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혈왕전서 1권 (9화)
3장. 무예입문(武藝入門) (3)


‘그래도 나쁜 상황은 아니다. 한 가지만 더 확인해 보자.’
비밀리에 안배하고는 있지만 자신이 준비한 패에 대해 알고 있는지 확인해야 했다.
“그렇다면 너희들을 막아섰던 자들에 대해서는 아는 것이 있느냐?”
“이 나라 왕실과 관련이 있는 자들인 것 같지만, 그것도 분명한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무서운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다행이다. 삼쇠 일행에 대한 것은 사 년 전부터 차단시켜 놓아서 그런지 놈들이 아는 것이 없는 모양이로구나.’
삼쇠 일행에 대해 아는 것이 없다는 사실에 안도할 수 있었다. 중원으로 잠입해 훗날을 위한 기반을 닦아야 할 그들이 이미 알려졌다면 큰 낭패가 아닐 수 없었던 것이다.
‘삼몽환시술(三夢幻施術)의 최후 단계는 사람의 인성 자체를 완전히 바꾸어 버리는 것이다. 한 인간의 생애를 완전히 뒤바꾸는 것이라 천기를 어기는 일이기는 하지만, 지금은 어쩔 수 없다. 이놈이 천랑혈로를 가지고 있었던 것도 그렇고, 자질이 뛰어나 최후 단계를 펼칠 수 있는 것도 어쩌면 운명이겠지. 훗날 서린이에게 크나큰 도움이 될 수도 있음이니…….’
적리소에게 금제를 가하는 것에 마음이 씁쓸한 것은 어쩔 수 없었지만 마음을 독하게 먹었다.
적리소가 운기요상을 할 때 사용하던 혈로에 대해서는 이미 알고 있는 것이었다.
천랑혈로는 거란족(契丹族)의 근간이 되는 신기.
자신과도 무관하지 않은 것이었기에 적리소의 인생을 바꾸면서까지 삼몽환시술을 펼치려 하는 것이다.
“지금부터 너에 대해 금제를 가할 것이다. 훗날 나와 같은 술법을 베푸는 이가 나타나면 너는 그에게 죽음으로서 충성을 바쳐야 한다. 이 명(命)은 그 무엇보다도 우선한다. 너에게 힘을 줄 것이니 그날이 오면 새로운 광명이 너를 찾을 것이다.”
한 노인의 눈에서 발해진 푸른 안광이 적리소의 눈으로 파고들었다.
말을 마친 한 노인의 손이 천랑혈로 위로 향했다. 손바닥이 혈로 위에 위치하자 그의 손에서 삼색의 기운이 아래로 뻗어 내렸다. 청적황(靑赤黃)의 기운이 혈로 안으로 빨려 들어가 듯 사라졌다.
우우우우웅!
천랑혈로가 괴로운 듯 진동을 하더니 이내 잠잠해졌다.
“조금 전 네가 하던 운기법을 다시금 시행하도록 해라. 천랑혈로의 진정한 기운은 내 몸속에 잠재해 있다가 스스로 깨어 너를 도울 것이다.”
이지를 상실했지만 적리소는 본능적으로 혈무천령(血霧天靈)이라 이름 붙여진 가문의 심법(心法)을 운용하기 시작했다.
적리소가 심법을 운용하자 천랑혈로에서 혈무가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완전한 핏빛을 띠고 있었다. 혈무의 색깔은 조금 전에 적리소가 운기 요상할 때와는 차원이 달랐다.
천랑혈로도 달라지고 있었다.
바깥에 새겨진 핏빛 혈무가 짙어질수록 혈랑의 모습들이 서서히 사라져 갔다.
‘휴우, 이대로 두어도 무사히 끝날 것이다. 이곳을 안가로 두었다는 것은 어떻게든 놈들과 관련이 있다는 뜻이니 아이들로 하여금 감시토록 하고, 서린이에게 매달려야겠구나.’
적리소에 대한 안배가 어느 정도 끝나자 한 노인은 미련 없이 적리소의 거처를 나섰다. 전각 안으로 들어설 때와 마찬가지로 나올 때 또한 그의 모습을 본 자는 아무도 없었다.

* * *

눈을 뜨자 등잔불도 댕기지 않은 방은 이미 짙은 어둠이 물들어 있었다.
“벌써 밤이구나.”
하루 종일 마음을 잡지 못하다가 할아버지로부터 배운 호흡법을 이용해 마음을 가다듬은 서린은 시간이 꽤 지났음을 알 수 있었다.
“아직 돌아오시지 않으신 건가? 알아서 오시겠지. 전에도 이런 적이 많았으니까. 그런데 배가 고픈데 밥도 안 주나?”
할아버지가 보이지는 않았지만 서린은 그리 마음을 쓰지는 않았다. 사당패에 있을 때도 종종 있어 왔던 일이었기 때문이다.
서린은 시장기를 느끼며 방 안을 둘러보았다.
“어? 밥이네!”
한쪽 구석에 밥상이 놓여 있었다. 성갑의 가문이 원래부터 무가(武家)라 운기조식을 할 때나 명상을 할 때는 건드려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있는 집안의 종복들이 슬며시 들여놓은 것이었다.
“와우, 맛있겠다.”
비록 식기는 했지만 하얀 쌀밥에 나물이며 반찬이 맛깔스러워 보였다.
사당패에서 먹었던 것과는 천지 차이였다. 서린은 시장기를 느꼈기에 들여온 밥상을 끌어당기고는 정신없이 밥을 먹기 시작했다.
“우걱우걱!”
수저로 먹다가 마음이 급해 손가락으로 반찬을 집어먹는 것을 보면 몇 날 며칠은 굶은 것 같은 모습으로 아귀 같이 밥을 먹는 모습이 기관이 아니었다.
“꺼억∼! 휴우, 잘 먹었다.”
트림을 하며 배를 두드린 서린은 깨끗한 상을 바라보다가 밖에 내놓았다.
방으로 들어와 다시 문을 닫고 하릴없이 할아버지를 기다렸다.
“들어오지 않으실 모양이구나. 할아버지가 당부하신 것도 있고, 내일 아침 일찍부터 수련을 해야 하니 이만 자자.”
서린은 이부자리를 편 후 자리에 누워 오늘 있었던 일을 생각했다.
‘형이 위험한 일이 뛰어든 것은 틀림없다. 할아버지께서 형이 무사하다고 하니 믿어야겠지만 걱정이 되는구나.’
형에 대해 마음에 쓰이며 뇌리를 떠나지 않았다.
‘그래, 형이 좋지 않은 일을 당했다고는 생각하지 말자. 애고, 머리가 어지러우니 안 되겠다. 누워서 해도 되니 할아버지가 알려 주신 호흡이나 연습해야겠다.”
다시 호흡을 가다듬은 서린은 마음이 안정되는 것을 느꼈다.
‘역시나 배꼽 있는 데가 따뜻해지는구나. 전보다 면적이 조금 늘어난 것 같은데 잘됐다.’
따뜻한 부분이 한 손바닥만 했는데, 이제는 두 손을 합친 것보다도 컸다. 기쁜 마음에 호흡을 더욱 가다듬자 의식 깊숙한 곳으로 침잠해 드는 것을 느낄 수 있었고 스르르 잠이 들었다.
그리고 다음 날이 되었다.
잠에서 깬 서린은 자리에서 일어나 기지개를 켰다. 창을 보니 희미하게 날이 밝아 오고 있었다.
“오늘도 새벽이구나. 어제 늦게 잔 것 같은데. 정말 좋은 것을 배운 것 같다.”
호흡법을 하고 난 아침이면 전날 아무리 피곤하더라도 일찍 일어날 수 있었다. 언제나 기분 좋은 일이었다.
“서두르자.”
서린은 이부자리를 개고 밖으로 나섰다. 밖으로 나오니 하인 하나가 서 있었다.
“일어나셨습니까?”
“에, 예.”
“저를 따라오십시오.”
생전 처음 받아 보는 존대에 말끝을 흐리던 서린은 하인을 따라나섰다.
“대감마님께서 광을 개조해 수련장을 만드셨습니다.”
“스승님께서요?”
“예, 지금 그곳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들어가십시오.”
“예.”
수련장은 스승의 전언을 가지고 온 하인이 안내했기에 쉽게 찾아갈 수 있었다. 안으로 들어서자 성갑이 감색의 무복을 입고 기다리고 있었다.
“어서 오너라.”
“예, 스승님.”
“어제는 하루 종일 너를 어떻게 가르칠까 심히 고심했느니라. 너도 알다시피 관청에 메인 몸이라 상시 너를 가르칠 수가 없더구나. 해서, 고민 끝에 너에게는 본 가에서만 내려오는 특별한 수련을 시키기로 했다.”
“특별한 수련이라니요?”
“당분간 오전에는 저기 있는 철봉을 드는 것으로 수련을 하도록 해라. 가문 대대로 내려오는 수련법이니, 하찮다 여기지 말고 성심을 다해야 할 것이다.”
“명심하겠습니다, 스승님.”
맨 먼저 시킨 것이 바닥에 누워 있는 철봉을 드는 것이지만 서린은 의문을 가지지 않았다. 스승의 가문에서 대대로 내려오는 수련법이라는 말 때문이었다.
‘굉장히 무거워 보이는데, 저걸 들라니. 정말 특별한 수련인가 본데…….’
철봉은 자신의 키를 훌쩍 넘기는 크기였다.
두 손으로 맞잡아도 다 잡을 수 없는 두께를 가진 철봉은 열다섯 어린 소년이 들기에는 불가능한 것이었다.
“지금 내가 너에게 들라고 한 철봉은 우리 가문 대대로 내려온 것이다. 지금까지 우리 가문의 사람들은 그 철봉으로 수련을 시작했고, 그 철봉으로 수련을 끝냈다. 처음 시작하는 것이니 지금은 힘들 것이나 네 할아버지가 알려 주신 호흡법으로 호흡을 하며 들다 보면 언젠가 가뿐히 들 수 있는 날이 올 것이다. 그 다음부터 본격적인 수련이 시작되니 그리 알아라.”
“예, 스승님!”
“그리고 오전 수련이 끝난 후, 오후에는 예전에 하던 데로 재주를 조금 더 가다듬도록 해라. 후원에 준비를 해 두었느니라.”
“기예도요?”
“그렇다. 네가 지금까지 놀이패에서 하던 기예들도 계속 연습을 하도록 해라. 후원에 줄을 매달아 놨으니 줄타기도 해 보고, 땅재주도 해 봐라. 몸을 유연하게 하는 데는 그만한 것이 없는 것 같으니 말이다.”
“알겠습니다.”
“오늘 아침은 겸상을 하려고 하니 한 시진 정도 수련을 한 후에 사랑채로 오너라.”
“그리하겠습니다.”
성갑은 더 이상 말을 하지 않고 수련장을 나섰다. 혼자 남게 된 서린은 바닥에 있는 철봉을 바라보았다.
“아무리 봐도 평범한 철봉인데…….”
비록 또래의 아이들 보다 건강하고 놀이패에서 힘든 기예 훈련을 했지만, 자신은 어린 소년이었다. 자신의 몸무게보다 더 무거워 보이는 쇠몽둥이를 드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완전히 세우는 것은 섣불리 도전할 만한 일이 아니었지만 수련을 완성해야만 형을 만날 수 있다는 말이 서린을 철봉 앞에 세웠다.,
“허언을 하실 분이 아니니 시키시는 대로 해 봐야겠다. 나이가 들어 힘이 붙으면 들 수 있을 텐데, 이리 시키시는 것은 이유가 있을 테니 말이다.”
무예를 배우라기에 기대를 했던 서린이다. 수련이란 것이 철봉을 드는 것이었지만 실망하지 않았다.
“끄응!”
두 손으로 잡히지 않는 두꺼운 철봉을 쥐는 일조차 쉽지 않았다. 손아귀에 있는 대로 힘을 줘야 했지만 워낙 두꺼워 소용이 없었다.
“우와, 되게 힘드네. 그럼, 어디.”
서린은 끝부분으로 다가가 흙을 조금 파고는 철봉 밑으로 손가락을 들이밀었다.
“끄응.”
용을 쓰며 힘을 줬지만 꿈쩍도 하지 않았다. 족히 몇 백 근은 나가 보였다.
“고놈, 되게 무겁네. 하지만 얼마나 버틸지 두고 보자.”
한참을 씨름하다가 서린은 철봉을 노려보며 한마디 한 서린이 수련장을 나섰다.
철봉과 정신없이 씨름을 하는 동안 벌써 한 시진이 훌쩍 지나 버린 것이다. 사랑채로 향하자 마당에 물을 담은 유기를 든 하인이 보였다.
“씻고 들어가십시오.”
“고맙습니다.”
서린은 대야에 담긴 따뜻한 물로 얼굴과 손을 씻은 후 곧바로 사랑채로 들어갔다.
좌정하고 책을 보던 성갑이 보던 책을 덮었다.
“그리 앉아라. 그래, 힘들지 않더냐?”
“아주 무겁습니다. 아직은 어려운 일이지만 조만간 기필코 들고 말겠습니다.”
“그래, 수련은 중단 없이 해야 하느니라.”
“예, 스승님.”
성갑이 가상하다는 눈빛으로 서린을 바라보았다.
잠시 후, 아침 밥상이 들어왔다. 상당히 맛있어 보이는 음식들이 상 위에 가득했다.
“원래는 이리 먹지 않지만, 너를 위해 이리 차리라 했다. 잘 먹어야 키도 크는 것이다.”
“고맙습니다, 스승님.”
“자, 먹자.”
스승이 수저를 들어 국을 뜨자 서린도 수저를 들었다.
어제 밤늦게 먹었던 것처럼 걸신들린 모습을 보여 줄 수 없었던 터라 조신하게 수저를 놀렸지만 그럼에도 상당히 많은 양의 음식이 서린의 배로 들어갔다.
흡족한 식사를 마친 후에 차가 들어왔다.
‘냄새가 좋구나.’
백색의 자기에 담긴 담녹색의 차가 싱그러운 향기를 풍기고 있었다.
한 번도 차를 마신 적이 없는 서린은 스승이 마시는 모습을 따라 천천히 차를 마셨다.
다향이 사라질 즈음 성갑이 입을 열었다.
“나는 곧 등청을 해야 하니 조금 쉬다가 수련을 시작하도록 해라. 자신에게 부끄러움이 없도록 누가 보지 않도록 열심히 해야 할 것이다.”
“예, 스승님.”
“그만 나가 보아라.”
“저는 이만 나가 보겠습니다. 조심히 다녀오십시오.”
서린은 자리에서 일어나 고개를 한 번 조아리더니 사랑채를 나섰다.
그리고 곧바로 수련장으로 향했다.
스승인 성갑이 쉬라고 말은 했지만 소화도 도울 겸, 할아버지에게서 배운 체조로 몸을 풀었다. 오전 내내 용을 써야 하는 까닭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