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혈왕전서 1권 (8화)
3장. 무예입문(武藝入門) (2)


그런 마음을 느낀 것인지 한 노인이 다시 입을 열었다.
“서린아! 지금은 네 스승으로부터 무예를 전수받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이니 말이다. 네가 일정한 수준에 오르지 않는 이상 알고 싶어도 알 수 없는 일이니 궁금하더라도 참고 수련에 매진하도록 해라. 한 가지 명심할 것은 네 수련 정도에 따라 네 형의 운명이 바뀔 수 있다는 것이다.”
“예, 할아버지.”
서린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린 나이이기는 하지만 이야기가 심상치 않음을 알 수 있었기 때문이다.
“난 볼일이 있어 이만 나가 봐야겠다. 그러니 마음을 차분하게 가라앉히고 있어라.”
“예.”
한 노인은 서린이에게 말을 마친 후 곧장 방을 나섰다.
궁금한 것을 물어도 대답을 해 줄 것 같지 않기에 서린은 불안한 마음만 가중될 뿐이었다.
“무슨 일일까? 형이 어떻게 됐기에…… 그리고 내가 하는 정도에 따라 형과 나라의 운명이 바뀐다니 도대체 무슨 말씀이지?”
알 수 없는 말들뿐이었기에 서린은 좀처럼 마음을 잡을 수가 없었다.

* * *

한 노인은 서린과 이야기를 나누다 삼쇠의 전언에 그를 만나기 위해 밖으로 나선 참이었다.
성갑의 집을 나서자 멀리 떨어진 구석에 삼쇠가 주변을 살피며 서성거리고 있었다.
“무슨 일이더냐?”
성갑에게 다가간 한 노인이 물었다.
“어르신, 사 년 전에 도성을 침범해 범궐하여 무참한 짓을 했던 자들이 나타났습니다.”
“그놈들이 나타났다고?”
한 노인은 예상치 못한 소식에 눈을 부라렸다.
“예, 어르신.”
‘이번 일이 결정된 것은 하루도 채 되지 않았다. 그놈들이 눈치를 채고 나타났을 리는 없을 텐데…….’
서린이에게 무예를 전수하기로 결정한 것을 이리 빨리 알고 대처할 리는 없었다.
“어떻게 된 일인지, 자세히 이야기해 보아라.”
“산막에서 나와 주변을 살피던 중에 놈들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그들이 하는 말을 엿들었는데, 적리세가라고 하는 곳에서 온 놈들이었습니다. 수하들과 징치하면서 배후를 캐기 위해 놈들을 이끌고 있는 자는 일부러 놓아 주었습니다. 그리고 예상대로 놈은 도성 안으로 숨어들었습니다.”
“놈이 숨어든 곳은 알아 두었느냐?”
“예, 어르신. 윤견의 사택이었습니다.”
“윤견이라…… 알았다. 그놈에 대해서는 따로 조치하도록 할 테니 넌 그만 이곳의 일을 정리하고 대륙으로 건너가거라. 일이 심상치 않게 돌아가는 것을 보니 서둘러야 할 것이다.”
“하오면?”
“그래 이제부터 대계를 시작한다. 네가 모셔야 할 사람은 이제부터 서린이니라.”
“어르신!”
“이제부터는 서린이에게 기대를 걸기로 했느니라. 선주는 이미 놈들의 손에 떨어진 것 같으니 말이다.”
“하지만 어르신, 소주의 나이가 이제 열다섯이옵니다. 괜찮겠사옵니까?”
“이는 백 년 대계니라. 하루이틀 사이에 끝날 사안이 아니란 말이다.”
“알겠습니다, 어르신.”
결단을 내렸다는 것을 깨달은 삼쇠는 고개를 숙여 대답했다.
“서린이가 준비가 되어야 하니 본격적인 움직임은 앞으로 한참 후가 될 것이다. 넌 대륙으로 건너가 섣불리 나서지 말고 기반을 다지도록 해라. 너희들의 재주라면 자리 잡는 데 그리 어려움을 없을 것이다. 그에 따른 준비가 있으니 그리 어렵지는 않을 것이다. 그리고 그동안 중원의 정세에 대해서 빠짐없이 파악을 해라. 중원에 있는 세력 간에 물밑 싸움이 치열할 테지만 너희들에게까지는 신경을 쓰지 못할 것이니 말이다.”
“예, 어르신. 한 치의 소홀함도 없을 것입니다.”
“내 명도 얼마 남지 않았지만, 천기를 보니 그자의 수명도 얼마 남지 않았다. 그자의 힘들이 세를 잃어 갈 테니 중원의 정세는 복잡해질 것이다. 무인으로서 답답할 수도 있겠지만 너희들이 하게 일은 아주 중요하다. 그동안 우리를 업신여겼던 놈들에게 본때를 보여 줄 때가 서서히 다고 오고 있음이니, 너희들이 천여 년을 넘게 이어 온 전쟁의 막을 내려야 할 것이다.”
“어르신,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래, 이제 그만 가 보도록 해라. 연락은 나중에 서린이가 할 것이다. 내 전에 일러 놓았던 것으로 그 아이의 신분을 확인하면 될 것이다.”
“알겠습니다, 어르신. 그럼 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옥체 강령하십시오.”
팟!
삼쇠는 한 노인에게 장읍으로 인사를 하더니 이내 바람처럼 사라졌다.
한 노인이 아련한 눈으로 궁궐 쪽을 바라보았다.
“내 죽음으로 혈왕의 문을 열릴 것이고, 이제 중원은 새로운 질서로 재편될 것이다. 서린이가 얼마나 해 줄지는 모르겠으나 이로서 싹은 뿌려졌음이야. 궁왕의 맥을 이은 놈들이 형제를 배신하고 나라를 세웠으면 자존심을 지키기라도 해야 하거늘, 대륙을 질타하던 기상은 다 어디로 가고 없더란 말인가? 형제의 의를 배신한 자들이라 하지만 어찌 내버려 둘 수 있겠는가? 미우나 고우나 한 핏줄인 것을…….”
이 땅에 남은 겨레의 마지막 신물조차 놈들에게 탈취당한 상황이 아쉬웠다.
그것만 있었다면 일이 훨씬 쉬워질 테지만, 이미 탈취를 당한 후라 아쉬워해 봐야 소용이 없었다.
백척간두의 상황에 아직도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이깟 조그만 땅덩어리에 안주한 왕실이 한심스럽기는 하지만 그냥 두고 볼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태고조를 따르던 삼신의 후예인 삼봉신(三封臣)의 자취마저 사라진 지금, 자부(紫府)의 맥만이 홀로 남아 이 땅을 지키고 있는 상황이지만, 혈왕이 다시 재림할 수만 있다면 아직 기회는 있다.”
두 눈에서 한줄기 신광을 발한, 한 노인은 성갑의 집으로 향했다. 안배가 시작된 터라 다른 자들이 눈치를 채기 전에 서린이에게 모든 것을 전해야 하는 그의 마음은 조금씩 바빠지기 시작했다.
집 안으로 들어선 한 노인은 행랑으로 갔다.
방으로 들어서자 서린이 자신이 가르쳐 준 호흡법을 이용해 마음을 안정시키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선주의 자질이 최상이라 여겼거늘, 이 아이는 더하구나. 가히 천고의 자질이다.’
이미 호흡이 완숙에 이르렀다.
형인 선주가 최고의 무골이라 생각했건만 서린이 익히고 있는 속도는 그가 보기에도 범상치 않았다. 서린의 성취는 자신도 예상치 못한 것이었다.
‘내기를 느끼려면 적어도 수년을 수련해야 하건만 이 년이 채 되지도 않았는데 예전 선주의 성취를 능가하고 있구나. 마음이 유약한 것이 흠이기는 하나, 광명정대하니 그 또한 감춰질 터. 고집이 세고 형에 대한 정이 각별한 아이니 선주의 일을 알고 나면 마음이 유약한 것 또한 충분이 상쇄될 것이다. 어느 정도 마음을 추스른 것 같으니 일단은 삼쇠가 알려 준 놈을 족쳐 무엇을 위해 이곳에 다시 왔는지 알아내야겠구나.’
안정된 기운이 전신에 흐르고 있었다.
굳이 돌보지 않아도 될 것 같기에 서린을 뒤로 하고 행랑채를 나섰다.
스스스슷.
행랑을 나선 한 노인의 신형이 연기처럼 사라졌다.
마치 바람이 일어 안개가 사라지듯 사라져 버린 것 같았다.
집을 빠져나왔지만 그 누구도 한 노인의 종적을 발견할 수 없었다.
한 노인이 시전 한 것은 축지번둔(縮地飜遁)의 선법이다. 땅을 접어 자신이 원하는 곳까지 몸을 감춘 후 갈 수 있는 것이 축지번둔이다.
중원에서 내려오는 도맥의 술법과는 다른 이 땅 고유의 선법이었다.
순식간에 윤견의 집에 당도한 그는 주변을 살핀 후 아주 은밀히 담을 넘었다.
‘으음, 저곳인가? 기운이 요동을 치며 한곳으로 빨려 들고 있는 것을 보니 놈이 운기요상을 행하고 있는가 보군. 놈이 눈치채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는 지금이 좋은 기회다.’
행랑채와는 따로 떨어져 있는 조그마한 전각에서 거친 기운이 움직이는 것을 느낀 한 노인은 연기가 스며들 듯 전각 안으로 숨어들었다.
‘흐음! 이놈은 놈들과는 연관이 있을지언정 본 맥에서 나온 놈은 아니로군.’
방 안에 들어선 한 노인은 적리소가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기물을 가지고 있는 것을 보니 방계 중에서는 직계인 모양인데…….’
적리소 앞에는 조그만 향로가 놓여 있었다.
향로에서 벌어지는 현상은 보통 사람이 보기에도 기이한 광경을 연출하고 있었다.
피처럼 붉은 연기가 향로에서 흘러나와 가부좌를 틀고 있는 적리소의 콧속으로 사라지고 있었다.
하늘을 날아가는 것 같은 이리의 문양이 새겨져 있는 붉은색의 조그만 향로에서 나오는 붉은 연기가 가부좌를 틀고 적리소의 기운을 충만하게 해 주는 것을 보면 기물인 것이 분명했다.
‘이놈의 상태를 보아하니 삼몽환시술(三夢幻施術)이라면 충분할 것이다.’
핏!
끝날 때까지 기다려야 하는지 잠시 망설이던 한 노인의 손에서 한 가닥 지풍이 뻗어 나와 적리소의 혈도를 제압했다. 특이하게도 사혈인 백회혈이었다.
펼친 사람의 의지에 따라 다른 작용을 하는 삼몽환시술.
한 노인이 펼친 것은 그만이 알고 있는 탈혼대법이었다. 세 개의 환상을 겹쳐 시술받은 자조차 자신도 모르게 비밀을 토설하는 무서운 수법이다.
금제가 걸려 있다면 의식 깊숙한 공간을 우회하여 펼쳐지는 것이라 예외 없이 모든 것을 토설하게 되는 비기 중의 비기로, 비록 막대한 내력과 정신력이 소모되는 것이었으나 한 노인이 알아내야 하는 것은 무엇보다 중요하기에 망설이지 않고 펼친 것이었다.
“내 너에게 묻노니, 이곳에 온 이유가 무엇이더냐?”
한 노인의 입에서 누구도 거역할 수 없는 기세가 담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번쩍!
한 노인의 말에 적리소의 눈이 떠졌다. 붉은색으로 물들어 무시무시한 안광을 흘리는 적리소는 정상적으로 보이지 않았다.
“한 가지 기물을 찾으러 왔습니다.”
이지를 잃어버린 것과는 달리 적리소의 말은 무척이나 또렷했다.
“그것이 천왕의 탈이더냐?”
“그건 모릅니다. 이 나라 왕실에서 보관하고 있는 인장 하나를 가지고 오라는 명을 받았습니다.”
“으음.”
한 노인은 신음성을 삼켰다.
그는 적리소가 말한 인장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이상하군.’
인장은 분명히 사 년 전 범궐한 자들이 탈취해 갔다. 그런데 탈취하러 왔다니 이상했다.
“인장은 이미 네놈들이 지난날 탈취해 가지 않았느냐?”
“그건 가짜였습니다. 그래서 본 가에서 진짜를 찾으러 이곳으로 저를 보낸 것입니다.”
적리소의 말은 한 노인에게는 의외였다.
‘놈들이 혈왕의 인장에 숨겨진 비밀을 알아내지 못한 모양이니 다행스러운 일이다. 하긴 천우신경 안에 혈왕의 인장이 숨겨져 있다는 것은 나밖에는 모르는 일이다. 그리고 혈왕의 맥을 이은 자가 아니면 평범한 것에 지나지 않으니 놈들이 진위를 알아낼 수는 없었을 것이다.’
다행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노리는 물건이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탈취해 갔다가 가짜라고 판명이 난 것을 보면 분명 인장이 무엇을 뜻하는지도 모르는 것 같았다.
‘어쩌면 서린이에게 큰 도움이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혈왕에 대한 안배가 시작된 지금 가장 중요한 신물에 대한 단서가 잡혔다.
“그럼 가짜라고 판명이 난 것은 어디다 두었느냐?”
“다른 것이지만 현기가 느껴진다는 아버님 말씀에 따라 천장비고(天藏秘庫)로 옮겨졌습니다.”
“천장비고?”
“다른 말로는 지옥의 혈장고(血藏庫)라고 불리는데, 저도 그곳이 어디인지는 모릅니다. 우리 가문에서 그곳을 아는 사람은 아버님이 유일한 분이십니다.”
“알았다. 그럼 이곳에서 너와 연결된 자들은 누구냐?”
혈장고에 대해서는 대충 알기에 조선에 있는 끈이 누구인지 물었다.
“모릅니다. 다만, 이곳이 안전한 곳이라는 것만 알 뿐입니다.”
“이상하군. 연결 고리를 모른다는 말이냐?”
“그렇습니다. 연결된 자들을 알고 있는 수하는 이미 죽고 없습니다.”
“죽다니?”
“숨겨진 뻐꾸기를 알고 있던 수하는 사 년 전에 이곳에서 만났던 자들과 조우하여 그들의 손에 죽었습니다.”
“으음.”
‘안타까운 일이다. 놈들을 발본색원할 수 있었는데…….’
조선에서 놈들과 연결된 자들에 대한 단서가 끊겼음을 확인한 한 노인은 너무도 안타까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