 완전한 구결을 일러 줄 터이니, 넌 한상 바른 마음으로 호흡에 임하도록 해라.”
“알겠습니다. 제가 아직 어려, 잘은 모르지만 최선을 다해 익히도록 하겠습니다, 할아버지!”
서린은 자신도 모르게 자세를 바로 하고는 경청하기 시작했다.
“그럼 내 지금부터 삼극정법의 바른 법을 알려 주도록 하마. 구결을 일러 줄 터이니 머리에 각인하여 잊지 말거라. 上界主神其號曰天一(상계주신기호왈천일), 下界主神號曰地一(하계주신호왈지일), 中界主神號曰太一(중계주신호왈태일), 易有三極(역유삼극), 是生三儀(시생삼의), 三儀生六爻(삼의생육효)…….”
한 노인의 입에서 삼극정법에 대한 구결이 흘러나오고, 서린은 한 자라도 잊어버릴까 집중하여 구결을 외웠다.
할아버지의 말은 한 번도 잊어 먹지 않았지만, 이번엔 더욱 심혈을 기울여 외워 가고 있었던 것이다.
* * *
서린이 성갑으로부터 천세결에 대해 배운 것은 삼극정법의 구결을 전부 전수받은 다음 날 아침이었다.
서린이 수련장을 찾았을 때 스승인 성갑은 멍한 눈으로 탄기선봉을 바라보고 있었다.
믿을 수 없는 표정을 지으며 탄기선봉을 바라보던 스승은 수련장으로 들어오는 서린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서린아! 네가 이 탄기선봉을 움직였느냐?”
“예, 스승님. 어제 한 치 정도 움직였습니다. 하지만 숨이 차올라 그 이상은 힘들었습니다.”
“허허허, 그랬구나.”
자신의 성취를 뛰어넘는 서린의 성취에 기쁘면서도 자신의 성취를 되돌아본 성갑은 마음이 허허로웠다.
“네가 이 정도 성취를 이루었다니 정말 놀랍기 그지없구나. 그렇다면 오늘부터 너에게 천세결을 가르쳐 주어야겠구나.”
“천세결이요?”
할아버지의 예상대로 스승이 절기를 가르쳐 준다고 하자, 서린은 놀란 마음을 가라앉히고 스승을 쳐다보았다.
“서린아, 너는 이 스승이 어떤 무예를 익히고 있을 것이라 생각되느냐?”
한번도 본 적이 없는 무예를 물으니 대답을 할 수 없었다.
“잘 모르겠습니다. 권법인 것 같기도 하고, 병기를 사용하시는 것 같기도 하고, 스승님께서 어떤 무예를 익히셨는지 도저히 모르겠습니다.”
서린은 스승의 질문에 의아해하지 않을 수 없었다.
가르쳐 준 것이라고는 고작 천간십이수가 다였는데, 그것은 손으로 하는 수법이지, 무예라 여기지 않고 있었기에 그 의문은 더욱 커져 갔었다.
비록 천간십이수가 기운을 다루는 데는 그 공능이 뛰어나지만, 결코 절정의 무예라 불리기는 좀 모자란다는 감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네가 익히고 있는 천간십이수가 이 스승이 익히고 있는 최고의 무예이자 최후의 무예이니라.”
“제가 익히고 있는 것이 전부라는 말씀입니까?”
서린은 스승의 말을 믿을 수가 없었다.
그만큼 천간십이수는 매우 단순했던 것이다.
“내 그 끝을 보지는 못하였으나 천간십이수는 능히 이 땅에서 태어난 무예 중에 수위를 다툴 만한 절학이다. 탄기신봉이 없다면 그 요체를 익히기 힘든 것이지만 말이다. 탄기신봉을 이용해 천간십이수를 대성한다면 검을 들면 검왕이라 칭할 것이요. 도를 들면 또한 도왕이라 칭할 만큼 무서운 절학이 바로 천간십이수이니라.”
천간십이수는 음인수(陰引手), 탄양수(彈陽手), 절맥수(絶脈手), 교혼수(交魂手)의 네 가지 수법이었다.
좌수와 우수로 익히는 법이 달랐고, 양손으로 익히는 법이 달랐다.
그렇기에 팔 수가 되고 두 손으로 펼치는 네 가지 방법이 합해져 모두 십이수가 되는 것이었다.
하지만 서린은 천간십이수가 그리 특별한 절학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수련해 내기는 힘이 들었지만 익히는 법이 너무도 간단했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