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혈왕전서 1권 (5화)
2장. 한성지야(漢城之夜) (2)
“그 아이 말씀이군요. 근골은 자세히 살피지는 않아서 잘 모르겠사오나, 그 나이에 그 정도의 감각이라면 하늘이 내린 재주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신분만 천하지 않다면 소신이 제자로 받아들이고 싶을 만큼, 출중한 천품을 타고난 것으로 보였습니다.”
“으음, 이 나라 제일의 무예가께서 하신 말씀이니, 그 아이의 자질이 어느 정도인지 알 수 있을 것 같군요.”
‘예전부터 알던 아이인 것이 분명하다. 명의 무인들에 대해 하문하신 것도 그렇고, 분명히 동떨어진 이야기는 아닌 것 같은데…….’
안도의 표정을 보이는 임금을 보며 김성갑은 의문을 느꼈다.
강호에 대해 묻고, 아이의 자질에 대해 물었다.
기예를 펼쳐 보이던 아이와 무림이라 불리는 명의 무인들과 무슨 연관이 있는 것인지 궁금해졌다.
“전하, 외람되오나 신에게 그와 같은 하문을 하신 까닭이 있으신지요.”
“다른 것은 없습니다. 앞으로 저의 호위를 맡을 자를 구하기 위함입니다. 아직은 나이가 어리기에 시동으로 삼아 곁에 두고 있다가 재질을 살려 훗날 호위로 삼을까 해서 말입니다.”
생각과는 다른 대답이었다.
‘설마, 호위로 삼으실 생각이실 줄이야. 하지만 천출일 것이 분명하거늘…….’
임금의 뜻은 알겠지만 문제가 있었다.
재주가 아까워 그럴 수 있었지만 재능과 신분은 다른 문제였다.
“전하, 천한 신분의 아이입니다. 어찌 전하에 곁에 두신다는 것인지요? 아이를 곁에 두시게 되면 중신들의 반발이 만만치 않을 것입니다. 전하께 누가 될까 두렵습니다.”
아직은 어린 나이의 임금이 신하들에게 흠집을 잡힐까 두려워 성갑이 말렸다.
“그리 걱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내금위에서 확인한 결과 그 아이는 천출이 아닙니다.”
“예?”
턱.
“이것을 한 번 보시지요.”
김성갑은 임금이 내어놓은 두툼한 책자를 조심스럽게 받아 들어 살피기 시작했다.
“전하, 이것은 건국공신이신 충열공의 가계를 적어 놓은 가계세보[族譜]가 아니옵니까?”
“맞습니다. 그 아이 것이라고 하더군요. 몇 해 전에 부모가 돌림병으로 세상을 떠난 후. 지금은 행방을 알 수 없는 자신의 형이 집안의 것이라며 맡기고 간 것이라고 하더군요. 그 가계세보로 보아 그 아이는 천출이 아닌 것이 분명합니다.”
“하오나 천출이 아니라 해도 평생을 숨어 살아야 하는 전하의 호위를 어찌 그 어린 소년이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충열공의 후손이라면 더욱 그렇습니다, 전하!”
“대감, 사실 평생을 호위로 삼고자 하는 것이 아닙니다. 왕실에서 따로 쓰려고 하는 곳이 있기 때문입니다.”
‘역시.’
호위는 말뿐이고 분명 다른 쓰임새가 있는 것으로 보였다.
그것은 아마도 무림이라는 곳과 연관이 있을 것이 분명했다. 처음 무림이라는 곳의 무인들에 물어본 것이 그것을 짐작케 했다.
“하오면 대비전에서도 이 일을 알고 게시옵니까?”
성갑은 수렴청정을 하고 있는 대비전에서도 이 일을 알고 있는 지 궁금했다.
“물론입니다. 이 일은 대비전에서 먼저 말씀하셔서 하는 일입니다. 그리고 판윤대감을 이리 부른 것은 부탁드릴 일이 있어서입니다.”
“부탁이라 하오시면?”
“어려운 일이겠지만 판윤대감의 무예를 그 아이에게 전수해 주셨으면 합니다.”
“으음.”
‘왕실에 무슨 일이 있는 것이 분명하구나.’
임금의 말을 들으며 성갑은 모종의 일이 진행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어렸을 때부터 무예를 전수하고자 한다는 것은 하루이틀에 끝날 일이 아니라는 뜻이었다.
“하오면 대비전에서 그 아이를 예전부터 지켜보셨다는 말씀이십니까?”
왕실의 의도를 확실히 하기 위해 성갑이 물었다.
“작년 대감댁에서 벌어진 놀이판에서 그 아이를 발견하고 지난 일 년 동안 세심히 살피셨다고 합니다. 어제는 그 아이가 어떤 아이인지 짐이 집적 보러 간 것이고요.”
어차피 가문의 비예(벙藝)를 전수해야 할 기재를 찾아야 했기에 탐이 나던 아이였다.
성갑은 바로 승낙을 했다.
“알겠사옵니다, 전하. 어떤 연유이신지는 모르겠사오나. 신, 분부대로 그 아이에게 소신의 무예를 전수하도록 하겠습니다.”
가문의 비예를 전수한다는 것이 쉽지 않은 일임에도 승낙을 해 준 성갑을 보며 임금이 환하게 웃음 지었다.
“하하하, 고맙습니다, 대감. 그리고 한 가지 부탁을 더 드리겠습니다.”
“무슨 부탁이시옵니까?”
“그 아이와 놀이패에 같이 있는 한 노인이란 사람도 식객으로 받아 주시기 바랍니다. 서린이라는 아이와는 먼 친척이 되는 것 같고, 문장이 출중하다 하니, 그 아이에게 학문을 가르치게 하는 것도 나쁘지는 않으리라 생각돼서 드리는 부탁입니다.”
한 노인에 대해서는 그가 쓴 축문을 보고 문장이 만만치 않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터라 나쁘지 않은 생각이었다.
“알겠나이다.”
“당부 드리지만 이 일은 비밀에 붙여야 함을 경도 잘 알고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이만 물러가도록 하시고, 그 아이를 잘 가르쳐 주시기 바랍니다.”
“염려하지 마시옵소서. 신, 이만 물러가겠나이다.”
할 말을 끝내고 다시 생각에 잠기는 임금을 보며 성갑은 조용히 하직 인사를 올려 복명하고는 조용히 대전을 빠져나와 궐을 나섰다.
궐을 나선 성갑은 여명을 바라보았다.
“양(暘)이 승(昇)하기 시작하는 시간에 얻은 제자라, 허허! 이것도 인연이런가?”
아직도 의혹이 일고 있지만 상관하지 않았다.
재주를 보고 내심 탐을 내던 아이였다.
“얼른 가 봐야겠구나.”
자신의 무예가 자칫 사장될까 우려하던 차에 천고의 자질을 가지고 있는 아이를 임금의 뜻으로 맡게 되었지만 궁궐의 고요함만큼이나 마음이 답답했다.
대궐을 나선 후 대동하고 온 종복이 있는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만 가도록 하자.”
“예, 대감마님.”
사인교도 타지 않고 종복 하나만을 대동하고 입궐한 터라 걸음을 재촉했다.
‘자질이 뛰어난 아이를 제자로 받아들인 것은 기쁜 일이다만, 다시 한 번 생각해도 이상한 일이구나.’
임금의 명으로 난데없이 제자를 받아들이기는 했으나 왕실에서 벌이는 일이 무엇을 위한 것인지 알 수가 없었기에 곤혹스러웠다.
호위라면 무과에 급제한 이들 중 고르고골라 맡길 수도 있는 일이다.
무엇보다 자질이 출중하기는 하나 아직은 어린아이다. 지금부터 무예를 수련시킨다고 해도 적어도 십 년은 고련을 해야 했다.
이런 것들을 미루어 볼 때 호위로 쓰려 하는 것이 아님이 분명했다.
‘후우, 내가 생각이 너무 깊은 건가?’
생각을 거듭하던 성갑이 고개를 흔들었다.
‘아마도 강호에 대해 주상께서 하문하신 것 때문에 생각이 다른 길로 빠진 것 같구나. 그 아이가 자라 왕실을 위해 쓰인다면 그리 나쁘지도 않은 일이다. 그리고 이대로 접어야 했던 무맥을 승계할 수 있음이니 다른 생각은 하지 말자.’
왕실에서 필요한 곳에 쓴다는 말이 마음에 걸리기는 했으나 어차피 사문의 사명이 호국에 있으니 상관없었다.
사명을 달성하는 일이기도 하거니와 보기 드문 천품을 타고난 아이를 제자로 거둔다는 생각에 의문을 떨쳐 버렸다.
‘성상의 어지는 천명이다. 신하로서 받들어야 하는 것이 지당한 도리이고. 왕실의 일에 더 이상 의문을 가지는 것도 불충이니 그 아이를 제대로 된 재목으로 키워 보자.’
성갑은 좋게 생각하기로 했다.
더군다나 어진 주상과 대비전이 관련된 일이라면 파고들어 좋을 것이 없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응?”
종복은 느끼지 못하고 걷고 있었지만 성갑은 새벽바람에서 심상치 않은 기운을 느꼈다.
휘이익!
미세한 파공음과 함께 누군가 빠른 속도로 저잣거리의 지붕 위를 건너뛰며 날들이 달리고 있었던 것이다.
‘파공성으로 봐서는 무인의 움직임이 틀림없다. 미세한 혈향을 풍기는 것을 보니 부상을 당한 자가 분명한데,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알아봐야겠구나.’
여명이 터 오고 있다고는 하나 아직 사람들이 지나다닐 시간이 아니었다. 새벽부터 혈향을 풍기며 움직이고 있다면 사람이 상한 사건과 연루된 자가 분명했다.
한양성내를 책임지고 있는 직위를 가진 그였다.
가만히 둘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파팟!
조선제일의 무인답게 종복에게조차 기척을 흘리지 않고 경신법을 발휘해 은밀히 뒤를 쫓기 시작했다.
초가의 지붕이든, 기와집 지붕이 든 기척 하나 없이 찍은 후 단번에 삼십여 보를 날듯이 달리는 성갑의 몸에는 바람을 가르는 파공음조차 없었다.
‘으음, 저곳은 그분의 사택이 아닌가?’
지붕 위를 넘던 인영이 은밀히 숨어든 곳은 성갑도 잘 아는 곳이었다.
일찍이 문학과 경학에 밝아 학문이 경지에 이르렀으나 재주만큼 꽃을 피우지 못하고 세상을 여읜 판봉상시사(判奉常寺事) 윤견의 사택이었던 것이다.
‘으음, 괴이한 일이로고? 은밀히 숨어들기는 했지만 잘 아는 것 같구나.’
지상으로 내려선 후 지리를 잘 아는 것처럼 행랑채 쪽으로 걸음을 옮기더니 끝에 있는 방으로 조심스럽게 들어가고 있었다.
‘저곳의 주인과 관련이 있는 자 같으니 소란을 피우지는 않겠지만, 혹시 모를 일이니 집에 들렀다가 등청한 후에 조심스럽게 알아보아야겠구나.’
스슷!
숨어든 곳을 확인한 성갑은 쫓기를 중단하고 종복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후후후, 녀석.’
자신이 암행인을 쫓아갔다가 온 것을 모르는 듯 종복은 집을 향해 부지런히 걷고 있었다.
‘조금 전 그자의 움직임 정도면 상당한 고수다. 새벽부터 혈향을 풍기는 것을 보면 심상치 않은 일이 일어났음이 분명할 터. 하나 윤견은 생전에 집현전을 출입할 만큼 학문이 높은 사람이었으나 권력과는 무관한 이였다. 그러니 집 주인과 관련이 있다고 섣불리 단정 지을 수는 없는 일이다. 그런 자가 행랑채 머물고 있는 것에는 뭔가 이유가 있을 것이다. 일단은 별다른 일은 없을 것 같으니 등청하는 대로 은밀히 알아봐야겠구나.’
수상한 자이기는 하나 일의 전말을 모르니 어차피 붙잡아 봐야 뭔가 알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마음을 정리한 성갑은 자신이 자리를 비운 것도 모른 채 집을 향해 가고 있는 종복의 뒤에 천천히 내려서 걷기 시작했다.
조선제일의 무인이라는 성갑이 그렇게 집으로 향하는 모습을 지켜보는 이가 있었다.
적리소를 쫓아온 삼쇠와 덕팔이었다.
“가셨군!”
“하마터면 판윤대감께 들킬 뻔했습니다.”
“그러게 말이다. 우리가 지체하지 않았다면 분명 우리의 정체를 들켰을 것이다. 판윤대감이 우리에 대해 알아서 좋을 일은 없으니 다행이다. 일단 놈이 잠입한 곳을 알아냈으니 아이들을 시켜 저곳을 감시하라고 일러라.”
“알겠습니다. 걸립패의 돌쇠 놈이면 들키지 않고 감시할 수 있을 겁니다.”
“그래, 그놈이 적당하겠구나.”
사대문 안에 있는 거지들의 왕초가 돌쇠였다.
석년의 일로 인해 관복을 벗고 거지로 화신한 후 도성 내를 감시하는 돌쇠라면 충분할 것이기에 삼쇠가 고개를 끄덕였다.
“놈이 밖으로 나오는지. 그리고 저곳을 출입하는 자들이 누구인지 낱낱이 밝혀내야 한다고 일러라. 어차피 이곳의 일은 우리가 아니라 다른 이들이 맡게 될 터이니 난 어르신을 만나 봐야겠다.”
“알겠습니다. 그럼 전 돌쇠 놈에게 말을 해 놓고 아이들이 있는 곳으로 가겠습니다.”
“그래, 나도 어르신을 만나 뵌 후에 곧바로 가마. 형제들과의 약조도 있고 하니 말이다.”
“예, 꼭두쇠.”
덕팔은 고개를 숙여 보인 후 곧바로 사당패가 피신한 곳으로 향했다.
적인대와 대적한 자신의 동료들 또한 그곳으로 가 있을 터였기에 빠른 걸음으로 사라져 갔다.
“저놈의 정체를 내 손으로 밝혀야겠지만 연줄이 확인된 이상 이곳에 남아 있을 형제들이 처리할 일이다. 그런 일에는 우리보다 그들이 나을 테니까. 일단 어르신부터 만나 뵈어야겠다.”
파팟!
삼쇠는 신형을 날렸다. 은밀하고도 빠른 움직임이었다. 그가 가고 있는 방향은 성갑이 향했던 곳과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