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혈왕전서 1권 (6화)
2장. 한성지야(漢城之夜) (3)
“대감, 사당패에 있던 자들이 와 있습니다. 새벽같이 내금위들과 함께 온 터라 일단 집에 들였습니다.”
집에 도착하자 성갑은 청지기의 전언으로 서린과 한 노인이 집에 찾아왔음을 알 수 있었다.
“그런가? 어디 있나?”
“사랑채에 있습니다.”
“가지.”
성갑은 서린과 청지기를 앞장세운 후 한 노인이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사랑채로 향했다.
드르르륵!
안으로 들어서자 자리에서 일어나며 두 손을 조아리는 노소를 바라보며 성갑은 자리에 앉았다.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고?”
“예, 대감마님. 대감마님께서 이 아이를 제자로 삼고 싶다고 하셔서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태연히 대답을 하는 한 노인을 바라보며 성갑은 한 노인이 왕실과 관련이 있는 인물임을 알 수 있었다.
범인(凡人)이라면 의금부에 끌려갔다가 자신의 집으로 오면서 저렇게 태연한 신색을 가질 수 없었던 것이다.
‘대단한 자다. 어찌 내가 몰랐었단 말인가?’
한 노인의 눈은 정광이 어려 있는 것이, 그 깊이를 짐작할 수 없을 정도로 심유했다.
조선제일의 무인이라 자신하던 자신의 눈으로도 확인할 수 없는 깊이의 눈을 바라보며 한 노인이 예사 사람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
‘왕실에서는 도대체 무엇을 바라는 것인지…….’
조선제일의 무인이라는 말이 허명 같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는 성갑은 갈수록 고민이 깊어졌다.
‘생전 놀랄 일이 없다 자신했건만, 오늘따라 기이한 일만 생기는구나. 어차피 두고 보아야 할 일이다.‘
부동심을 키우는 것이 무인이 본분이건만, 오늘은 놀람의 연속뿐이었다. 그것도 그의 머리를 아프게 하는 일들이었다.
“청지기에게 일러두었으니, 방을 마련해 줄 것이네. 기본은 되어 있는 아이 같으니, 내일부터 무예를 전수할 것이네. 그럼 그만 나가들 보시게.”
“알겠습니다, 대감마님.”
드르륵.
“으음.”
두 노소가 방을 나서자 자신의 손에 맺힌 땀을 바라보며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잠깐이지만 눈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손에 땀이 잡히다니. 그럼 그자가 내가 넘볼 수 없는 고수라는 이야기인가? 내공을 가진 것도 아니고, 그저 학자로서 심유한 눈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거늘…….”
고민을 접고 제자나 키우려던 생각은 한 노인을 보고 난 뒤 오간 데 없이 사라졌다.
한 노인만 한 고수라면 굳이 자신에게 무예를 배우지 않아도 될 터였다. 비밀을 요하는 일이라면 서린의 친척인 한 노인이 가르치는 것이 더 나을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성갑은 임금의 어지로 알 수 없는 일에 휘말린 것이 못내 불안했다.
고민의 휩싸인 성갑과는 달리 사랑채를 나선 후 행랑에 머물게 된 한 노인과 서린은 태평하기 그지없었다.
“대감마님이 이제부터 저를 가르치시게 되는 겁니까?”
“그렇단다. 어렵게 청을 넣어 성사된 일이니, 저분이 가르쳐 주시는 것을 성심껏 배워야 한다. 대감마님이 가르쳐 주시는 것을 모두 배울 수만 있다면, 앞으로 네가 원하는 일은 무엇이든지 할 수 있을 것이다.
“알겠습니다. 어제 저녁에 만난 그분께서도 잘 배우라고 했으니 열심히 하겠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으리으리한 집에서 사시는 분하고는 어떻게 아시는 겁니까?”
서린은 어제의 일을 되새기며 한 노인에게 물었다.
“먼 친척이 되는 분이시다. 그리고 사실 그분께 부탁을 드려 이번에 판윤대감의 문하에 들어간 것이다. 그러니 게으름 피우지 말고 열심히 배우도록 해라.”
“그리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뿐만이 아니다. 나는 밤에 네게 글을 가르칠 것이다. 무예만 배워서는 반편이 될 뿐이니 말이다.”
“알겠습니다.”
이미 예상한 일이라 서린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나는 볼일이 있어 잠시 나가 봐야 하니 눈을 좀 붙이도록 해라. 밤을 새웠으니 피곤할 것이다.”
“예, 할아버지.”
한 노인이 이내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그래, 잠 좀 자자.”
할아버지를 마중한 서린은 조용히 이부자리를 펴고 자리에 누웠다.
“오늘은 이상한 일들뿐이군.”
김성갑 대감의 회갑연에서 놀이판을 끝내고 평양으로 향할 예정이었던 놀이패는 한양성을 벗어나자마자 의금부의 금군에게 붙잡혔다.
날이 선 장창을 잡고 포위한 금군에 의해 자신과 할아버지는 어디론가 갔었다.
그곳은 대궐만큼이나 세상에 다시 볼 수 있을까 하는 정도로 큰 집이었다.
서린은 그곳에서 정말 인자해 보이는 귀부인을 만나 볼 수 있었다.
화려한 비단옷을 걸친 인자해 보이는 귀부인은 자신의 손을 잡고는 따뜻한 눈빛을 보여 주었다.
그 때문에 죄인으로 잡혀 온 것이 아니는 것을 알 수 있어 안심할 있었다. 귀부인과 할아버지가 따로 할 말이 있다고 했기에 서린은 먼저 길을 나서 산막으로 갔다. 기다리는 놀이패를 안심시켜야 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산막에 들러 자신은 할아버지를 따라 도성에 머물러야 함을 알렸고, 꼭두쇠의 승낙을 받을 수 있었다.
그러다가 일이 터졌는지 산책을 나간 꼭두쇠의 전갈로 갑자기 몸을 피해야 했다.
그리고 놀라운 일들을 보고 겪어야 했다.
“아까 그자가 다시 덤벼들었다면 위험했을 거야.”
아이들이 위험할지도 몰라 살피던 중에 살기를 뿌리는 자에게 일격을 가해 도망치도록 했지만 아직도 가슴이 떨렸다.
그야말로 자신도 모르게 한 일이었다.
복면을 쓴 자를 물리치고 난 뒤 얼마 있지 않아 아저씨들이 산막으로 와서 안심할 수 있었지만 지금 생각해 봐도 무척이나 어리석은 일이었다.
“다시는 그러지 말아야 한다. 꼭 해야 하는 일이 있으니까.”
서린은 자신의 치기어린 행동을 자책했다.
살아온 날은 얼마 되지 않지만 소원하는 일을 이루기 위해서는 자신을 소중히 해야 했다.
“그래도 모두들 무사하니 다행이네. 아저씨들의 무예가 출중하니 별일은 없을 거고……. 그나저나 오늘부터 무예라는 것을 본격적으로 배우게 되는구나.”
놀이패와 떨어지는 것이 못내 서운했지만, 무예를 배우게 됐다는 서린은 마음이 뛰었다. 평소 티격태격했던 꼭두쇠의 다른 면을 본 후라 더욱 가슴이 뛰었다.
“최선을 다해 배우자. 형을 실망시킬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형을 만나게 되면 자랑할 수 있는 것이 한 가지는 있어야 한다는 생각에 서린은 마음을 다졌다.
그리고 이내 피곤에 물들어 잠에 빠져들었다.
* * *
“어르신, 이렇게 경황 중에 모시게 되서 죄송합니다.”
“어떻게 알았느냐?”
궁장을 입은 미부인을 향해 한 노인은 노기를 감추지 않았다.
평범한 남사당패의 일원이었던 그의 눈에는 푸른 신광이 줄기줄기 뻗어 나오고 있었다.
“어르신, 다 말씀을 드릴 터이니, 노여움을 거두시지요.”
중년을 훨씬 넘긴 것 같은 미부인은 두려움에 떨렸지만, 미소를 잃지 않고 한 노인의 노기를 가라앉히려 노력했다.
한 노인은 그런 중년 부인을 노려보며 서서히 기세를 가라앉혔다.
“말해 보아라!”
“제 밑에 있는 아이가 작년에 판윤의 집에서 어르신을 뵈었던 모양입니다.”
“의금부의 군사들이 나를 데리러 올 때부터 예상은 한 일이다만, 그동안 지켜보고 있었던 모양이로구나?”
한 노인이 기세를 뿜었다. 미부인으로서는 감당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죄송합니다, 어르신! 하지만 이번에 부탁드리는 일은 어르신과도 무관하지 않은 일입니다.”
“흥, 나와 무관하지 않다니! 네가 나를 희롱하려 하는구나.”
“아, 아닙니다. 정말로 어르신과 무관하지 않는 일입니다.”
노기를 띤 한 노인의 기세가 강렬해지자 중년의 미부인은 다급하게 말을 이었다.
만약 한 노인이 진짜 화를 낸다면 그녀로서도 감당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나야 이미 세속에서의 인연은 모두 접은 몸. 다만 핏줄에 얽힌 인연을 잊지 못해 잠시 속세로 나왔을 뿐이다. 그러니 허튼 소릴랑 하지 마라!”
“압니다, 어르신. 하지만 어르신, 이것을 한번 봐 주십시오.”
살며시 품에서 봉서를 꺼낸 여인은 한 노인에게 건넸다.
심상치 않아 보이는 봉서였다. 겉봉에 희미한 혈흔이 비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예상대로 한 노인이 봉서 안에 있는 것을 꺼내자 피로 쓰인 듯한 종이 한 장이 나왔다. 그 안에 담긴 글을 읽던 한 노인의 눈빛이 더욱 지독하게 변했다.
중년의 미부인 또한 마주 볼 수 없을 정도로 무시무시한 눈빛이었다.
한 노인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기운은 대단했다. 살을 저밀 듯한 살기가 사방에 충만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것이 사실이더냐……?”
“예, 어르신. 그들이 움직인 것이 확실한 것 같습니다.”
“어허!! 이제 와서 천 년의 언약이 깨지다니. 이제 세속으로 돌아올 수 없는 몸이 되었거늘 시간이 없음이야. 시간이!”
“하오나 준비를 해야 하지 않겠사옵니까? 저들이 약속을 파기 했다 함은 이미 그만한 준비를 했음이 분명하니 말입니다.”
“하지만 약속을 파기한 것은 그들뿐일 수도 있다. 다른 이들의 흔적이 없는 한, 내가 움직일 수도 없을뿐더러 이 편지만으로는 그들이 먼저 약속을 깼다고 확신할 수도 없으니 말이다.”
“그래도 준비는 해야 할 것이옵니다.”
중년 미부인의 말에 한 노인의 기세가 가라앉았다. 이제야 자신을 이곳으로 부른 까닭을 안 때문이었다.
“내가 이곳에 머물 수 있는 시간도 이제 얼마 남지 않았으니 걱정이구나.”
“그 아이의 천품은 듣도 보도 못한 것이니, 인연의 끈을 넘기시면 어떻겠습니까? 주상도 그 아이에게 마음을 주고 있는 것 같으니 말입니다.”
“그 아이를 말이냐?”
“예, 어르신.”
“……좋다. 그렇다면 판윤에게 서린을 위탁하도록 하거라. 판윤이라면 자질을 알아볼 터이니, 서린을 욕심을 낼 것이다. 서린이 갖고 있는 세가 내력을 보면 신분에 대한 짐도 벗어 버릴 수 있을 테니 문하로 받아들일 것이다.”
“김성갑 대감에게 말입니까?”
“그 사람은 장백파와 인연이 깊은 사람이니, 장차 서린의 행보에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알겠습니다, 어르신.”
여인이 고개를 조아리며 대답을 했다. 자신의 청을 순순히 받아 준 것에 대한 안도감 때문인지 그녀의 입가에 미소가 스쳤다.
“나 또한 이곳에 머무는 동안 서린이에게 인연의 끈을 넘길 테니 차후에 일은 하늘이 뜻하는 바를 따라야 할 것이다. 그 아이에게 인연이 이어질지 아닐지 모르니 말이다. 그러니 너 또한 그쯤에서 모든 것을 접거라. 더 이상 나선다면 다른 이들도 나설 수가 있음이야.”
“알겠습니다, 어르신. 그럼 어르신 말씀대로 준비를 하도록 하겠습니다.”
* * *
“허어~!”
집을 나선 후 성갑의 집을 돌며 기진을 설치하고 온 한 노인은 자고 있는 서린을 바라보며 한숨을 쉬었다.
지난밤의 일을 머리에 떠오른 까닭이었다.
어제 저녁에 알게 된 사실은 그로서도 놀라운 일이었다. 그것이 그의 마음 한구석을 무겁게 했다.
“고얀 것! 하지만 어찌할 수 없는 일이구나. 그 영악한 것의 말이 틀린 것이 아니니 말이다. 모두가 혈연을 잊지 못해 세속에 나온 내 잘못이다.”
자신의 자손이 편안한 삶을 살 수 있도록 보살피기 잠시 세속에 나온 것이 뜻하지 않은 일과 부딪칠 줄은 몰랐다.
원래는 저버려야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마지막 핏줄이 허무히 가는 것을 두고 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만약의 경우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진정 천 년의 약속이 깨어진 것이라면 금수강산에 잔인하게 뿌려질 붉은 피가 눈에 선했기 때문이었다.
‘선주도 나 때문에 이일에 말려든 것 같은데, 서린이 또한 같은 길을 걸어야 하다니, 우리 가문과 그자들과의 악연은 언제쯤 끝이 나려는 것인지?’
“험험!”
상념에 잠긴 한 노인의 귓가로 헛기침 소리가 들렸다.
밤을 새운 탓인지 잠시 곤한 잠을 자고 있는 서린을 보며 시름하던 한 노인은 청지기가 와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누구시오?”
“어르신, 대감마님께서 사랑채로 드시라 합니다.”
“알았다고 전하시게.”
전과는 다른 청지기의 말투였지만 신경을 쓰지 않았다. 판윤이 그리 지시를 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서린아, 일어나라.”
“으음, 할아버지.”
흔들어 깨우자 서린이 눈을 떴다.
“네 스승이 되실 분이 부르시는 모양이니 어서 얼굴을 씻도록 해라.”
“예.”
서린이 밖으로 나가 준비된 물로 씻었고, 두 사람은 이내 사랑채로 향했다.
드르르륵!
문을 열고 사랑채로 들어선 두 사람은 자리에 앉아 있는 성갑을 볼 수 있었다.
“어서 오십시오. 조반을 같이 하시자 모셨습니다.”
안으로 들어오자 성갑이 부른 이유를 말했다.
“대감마님, 별말씀을 다 하십니다. 어찌 저희들이 대감마님과 같이 조반을 할 수 있겠습니까. 분부를 거두어 주시지요.”
“아닙니다, 충열공의 후예시라 들었습니다. 건국 공신이신 충열공의 후예시라면 마땅한 대접이오니, 사양 마시고 자리에 앉으시기 바랍니다.”
한 노인은 간곡히 청하는 성갑의 청을 뿌리치지 못하고 자리에 앉았다.
아직은 어리지만 반상의 법도가 지엄하다는 것을 아는 서린은 안전부절하지 못하고 엉거주춤 서 있었다.
“서린이도 자리에 앉아라. 조금 있으면 상이 들어올 터이니 말이다.”
“예, 대감마님.”
서린을 보며 성갑은 미소를 지으며 자리에 앉도록 했다. 어색한 분위기 때문인지 서린은 조심스럽게 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