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혈왕전서 1권 (13화)
4장. 현음천자(玄陰千字) (4)
그리고 또다시 기예의 연습이 시작되었다.
한참을 연습한 후 돌아서는 서린의 눈에는 지난 시간과 마찬가지로 평상 위에 놓여 있는 밥상이 보였다.
“철봉 때문에 정신이 팔려 있었다지만 또 놓치다니, 정말 호선(狐仙)이라는 말인가?”
호선의 움직임을 한 번도 잡은 적이 없는 서린으로서는 이제 그만 포기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휴우, 이제는 포기하는 수밖에. 철봉을 잡고 수련하는 것도 힘든 판에 그런 것까지 신경 쓰다가는 죽도 밥도 안 된다.”
지난 넉 달간, 아무리 노력해도 밥상을 갔다가 놓는 사람을 볼 수 없었다.
서린은 이제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찾기를 포기했다. 지금 시작한 수련이 만만한 것이 아님을 안 까닭이었다.
평상 위에 앉아 얼얼한 손으로 묵묵히 밥을 다 먹은 서린은 할아버지가 있는 행랑채로 향했다.
“할아버지 저 왔습니다.”
“들어오너라.”
서린이 방 안으로 들어서자 한 노인은 인자한 눈으로 서린이 자리에 앉기를 권했다.
“할아버지, 할아버지가 알려 준 호흡법대로 호흡을 하며 충좌를 취하고 철봉을 잡아 봤지만 손만 아프지 힘들어요.”
“그리 힘들더냐?”
“얼마나 아픈데요. 벌써 몇 번씩 손바닥이 까지고 다시 아물고, 이제는 완전히 굳은살투성이라 소 발바닥이라고 해도 믿겠어요.”
“그럴 것이다. 하지만 서린아. 네 스승의 절기는 말로서는 전할 수 없는 것이다. 네 스승의 가문 사람들은 네가 하는 것 같이 그렇게 스스로 자신의 절기를 만들었느니라. 네가 익히고 있는 천간십이수는 보기에는 하찮은 것 같지만, 손으로 할 수 있는 모든 수법이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네가 탄기선봉과 씨름하다 보면 어느 순간 힘을 쓰는 법을 스스로 깨우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런 연후에야 네 스승의 나머지 절기를 전수받을 수 있을 테니, 지금 진전이 없다 하여 실망하지 말고 꾸준히 노력해야 할 것이다.”
“알겠어요, 할아버지.”
“그럼 이제 공부를 시작하도록 하자. 지치고 피곤하지만 사람은 자신이 가진 능력을 갈고닦지 않으면 발전할 수 없음이니 피곤하더라도 쉼 없이 매진해야 하느니라.”
“헤헤, 알고 있어요.”
서린이 피곤한 몸을 이끌고 경청할 자세를 취하자 한 노인은 강론을 하기 시작했다.
그 입에서는 삼교 구류를 비롯해 제자백가에 이르기까지 지난날 성인의 가르침이 쉼 없이 흘러나왔다.
서린이 말을 시작할 무렵부터 시작되어 온 공부는 지금껏 지속되어 온 것이었다.
기본적인 글자를 가르친 후 어느 정도 글을 깨우친 서린이에게 한 노인은 책 한 권 없이 말로서 강론을 했었다.
책은 없었지만 서린은 이상하게도 한 노인이 자신에게 한 강론을 모두 기억하고 있었다.
다른 사람들이 한 말은 곧잘 까먹으면서도 이상하게도 한 노인이 한 말은 한 자 한 자 뇌리에 각인되듯 지금까지 들어온 모든 강론을 기억하고 있는 서린이었다.
중간중간에 모르는 글자가 나오면 한 노인이 글자를 알려 주었기에 쉼 없이 흘러나오는 강론을 모두 알아들을 수 있었다.
그렇게 지속되던 강론이 삼경이 될 무렵 끝이 나자 서린은 피곤한 몸을 이끌고 자리에 누웠다.
오늘은 다른 날과 달리 온 힘을 다해 철봉과 씨름하느라 무척 지쳐 있었기에 서린은 눕자마자 깊은 잠에 빠질 수 있었다.
서린이 깊은 잠에 빠져들자 한 노인은 서린의 머리를 쓰다듬기 시작했다.
“내가 잘하는 것인지 모르겠다. 선주를 만나 보려는 마음밖에 없는 순수한 아이를 고난의 길로 이끄는 것은 아닌지 말이다. 어차피 우리 가문이 짊어져야 할 업보이기에 피할 수는 없겠지만, 네 형에 이어, 너까지 이 일에 말려들게 만들다니 훗날 할아비를 야속하다 생각해도 괜찮다.”
파파팟!
그렇게 서린의 머리를 쓰다듬던 한 노인의 손이 번개가 무색할 정도로 서린의 전신을 누비기 시작했다.
그리고 한쪽 구석에 놓인 보통이에서 세 개의 두루마리를 꺼내어 서린의 머리맡에 놓고는 왼손으로 두루마리 하나를 집어 들었다.
“서린아, 지금 내가 너에게 베풀려고 하는 것은 현음천자술이라는 것이다. 저 멀리 천축국에서 비롯된 비술이지만, 이 할아비가 우연치 않게 습득할 수 있었다. 현음천자술은 비전을 전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라 바라문교에서도 아는 사람이 극소수에 지나지 않지만 혹시나 하는 생각에 이 할아비가 익혔던 것이란다. 내가 지금 너에게 현음천자술을 이용해 전하고자 하는 것은 우리 민족의 고대 무예로 아직까지 전승자를 찾지 못한 것이다. 그 연원을 확실히 알 수는 없지만 이것을 익힌 자는 세상을 아우를 수 있다는 전설이 있을 만큼 무서운 것이란다.”
두루마리를 잡은 한 노인의 왼손이 푸른색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왼손이 청광에 완전히 휩싸이자 한 노인은 오른손을 서린의 미간에 가져다 대었다.
서린의 미간에 가져다 댄 손이 다시 청광이 물들고 연이어 사라졌다.
한 노인은 또다시 두루마리를 집어 들었고 같은 현상이 반복되었다.
그렇게 세 번째 두루마리까지 한 노인은 신비한 현상을 이끌어 냈다.
일을 모두 마치자 한 노인은 두 손을 서린의 미간에 가져다 대었다. 다시 그의 두 손에 청광이 잠시 머물다 사라졌다.
“내가 전해 준 비서에 쓰인 글자는 세상에서 유일하게 이 할아비만이 해석할 수 있는 글자로 기록되어 있는 것이다. 지금은 너의 의식 속에 잠들어 있지만, 네 스승이 가르쳐 준 절기를 완성해 감에 따라 스스로 너에게 모습을 보일 것이다. 이 할아비 또한 그것이 무엇인지 잘 모르지만 네가 그것들을 모두 완성한다면 어쩌면 천 년의 약속으로 이루어진 악연은 네 대에서 모두 끝을 낼 수 있을 것이다.”
읊조리듯 말을 끝낸 후 한 노인은 자신이 할 바를 다한 듯 편안한 표정으로 서린의 옆에 누워 잠을 청했다.
5장. 괄목상대(刮目相對) (1)
한 노인이 현음천자술을 이용해 세상에 나와 본 적이 없는 고대의 비예를 서린이에게 전수한지 도 어느덧 일 년이 다 되어 가고 있었다.
한 노인이 가르쳐 준 호흡법 때문인지 아니면 어린 나이부터 해 온 기예 때문인지는 몰라도 이제 열여섯 살이 되었지만 서린은 여느 아이보다도 튼튼하게 자라났다.
뼈를 진동하는 탄기선봉을 잡는 수련 속에서 서린의 뼈는 튼튼함을 더해 갔고, 매일 평상에 놓여 있는 밥상은 서린의 근육을 살찌웠다.
그런 때문인지 견디기 힘든 고통 속에서도 서린은 지난 시간 동안 스승의 가르침을 쫓아 철봉 잡는 법인 천간십이수를 어느 정도 습득할 수 있었다.
그중 가장 성취를 이룬 것은 한 노인이 알려 준 호흡법과 스승인 성갑이 알려 준 천간십이수였다.
천간십이수는 음인수(陰引手), 탄양수(彈陽手), 절맥수(絶脈手), 교혼수(交魂手)가 다인 수법이었다.
비록 네 가지뿐이기는 하지만 왼손과 오른손이 탄기선봉을 잡는 법이 각각 달랐고, 양손으로 동시에 탄기선봉을 잡는 법이 전부 달랐기에 총 열두 가지 수법(手法)이 되는 것이 바로 천간십이수였다.
오늘도 서린은 충좌를 취한 채 탄기선봉을 잡고서 용을 쓰고 있었다.
“끄응! 아이고!! 힘들다.”
탄기선봉을 잡고 한참 씨름하던 서린이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힘들다고 외치면서도 서린의 입가에 미소가 맺혀 있었다.
“크크, 이제 겨우 한 치 움직였구나.”
피나는 수련 덕분인지 오늘 서린은 바닥에 점잖게 누워 있는 탄기선봉을 한 치나 움직였다.
식은땀이 흐르고 다리가 후들거렸지만 자랑스러운 성과였다.
‘이제는 다른 것도 배울 수 있겠구나.’
오늘부터는 탄기선봉과 씨름하는 천간십이수 이외에 다른 것도 배울 수 있다는 사실을 며칠 전 스승으로부터 들은 서린이었다.
내일 수련장에서 만날 스승에게 보여 줄 자랑거리가 생긴 것을 기뻐하며 서린은 후원으로 향했다.
“하면 할수록 어려우니, 저 줄을 간 것도 벌써 스무 번을 훌쩍 넘겼네. 무던히도 연습했구나.”
지난 시간 동안 무던히도 타던 줄은 이미 몇 번을 갈은 것인지도 모른다.
스승의 배려인 듯 줄이 낡아지면 어느덧 새 줄로 교체한 것이 한 달에도 두어 번이니 많이도 갈았다는 생각을 가지며 서린은 몸을 풀기 시작했다.
“후후. 이제는 단전의 중심을 다른 곳으로 옮겨도 아무렇지 않으니, 많이 발전한 것인가?”
탄기선봉을 쥐며 할아버지의 호흡법대로 수련하는 서린은 자신이 옛날과는 많이 달라졌음을 느낄 수 있었다.
전과는 달리 단전을 중심축에서 이동해도 호흡이 가능해졌다.
중심축을 이동한 채로 아무리 심한 동작을 해도 호흡이 흐트러지지 않았고, 지치지도 않았다.
또한 제자리에서 재주를 넘어도 머리가 아프지 않았으며 어지러움증도 생기지 않았기에 오늘도 신이나 재주를 넘는 서린이었다.
휘이이이익!
서린이 재주를 넘은 것은 범인의 눈에는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빨랐다.
주위로 풍압이 발생하여 바람이 일 정도로 빠른 속도로 재주를 넘는 서린의 모습은 그저 둥그런 원이 휘도는 모습뿐이었다.
그리고 점점이 파여 가는 후원 바닥은 서린이 땅을 짚고 재주를 넘고 있다는 것을 보여 주고 있을 뿐이었다.
휘리릭!
재주넘기가 끝난 것인지 서린은 팔을 튕겨 나는 듯이 회전하며 줄 위로 올라갔다.
단숨에 날듯 줄 위로 올라간 서린의 신법은 감히 흉내 내기 어려운 것이었다.
줄 위로 올라온 서린은 줄의 탄력을 이용해 널뛰기를 시작했다.
마치 구름 위를 거니는 듯 날아올랐다 떨어지고, 전후로 움직이는 서린의 동작은 신기를 보는 것 같았다.
그렇게 한참을 줄 위에서 노닐던 서린은 줄에서 내려 수련장으로 향했다.
“어! 무슨 일이지? 점심도 그렇고, 호선이 아픈가?”
오늘은 매일 점심과 저녁에 놓여 있던 밥상이 보이지 않았다.
나타나지 않는 호선과 허기를 면할 수 없음을 생각하며 서린은 근심이 쌓이기 시작했다.
호선은 재주가 비상하여 사람이 모습을 보기가 힘들다는 것을 상기했다.
어쩌면 자신이 호선의 진짜 모습을 보았기에 나타나지 않은 것인지도 몰랐다.
“호선을 볼 수 있는 것은 전설 속에서나 가능한 일이지만 이제 겨우 볼 수 있게 됐는데, 정말 이상하네. 진짜로 어디 아픈 건가? 아니면 내가 봤다는 것을 알게 되서 더 이상 나타나지 않는 건가?”
호흡법을 대로 호흡을 하며 탄기선봉과 씨름하는 동안 신체가 몰라보게 변했다.
그동안 보이지 않았던 호선의 움직임이 보였다는 사실은 서린을 기쁘게도 했고, 한편으로 당혹스럽게 만들기도 했다.
얼마 전부터 서린의 눈에 보이기 시작한 호선은 서린 또래의 여자자이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서린은 지금까지 호선이 여자아이로 변신하여 자신에게 밥상을 차려 줬음을 그제야 알 수 있었다.
눈이 부실 정도의 곱상한 외모의 호선은 나는 듯이 밥상을 내려놓고는 눈 깜짝할 사이에 서린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처음에 갑자기 나타났다 사라지는 호선의 모습을 보고 얼마나 놀랐는지 몰랐다.
소리 없이 홀연히 나타나 밥상을 내려놓고는 눈 깜짝 할 사이에 사라지는 모습을 보며 놀란 서린은 호선이 아니면 그럴 수 없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었다.
인간세상에서 호선을 볼 수 있다니 정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었다.
혹시나 자신을 홀려 나중에 간을 빼 먹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잠시간 볼 수 있었던 호선의 눈은 푸른 하늘을 닮아 있었기에 마음이 놓였었다.
조금 불안하기는 하지만 한번 만나 보면 안 될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호선은 마음에 드는 눈빛을 가지고 있었다.
“내가 얼굴을 봤다는 것은 알지 못할 거다. 혹시나 몰라 아는 척을 하지 않았으니까. 그럼 많이 아프다는 건데, 걱정이네. 아프면 안 되는데 말이야.”
꼬르르륵!
호선에 대한 걱정도 잠시, 배속에서 신호가 오고 있었다.
“크으, 할 수 없지, 밥이 없으니 오늘은 굶는 수밖에. 일단은 할아버지한테나 가 봐야겠다.”
서린은 빠르게 행랑채로 향했다.
스으으윽.
서린이 후원을 떠나자 평상 옆으로 이제 서린 또래로 보이는 여자아이 하나가 홀연히 나타났다.
서린이 진짜 호선이라 여길 정도로 귀신같은 몸놀림이었다.
붉은색 댕기를 맨 여자아이는 누가 보더라도 깨물어 주고 싶은 만큼 귀여움과 함께 보기 힘든 미태를 간직하고 있었다.
여자아이는 서린이 자신의 처소로 사라지는 것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휘이이익.
무엇인가 결심을 한 듯 서린을 바라보다 말고 후원으로 향했다.
그러고는 곧바로 몸을 날려 서린이 타는 줄 위로 올라섰다.
신영을 날려 한길 높이의 줄 위로 올라서는 모습은 평범한 아이의 몸놀림이 아니었다. 아무런 기척도 내지 않고 땅 위에서 없어짐과 동시에 홀연 줄 위로 올라섰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