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혈왕전서 1권 (11화)
4장. 현음천자(玄陰千字) (2)


낮에는 수련, 밤에는 할아버지로부터 학문을 배우는 동안 석 달이라는 시간이 쏜살같이 빠르게 흘러갔다.
석 달 동안 낮 동안은 철봉을 들어 올리는 일과 기예 연습, 그리고 밤에는 할아버지로부터 학문을 배우는 일이 반복됐다.
그러나 아직까지 철봉은 꿈쩍도 하지 않았고, 자신도 모르게 밥상을 가져다 놓는 사람의 정체도 밝혀내지 못했다. 그래도 성과가 있다면 할아버지가 가르쳐 주신 호흡법을 집중하지 않고도 할 수 있게 됐다는 것이었다. 무의식적으로 평상시에도 계속해서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또한 전보다 강도 높게 기예를 연습하면서도 쉽게 지치지 않는다는 것은 큰 성과였다.
지치지 않으니 수련을 끈질기게 할 수 있었던 것이다.
오늘도 다른 때와 마찬가지로 철봉을 들어 올리는 수련에 열중을 했다.
“쩝! 오늘도 차려져 있네.”
수련을 마치고 바깥으로 나오자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평상 위에 밥상이 놓여 있었다.
‘저녁에는 누가 이곳에 밥상을 가져다 놓는지 기필코 알아내고 만다.’
수련장 주변을 살펴봤지만 아무도 없음을 확인한 서린은 밥을 먹기 시작했다.
밥을 다 먹은 뒤 잠시 쉬고는 후원으로 가서 천천히 몸을 풀기 시작했다.
오늘은 다른 날과 달랐다. 몸을 푸는 척하며 사방을 살피며 누군가 주변에 있는지 찾았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였다.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하자 이내 수련에 푹 빠져 버렸다. 어느새 서린은 정신을 집중하여 수련에 임하고 있었다.
‘이런!’
살판을 땅재주를 연습한 서린은 아차하며 수련장 쪽으로 가서 평상 위를 살폈다. 시간이 되지 않아서인지 다행스럽게도 아직까지 밥상이 놓여 있지는 않았다.
‘뛰어오르면 평상 쪽이 보이니까, 오늘은 나래 차는 것만 연습하자.’
줄 위로 올라가면서도 이번에는 반드시 살핀다는 각오로 연습을 시작했다.
연습을 하면서도 뛰어오를 때마다 기와 너머로 보이는 평상 위를 살피며 시선을 풀지 않았다.
‘저건?’
한참을 연습하던 서린은 무엇인가 희미한 인영이 평상 위를 스쳐 지나가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으이크!”
호선(狐仙)이 아닌가 하는 놀라움에 하마터면 줄 위에서 떨어질 뻔한 서린은 마음을 가다듬고 줄 위에서 내려왔다.
“역시!”
아무것도 없던 평상에 밥상이 놓여 있었다.
분명히 조금 전에 본 희미한 인영이 놓고 간 것이 틀림없었다.
자신도 모르게 밥상을 놓고 가는 이가 궁금했지만, 아직은 확인이 요원한 일이라 서린은 묵묵히 식사를 마쳐야 했다.
식사를 끝낸 후 곧바로 수련장으로 향했다.
요즘 공부를 시작하기 전에 수련장에 들어 철봉을 다시 들어 보는 것이 습관이 된 때문이었다.
수련장 안으로 들어선 서린은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스승을 볼 수 있었다.
“스승님!”
“그래, 밥은 다 먹은 거냐?”
“예.”
“이제는 철봉을 들 수 있느냐?”
“아닙니다. 제자가 미욱하여서 그런지 아직까지 철봉을 들지는 못하고 있습니다.”
“그렇더냐? 어디 한 번 들어 보아라.”
서린은 스승의 지시에 땅바닥에 누워 있는 철봉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핏, 아직 힘이 부족해서 그런 것인가?’
석 달 동안 노력했지만 한 치도 움직이지 않는 철봉을 들라고 하니 마음이 착잡했다.
‘좋아, 한 번 해 보자. 내 스스로 노력했으니 스승님께서 몰라 주시더라도 상관은 없다.’
마음을 가다듬은 서린은 호흡을 바로하며 손에 힘을 집중하고 철봉을 들어 올리기 위해 용을 썼다.
‘어째 기운이 더욱 세진 것 같다.’
철봉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철봉에서 흘러나오는 반탄력 때문에 잡기조차 힘에 겨웠다.
“그만하면 됐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고, 그만 할아버지께 가 보거라.”
“예, 스승님.”
대답을 하고 돌아서는 서린의 표정이 굳었다. 아무리 나이가 어리다지만 석 달 동안 노력했는데 한 치도 움직이지 않았기에 수련장을 나서는 서린의 어깨가 축 져져 있었다. 스승에게 실망스러운 모습을 보였다는 생각으로 인해서다.
‘철봉에서 뿜어져 나오는 이상한 기운만 아니라면 손에 힘을 줄 수 있을 텐데…….’
두 달 전부터 철봉에서 뿜어져 나오는 기운으로 인해 봉을 잡는 것조차 어려웠다.
호흡을 하며 힘을 줄수록 봉에서 흘러나오는 기운이 더욱 거세어졌기에 더욱 힘들어지고 있는 중이다.
침울한 표정으로 밖으로 나가는 서린과는 달리 성갑의 눈은 잘게 떨리고 있었다. 제자의 성취가 그가 예상한 것 보다 훨씬 빠른 것이었기 때문이다.
“예상을 했지만 벌써 탄기선봉이 벌써 반응을 하다니 천품이 놀라운 아이다. 나조차 삼 년이 걸린 것을 불과 석 달 만에 이루어 내다니, 도저히 믿을 수가 없는 일이다. 역시, 피는 속이지 못하는 것인가?”
성갑의 가문에서 대대로 내려오는 기물인 탄기선봉은 그 유래가 어디서부터 비롯됐는지는 아무도 아는 이가 없었다.
다만 삼국시대 이전부터 존재했던 물건으로 탄기선봉을 얻으면서 성갑의 가문이 무가로서 이름을 떨치는 계기가 되었다는 것은 분명했다.
자신도 지금에서야 간신히 움직일 수 있을 정도로 탄기선봉의 반탄력은 상상을 불허하는 것이었다. 내공이 쌓이면 쌓일수록 반탄력이 크게 일어나는 까닭이다.
탄탄한 내공을 바탕으로 운기의 묘를 살리고 힘을 흘릴 수 있어만 탄기선봉을 조금이나마 움직일 수 있다. 내력을 쌓기만 할 뿐, 운기하는 법을 배우지 못한 서린으로서는 철봉을 드는 것은 아직은 요원한 일이었다.
“몸도 그만하면 수련을 시작할 수 있을 정도로 만들어진 것 같고, 이제는 슬슬 운기하는 법을 가르쳐야겠구나.”
잘 먹고 계속해서 수련을 한 덕에 키가 세 치나 자라 있었다.
상당히 빠른 성장이었다. 거기다가 자신도 모르게 탄기선봉의 반탄력에 대응하는 기운을 뽑아낼 수 있는 성취라면 본격적으로 가문의 무공을 가르칠 차례였다.

성갑이 제자의 수련 과정에 생각하고 있을 무렵 서린은 방에 당도해 있었다.
“할아버지, 저 왔어요.”
“들어오너라.”
방으로 틀어 온 서린은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어찌 그리 기운이 없는 것이냐?
“오늘도 실패했어요.”
“허허허, 오늘도 실패했다는 말이냐?”
“할아버지, 아무래도 호선(狐仙)인 것 같아요.”
“하하하, 오늘은 누가 가지고 오는지 본 모양이구나.”
“희미한 인영을 보기는 했는데 분명히 호선이 맞는 것 같아요. 사람이 그렇게 빠를 수는 없을 테니 말이죠.”
“으음, 아마도 무예를 익히고 있는 여아가 이 집안에 있나 보구나.”
잠시 생각하던 한 노인이 입을 열었다.
어느 정도는 짐작하고 있었던 일이라서 그런지 표정이 무척이나 담담했다.
“무예를 익힌 여자아이가 저에게 밥을 갖다 주고 있었다는 말인가요?”
“그래, 아마도 특이한 경신법을 익혀 네가 모습을 놓치는 것일 게다. 네 식사를 책임지고 있는 것 같지만 모습을 보이기 싫은 것 같으니 그만 관심을 접도록 해라.”
“그래야겠어요.”
확인하고 싶기는 하지만 상대가 싫어하는 것일 수도 있기에 서린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어떻게 하면 좋을지 모르겠어요.”
“무슨 일이 있었느냐?”
“오늘도 철봉을 들지 못했어요. 스승님에 보시는 앞에서 했는데 말이죠.”
“허허허, 그러냐?”
실망스러운 표정의 서린을 보며 한 노인이 웃었다.
“그렇다고 실망은 하지 마라. 네 스승이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을 보면 제대로 수련을 하고 있다는 뜻이니 말이다.”
“실망은 하지 않아요. 열심히 하면 되겠죠. 언젠가는 들고 말 테니까요.”
“그래, 그리하면 될 것이다. 네 스승이 알려 준 수련법은 일조일석에 이룰 수 있는 것이 결코 아니니 말이다.”
한 노인은 서린을 다독였다.
“그런데 할아버지.”
“왜 그러느냐?”
“저어…….”
“무슨 할 말이라도 있느냐?”
자신을 부른 서린이 미적거리는 모습을 보이자 한 노인이 연유를 물었다.
“그놈이 자꾸만 이상한 기운으로 제 손에서 빠져나가려 하는 통에 잡을 수가 없어요. 그래서 들어 올리는 것은 시도조차 할 수 없는데 무슨 방법이 없을 까요?”
“으음, 철봉이 손에서 자꾸 빠져나가려 한단 말이냐?”
처음 듣는 소리라 한 노인이 확인하듯 물었다.
“두 달 전에는 손을 약간만 밀어내는 것 같더니 지금은 아예 거부하듯이 뿌리치려고 그래요.”
“그렇게 된 지가 벌써 두 달이나 됐다는 말이냐?”
한 노인은 반문하며 사실을 확인했다.
“오늘로 딱 두 달 째예요. 들어 올리게 되면 할아버지와 스승님께 자랑하려고 했는데 말처럼 되지가 않네요.”
“그렇구나.”
‘벌써 그 정도라니, 정말 놀랍구나.’
성갑은 일이 바빠 서린을 잘 살피지 못했고, 자신 또한 마찬가지였다.
두 달 전부터 그랬다면 상당히 빠른 성취가 아니라 경천동지할 성취였다.
오랜 세월이 흐르는 동안 성갑의 가문 사람 중에 반년 안에 서린과 같은 성취를 이룬 인물이 하나도 없었기 때문이다.
‘으음, 벌써 그런 성취를 이루다니. 아무래도 가르쳐 줘야 할 것 같구나.’
철봉을 드는 모습을 봤다면 성갑이 본격적인 수련을 시킬 것이 분명했기에 한 노인은 그 사실을 말해 주기로 했다.
“후후후, 서린아. 그렇다면 내일부터는 네 스승이 너에게 가문의 절기를 가르치겠구나.”
“아직 철봉을 들어 올리지 못하는 데도요?”
스승이 본격적으로 가문의 절기를 가르쳐 줄 것이라는 말에 서린이 반문했다.
자신은 아직도 철봉을 움직이지도 못하는데 그럴 리가 없었던 것이다.
“그 철봉은 네 스승이라고 해도 움직이기 쉽지 않은 천고의 기물이다. 스스로 기운을 뿜어내고, 그 기운이 일으키는 반탄력은 사람이 감당하기에는 힘든 것이다. 그런 연유 때문에 네 스승의 가문은 이곳을 떠난 적이 한 번도 없느니라. 가문의 보물을 두고 떠날 수는 없는 노릇이니 말이다.”
“정말이요? 철봉에서 뿜어져 나오는 힘이 그런 정도라니, 진짜 신기한 철봉이네요.”
“이 할아비가 너를 이곳에 데려온 이유도 네 스승이 뛰어난 사람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 철봉이 여기에 있다는 이유가 컸다.”
‘역시, 연유가 있었구나.’
혹시나 사정을 들을 수 있을까 기대를 한 서린이지만 이어지는 할아버지의 말에 실망하지 않을 수 없었다.
“철봉에서 일어나는 반탄력을 대응하다 보면 자신도 모르게 내력의 운용이 자연스러워진다. 아직 거칠기만 한 네게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스승의 절기를 배우더라도 철봉 잡는 일을 게을리 하지 말거라.”
“예, 할아버지!”
서린은 할아버지의 당부를 기억했다.
“그럼, 책을 펴도록 해라.”
“알겠습니다.”
책이 펼쳐지고 이내 공부가 시작되었다.
늦게까지 공부를 하던 서린은 삼경이 되어서야 잠이 들 수 있었다.
호흡이 자연스러워진 이후로는 피곤할 일이 없기에 다음 날 아침도 일찍 일어나 수련장으로 향했다.
수련장으로 들어서자 스승이 먼저 와 있었다.
‘스승님께서 나와 계셨구나. 할아버지 말씀이 맞는가 보다.’
석 달 동안 자신의 수련을 보지 않던 스승이 오늘은 아침부터 수련장에 나와 있었다.
어젯밤 할아버지의 말대로 가문의 절기를 본격적으로 가르치려는 것 같았다.
“오늘부터 우리 가문의 절기를 전수할 것이니 그리 알도록 해라. 내 나랏일을 보는 몸이라 너에게 가문의 절기를 알려 주는 것은 아침 일찍 하게 될 것이다. 내일부터는 항상 인시말경에 이곳으로 나오도록 해라.”
“예, 스승님!”
서린은 밝은 표정으로 대답을 했다.
드디어 본격적이 수련이 시작됐기 때문이었다.
형에게 갈 시간이 한 발 앞당겨진 것이다.
서린은 스승에게서 한 가지 수법을 전수받을 수 있었다.
그것은 바로 철봉을 쥐는 법이었다. 철봉을 쥐는 법이 열두 가지나 되었지만 그 형태는 간단하기 그지없었다.
“이것으로 모두 알려 준 것 같구나. 기억하겠느냐?”
“제자의 머릿속에 모두 들어 있습니다.”
“그래, 앞으로 철봉을 이용해 내가 가르쳐 준 수법(手法)을 수련하도록 해라. 능숙하게 될 때까지 계속해야 하니 집중을 잃지 말도록 해라. 난 이만 가 보도록 하마.”
스승인 성갑이 열두 가지의 수법별로 기운을 움직이는 법을 모두 전수해 주고는 등청을 위해 나가자 수련장 안에는 서린 홀로 남아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