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혈왕전서 1권 (3화)
1장. 적리세가(赤狸世家) (3)
‘시작하는구나.’
파팟!
차아앙!
첫 번째 일격은 적인대에서부터 시작되었다.
포위한 자들 중 몇이 앞으로 나서 이리가 먹이를 노리듯 삼쇠 일행을 향해 덮쳐들며 혈랑조를 휘둘렀던 것이다.
차차차창!
검과 혈랑조가 부딪치는 소리가 장내에 울려 퍼졌다.
파파팟!
삼쇠 일행은 혈랑조를 쳐 내고는 계속해서 검인을 하늘로 치켜든 표두압정(豹頭壓頂) 자세를 유지하며 안쪽으로 등을 마주 대었다.
차차차창!
적인대의 혈랑들도 기민한 움직임을 보이고 있었다.
앞 열이 공격하고 재빠르게 뒤로 물러서는 것과 동시에 뒤의 열이 참격을 시전하며 공격해 달려들고 있었다.
‘마치 늑대 무리가 먹이를 사냥하기 위해 공격하는 모습과 비슷하구나.’
거친 듯 보이지만 일정한 흐름을 보이고 있는 적인대의 모습에 서린의 눈이 빛을 발했다.
원진을 그리는 삼쇠 일행을 상대하기 위해 적인대도 나름대로 일종의 진을 펼치고 있었던 것이다.
투기와 같은 거친 기운을 내뿜으면서도 집요하게 적을 공격하는 적인대의 공격법은 나름 유명한 것이었다. 혈살전법(血殺戰法)이라 불리는 것으로 그들의 펼치는 전법은 중원에도 검증받은 것이었다.
혈살전법은 오랜 세월 동안 혈랑들의 움직임을 관찰한 후 창안되었는데, 다수가 소수, 다수가 다수를 공격하는 데에 있어 따를 만한 것이 없었기에 오늘날 적리세가를 대표하는 상징이 되기도 했다.
반격이 없는 삼쇠 일행을 공격해 드는 혈랑들의 움직임은 눈이 부셨다.
포위하여 끈질기게 공격하는 늑대 무리의 움직임은 산중의 대호조차 어째서 경계하는 것임을 여실히 보여 주고 있었다.
그렇게 순차적으로 공격을 이어 가던 적인대에게 파탄이 일어난 것은 한순간이었다.
그것은 삼쇠 일행의 검인이 지면으로 향한 순간이었다.
번쩍!
아래로 향해 있던 검인이 하늘로 오르는 순간, 번쩍이는 검광이 일었다.
“커…… 어억!”
덮쳐들던 혈랑 중 하나의 입에서 답답한 신음이 흘러나왔다.
앞 열이 공격하고 뒤의 열이 재차 공격하려는 순간 섬광과 함께 삼쇠의 예도가 혈랑의 목을 훑고 지나간 것이다.
투드드득!
적인대의 머리가 지면에 떨어져 구르고 또다시 표두압정의 자세를 취하는 삼쇠 일행을 보며 적리소는 자신의 답답한 마음이 어디서 기인하는지 확인할 수 있었다.
‘어떻게 이런 자들이…….’
비록 옷은 남루하게 차려입었으나 자신들이 포위하고 있는 삼쇠 일행은 내력조차 가늠이 되지 않는 고수들이었다.
지난날 적인대를 막아선 자들로 인해 실패했다고는 들었으나 이 정도일 줄은 그로서도 짐작을 못했던 것이다.
“……너희들은 누구냐?”
적리소는 떨리는 목소리로 삼쇠 일행의 정체에 대해 물었다.
“너희들로 인해 선왕께서 붕어하시고, 들개 같은 네놈들에게 복수하기 위해 관직을 떠난 사람들이다. 이곳이 한낱 중원의 야인들이 찾아와 분탕질을 칠 만큼 만만한 곳인 줄 알았더냐? 네놈들은 오늘 살아서 돌아가지 못하리라!”
서릿발 같은 삼쇠의 호통에 적리소는 가슴이 떨려 왔다.
‘도저히 실력으로 승부를 볼 수 있는 자들이 아니다. 저런 분노라면 이자들은 절대로 우리를 놔주지 않을 것이다. 지금 서로의 인원이 동수가 된 이상, 오늘의 일은 글렀구나.’
방어에서 순식간에 공세로 전환하여 환상처럼 검기를 뿌리는 검진의 위용에 가슴이 시렸다.
적인대가 펼치는 혈살전법이 아무리 중원무림에서 무서운 맹위를 떨치던 전법이라고는 하나 삼쇠 일행이 펼치는 것은 그것을 훨씬 상회하는 것이었다.
‘저런 모습을 한 채 이곳을 계속해서 감시하고 있었던 것을 보면 길보다 흉이 많을 것 같으니 빨리 벗어나야 한다.’
적리소는 장내를 벗어나야 한다고 판단했다. 적이 지금 자신들과 대적하고 있는 이들뿐이라는 확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몇이나 빠져나갈 수 있을런지…….’
빠져나가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이었다.
자신들을 촘촘히 감싸기 시작한 검기의 여파가 살을 베일 듯 무척이나 엄밀했다.
섣불리 몸을 뺄 처지도 아니라는 것을 절감한 적리소는 진퇴양난에 빠져 버렸음을 알 수 있었다.
파파팟!
적리소의 생각은 길게 이어지지 않았다. 어느새 삼쇠 일행이 자신들을 향해 덮쳐 왔기 때문이다.
웅크리고 있던 맹호가 도약하듯 자신들을 향해 달려들며 내려치는 검격에는 무시하지 못할 경력이 담겨 있었다.
차차창!
“크억!”
“크아악!”
혈랑조를 들어 쇄도하는 검과 맞부딪쳤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바람처럼 휘돌아 그어 내리는 검에 적인대의 혈랑들은 하나둘 바닥에 누워야 했다.
채채챙!
‘제기랄!!’
수하들이 쓰러지는 것을 보면서도 적리소는 그들을 도울 수가 없었다.
삼쇠의 검에서 피어나는 검기가 옥죄듯 사방을 포위하고 있어 빠져나갈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 정도의 실력을 지닌 자들은 중원에서 보기 쉽지 않다. 특히나 저자는 절정의 무인이다.’
중원에서는 볼 수 없는 판이한 검세요, 검기였다.
도도히 흐르는 강물처럼 면면부절 끊임없이 이어지는 검세는 당혹스럽게 그지없었다.
어떻게 대적해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 없는 탓이었다.
채챙!!
검격이 빠르게 다가왔고, 적리소는 빠르게 검을 쳐 냈다.
‘크으, 반탄력이 장난이 아니다.’
막아 내기는 했지만 손아귀가 아려 오는 것을 느끼며 적리소는 삼쇠를 바라보았다.
뭉클거리는 검기가 더욱 진해지는 것을 보니 내기를 끌어 올리는 것이 분명했다.
‘이대로라면 저자에게 당한다. 어쩔 수 없이 나 혼자서라도 피해야 하는가?’
여기 저기 자신의 수하들이 피를 흘리며 땅바닥에 눕는 것이 보였다.
자신들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대적을 맞이한 것을 느꼈기에 적리소는 자리를 벗어나기로 했다.
―우리 상대가 아니다. 부딪칠 때 탄의 힘으로 간격을 만든 후, 최대한 빨리 이 자리를 벗어난다. 살아서 보도록 하자.
수하들에게 전음을 보낸 적리소는 내력을 더욱 끌어 올렸다.
휘이이익!
삼쇠의 검세가 자신을 향해 다가왔다.
들고 있는 검은 한 자루가 분명했지만 상중하로 찔러 오는 검세는 적리소의 눈에 모두 진검으로 보였다.
‘지랄 같군.’
적리소는 가문에서 내려오는 절기를 빠르게 펼쳤다.
자신이 익히고 있는 혈랑조의 유일한 방어초식인 혈랑밀밀(血狼密密)에 반탄의 기운을 실었다.
퍼퍼퍽!
혈랑조와 검이 부딪치면서 둔탁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크…… 으윽!”
적리소의 입에서 피분수가 뿜어졌다.
탄의 힘으로 삼쇠의 경력을 밀어내려 했지만, 생각과는 달리 부딪치자마자 밀려오는 암력에 내상을 입었던 것이다.
휘이익!
내상을 입기는 했지만 삼쇠를 밀어내 간격을 벌린 적리소는 빠르게 신형을 뒤로 빼냈다. 그러고는 뒤로 돌아 다급히 도망치기 시작했다.
파파팟!
“크악!”
“아아악!”
등 뒤에서 비명 소리가 연이어 들려왔지만 개의치 않고 전력을 다해 경공을 펼쳤다.
‘지금은 이대로 가지만 반드시 네놈들을 죽이고 말리라.’
상대의 검격에 내상을 입은 상태.
비명의 숫자로 봐서 이끌고 있는 수하들도 모두 당한 것이 분명했다. 이대로 있다가는 목숨조차 부지하지 못할 것이 분명했기에 내상이 도지는 것을 무시하고는 내공을 더욱 끌어 올린 후 경공을 시전 했다.
도주하는 꼴이 비루먹은 강아지 같은 모습이기는 하지만 적리소는 마음속으로 복수를 다짐하고 있었다.
조선의 도성 인근에 대한 대략적인 지형은 파악을 한 터였다.
안가까지 가는 것은 어렵지 않지만, 추적해 올 자들이 문제였기에 적리소는 방향을 틀었다.
‘저쪽은?’
숨어서 격전을 지켜보고 있던 서린은 도성으로 향하던 적리소가 다른 곳으로 방향을 트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제기랄!’
도주하는 것은 상관없지만 방향이 문제였다. 아이들과 어르신들이 몸을 피한 곳으로 적리소가 움직이고 있었다.
‘꼭두쇠에게 밀리기는 했지만 저 정도 실력이면 아이들과 어르신들이 위험하다.’
사사사사삭!
서린은 빠르게 신형을 움직였다.
소리를 내지 않고 은밀하게 움직이는 서린의 존재를 장내의 누구도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파파팟!
적리소는 중간에 방향을 튼 후 빠르게 이동했다.
일각여를 달렸을까, 머지않은 곳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기감을 집중했지만 옹기종기 모여 있는 불안한 기운들 속에서 무인의 기세는 느껴지지 않았다.
적리소의 눈에서 살기가 일었다.
‘어떤 놈들인지 모르겠지만 잘됐다. 버러지들을 이용해 놈들의 발걸음을 늦출 수 있을 것이다.’
철컥!
적리소가 진기를 주입하자 손등에서 장착한 혈랑조에서 조인(爪刃)이 발출되더니 손가락을 따라 길게 뻗어 나왔다.
어차피 다른 흔적을 만들어 추적하는 자들에게 혼란을 주기 위해 돌아가는 길. 기운으로 보아 일반 백성들인 터라 간단하게 죽일 수 있을 테지만, 부상만 입히기로 했다.
조선의 관에 있는 자들 같으니 부상으로 신음하는 백성들을 그냥 두고 보지 않을 것이고, 그만큼 자신은 몸을 뺄 수 있는 시간을 벌 수 있을 터였다.
적리소가 그렇게 살기를 갈무리하며 나아가다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까지는 대략 삼십여 장이 남았을 때였다.
휘익!
퍽!
“커억!”
갑자기 나무 위에서 떨어져 내린 서린으로부터 등을 강타당한 적리소가 답답한 비명을 지르며 튕겨져 나가더니 이내 산비탈을 굴렀다.
‘저 정도면 산막으로 가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혹시 모르니, 일단 숨자.’
야행복을 입은 적리소가 빠르게 비탈을 구르는 것을 잠시 지켜보다가 서린은 재빠르게 몸을 감췄다.
터터터턱!
예상치 못한 적의 등장에 적리소는 굴러 떨어지면서도 냉정을 잃지 않았다.
‘크윽, 제기랄! 숨어 있는 자가 있었다니……!’
팍!
기적조차 느끼지 못한 적의 암습에 적지 않은 내상을 입은 적리소는 산비탈을 구르다가 눈에 뜨인 나무 등걸을 손으로 잡아채고는 빠르게 몸을 일으켰다.
적이 누군가 파악하기 위해 시선을 돌린 적리소는 붉은 안광이 넘실거리는 눈동자가 자신을 지켜보더니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것을 볼 수 있었다.
‘크으, 위험한 놈이다.’
잠깐이었지만 자신이 본 적의 눈에 어린 살기가 가슴을 파고들었다.
부친이 적들과 상대했을 때 보여 주었던 살기와 비교해 봤을 때 절대로 아래가 아니었다.
‘이대로는 내가 위험하다.’
삼쇠와 싸우며 입은 내상이 도져 있는 상태에 알 수 없는 적이 자신을 기다리고 있다는 생각에 적리소는 이내 도주를 선택했다.
파파팟!
‘크으으, 제기랄! 변방의 약소국이라고 생각했는데, 이런 자들이 있었다니…….’
석년의 실패는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이런 자들이 있었다면 실패는 당연한 일이었다.
중원을 떠나오며 너무 쉽게 생각을 했던 자신을 자책하면서 적리소는 곧장 도성을 향해 달렸다.
안가로 가서 내상을 최대한 빨리 수습한 후 조선을 떠나는 것이 목숨을 부지하는 것임을 깨달은 것이다.
적리소가 의문의 누군가에게 일격을 당한 후 도성으로 도주하는 그 시각, 마지막 남은 혈랑이 삼쇠의 손에 유명을 달리하고 있었다.
서걱!
“크윽!”
도주한 적리소를 제외하고 마지막 남은 혈랑이 답답한 비명과 함께 주검으로 누었다.
“시끄러워질 수 있으니 이놈들을 모두 묻고, 흔적을 지워라.”
마지막 적인대원을 일 검에 쓰러트린 삼쇠는 빠르게 지시를 내렸다.
“예, 대감”
“앞으로 나는 삼쇠일 뿐이다. 예전의 지위는 버렸음을 잊지 말기 바란다. 우리가 제 이름으로 설 수 있는 날은 놈들에 대한 응징이 끝났을 때뿐이다.”
정색을 한 삼쇠가 대답한 덕팔을 꾸짖으며 자신들의 맹세를 상기시켰다.