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혈왕전서 1권 (7화)
2장. 한성지야(漢城之夜) (4)


“대감마님, 조반상 들었사옵니다.”
하녀의 목소리와 함께 이내 문이 열리며 조반상이 들어왔다. 상이 세 사람 앞에 놓은 하녀는 이내 밖으로 나갔다.
“어서 드십시오.”
“고맙습니다.”
“서린이 너도 맛있게 먹어라.”
“예, 대감마님.”
성갑의 권유에 두 사람은 수저를 들었다. 성갑도 수저를 들고 식사를 시작했지만, 대화는 이어지지 않았다.
그렇게 세 사람은 어색한 분위기 속에서 말없이 식사를 마칠 수 있었다.
식사가 끝났음을 알리자 종복들이 들어와 상을 치웠지만 여전히 침묵이 흘렀다.
그러다가 먼저 말을 꺼낸 것은 성갑이었다.
“어찌 된 일인지는 모르겠으나, 성상의 어지를 받들어야 할 몸이니 서린을 맡기는 하겠습니다. 그런데 달리 하실 말씀은 없으십니까?”
“음, 대감께서 그리 말씀하시니 한 말씀드리겠습니다. 우리 서린이 대감 문하에 들어가면 의발을 전수받을 수 있는 것입니까? 아니면 기명제자에 머무는 것입니까?”
한 노인의 단도직입적인 말에 성갑은 흠칫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자신 앞에 있는 한 노인은 가문의 비밀을 알고 있는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어르신은 어떤 분이십니까?
성갑은 전음으로 한 노인의 정체를 물었다.
―자세히 말해 줄 수 없네만, 자네의 고조부인 한성공과 교분을 나누던 사이라네.
‘그렇다면…….’
자신의 뇌리로 들려오는 전음을 들으며 한 노인을 바라보던 성갑은 의혹을 감출 수 없었다.
‘하지만 얼마나 긴 세월이 지났는데…….’
자신의 고조부와 교분을 나누던 사람이라면 이미 세수가 백수를 훨씬 넘겨야 했지만, 눈앞의 한 노인은 고작해야 예순이 넘은 모습이었다. 믿기 힘든 사실이었다.
―자네 가문의 절기를 마지막으로 정리한 사람이 바로 나네.
성갑의 의혹에 한 노인이 다시 전음을 보냈다.
―마, 맞군요.
성갑은 한 노인이 자신이 생각하고 있는 사람이 맞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사실이라면 눈앞에 있는 한 노인은 조부 때부터 가문에서 내려오는 유훈 속의 사람이었다.
가문의 절기를 완성할 수 있도록 조언을 아끼지 않았고, 이 나라를 위해 홀로 중원으로 떠났던 사람이 눈앞에 있었던 것이다.
―자네가 생각하는 것 같이, 나는 그 사람이 틀림없네.
―정말이십니까? 어르신이 그분이라니, 정말이지 믿을 수가 없는 일입니다.
―믿게, 나는 자네가 생각하는 그 사람이 분명하니 말이야.
―하지만, 어째서…….
자신이 눈치를 채지 못할 정도의 고수였다.
그런 실력이라면 서린을 자신에게 맡길 필요가 없기에 다시 의문에 찬 눈으로 한 노인을 바라보았다.
―난 지금 지난날의 약속 때문에 서린이에게 나의 절기를 전수해 줄 수 없는 처지라네. 자네도 나중에는 알게 되겠지만, 서린이에게 무예를 가르치려 함은 금수강산에 불어닥칠 피의 폭풍을 막기 위함일세. 그렇다고 내가 가르칠 수는 없으니 자네가 기초를 좀 닦아 주도록 하게.
―어르신 말씀이니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런데 피의 폭풍이라니요?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우선은 그렇게만 알고 있게. 디 이상은 곤란하니 말이야.
성갑은 더 이상 물어봤자 소용이 없다는 것을 깨닫고는 더 이상 질문을 하지 않았으나 마음이 무거운 것은 사실이었다.
―너무 걱정하지 말게. 이 나라에서 우리 가문의 절기와 쌍벽을 이루는 자네 가문의 절기라면 다가오는 혈풍을 막을 수도 있을 것이니 말이야.
자신을 안심시키려는 전음에 성갑은 고개를 끄덕였다.
―서린이를 잘 부탁하겠네.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으나, 고조부님께서 남기신 유훈에는 가문의 절학이 어르신 것이나 마찬가지라 했습니다. 그러니 서린이에게 모두 전수는 하겠습니다. 그런데 왜 이런 일을 벌이시는지 정말 제가 알 수는 없겠습니까?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자네에게 말을 해 줄 수 있는 일이 아니네.
―으음, 곤란하신 모양이군요.
―그렇네. 자네는 서린이에게 자네 가문의 절학을 전수하는 일에만 전념해 주게. 자네에게, 그리고 자네의 가문에도 이로운 일일 테니 말이야.
성갑은 한 노인의 말에 아쉬움을 느꼈지만 가문에 이롭다는 말에 아쉬움을 삼켜야 했다.
앞에 있는 한 노인은 이 땅에 무인이란 존재가 있어 온 이래 최고의 무예가라 일컬어지는 사람이다.
또한 가문의 절기를 완성시켜 준 사람이기에 지금껏 자신이 돌파하지 못하고 있는 한계를 극복할 수 있는 전기를 마련해 줄지도 모르기에 아쉬움을 접을 수밖에 없었다.
―자네가 서린이에게 전수해 줄 절기는 자네 가문에 전해지는 이대절기네. 그리고 그와 더불어 비장되어 묻혀 있는 세 가지 비예를 전수해 주면 되네.
―세 가지 비예까지 말입니까? 그것은 아직까지 익힌 이가 아무도 없는 절기입니다. 고대로부터 내려온 것이기는 하나, 글의 내용조차 모르고 있는 실정입니다. 한데, 어찌……?
―그건 걱정 말게. 자네는 나에게 비기들을 보여 주기만 하면 되네. 내가 알아서 서린이에게 전수해 줄 테니 그건 걱정하지 말게. 그리고 인연이 닿아야 하겠지만 어쩌면 자네 가문에도 전해 줄 수 있을지 모르네.
―저희 가문에 전하지 않아도 상관없습니다. 어차피 인연이 있어야 익힐 수 있는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으니 말입니다. 어르신이 원하는 대로 비기를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고맙네.
무리한 부탁이었는데 순순히 들어주어 한 노인으로서는 고마울 따름이었다.



3장. 무예입문(武藝入門) (1)


‘두 분이 왜 그러시는 거지? 눈싸움을 하시는 것 같지는 않은데 말이야.’
말없이 서로를 바라보며 눈빛으로 무엇인가를 주고받는 두 사람을 보면 서린은 궁금증을 참을 수 없었다.
아침밥을 먹은 후 아무 말 없이 노려보기만 하는 두 사람이었다.
그런 모습을 바라보며 혹시 싸우는 것이 아닌가 걱정이 들기도 했지만, 그런 것은 아니 것 같았다.
스승이 되어 줄 성갑의 눈빛에서 간혹 놀람이 스치는 것을 보면서 두 사람이 싸우는 것이 아님을 알았던 것이다.
무어라 말을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기에 서린은 말없이 두 사람을 바라보기만 했다.
그러다가 마침내 침묵이 깨졌다. 한 노인이 입을 열어 서린을 불렀다.
“서린아.”
“예, 할아버지.”
“얼마간이지만 앞으로 너를 이끌어 주실 스승이시다. 예의를 다하여 인사를 올리도록 해라.”
“예. 알겠어요, 할아버지. 다시 인사 올립니다. 스승님.”
서린은 자리에서 일어나 성갑을 향해 정중히 일 배를 올렸다. 그런 서린을 보며 성갑은 조용히 미소를 지었다.
“어서, 자리에 앉거라. 원래는 입문식을 해야 하지만 어르신 말대로 얼마 동안만 너를 이끌게 되었으니 그것은 생략하도록 하마. 그러나 네 스승인 것은 변함이 없으니 앞으로 내 지도를 잘 따라야 할 것이다.
“예, 스승님.”
“네 스승으로서 당부할 것이 하나 있다.”
“말씀하십시오.”
“낮 동안은 내게서 무예를 배우고, 밤에는 할아버지께 학문을 배울 것이다. 내가 앞으로 너에게 가르칠 것들은 어린 네가 견디기에는 매우 힘이 드는 것들일 터. 어느 정도 성취를 보기 위해서는 하나같이 인내를 요하는 것들이니 참고 견뎌 내야 할 것이다.”
“무엇이 되었건 포기하지 않겠습니다.”
당차게 대답을 하는 서린을 보며 기꺼운 마음이 들었다.
“오냐, 그리 마음을 먹었다니 고맙구나. 내 성심을 다하여 너를 가르치도록 하마.”
“고맙습니다, 스승님!”
“하하하, 내 기대가 크다.”
“제자 불민하나 스승님의 기대에 어긋나지 않도록 성심을 다하겠습니다.”
“그래, 이만 물러가도록 해라. 어르신도 쉬시도록 하시고 말입니다.”
“그렇게 하겠네.”
성갑의 말에 두 사람은 사랑채를 나섰다.
‘할아버지에게 존대를 하는 것을 보면 두 분 사이에 뭔가 의논이 있었다는 건데…….“
행랑으로 건너가면서 서린은 두 사람의 진지한 모습을 생각하며 알 수 없는 긴장감으로 마음이 무거워짐을 느꼈다. 뭔가 알 수 없는 기시감이 자꾸 마음을 건드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서 들어가자.”
문 앞에 온 한 노인은 서린을 방 안으로 들게 했다.
예전과는 다른 한 노인의 말투에 서린은 주춤하며 방으로 들어갔다.
그렇게 방에 들어와 먼저 말문을 연 것은 한 노인이었다.
“자리에 앉아라.”
“예, 할아버지.”
“궁금한 것이 많을 것이다.”
“사실 너무 갑작스러운 일이라 궁금합니다.”
서린은 의문을 숨기지 않았다.
“먼저 말해 줄 것이 있다. 너와 나는 무관한 사이가 아니라는 것이다.”
“무슨 말씀이시죠?”
서린으로서는 뜻밖의 이야기였다.
왠지 모를 친밀감이 들기는 했지만, 한 노인이 자신과 무관한 사이가 아니라고 하는 말이 심상치 않았던 것이다.
“말하자면 너와 나는 친척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치, 친척이라고요?”
갑자기 스승이 생긴 것도 아직 얼떨떨한데, 이번에는 할아버지가 생기니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혈육의 정 같은 것을 느끼기는 했지만 진짜 할아버지일 줄은 정말 몰랐다.
“서린아, 내가 사당패에 들어오기 전에 우연치 않게 네 형을 만날 수 있었다. 그때 네 형의 부탁으로 사당패에 들어와 너를 보살피게 되었다.”
“그, 그 말이 사실가요?”
“사실이다.”
형과 헤어진 후 천애고아라 생각 때문에 많이 외로웠었다. 자신을 돌보기 위해 할아버지가 사당패로 들어왔다는 말에 기쁜 마음이 들었다.
그것도 형의 부탁이었다는 것이 가슴을 뛰게 했다.
“사정이 있어서 너에게 내 신분을 밝히지는 못하지만, 네 할아버지라는 것은 틀림없다. 원래는 친척이라는 것도 밝히지 않으려 했지만 어쩔 수 없는 상황이라 너에게 밝히는 것이다.”
“할아버지가 제 친척이시라니 정말 믿어지지가 않아요. 너무 뜻밖이라 전 뭐가 어떻게 된 것인지 아직도 영문을 알 수가 없습니다.”
아직도 믿어지지 않는 듯 서린은 한 노인을 바라보았다.
“네 마음을 이해한다. 다시 말하지만 나는 너에게 할아버지뻘이 된다.”
“그렇군요.”
“아마도 배움이 어느 정도 채워지면 넌 중원으로 가게 될 것이다.”
“중원으로 말입니까?”
“그래, 네 소원이 형을 만나는 것 아니더냐? 그러니 중원으로 가야지.”
“혀, 형을 만날 수 있는 건가요?”
“그렇다. 아마도 살아 있을 테니 중원으로 가면 만날 수도 있겠지.”
“형은 지금 정확히 어디에 있는 거죠?”
서린은 미치도록 보고 싶은 형의 행방을 물었다.
“중원에 있는 건 확실하지만 지금 어디에 있는지 알 수가 없는 상황이다.”
“으음.”
서린의 입에서 실망스러운 탄식이 흘러나왔다.
중원으로 갔다는 것은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었고, 형에 대한 단서는 진척이 없었기 때문이다.
“서린아, 형은 네가 직접 찾아야 한다. 하지만 지금은 어려운 일이다. 네가 너무 어리기 때문이다.”
“그, 그렇군요.”
“네 형을 찾고 싶다면 넌 지금부터 배우는 것에 한 치의 소홀함도 없어야 할 것이다. 이미 말했지만 네가 직접 찾아야 할 테니 말이다.”
“그건 걱정하지 마세요. 어차피 형을 찾아 중원으로 가려고 마음에 준비를 하고 있었어요.”
“그래, 언제까지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가려고 했다는 것을 안다. 하나 중원은 만만한 곳이 아니다.”
“알고 있습니다. 형이 무엇인가 심상치 않은 일로 중원에 갔다는 것을요. 할아버지, 형은 어째서 중원에 간 거죠?”
“아직은 때가 아니다. 사실을 알면 수련에 방해가 될 수 있으니 말이다.”
“그렇군요. 아직은 때가 아니군요.”
“때가 되면 모두 말해 줄 테니, 지금은 중원으로 갈 준비를 해야 한다.”
“알겠습니다.”
“지금부터는 내가 가르쳐 준 날라리 부는 법을 한시도 쉬지 마라. 언제 어디에서나 항상 그렇게 숨을 쉬도록 해라. 스승의 무예를 익히는 데도 큰 도움이 될 터이고, 완성한다면 네가 중원으로 가는 길을 빠르게 해 줄 테니 말이다.”
“예, 할아버지.”
‘이리 당부하시는 것을 보면 형이 중원으로 간 것은 정말 심상치 않은 일이 분명하구나.’
서린은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형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할아버지의 표정이 심상치 않음을 느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