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혈왕전서 1권 (10화)
3장. 무예입문(武藝入門) (4)
한동안 몸을 푼 후, 호흡을 가다듬었다. 아침을 먹기 전에는 순순한 근력으로 들어 보려 했지만 움직이지 않았기에 스승의 말대로 해 보기 위해서였다.
‘그래, 이거야.’
호흡을 하자 아랫배가 따뜻해졌다.
힘이 도는 것을 느끼며 자연스럽게 마보 형태를 취한 서린은 철봉의 끝머리를 잡고 힘을 주었다.
“끄으응!”
팔이 떨리고 힘을 주는 다리도 떨렸지만 숨을 흐트러트리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후우, 으자자자차!”
용을 써 봤지만 꼼짝도 하지 않자, 서린은 기합을 넣으며 철봉을 들어 올리려 했다.
하지만 여전히 미동도 하지 않았다.
“하아, 되게 힘드네. 일단 호흡을 가다듬고.”
털썩!
반 시진 가까이 온 힘을 쓴 서린이 바닥에 주저앉았다. 그러면서 천천히 호흡을 가다듬었다.
“좋아, 또 해 보자.”
바닥에서 엉덩이를 뗀 서린은 자세를 바로하고 손아귀에 힘을 주며 다시 한 번 철봉을 잡았다.
“이이잇!”
노새의 등짐도 수월하게 들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지만 역시나 꼼짝도 하지 않았다.
‘손오공의 여의봉도 아니고 더럽게 무겁네.’
얼마나 무거운지 감을 잡을 수 없었다.
‘언젠간 들고 말거다.’
서린은 실망하지 않았다. 들 수 있기에 시킨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철봉과의 씨름이 계속해서 이어졌다.
톡톡.
한동안 철봉과 씨름을 하느라 시간이 가는 줄 몰랐던 서린은 누군가 문을 두드리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누구지?”
자신을 찾아온 것 같기에 문을 열고 밖으로 나섰다.
“벌써, 점심인가?”
수련장 앞에 있는 평상 위에 누군가 가져다 놓은 밥상이 보였다.
하늘을 보니 해가 중천을 넘어가고 있었다. 힘을 쓰며 칠봉과 씨름하느라 시간이 가는 줄 몰랐던 것이다.
“어디!”
서린은 평상 위에 앉았다. 반찬 몇 가지가 간단하게 차려진 밥상이지만 정성이 보이는 터라 맛있게 먹을 수 있었다.
“꺼억! 잘 먹었다. 찬모가 누구인지 모르지만 솜씨가 정말 좋구나.”
밥과 찬들이 하나같이 맛이 좋은 것을 느끼며 서린은 음식을 준비했을 찬모가 고마웠다.
식사를 마치고 평상에서 잠시 쉰 서린은 후원으로 향했다. 스승의 말대로 기예 연습을 하기 위해서였다.
이제는 할아버지가 가르쳐 준 호흡법이 몸에 익었기에 기예를 연습하는 것도 괜찮았다.
살판을 배우며 몸을 유연하게 하는 것은 기본이라는 가열들의 말을 곱씹으며 서서히 몸을 풀기 시작했다.
다리에서부터 근육을 풀기 시작하여 세세히 말단 근육까지 풀고 난 서린은 서서히 재주를 넘었다.
파파파팟!
휘― 이익!
속도가 더해지자 바람이 휘돌았다.
몸의 상체가 지면을 스치며 한 바퀴 돌 때마다 머릿속이 흔들리는 듯했지만 어려서부터 해 온 일이라 그리 어렵지는 않았다.
몸의 균형을 잡고 피가 뇌로 몰리는 어지러움을 참으며 넘어가는 제자리 회전은 보기보다는 고난도의 기예.
자칫 중심을 잃으면 부상을 당하기에 주의를 기울여야 했다.
호흡법을 하지 않고 서린이 연속해서 제자리 회전을 할 수 있는 숫자는 삼십 회가 전부였다. 그렇지만 지금은 얼마든지 할 수 있었다.
할아버지가 알려 준 호흡을 한 후로는 힘이 달리지 않았다.
회전 수가 더해 가고 속도가 높아져도 어지럽지도 않았다.
언제나 배꼽 아래 세 치 정도에서 따뜻한 기운이 일어나 재주넘는 것을 도와주고 있었다.
“후우, 이 정도면 됐다.”
족히 수백 번은 재주를 넘은 서린은 몸을 멈춰 세운 후 가볍게 몸을 풀었다.
“어디.”
그렇게 제자리 회전을 끝낸 후 놀이판에서 벌이는 갖가지 땅재주를 연습한 서린은 곧이어 후원에 매달려 있는 줄 위로 올라섰다.
양팔로 균형을 잡고 발바닥의 감촉으로 외줄을 노니는 어름은 놀이패 기예의 백미. 조선팔도에서도 할 줄 아는 가열들이 얼마 없을 정도로 어려운 재주이기도 했다.
휘익!
탁!
튕겨 올라갔다가 내려오며 발로 줄을 걸치고, 몸을 회전시켜 이리저리 움직여 갔다.
타고난 것인지 무복(武服)을 입고 줄 위에서 노니는 서린의 모습은 천상의 선동이 구름 위를 노니는 것 같았다.
서린은 몸에서 따뜻한 기운이 생긴 이후론 발에서 이는 감촉이 손만큼이나 예민해져 있었다.
4장. 현음천자(玄陰千字) (1)
서린이 줄 위에서 내려온 것은 저녁이 다 됐을 무렵이었다. 기예에 집중하느라 시간이 가는 줄 몰랐던 것이다.
“후우! 정신없이 놀았더니 시간 가는 줄도 몰랐네. 어! 저건 뭐지?”
줄에서 내려온 서린은 수련장 한구석에 놓여 있는 평상 위에 하얀 천에 쌓여진 채 놓여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가까이 다가가 천을 젖힌 서린은 깔끔하게 차려진 자그마한 밥상을 볼 수 있었다.
“이건 언제 가져다 놨지? 후원에서 수련할 때 가져다 놓은 건가?”
줄 위에 있을 때면 신명이 나 세상의 모든 것을 잊어버리는 서린이다. 언제 누가 밥상을 갔다 놨는지 보지 못했지만 시장하던 참이라 군침이 넘어갔다.
“꿀꺽! 누가 차려 놓은 것인지는 모르지만 잘됐다. 어디!”
점심과는 달리 고기까지 있었기에 평상에 재빠르게 걸터앉은 서린은 게걸스럽게 밥상을 비우기 시작했다.
고봉으로 담은 밥이 수저를 놀릴 때마다 움푹움푹 줄어들었다. 어린 소년이라 할 수 없을 정도로 엄청난 식욕이 아닐 수 없었다.
“꺼억! 잘 먹었다.”
깔끔하게 차려진 밥상을 깨끗하게 비운 서린은 잠시 평상에 앉아 쉬었다.
“쉴 만큼 쉬었으니 슬슬 다시 시작해 보자. 스승님이 오전에만 하라고 하셨지만, 한 번 더 해 보는 것은 상관은 없겠지. 할아버지가 가르쳐 주신 호흡법대로 한 번만 해 보자. 어쩌면 단서를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르니까.”
서린은 시험을 해 볼 것이 있어서 철봉이 있는 수련실로 향했다.
아침을 먹기 전에 그냥 들어 봤던 것과 나중에 할아버지로부터 정식으로 배운 호흡법대로 숨을 쉬며 들었던 것과는 차이가 확연했다.
서린은 그 차이를 알고 싶었던 것이다.
한양으로 오면서 할아버지로부터 숨 쉬는 법을 좀 더 세세하게 들을 수 있었다.
날라리 부는 법과 그리 다르지 않았지만, 완전히 같은 것은 아니었다. 전과는 달리 호흡을 할 때 마음을 두는 법에 대해서 아주 자세하게 들었던 것이다.
서린은 할아버지가 새롭게 가르쳐 준대로 호흡을 하며 두 손으로 철봉을 잡았다.
“끄응!”
역시 열다섯 어린 소년이 들기에는 턱도 없다는 듯 철봉은 요지부동이었다.
서린의 예상대로 자신의 존재감을 확실히 드러내고 있었다.
“후! 후! 읏차!!”
다시 한 번 들어 봤지만 요지부동이었다.
“조금은 움직일 줄 알았는데 이거 요지부동이네. 참! 그래, 네가 이기나 내가 이기나 한번 해 보자. 읏차!”
열이 받아 오기가 생긴 서린은 스승의 말도 잊어버리고 호흡을 하며 철봉을 들기를 계속했다.
‘진짜 더럽게 무겁네.’
호흡을 계속하면 배꼽과 명치 그리고 이마에 따뜻한 기운이 생기며 힘이 생기고, 아무리 무거운 물건이라도 들 수가 있을 것이라고 했었다.
엄한 모습의 스승 또한 호흡을 정갈히 하면 들 수도 있다고 했기에 서린은 시간이 가는 줄 모르고 철봉과 씨름을 했다.
“호호호호!”
“누구야?”
용을 쓰는 찰나에 누군가 웃는 소리가 들렸다.
‘이상하다, 분명 웃는 소리를 들었는데, 내가 잘못 들었나?’
웃음소리에 뒤돌아보았지만 아무도 없었다.
광을 비우고 마련된 수련장은 어른 얼굴만 한 쪽창을 제외하고는 사방이 막혀 있었다.
안에 들어오지 않는 이상 자신의 모습을 볼 수 없었기에 서린은 자신이 철봉과 씨름하다 환청을 들은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오늘은 힘들 것 같으니 내일 다시 해 보자.”
철봉과의 씨름으로 온몸에 기운을 빼기도 했지만, 정신이 흐트러진 탓에 더 이상 하고 싶은 마음이 없어졌다.
서린은 후원으로 나가 다시금 몸을 풀기 시작했다.
기예를 배울 때마다 집중된 힘으로 인해 근육이 무리를 한 상태에서는 적당히 풀어 주어야 좋다는 가열들의 조언을 잊지 않았던 것이다.
살판을 통해 몸을 완전히 푼 서린은 방으로 돌아왔다. 저녁에는 할아버지에게 학문을 배워야 할 시간이었다.
“도대체 어디를 가신 거지?”
방으로 돌아왔으나 여전히 할아버지는 돌아오지 않았다.
“오실 때까지 명상이나 하자.”
호흡을 가라앉히며 명상에 들었다. 다른 날과는 달리 아주 깊은 명상을 할 수 있었다.
서린이 명상을 끝내고 눈을 떴다.
“으음, 날이 벌써 밝은 건가? 얼마 하지도 않은 것 같은데 시간이 이리 지났다니…….”
창밖으로 여명이 느껴졌다. 어찌 된 일인지 벌써 날이 밝아오고 있었다.
이불을 개고 얼굴을 씻기 위해 밖으로 나오자 하인이 하나가 밥상을 들이고 있었다.
“우물은 뒤쪽에 있습니다. 밥상을 들여 놓을 테니 어서 씻고 오십시오.”
“스승님은 어디 계십니까?”
“말씀 낮추십시오. 그리고 대감께서는 어제 등청하신 후 퇴청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알겠습니다.”
스승인 성갑도 등청한 후에 집으로 돌아오지 않았다는 소리에 서린은 우물로 가서 간단히 씻은 후 방으로 돌아와 하인이 차려다 준 밥을 먹고 난 후에 곧바로 수련장으로 갔다.
“좋아. 오늘도 한 번 해 보자.”
탁!
서린은 손바닥에 침을 한 번 뱉은 후 비비고는 곧바로 철봉에 달려들었다.
“후우, 고놈! 참 요지부동이네.”
어제와 마찬가지로 철봉을 가지고 한참 동안 씨름을 해야 했다.
여기저기 들어 올릴 곳을 들쑤시며 용을 써 봤지만 움직이지는 않았다.
녹초가 될 정도로 힘을 쓴 서린은 점심 무렵이 되자 수련장을 나섰다.
“쩝! 우렁각시라도 있나?”
다시금 평상에 차려진 밥상을 볼 수 있었다.
예전보다 이목이 훨씬 밝아진 자신이었다. 집중하면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모를 지경이 되기는 하지만, 평상에 밥상을 가져다 놓은 사람을 기척을 느끼지 못했던 것을 의아하게 느끼며 서린은 평상에 앉아 밥을 먹기 시작했다.
식사를 마친 후에는 후원으로 가서 기예를 연습하기 시작했다.
어제보다는 호흡이 깊어진 것인지 훨씬 빠르고 정확하게 살판을 놀 수 있었다.
살판이 끝난 후에는 어름을 놀았다. 그렇게 밤이 찾아올 무렵까지 수련을 한 서린은 자신도 모르게 평상 위에 차려져 있는 밥을 먹은 후 행랑채에 있는 자신의 방으로 향했다.
방으로 들어서자 조그마한 책상 두 개와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할아버지를 볼 수 있었다.
“어! 할아버지, 언제 오셨어요?”
“조금 전에 들어왔다. 어제는 할 일이 있어서 들어오지 못했다. 그래 수련은 할 만했느냐?”
“철봉을 드는 것 빼놓고는 전부 괜찮았어요. 그런데 할아버지가 가르쳐 주신 호흡이 깊어지면 진짜로 그 철봉을 들 수 있는 건가요?”
철봉과 씨름하는 것에 약이 올랐던 서린이 물었다.
“후후, 들 수 있을 게다.”
“그렇군요.”
“네 스승이 그것을 너에게 시키다니 의외로구나.”
“무슨 말씀이세요?”
“그 수련을 시키는 것을 보니 널 수제자로 삼을 모양이라서 그렇다.”
“수제자요?”
“그래, 그 철봉은 탄기선봉이라는 것이다. 그것을 잡아들어 올려 바로 세우는 것이 네 스승의 집안에서 내려오는 전통의 수련법이다. 너에게 그것을 가르친다는 것은 네 스승이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전하겠다는 이야기나 마찬가지다.”
“으음, 철봉을 드는 것에 깊은 뜻이 있나 보군요?”
“그렇다. 아직은 네가 어리고 수련이 되어 있지 않아 그렇지만 두어 달 수련을 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알게 될 것이다. 네 스승이 전심전력하여 널 가르칠 생각인 것 같으니 어렵다 생각하지 말고 온 정성을 기울여 수련해야 한다.”
“예, 할아버지.”
“그럼 지금부터 공부를 시작하겠다. 전에 어디까지 했었느냐?”
“도덕경을 끝내고 나면 육도와 삼략을 가르쳐 주신다고 했습니다.”
“그렇구나. 지금까지는 남들의 이목이 있어 틈틈이 시간을 내서 가르쳤지만 이제부터는 본격적인 공부를 할 테니 배움에 집중해야 한다.”
“예, 할아버지.”
서린이 한 노인에게 학문을 배운 것은 오래 전부터였다.
총명이 과인할 정도로 뛰어난 서린이었기에 어리지만 지금까지 상당한 학문을 익히고 있었다.
지금까지는 틈틈이 글을 익히고 경문을 배웠지만, 지금부터 본격적으로 배움을 시작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