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혈왕전서 1권 (12화)
4장. 현음천자(玄陰千字) (3)
홀로 남은 서린은 스승이 가르쳐 준 천간십이수(天干十二手)를 상기했다.
“스승님이 철봉 쥐는 법의 이름이라고 하셨지만 철봉 쥐는 법의 이름 치고는 거창하다. 쥐는 법은 간단하지만 나머지 것은 철봉을 쥐다 보면 저절로 알게 된다고 하셨으니, 천간십이수 중에 음인수(陰引手)부터 연습해 볼 수밖에…….”
스승이 알려 준 천간십이수는 손으로 잡으려고 하면 생기는 철봉의 반탄력을 이용하는 것이었다.
“우선은 심호흡을 해서 기운을 모으고. 스승님께서 말씀 하신 대로 한번 해 보자.”
지난 석 달 동안 할아버지로부터 배운 기혈의 움직임을 상기하며 서린은 스승이 가르쳐 준 기혈의 순서대로 기가 흐른다고 생각하며 음인수를 수련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할아버지가 가르쳐 준 호흡과 동시에 천갑십이수의 흐름을 생각하며 철봉을 잡아 갔다.
“으윽!!”
서린은 철봉에서 이제와는 다른 강력한 반탄의 기운을 느낄 수 있었다.
지금까지의 기운과는 강도를 논할 수 없을 만큼 강력한 기운이 느껴졌던 것이다.
“이 정도라니…….”
장심은 일부 벗겨져 나갔고, 손바닥 전체가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철봉에서 튀어나온 기운이 그렇게 만든 것이었다.
천간십이수는 연환을 해서 펼치는 것이 최종적인 완성이었다. 피나는 고련이 필요하기도 하지만, 탄기선봉이 없으면 제대로 수련을 할 수 없는 것이기도 했다. 기운의 흐름을 놓치는 바람에 이렇게 된 것이기에 누구를 탓할 수도 없었다.
“빌어먹을! 이거 완전히 사람 잡는 철봉이구나. 천간십이수는 철봉에서 자신에게 들어오는 기운을 가두었다가 자신의 기운과 함께 되돌려 쓰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지만…….”
서린은 투덜거리며 놓쳐 버린 봉을 노려보았다.
두 손이 상할 정도로 강력한 기운에 오기가 생겼다. 활활 타오르는 눈빛이 독기로 가득 찼다.
“좋아, 누가 이기나 해 보자.”
서린은 마음을 다잡으며 다시금 철봉을 잡아 갔다.
천간십이수는 익히는 사람마다 다르고 시전 했을 때의 위력 또한 천차만별이라고 했었다. 스스로 깨우치는 무공이 바로 천간십이수였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스승조차 기본적인 내기의 운행만 알려 주었을 뿐이었다.
스승의 이야기로는 누구나 이런 식으로 수련을 했다는 것에 서린은 투덜거리면서도 자신만의 천간십이수를 만들기 위해 수련을 자처하고 있었다.
그렇게 향후 고금제일무적수(古今第一無敵手)라는 수식어가 붙을 최강의 수법이 기초를 잡아 가고 있었다.
서린이 철봉 잡는 법인 천간십이수를 한창 익히고 있을 무렵에 성갑은 사랑채에서 한 노인을 만나고 있었다.
성갑은 책상 밑에 있던 두툼한 보퉁이 하나를 한 노인에게 내밀었다.
“이것입니다. 가문의 절기인 천간십이수(天干十二手)와 천세결(天洗結)은 제가 성심껏 전수할 것입니다. 하지만 삼대비예는 지금까지 아무도 익힌 이가 없을 만큼 어려운 것입니다. 쓰인 글들을 해석할 수가 없으니 말입니다. 어르신께서 장담은 하시지만 이런 난해한 것을 서린이 익히는 것이 가능할지 모르겠습니다.”
보퉁이에 담긴 것이 가문의 비예였지만 자신도 익히지 못한 것이기에 성갑은 걱정을 숨기지 않았다.
“그것은 걱정 말게, 내 알아서 할 터이니 말이야. 그런데 서린이가 자네가 전수하는 절기를 모두 익히는 것은 얼마나 걸리겠는가?”
“지금 속도로 봐서는 기본을 익히는 데 앞으로 일 년이면 가능할 것 같습니다. 하지만 두 가지 절기는 평생을 수련해야 하는 것인지라, 서린이가 어느 정도의 성취를 이룰지는 저로서도 장담을 못하겠습니다.”
“으음…….”
성갑의 말에 한 노인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기본을 배우는 데 일 년이라는 말은 서린의 천품이 고금을 통 털어 찾아볼 수 없을 만큼 뛰어나다는 뜻이었다.
그러나 성갑의 말대로 완숙의 경지에 들기 위해서는 얼마의 시간이 걸릴지 모르기 때문이었다.
‘서린이에게 짐을 지우는 것 같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서린이의 천품을 믿어 보는 수밖에.’
자신에게는 시간이 없어도 너무 없었다.
이미 적리소를 통해 확인한 것을 보면 천 년의 약속이 깨진 것이 거의 확실한 만큼, 서린을 성장시키기 위해서는 모종의 결심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자네는 건국 초기에 있었던 참변을 알고 있는가?”
“무혹지변(武惑之變)을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갑자기 꺼내는 말이었지만 성갑은 빠르게 대답을 했다.
가문과도 관련이 있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렇네. 자네도 어느 정도는 알고 있으리라 보네. 자네의 고조부도 관련이 있었던 일이었으니까.”
“어느 정도는 알고 있습니다.”
무혹지변이라 불리는 무인들의 수난에 대해서는 성갑 또한 자신의 조부로부터 들은 바가 있었다.
조선이 들어서기 전 고려조는 그야말로 무인들의 천국이었다.
고려 의종 십사 년, 정중부에 의해 시작된 무신정권의 시작은 백여 년간 이 땅을 무를 숭상하는 천하로 만들었다.
쥬신이 지배하던 시절을 제외하더라도 중원을 호령하던 고구려, 백제, 신라의 삼국시대 이래 무인들의 최전성기가 바로 이 시기였다.
무신정권이 들어선 이후 고려조의 각 호족들은 가문에서 내려오는 각 가문의 절기를 찬란히 꽃피웠다.
그로 인해 중원을 비롯해 저 멀리 서역의 이국까지 광활한 제국을 건설한 원의 공세를 장장 사십여 년간이나 막아 내기도 했다.
하지만 원과의 기나긴 대립은 결국 무신정권이 몰락을 불러왔고, 무인들은 정권에서 한 발 물러나야 했다.
그러나 정권에서는 물러났으나 오랜 무신정권기간 동안 절기를 가다듬은 각 가문에서는 자신들의 절기를 발전시키는 계기로 삼았다.
오히려 이 시기는 각 가문에서 가지고 있는 무의 깊이가 더욱 깊어지는 계기가 되었다.
또한 정권의 변방에 설 수밖에 없었던 이 땅의 무인들은 원, 명 교체기의 혼란한 와중에도 중원으로 건너가 혁혁한 무명을 드날리기도 했다. 바로 자신의 눈앞에 있는 한 노인 또한 그중에 한 사람이었다.
중원을 떠나 고향으로 귀향한 후 태조를 도와 이 나라 조선의 건국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던 사람이 바로 자신의 눈앞에 있는 한 노인이었던 것이다.
건국과 더불어 바람과 같이 사라졌던 한 노인이었다. 세수가 얼마나 되는지는 짐작조차 할 수 없는 사람인 것이다.
무혹지변은 성갑도 지금껏 관심을 가지고 있는 사안이었다.
가문의 숙원이 되어 버린 사건을 한 노인이 말한 것이다.
무혹지변은 다름 아니라 조선 건국 초에 일어났던 불가사의한 사건을 이름이었다.
조선 건국 초!
태조의 위화도 회군과 더불어 이 땅에 새로운 왕조가 등장하고, 새로운 국조가 정해지게 되었다.
고려 불교의 폐단을 일소하기 위해 삼봉 정도전이 주창한 숭유억불 정책은 불교의 탄압뿐만 아니라, 이 땅의 무인들이 속속 속세를 등지게 하는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무(武)보다는 문(文)을 중시하는 정책으로 오랜 무신정권 기간 동안 무에 대한 혐오감이 높았던 문신들에 의해 무신들이 억압을 받는 세상이 도래한 것이다.
태조가 무관 출신임에도 이 땅의 무인들은 가진 바 재주를 드러낼 수 없었기에 이로서 이 땅의 무는 쇠약의 길을 걸을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무인들은 서로 교통하며 교류를 하고 있었건만, 세종 즉위 초기에 갑자기 수많은 무인들이 이 땅에서 증발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 조선 땅의 강자라 칭하는 자들 중 삼십여 명이 어느 날 갑자기 소문도 없이 사라져 버렸던 것이었다.
가문의 절기 대부분을 간직한 이들이 사라져 버림으로 인해 그나마 명맥을 이어 가던 조선에서 무(武)라는 것이 사라져 버린 것이나 마찬가지가 되어 버렸던 사건이 바로 무혹지변이었던 것이다.
“어르신, 무혹지변을 어째서 거론하시는 것입니까?”
“무혹지변과 이번에 서린이에게 삼대비예를 가르치는 것이 무관하지 않기 때문이네.”
“무, 무혹지변과 말입니까?”
성갑의 음성이 떨렸다.
“그렇다네. 사실을 말하자면 그들은 사라진 것이 아니네.”
“사라진 것이 아니라면 어떻게 된 일입니까?”
“그들은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고 한 가지 물건을 찾으러 이 땅을 떠났네. 다들 돌아오지 못했기에 사라졌다고 알려진 것이네.”
“그것이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습니다. 찾으려 하신 물건이 무엇입니까?”
“미안하지만 자세한 이야기는 해 줄 수 없다네. 하지만 한 가지 이번 일은 그것과 관련이 있는 일이네. 그리고 서린이에게 맡기려는 일은 어쩌면 이 땅의 존폐 여부를 가릴 정도로 중요한 일일 수도 있음을 명심하게.”
한 노인은 말을 마치고 더 이상 해 줄 이야기가 없다는 듯 입을 굳게 다물었다.
지난날 조부에게서 한 노인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얼마나 놀랬던가.
언제고 한 노인이나 그의 후예의 부탁은 자신의 가문의 사람이라면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다 내주어야 한다는 조부의 말씀을 들으며 어떤 빚을 졌는지 궁금했었다.
하지만 조부 또한 지금의 한 노인과 같이 아무런 언질도 주지 않았기에 성갑의 궁금증은 더해만 갔다.
“이만 나가 보겠네. 이것은 내일 가져다주겠네.”
“그러십시오.”
“그 아이의 스승이니 자네도 때가 되면 알게 될 것이네. 그리고 서린이를 가르친 것이 잘 한 결정이라는 것도 말이네.”
말을 끝낸 한 노인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성갑이 내민 보퉁이를 들고는 사랑채를 나섰다.
“도대체 무슨 일인지 모르겠구나. 도대체…….”
새로운 사실에 성갑의 고심은 점점 깊어만 갔다.
사랑채를 나서 문간방으로 돌아온 한 노인은 성갑에게서 받은 보퉁이를 열었다.
보퉁이 안에는 얇기가 종이장 보다 더한 푸르디푸른 비단으로 만들어진 두루마리 세 개가 들어 있었다.
“이것이 성로의 사문인 선운문(鮮雲門)의 지보인 삼대비예로구나. 성로 그 친구는 내 신상을 생각해 죽어도 나에게 보여 주지 않았었지. 예전부터 알고 있었던 물건이지만 이렇게 직접 보니 감회가 새삼스럽구나.”
한 노인은 누군가를 생각하며 회상에 젖었다가 이내 세 개의 두루마리 중 하나를 풀었다.
차라라락!
서서히 풀려 나가는 두루마리에는 녹색의 바탕 위에 한문이나 언문이 아닌, 이 땅의 어느 누구도 보지 못했던 글자들이 빼곡히 적혀 있었다.
두루마리를 펴서 어느 정도 읽던 한 노인은 두루마리를 다시 말았다.
“으음, 세상에서 이것을 읽을 줄 아는 사람은 나 혼자뿐이지만, 나 또한 허락된 인연자가 아니기에 이 이상은 볼 수가 없구나.”
한 노인은 비단의 일부를 보다 말고 미련 없이 두루마리를 접었다.
그에게는 인연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다.
서린이에게는 비예를 전할 방법은 따로 있었다. 그렇기에 더 이상 보고 싶지 않았다.
마지막까지 읽었다간 다시 세속의 인연을 맺을까 두려워하는 마음이 들었던 것이다.
‘이런 것이라면 성로의 말처럼 삼대비예를 이용해 역천을 행할 수도 있는 일이다.’
보통의 인연이 아니었다.
삼대비예를 자신이 수습하게 되면 역천이 일어날 수도 있다. 혼자서 책임지는 것이라면 모를까, 그렇지 않다면 모르는 것이 좋았다.
* * *
서린은 오늘도 자신의 힘을 뿌리치는 탄기선봉과 씨름을 하고 있었다.
천간십이수를 배운 후 넉 달 동안 끊임없이 수련에 매진했다.
쇠고집을 가지고 있는 서린은 뼈마디가 부셔지는 것 같은 고통 속에서도 충좌(充坐)의 자세를 취한 채 스승이 가르쳐 준 내기의 순환법대로 탄기선봉을 잡고 있었다.
어깨 넓이로 발을 벌리고, 지면으로부터 무릎까지 직선을 만든 후 그대로 앉는 충좌는 그냥하기에도 어려운 자세였다.
처음 시작할 때는 수련장의 벽에 발끝을 대고 무릎이 닿지 않도록 하며 서서히 앉는 연습을 했었다.
끊어지는 것 같은 허리의 고통 속에서도 쉼 없이 호흡을 하며 앉았다 일어서기를 반복하며 익힌 충좌는 내기를 바르게 하는 효능이 있었다.
“끄응!! 이놈이 발악하는 것이 더욱 거세진 것 같으니. 손바닥이 얼얼한 게 이제 그만해야겠구나.”
어느덧 익숙해진 충좌와 더불어 내기를 순환한다 생각하며 잡고는 있었지만 탄기선봉은 서린에게 쉽게 자신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렇게 한참을 철봉과 씨름하던 서린은 시간이 되자 수련장을 나서 후원으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